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1화
연(緣)
백승무는 자신을 호위해 온 백가상단 무인들을 모두 상단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은 거세게 반발했으나 백승무가 ‘명을 번복할 생각은 없네’라고 덧붙이자 섬랑을 한 차례 쏘아본 뒤 군말 없이 떠났다.
이제 백승무가 떠날 차례.
신법을 펼쳐 부두로 향하는데 옆에서 달리던 섬랑이 불쑥 칭찬했다.
“사람을 잘 다루시나 봐요.”
“과찬일세.”
“인정도 많고요.”
“그래 보이나?”
섬랑이 피식 웃었다.
“혹시라도 일이 터질까 봐 전부 피신시키신 거잖아요.”
“나는 꼼짝없이 잡혔으니 다른 이들이라도 보내야 할 것 아닌가.”
백승무가 쓴웃음을 짓자 섬랑이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다 잘될 테니 안심하세요.”
“사형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시곤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셨지.”
“그 결과는요?”
“알고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네. 죽을 고생을 해야 했지만 언제나 좋게 마무리됐어.”
“역시. 저랑 똑같으시네요.”
“자네가 사형을 많이 닳은 건 사실일세.”
“하하하. 아무리 봐도 그렇죠?”
섬랑이 기뻐하자 백승무가 무겁게 강조했다.
“사형은 때가 되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설명해 주셨지. 자네도 그럴 거라 믿겠네.”
“네? 진짜 황궁 밥을 먹으러 갈 계획이었는데.”
“……정말 비슷하군.”
“아. 이러면 되겠다. 결과를 보고 이유를 붙이죠, 뭐.”
“……과연. 사형이 자네를 거둘 만해.”
“거봐요. 다들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한다니깐요.”
백승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신법을 펼쳤다.
시간이 흘러 부두에 도착해 보니 장강수로제일운방이 자랑하는 특급 쾌속선이 정박해 있었다.
섬랑의 뒤를 따라 신형을 훌쩍 날려 갑판 위에 착지하자 선장이 백승무에게 다가와 포권했다.
“어서 오시오, 단주. 내 배에 오른 걸 환영하오.”
백승무도 선장을 유심히 살펴보며 답례했다.
“오랜만이오, 단장. 느닷없이 왔는데도 놀라지 않으시는 걸 보니 악양루에서 먼저 떠난 총채주께서 들르셨나 보오.”
“사람을 보내 소식만 전하셨지. 여기 들르실 기분이 아니라고 전해 들었소.”
수왕이 섬랑의 신위를 접하고 허탈감을 느껴 뒤로 물러서기로 한 것을 말하는 거였다.
선장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동안 장강에 바람이 불 것 같소. 그 바람이 잠잠해질 때까지 외풍이 없었으면 하오.”
수왕이 후계를 정하고 그 후계가 장강수로십팔채를 휘어잡을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의미.
백승무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바람이 여러 곳에서 불면 머리털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양손으로 정리하는 수고만 생기니 단장의 말이 맞소.”
백가상단은 물론이오, 남궁세가도 손을 쓰지 않을 거라 하자 선장의 표정이 풀렸다.
백승무는 분위기도 바꿀 겸 안부를 물었다.
“그건 그렇고, 별래무양(別來無恙)하셨소?”
“…….”
장강수로십팔채의 쾌선단장(快船團長)이자 장강쾌장(長江快長)이라 불리는 선장이 백승무를 물끄러미 보다가 누군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럴 리가 있겠소?”
“크흠. 실언을 해 미안하오.”
“잠깐만요, 그게 무슨 뜻이죠? 제가 어때서요?”
눈치가 빠른 섬랑이 어이없어했으나 아무도 그의 편을 들지 않았다.
심지어 마인들도 그랬는데 연규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선실로 들어가 버렸고 단성오는 묵영대원들에게 사방을 경계하라 명한 뒤 섬랑의 뒤에 시립했다.
“이거야 원.”
섬랑이 혀를 차며 뒤를 돌아봤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단성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대꾸했다.
“소교주를 호위하는 중입니다만.”
“지키는 게 아니라 기회를 엿보다가 등을 찌를 기세인데? 다른 녀석들도 주위를 경계하는 게 아니라 나를 포위하고 있잖아.”
“기분 탓이겠지요. 설령 그렇다 해도 저희처럼 쓸모없는 것들이 소교주를 어찌 해하겠습니까?”
“난 또 뭐라고.”
섬랑이 작게 한숨을 쉬며 단성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 먼저 갔다고 삐지기는. 차라리 규서처럼 선실에 처박혀 조용히 우는 게 낫지, 그렇게 외롭다고 투덜대 봐야 뭐가 바뀌겠어.”
“……!”
뭐가 어째?
단성오가 울컥해서 반박하려고 하는데 선장이 수부들에게 명했다.
“출항한다!”
“하!”
수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자 섬랑도 자신의 선실로 향했다.
“이거 은근히 피곤하네. 들어가서 눈 좀 붙일게.”
“…….”
자겠다는데 따라갈 수도 없고.
단성오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멍하니 있다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를 갈았다.
까드득-
이빨을 가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백승무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데 한 사람이 슬그머니 다가와 예를 표했다.
“이관휘가 금군(金君)을 뵙습니다. 경황이 없어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한 점,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네, 결룡(潔龍). 자네도 그간 잘 있었…… 이런, 미안하군. 또 실언을 했어.”
“견딜 만하니 괘념치 마십시오.”
이관휘가 쓰게 웃자 백승무가 정색했다.
“그것참 다행이네만 기밀에 속하는 일이라 자네가 궁금해하는 걸 전부 알려줄 순 없네. 만뇌(萬腦)가 곧 무림맹에 연락할 테니 조금만 참으시게.”
“그럼 딱 한 가지만 부탁드립니다. 대협께서 왜 이 배를 타신 겁니까?”
“허어. 낭왕이 악양루에 온 연유를 물을 줄 알았거늘 단번에 핵심을 찌르는군. 그래, 이것만큼은 자네도 알아야겠지.”
백승무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천마신교 소교주와 황궁에 가서 황상을 뵙기 위해서일세.”
“……황상을요?”
“그렇게 됐네. 자네, 괜찮겠나?”
“…….”
괜찮을 리 있나.
이관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장차 천하제일 사교(邪敎)를 이끌어 나갈 마인이 황제를 만나려 한다는 황당한 사실보다 황제 곁에 있을 자신의 부친 때문이었다.
백승무도 유정풍과의 교분이 워낙 돈독해서 그의 제자가 어떤 가문 출신이고 누구의 자식인지 빤히 알기에 나직이 제안했다.
“길잡이 역할이야 내가 하면 되지. 소교주가 납득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하고 올 테니 다음 정박지에서 내릴 준비를 하게.”
“그럼…….”
이관휘는 저도 모르게 승낙하려다가 말끝을 흐리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빌어먹을. 이대로 계속 도망만 칠 순 없어.’
언젠가는 부친 앞에 서게 될 날이 올 터, 타의로 그런 처지가 되느니 지금이 그때라 생각하고 스스로 부딪치는 게 낫지 않은가?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가슴을 활짝 폈다.
“대협, 말씀은 고맙지만 피하지 않겠습니다.”
백승무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립…… 말이 헛나왔네. 약관도 안 된 나이로 구룡사봉에 뽑힐 만해. 유 대협이 들었으면 제자를 잘 키웠다고 기뻐하셨을 걸세.”
유난히 성숙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이관휘는 백승무의 이어지는 말에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니 나이 많은 내가 끼면 불편하겠군.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껏 그랬듯이 소교주를 잘 챙겨주게나. 나는 선실에 박혀 있겠네.”
* * *
섬랑은 말 위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오오. 하북성에 들어왔을 땐 그냥 그랬는데 영청현(永清縣)에 이르니 확실히 다르네요. 팽가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많이 번화해요. 안 그래요, 백 대협?”
백승무는 섬랑의 옆에서 말을 천천히 몰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편이긴 하지.”
“저 멀리 보이는 장원이 팽가죠? 부잣집이라 그런지 크긴 하네요.”
섬랑이 또 말을 던지자 백승무가 참다 참다 물었다.
“하나 묻겠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왜 계속 내게만 말하는가? 결룡이 더 편하지 않나?”
“이 소협한테도 말 거는데요.”
“비율이 천지 차이인데 무슨. 나와 비교하면 십분지 일 정도밖에 안 돼.”
뒤에서 따라오던 이관휘가 꼴좋다는 듯 소리 없이 웃었지만 섬랑은 진지했다.
“대협을 만나기 전에 많이 얘기했으니까 그러죠. 더구나 대협은 저와 깊은 인연이 있잖아요.”
“……사형을 말하는 건가?”
섬랑이 서쪽 하늘을 우수에 잠긴 얼굴로 올려다봤다.
“네. 못 뵌 지 오래돼서 그런가 대인의 사제 되시는 대협이 친근하게 느껴져요.”
“…….”
저런 표정으로 이런 말까지 하는데 어쩔 수 있나.
백승무는 마음을 고쳐먹고 화제를 돌렸다.
“팽가는 황실과 깊은 연이 있네. 몇 년 전 귀천하신 전대 태상가주는 황상이 황태손 시절부터 스승으로 모시던 분이셨지.”
“아는데요.”
“…….”
“자오 아저씨가 해주신 말씀 말고 다른 거 없어요?”
큰맘 먹고 친절하게 대했거늘 따지기는!
백승무는 가슴에 참을 인 자를 깊게 새겼다.
“팽가 가주는 무림맹주가 되어 무림맹에 있으니 전대 무림맹주셨던 태상가주께 부탁드려야 할 걸세.”
“대를 이어 맹주라니. 팽가, 잘나가네요.”
잘나갈 뿐이랴.
무림에서의 영향력에 민초들의 지지, 황제의 두터운 신임과 모용세가와의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재물까지.
하북팽가는 가문 역사상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팽가는 가볍게 볼 곳이 아니야.”
“그렇겠죠.”
“그런데 이십 년 전에 발발했던 정마대전에서 현 가주가 중상을 입었었네.”
“저런.”
“그의 부친인 현 태상가주는 천마신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무슨 말인지 이해했나?”
“황상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해 봐야 들어주지 않을 테니 목에 칼날을 들이밀고 협박하라고요?”
“…….”
백승무는 참을 인 자를 무수히 새겼다.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군. 황궁으로 곧장 가서 몰래 담을 넘게.”
“하하. 저를 뭐로 보시고. 농이에요, 농. 태상가주께 예의를 갖출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생각해 보게. 팽가에 굳이 갈 필요가 있나?”
“네. 어차피 그럴 예정이었거든요.”
“음? 무슨 목적으로?”
“대인의 무기명제자를 만나 인사라도 하려고요.”
“……!”
백승무가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여는데 섬랑이 눈을 빛냈다.
“저 사람들은 뭐죠? 복색이 특이하네요.”
팽가 장원에서 가죽옷을 입은 자들이 말을 몰아 나오고 있었다.
백승무는 마주 오는 그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녕성 사람들이군.”
“모용세가요? 풍기는 기운은 난잡한데.”
“과거 사형에게 투항했던 낭인들이 뭉친 낭인향(浪人香)이라는 무리가 있네. 마적과 이민족을 규합한 비초회(飛草會)라는 곳이 있고. 두 조직이 합쳐져 비마회(飛馬會)가 됐는데 그곳 사람들일 걸세.”
“아! 저와 연(緣)이 있는 분들이시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에이, 아시면서.”
섬랑은 말을 빨리 몰아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섬랑이라고 해요.”
비마회 무인들은 낯선 이가 접근하자 말을 세우고 경계하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섬랑이 중원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요녕성까지 퍼지진 않았으나 팽가에서 들은 것이다.
선두에 있는 텁석부리 중늙은이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처, 천마신교 소교주?”
“어라? 잘 아시네요. 그쪽은 누구시죠?”
텁석부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답했다.
“비마회 외당 이향주 오상록이오.”
섬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남이 아니셨네. 출세하셨고요.”
“나를 아시오?”
“물론이죠. 남방장 휘하 제조당(製造堂) 삼향(三香) 일조에 계셨던 분이시잖아요.”
“그, 그걸 어떻게!”
“들었으니까 알죠. 일조장이셨던 분은 잘 계세요? 깐깐한 시어머니 같다던 분요.”
“헉! 그, 그는 지금 외당주를 맡고 있소.”
“이야. 다들 잘 풀리셨구나. 대인께서 좋아하시겠어요.”
“대인은 또 누구요?”
“누구긴 누구예요, 요녕성에 있는 대흥장(大興莊)의 주인이시죠.”
“아! 진옥룡!”
섬랑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대흥장은 잘 관리되고 있죠?”
“정말 모르시는 게 없군. 물론이오.”
“팽가엔 무슨 일로 들렀다 가시는 거예요?”
대답할 이유가 없었으나 섬랑의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기는 마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보, 본회는 모용세가와 협력해 팽가와 거래하고 있소. 요녕성에서 나오는 모피와 약재를 수송하고 떠나는 길이오.”
“맞다, 거기 것들이 그렇게 좋다면서요?”
텁석부리는 두려워하는 와중에도 어깨를 폈다.
“그렇소, 요녕성 것들은 최고요.”
섬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했다.
“그럼 본교 사람들도 써봐야지. 모용세가와 비마회도 사업에 포함시켜야겠어.”
“……!”
이건 또 무슨 말인지.
결코 좋은 얘기는 아닌 것 같아 텁석부리가 안절부절못하는데 백승무가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실례가 많았소. 백가상단의 백승무라 하오.”
텁석부리의 얼굴이 무간지옥에서 부처라도 만난 것처럼 환해졌다.
“금군이셨구려. 명성은 익히 들었소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나 역시 그렇소. 그럼 조심히 가시오.”
“……갑자기 무슨?”
백승무가 생각에 잠긴 섬랑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손을 내젓자 텁석부리는 그제야 알아듣고 수하들과 함께 조용히 떠났다.
그리고 잠시 뒤.
섬랑이 생각을 정리했는지 팽가 장원을 가리켰다.
“뭐 하세요? 가시죠.”
“알겠네.”
장원에 이르자 정문을 지키는 건장한 무인들이 도파에 손을 대며 백승무에게 물었다.
“백 대협, 이자들은 누구입니까?”
백승무보다 섬랑이 빨랐다.
“섬랑요, 태상가주님 계신가요?”
“……!”
무인들이 호각을 꺼내 불자 장원에서 수많은 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섬랑은 그들 중 제일 먼저 나온 이를 보며 감탄했다.
“과연 팽가. 핏줄은 속일 수 없다더니 여인도 건장하네.”
중년 여인이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참마도(斬馬刀)를 쥐며 입을 열었다.
“팽가의 피를 이어받진 않았으나 팽가 사람이긴 하지.”
“네? 어떻게요?”
중년 여인이 섬랑을 노려보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연 중에서도 연이라 불리는 혼인으로. 나는 모용수수다. 마인 중의 마인이 무슨 용무로 본가에 온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