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39화 (539/569)

외전 20화

혹세무민(惑世誣民)

낭왕의 눈이 열의로 이글거리자 섬랑이 웃었다.

“하하하. 이러실 줄 알았다니까. 어때요, 어르신. 상상만 해도 갈증이 가시죠?”

“…….”

솔직히 조금은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긴 한데.

그렇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야 있나.

낭인이란 전장을 갈구하면서도 본인의 몸값은 확실히 높이는 존재.

그런 자들의 왕인 낭왕은 팔짱을 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노는 건 좋은데 판이 어느 정도 규모여야지. 서역은 너무 멀어. 한 번만 오가도 주름살이 몇 개씩 늘어날걸.”

섬랑이 낭왕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제법 볼만할 것 같은 용모인데요.”

“그야 그렇지만 다른 문제를 지적하는 거다. 내 애들에게 딸린 식솔이 몇이나 되는지 알아?”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렇지. 아주 많아. 가장이 그 먼 길을 왕복하는 동안 그 많은 이들이 하염없이 기다리며 배를 곯으면 어떡해. 아니, 생이별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지. 가장이 덜컥 죽기라도 해봐, 졸지에 과부나 고아 신세가 되잖아.”

섬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낭인의 기본은 식구를 내팽개치고 나 몰라라 하는 거 아니었어요? 낭왕 어르신처럼요.”

“……크흠. 십인십색(十人十色)이거늘 싸잡으면 쓰나. 가정에 충실한 녀석들도 많아.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치 않네. 그 아픔을 어찌 씻을까.”

“돈으로 씻으면 되죠.”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야.”

“거액으로요. 아까 정의회 군사께서 하시는 말씀 못 들으셨어요? 다소 손해를 보겠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위진홍이 확고히 보증했다.

“쉬운 일이 아니니 값은 섭섭지 않게 쳐주겠소.”

낭왕이 우려한 아픔이 씻겼다.

“이렇게까지 사정하는데 계속 매몰차게 대하긴 뭣하군. 신강 술이 중원에 유통되면 좋기도 하고. 조건만 맞으면 대의를 위해 희생해 볼까.”

후위진이 반대했다.

“안 됩니다.”

“왜!”

낭왕이 눈을 부라려도 후위진은 담담했다.

“아버님이 떠나시면 큰 공백이 생깁니다.”

“원래 없었으니 상관없잖아.”

“지금은 계시니 상관있지요.”

후위진은 육성이 아닌 전음으로 상기시켰다.

-어머님의 유언을 그새 잊으셨습니까?

낭왕이 인상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네게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니 결코 어기는 게 아니야.

-우리만 이득을 얻는 게 아닙니다. 저들도 똑같잖습니까. 냉정하게 따져보십시오, 양측 다 돈을 버는데 피는 한쪽에서만 흘리게 됩니다. 그만한 보상을 받는다 해도 안 하는 게 낫지요.

돈은 운이 좋거나 기회만 잡으면 단기간에 벌 수 있으나 무인을 키우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실로 옳은 소리였지만 낭왕의 생각은 달랐다.

-아까 마교 꼬마가 말했던 대로 내 애들이 좀이 쑤셔서 미치려고 해. 이대로 허송세월하다간 얼마 안 가 뿔뿔이 흩어질 거다. 그럴 바엔 피해를 보더라도 하는 게 맞아. 네가 이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테고, 뭘 노리고 반대하는 거냐?

-만뇌(萬腦)가 답을 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위진홍이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소, 련주. 응담후가(鷹潭后家)의 천륜은 언제까지 유효한 것이오?”

후위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천륜에 그런 게 어디 있겠냐만, 적어도 강산이 바뀔 때까지는 변함없지 않을까 싶소.”

“최소한 십 년이라…….”

위진홍은 잠시 계산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빠듯한 시간이지만 련주의 입지를 다지고 쓸 만한 무인들을 키울 수 있겠소.”

후위진의 눈이 맑게 빛났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니 귀측도 마찬가지일 것 같소만.”

“그럴 리가. 각자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지.”

위진홍은 싸늘하게 중얼거리고 손가락을 하나 폈다.

“그럼 일단 십 년 계약으로 합시다. 계약 기간에는 서로 불침하는 것이오. 귀측이 어기지 않으면 우리 역시 해를 끼치지 않겠소.”

“나쁘지 않군. 문서로 남기면 받아들이겠소.”

“그건 이쪽이 할 말이오. 무림맹은 내가 어떻게든 설득할 테고, 단주는 어떠시오?”

백승무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찬성했다.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사업이니 마땅히 응해야 하지 않겠소.”

“이제 총채주만 남았소. 의향을 밝히시오.”

모두의 시선이 수왕에게 집중됐다.

수왕이라고 싫을 리 있나.

허나 곧바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날이 갈수록 발언권이 약해지고 있는데 이번 일을 기회 삼아 입지를 키워야 했다.

“불가. 사마련과 낭인들이야 그렇다 쳐도 마교만큼은 믿을 수 없다. 음모가 있을 게 뻔하거늘 어떻게 믿고 일을 하겠느냐.”

섬랑은 분노하긴커녕 친절하게 정정해 줬다.

“마교가 아니라 천마신교요.”

“흥. 호칭을 바꾼다고 속성도 변할까?”

“수적떼 두목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갈! 네가 지금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주장하신 논리대로 돌려 드린 거잖아요. 그보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수왕이 거부하려 했으나 섬랑이 더 빨랐다.

“언제 가실지 모르는 분이 왜 십 년짜리 계약에 신경 쓰시죠?”

“……!”

“그러고 보니 진짜 이상하네. 장차 장강수로십팔채를 이끌어 나갈 분이 나오셔야지, 왜 어르신이 여기 계신 거예요?”

낭왕이 손뼉까지 쳐가며 격하게 동의했다.

“와하하하! 말 한번 잘했다! 관 속에 한 발을 집어넣은 반송장이 낄 자리가 아니지! 영감, 악양루에 똥칠하다가 죽기 전에 후계나 확실히 정하는 게 어때? 그래야 체면을 지키고 우리 역시 편하게 사업할 거 아냐.”

“…….”

화가 극심하게 치밀면 오히려 침착해진다고 했던가.

수왕은 섬랑과 낭왕을 번갈아 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어린놈이나 나이를 먹은 것이나 똑같이 재롱을 부리는구나. 어느 놈부터 덤빌 테냐?”

섬랑이 제안했다.

“시간 아까우니까 한꺼번에 상대하시죠.”

“허튼소리 말고 어서 정해!”

“진심인데. 그럼 장유유서(長幼有序), 낭왕 어르신이 먼저 하세요. 양패구상하면 제가 마무리를 짓죠.”

낭왕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마음에 들려 하면 바로 속을 뒤집는구나.”

“두 분 다 빼시면 어떡해요.”

“남 말하네! 너는?”

“저야 다르죠.”

섬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왕을 내려다봤다.

“알아서 금분세수(金盆洗手) 하시면 좀 좋아. 나가서 붙죠. 은퇴시켜 드릴게요.”

“무어라?”

수왕은 벌떡 일어서서 호통치려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섬랑의 전신에서 흉포한 흑염이 솟구쳐 오르더니 무시무시한 악귀의 형상으로 화해 수왕을 오만하게 굽어보는 것 아닌가!

‘정말 대단한 마기구나!’

낭왕과 겨룰 때보다 더한 신위에 경악했으나 자신이 질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과거 정광이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삼화취정(三花聚頂)의 경지에 올라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느꼈던 좌절감이 다시 머리를 들었다.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라. 이렇게 또 한 번 애송이에게 밀려나는 건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제는 질투심이 아니라 극심한 허탈감이 밀려왔다.

‘쓸데없이 오래 살았어.’

악귀에게서 시선을 떼고 섬랑의 눈부신 젊음을 망연자실하게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마무리는 지어야지.’

어느새 육신으로 진법을 펼쳐 멀찍이 물러나 있는 위진홍에게 말했다.

“동의하마.”

위진홍이 진법을 풀고 섬랑을 노려봤다.

“모두 찬성했으니 그만해.”

섬랑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혼을 거둔 뒤 수왕에게 투덜거렸다.

“헛심만 썼네. 사람 무안하게 뭐 하시는 거예요.”

“더 이상 내게 말 걸지 말아라.”

수왕은 눈에서 흘러내리는 진물을 닦고 탁자 앞에 앉는 위진홍에게 물었다.

“마지막 관문은 자신 있느냐?”

“황상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다. 그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천마신교는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교야. 토벌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사업을 함께 하는 건 쉽지 않을 게다.”

섬랑이 ‘우리가 어때서’라며 항변했으나 위진홍은 깨끗이 무시하고 대답했다.

“황상은 백성들의 삶이 더 윤택해지길 바라오. 마인들이 중원으로 넘어오지만 않으면 설득할 수 있을 것이오.”

“벌써 왔는데요.”

“그의 용태가 좋지 않으니 빨리 사정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야 하오. 누가 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제가요. 어차피 황궁 밥을 먹으러 갈 계획이었거든요.”

천하의 위진홍도 이 말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시끄럽다. 농이나 떠들 때가 아니야.”

“진담이었는데.”

“설마 황상을 해치려고 중원에 온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그랬으면 고작 이 인원으로 왔겠어요?”

낭왕이 섬랑의 그림자를 힐끗 보고 중얼거렸다.

“살수 따위를 믿고 그럴 바보도 아니니 정말 황궁 밥을 먹으려고 이러나 보군. 바보는 아니어도 제정신이 아니야.”

수왕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했고 후위진은 반신반의하다가 확신하게 됐는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으나 위진홍과 백승무는 다소 커진 눈으로 섬랑의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러자 섬랑이 가볍게 손뼉을 쳐서 주의를 끌어모았다.

“본교가 중원에 아무런 뜻이 없다는 걸 황상에게 보증하는 데 저만한 적임자가 또 있나요.”

확실히 없긴 했다.

“제가 가서 확신시켜 드릴 테니 안심하세요.”

그 안심이 안 돼서 문제였다.

위진홍은 섬랑을 뚫어져라 보다가 무겁게 요구했다.

“정말 황궁 밥을 먹으려고 할 뿐이고 사고 치지 않겠다는 것을 너를 거둔 진옥룡을 걸고 맹세해라.”

“맹세할게요.”

“그래도 영 믿음이 안 가.”

“아 진짜. 그럼 대체 어쩌라고요.”

위진홍은 백승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사업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야 하니 단주가 동행해 주시오.”

백승무가 난색을 표했다.

“내가 간다고 소교주가 달라지겠소?”

“어찌 보면 섬랑의 사숙 아니오? 다른 대안이 있소?”

“……!”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 그런 망언을!

백승무는 경악했으나 섬랑은 흐뭇해했다.

“맞아요, 한 식구나 마찬가지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백승무가 당황해서 입만 뻐끔거리자 위진홍이 설명했다.

“어차피 황상을 만나려면 하북팽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오. 이 자리에 단주보다 그들과 친밀한 이는 없지 않소?”

백승무는 그제야 말문이 열렸다.

“그건 그거고! 소교주가 사고를 치면 우리는 멸족의 위기에 처하오!”

“팽가를 통해 황상에게 서신을 보낼 때 사정을 설명한 뒤 섬랑을 만날지 안 만날지 직접 정하라 하시오. 그가 만날 의향이 있으면 그만한 대비를 하고 부를 것이니 섬랑이 미치지 않고서야…… 으음. 우리는 섬랑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확실히 적으시오. 그러면 황상도 우리가 필요하니 크게 탓하지는 않겠지.”

백승무는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황상의 패는 우리만이 아니잖소.”

“균형을 잡으려면 어느 쪽도 버릴 수 없소.”

위진홍이 쐐기를 박았다.

“황상은 영명하니 바른 판단을 할 것이오. 정말 안 좋은 상황이 되어도 단주의 사형을 떠올릴 터, 그만 마음 놓으시오.”

정광을 자꾸 거론하자 수왕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이 성사되면 연락해라. 세부 사항을 정하며 계약서를 작성하는 자리엔 다른 사람을 보내마.”

후위진과 낭왕도 질세라 떠났다.

“기다리고 있겠소.”

“어이, 금군(金君). 믿고 있을게. 그리고 섬랑, 허리춤에 검까지 차고 있는데 그게 주병기지? 다음엔 그것으로 놀아보자고.”

위진홍은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린 백승무를 위로했다.

“수왕이 욕심을 버리고 후계를 세우려나 보오. 피를 안 보고도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됐으니 힘내시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소만.”

“황상의 용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소. 빨리 가셔야 하오.”

섬랑도 거들었다.

“제가 잘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앞으로 사업할 때 우리 쪽 전표로 지급해도 되죠?”

백승무가 참다못해 폭발했다.

“뭘 믿고! 절대 안 돼!”

“그럼 금은으로 하다가 차차 바꿔가죠. 뭐 하세요? 어서 가죠.”

섬랑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하북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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