소설리스트

곤륜마협-542화 (542/569)

외전 23화

절차탁마(切磋琢磨)

‘허어…….’

하북팽가 태상가주 팽수관은 황궁에서 나온 무관이 전해 준 것을 들고 내심 탄식했다.

황제가 정식으로 내린 교지(敎旨)가 아니라 비밀리에 보낸 서신이기에 과도한 예를 취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으나 너무 급작스럽지 않은가?

‘아무리 빨라 봐야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천하를 주무르는 권력을 지녔지만 그 대가로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현 황제인 선덕제(宣德帝)는 탄탄한 황권과 타고난 총명함을 기반으로 내치(內治)와 외치(外治)라는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잡으려고 했기에 더욱더 그랬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무에 매진하셔서 용태가 악화될 정도이거늘, 이렇게 빨리 처리하실 줄이야.’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신을 펼쳐 읽어봤으나 결과는 같았다.

‘망했군.’

슬쩍 고개를 드니 눈이 마주친 무관이 힘주어 말했다.

“황상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서두르십시오.”

“…….”

달랑 서신만 왔으면 모를까, 안내 역할을 맡은 이가 눈앞에서 재촉하는데 어쩔 수 있나.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받아들였다.

“알겠소.”

팽수관이 사람을 불러서 알리려고 하는데 무관이 입을 열었다.

“총원이 다섯 명을 넘으면 안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서신에 그런 내용은 없소만.”

“인원을 무제한으로 허락하지도 않으셨지요.”

팽수관은 주황색 관복을 걸치고 검은 관모를 눌러 쓴 무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건 황상이 아니라 지휘사(指揮使)의 뜻인가 보오.”

“그렇습니다.”

“혹여라도 황상께서 아시면 불쾌해하시지 않겠소?”

무관이 꼿꼿한 자세로 답했다.

“금의위(錦衣衛)는 황상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 황상께서 탓하시더라도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황제의 비위를 거슬러 목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킬 것이라는 의미.

무관의 뜨거운 충성심에 감탄하는 건 팽수관만이 아니었다.

“대단하시네요. 황상이 부러워요.”

섬랑이 은신을 풀고 나타나 칭찬하자 팽수관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 녀석이 감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어차피 부르실 거였잖아요. 수고를 줄여 드리려고 조금 일찍 왔죠.”

섬랑은 너스레를 떨고 무관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구시죠?”

무관이 섬랑을 쏘아보다가 신분을 밝혔다.

“금의위 북진무사(北鎭撫司) 천호(千戶) 마형오다.”

“너무 기니까 마 천호님으로 하죠. 표정이 안 좋으신 걸 보니 많이 놀라셨나 봐요.”

“놀란 건 사실이지만 그걸로 끝이다.”

“금의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시네요.”

“갈 사람이나 빨리 정해라.”

섬랑이 씩 웃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황궁에 갈 사람을 정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으나 순탄하게 끝난 건 아니었다.

섬랑은 연규서의 한쪽 눈에 시커먼 멍을 새기고 단성오가 먹은 음식을 전부 토하게 만들고 나서야 손가락을 하나씩 꼽을 수 있었다.

“나와 백가상단주님은 무조건 가야하고. 너희 둘은 죽이지 않는 이상 따라올 테니 포함시켜야겠지. 그럼 한 명이 비는데 가고 싶은 사람?”

“……!”

묵영대원들 모두가 원했지만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

서열로 따지면 오장(伍長)들 차례였는데 그들 사이에도 엄연한 고하가 있었다.

선임인 두 사람이 동시에 한 걸음 나섰다가 서로를 향해 살기를 쏘아냈다.

“나다.”

“아니, 나야.”

우소묵이 안 그래도 부리부리한 눈을 부라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황궁에 넘쳐나는 게 환관이다. 너까지 더할 필요는 없어.”

구자영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요사하게 웃었다.

“호호. 흉포한 멧돼지는 더 쓸모없지 않을까? 거세하면 조금이나마 얌전해질지도 모르겠네.”

이렇게 두 사람이 치열하게 대치하는 사이.

이관휘가 재빨리 취팔선보(醉八仙步)를 밟아 섬랑 옆에 섰다.

“내가 가겠네.”

“좋아, 이 소협.”

“……!”

엉뚱한 사람이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얻을 줄이야!

우소묵과 구자영이 길길이 날뛰었으나 소용없었다.

섬랑은 그들과 묵영대원들을 둘러보며 두 손을 매만졌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야. 이해했지?”

하다마다.

마인들이 일제히 외쳤다.

“존명!”

“그래, 믿을게.”

섬랑은 신형을 돌려 팽수관을 비롯한 팽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요. 얼굴 좀 펴시고요. 저 믿으시죠?”

누가 믿을까.

팽수관이 그 마음들을 대표해 포권했다.

“그야 소교주에게 달렸지. 이번 사업을 통해 좋은 관계를 구축했으면 하네.”

“하하. 우리 사이에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팽가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든 말든, 섬랑은 준마 위에 뛰어올라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죠.”

그를 포함한 다섯 사람은 금의위 천호 마형오와 함께 말달렸다.

대명(大明)의 황궁, 자금성(紫禁城)을 향해!

* * *

섬랑은 점점 가까워지는 자금성을 주시하며 탄복했다.

‘뭐야, 저건? 듣던 것보다 더하잖아!’

드높은 성벽과 넓디넓은 해자로도 모자라 수많은 위사(衛士)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모습이라니.

천하제일 부자가 사는 곳답게 돈 냄새가 풀풀 나지 않는가?

‘겉이 저 정도인데 속은 얼마나 대단할까?’

섬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상상의 날개를 펴다가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네. 곧 보게 될 텐데 뭐 하러…….’

그때, 앞서가던 마형오가 말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어? 마 천호님, 황궁이 코앞에 있는데 왜 방향을 트세요?”

마형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문했다.

“내가 언제 그곳으로 간다고 했느냐?”

“……!”

확실히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섬랑은 말고삐를 내려쳐 마형오의 측면에 바짝 붙었다.

“그럼 어디로 가는 건데요?”

마형오가 말의 속도를 늦추며 앞을 가리켰다.

“여기다.”

자금성 옆에 있는 거대한 장원이었다.

섬랑은 문 앞에 늘어서 있는 금의위 무관들과 현판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금의위 연무장에 왜?”

“황상이 이곳에 계시니까.”

마형오가 말을 멈춰 세우더니 하마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연규서와 단성오는 서로를 바라보며 전음을 보냈다.

-함정일 수도 있소!

-소교주를 모시고 피해야 하오!

다시 앞을 보며 섬랑에게 경고하려던 두 사람은 입을 떡 벌렸다.

섬랑도 어느새 말에서 내려 마형오와 함께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소교주!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멈추십시오!”

섬랑은 수하들의 피 끓는 충언을 가뿐히 무시했다.

“시끄러워. 밖에서 기다릴 거 아니면 빨리 따라와.”

그 순간, 커다란 문이 활짝 열리고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는 수많은 금의위 무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너머로 보이는 높은 단상 위, 화려한 옥좌(玉座)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검은색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황룡포(黃龍袍)를 입은 뒤 허리에 옥대(玉帶)를 매고 피화(皮靴)를 신은 잘생긴 중년인이었다.

섬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잘 봐, 제대로 찾아왔어.”

중년인을 똑바로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소교주가 호굴(虎窟)로 들어가는데 수하들이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나.

연규서와 단성오는 이를 지그시 물고 섬랑의 뒤를 따랐다.

백승무와 이관휘도 마찬가지.

그들이 모두 들어가자 문이 굳게 닫혔다.

쿠웅-

다들 옴찔했지만 섬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중년인만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과연. 뭐가 달라도 다르시네.”

그러자 중년인 옆에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던 늙은 환관이 허리를 잠시 공손하게 굽혔다가 펴고 말문을 열었다.

“네가 바로 섬랑이렷다? 황상께서 복색이 보기 좋다는 뜻이냐고 물으신다.”

“……!”

가늘고 여린 음성이 섬랑 일행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연규서와 단성오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괴물 같은 늙은이구나. 저 먼 거리에서 소교주가 작게 혼잣말한 걸 알아듣고 황제에게 전했어.’

‘이렇게 작은 목소리를 여기까지 또렷하게 보내다니. 내공을 대체 얼마나 쌓은 거야?’

섬랑도 환관의 심후한 내공에 감탄했으나 일의 우선순위를 알았기에 대답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폐하. 제가 섬랑이에요. 복색 같은 게 아니라 병색이 완연한데도 위엄이 넘치셔서요. 황상다우세요.”

중년인의 눈에 이채가 맺혔고 섬랑은 금의위 무관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근데 신하분들의 시선이 화살이 꽂히는 것처럼 따갑네요. 제가 황궁 예법에 어두워서요. 오체투지(五體投地)라도 해야 하나요?”

터무니없는 무례에 금의위 무관들의 눈초리가 더 사나워졌으나 황제는 담담했다.

늙은 환관이 다시 허리를 숙였다가 펴며 황제의 말을 전했다.

“황상께선 강호의 무부들에게 그런 걸 기대하지 않으신다.”

“시원시원하셔라. 그런데 왜 여기로 부르신 거죠?”

“사특한 사교 무리를 자금성에 들일 수는 없어서다. 금의위 훈련을 시찰하러 나오신 참에 우연히 만나신 것이야.”

섬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래도 많이 보고 싶으셨나 봐요, 이렇게 빨리 우연히 뵙게 되고.”

“황상께서 서두르신 건 너 때문만이 아니다.”

황제가 두 눈을 빛내며 입술을 미미하게 움직였고 늙은 환관은 주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사람에게 오롯이 전했다.

“그대가 진옥룡의 유일한 사제인 백가상단주인가?”

백승무가 정중히 예를 취하며 대답했다.

“네, 폐하.”

“만나서 반갑다.”

“소인이야말로 영광이옵니다.”

“인사는 이쯤이면 됐고. 그대의 사문에선 짐이 내린 선물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더군. 무엇이 문제여서 그러느냐?”

뼈가 담긴 말이었으나 백승무는 당황하지 않았다.

공손한 태도와 차분한 어조로 사정을 설명했다.

“아니옵니다, 폐하. 하해와 같은 성은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다만 도사의 본분을 지키고자 노력할 뿐이니 통촉해 주시옵소서.”

황제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으면 아첨으로 여기고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짐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다. 그대들의 언행이 일치하니 하나라도 더 내려주고 싶은 것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객쩍은 소리는 됐고. 혹시 진옥룡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곤륜이나 그대에게 서신이라도 보냈느냐?”

“아니옵니다. 이십 년 동안 전혀 없었습니다.”

“그답군. 정말 그다워.”

황제는 용안에 주름을 잡고 가만히 있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늙은 환관이 황제의 말을 듣고 백승무에게 손짓했다.

“백가상단주는 이리 와서 그 사업에 대해 자세히 아뢰어라.”

백승무가 섬랑을 힐끗 보자 섬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잘하실 거라 믿어요.”

“최선을 다하겠네.”

백승무는 금의위들이 열어준 길을 걸어 황제에게 향했다.

금의위들은 섬랑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했다.

섬랑은 하품하며 딴청을 피우다가 황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황제의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무장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섬랑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목석같이 서 있더니 기세를 드러내니 상당한데. 금의위에 저런 자가 또 있을 리는 없으니 지휘사겠지.’

늙은 환관으로도 모자라 저런 무장까지.

게다가 이자들이 전부가 아닐 터, 대명 황실의 저력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왜 이래?’

이관휘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만. 설마.’

섬랑은 머릿속에 새겨진 그의 얼굴과 단상에 서 있는 무장의 얼굴을 비교하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꽤 잘 사는 무가(武家)에서 나고 자랐다더니 금의위 지휘사 아들이었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조직의 수장을 아비를 뒀으면서 거지가 되어 식은 밥이나 처먹는 멍청한 녀석이 있을 줄이야!

하도 어이가 없어 이관휘를 멍하니 보는데 백승무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황상께서 그럴듯한 사업이라고 하셨네.”

“아. 잘됐네요.”

“허락하고 싶다 하셨어. 무척이나 말일세.”

“갑자기 불안해지네요. 어떤 반전이 있는 거죠?”

백승무가 쓴웃음을 지었다.

“악양루에서 내가 물었던 것과 비슷하네. 자네가 교도들을 통제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셔.”

“장차 천하제일 사교를 이끌어 나갈 마인의 실력이 궁금하신 거겠죠. 별것 아니다 싶으면 본교를 토벌해버리시려고요.”

“너무 앞서가지 말게나. 직접 말씀하신다고 하셨으니 들어보게.”

때마침 늙은 환관이 입을 열었다.

“섬랑은 신강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라.”

“어떻게요?”

“짐의 이 장 앞까지 다가와 예를 취해라. 아까 말했듯이 제대로 된 예는 원하지 않는다. 포권이면 돼.”

“성은이 망극하시네요.”

황제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작게 웃다가 기침을 토하자 늙은 환관이 재빨리 맥문을 잡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폐하, 무리하시면 안 되옵니다.”

황제의 표정이 편해지자 환관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무장에게 말했다.

“지휘사, 시작하시오.”

“알겠소, 병필태감.”

지휘사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금의위는 금의수호팔진(錦衣守護八陣)을 펼쳐라!”

“충!”

무장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진법을 발동시켰다.

섬랑은 전신을 조여오는 압박감에 감탄을 토했다.

“이야, 멋진데요.”

지휘사가 담담히 설명했다.

“팔진(八陣) 중 단 일진(一陣)을 약식으로 펼친 것이다. 너를 거둔 진옥룡이 직접 상대해 보고 개량한 진이니 쉽지 않을 게다.”

“이게 다예요?”

“무슨 뜻이냐?”

“그 유명한 어림군(御林軍)이 안 보여서요.”

황제가 입술을 움직이고 병필태감이 그 말을 전했다.

“짐은 이들로 충분하다.”

지휘사를 비롯한 금의위 무관들이 가슴을 폈다.

황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와라.”

“네, 폐하. 금방 갈게요.”

섬랑은 지휘사에게 시선을 돌리고 두 손을 매만졌다.

“근데 지휘사님처럼 뛰어난 고수가 좁은 곳에 갇혀 있으니 답답하시겠어요.”

“나를 관부의 개라고 나무라는 것이군.”

“비약이 지나치시네요.”

“격장지계(激將之計) 따위엔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는 무림과 사교의 개야.”

“하하. 재밌는 표현이네요.”

생전 웃을 것 같지 않던 지휘사가 미소 지었다.

“이것 역시 너를 거둔 이가 알려준 것이지.”

“오오. 그럼 저도 그분께 배운 걸 보여 드리죠. 함께 절차탁마(切磋琢磨)해봐요.”

섬랑이 활짝 웃으며 신형을 날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