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9화
진짜 모습
“그 사업, 본교도 낄게요.”
“……!”
“왜 모두 입만 벌리고 말씀을 안 하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
있다마다.
아니, 많다 못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
수왕의 얼굴을 뒤덮은 주름들이 가뭄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고 낭왕이 ‘역시 안 되겠어’라고 중얼거리며 도파(刀把)에 손을 대자 백승무가 재빨리 나섰다.
“어허. 상세히 말해보라고 했잖는가. 다들 공사다망(公私多忙)하시니 죽 이어서 얘기하게. 그래, 자오 대협 알지? 그분처럼 말일세.”
섬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불가능한데요.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내가 실언을 했군. 흉내라도 내보게나. 아, 어서.”
백승무는 속이 시커멓게 타는지 수왕과 낭왕을 연신 눈짓으로 가리키며 채근했다.
섬랑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빙긋 웃어 보이고 입을 열었다.
“사마련의 협조를 받아 장강 이남의 물자까지 장강을 통해 천하 곳곳으로 나르면 이곳에 계신 분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질 것이고 민초들의 삶도 나아지겠죠. 관부에서는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되니 좋아할 거고요. 하지만 그만큼 시기하는 이들도 많아지겠죠. 예를 들면 제가 운남성에서 인연을 맺은 조상(潮商) 같은 자들이요.”
어디 광동성의 조상뿐이랴.
산서성의 진상(晋商)을 포함한 수많은 상방과 상단이 안 그래도 거대한 정족상단이 천하를 집어삼키려 한다며 성토할 게 뻔했다.
“그들과 엮인 관리와 무림 문파도 가만있지 않을 거고요. 그에 대한 대비책은 당연히 있으시겠죠?”
섬랑이 미소 지으며 바라보자 백승무는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고 담담히 답했다.
“자네 뜻을 말하라고 했지, 우리 패를 보여주겠다는 얘기는 안 했네.”
“뻔한데 숨기실 필요 있나요.”
섬랑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말을 이었다.
“무림, 상계, 관부, 이 세 부류의 이해가 얽히고설킨 일인데 피를 보지 않고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선 다른 한 곳의 의지가 필요하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손가락이 접혔다.
“바로 황실, 정확히 말하면 황상요. 그분이 명하시면 관리들이 억지로라도 따를 수밖에 없잖아요. 상계 역시 할 말이 없어지니 무림은 고작해야 투덜대는 게 끝이겠죠.”
백승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네, 세상을 너무 쉽게 보는군.”
“왜요?”
“전가통신(錢可通神)이라,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말이 있네. 돈이 걸린 일에 그 돈이 있고 돈맛 또한 아는 자들이 당하고만 있을 것 같나?”
“그들에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황상을 암습…….”
“어허. 말 좀 가려서 하게.”
“시해하는 걸 말씀하시나 본데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성공한다 한들 후폭풍을 감당 못 할 테고요.”
“……자네가 입조심 하게 만드는 것도 그만큼 어려울 것 같네.”
“한번 노력해 보죠. 어쨌든 우리가 먼저 돈으로 귀신을 부릴 건데 무슨 문제예요.”
가만히 듣고 있던 낭왕이 도갑을 툭툭 두드리며 경고했다.
“우리라니, 은근슬쩍 한 발 담그지 마.”
“섭섭하게 왜 이러세요? 어르신도 아직 남이시면서.”
낭왕이 이를 드러내며 웃으려 하자 백승무가 섬랑을 재촉했다.
“계속 말해보게.”
“무림이야 정의회와 사마련이 어떻게든 납득시킬 거고. 무림맹도 삐치지 않게 끼워주셨죠? 관리들에게는 뇌물을…… 아, 입조심해야지. 지원금을 주실 거잖아요. 그들 입장에서 돈이 어디서 들어오는 게 중요한가요, 들어오기만 하면 되지.”
“그런다고 상계가 포기할 것 같나? 청렴한 관리들에게 부정부패에 대한 증거를 흘릴 수도 있네. 그럼 상소가 빗발치겠지. 무림의 무뢰배들이 조직한 상단이 탐관오리들과 결탁해 유통을 독점하려 한다고. 황상에게 큰 부담이 될 거야.”
섬랑이 피식 웃으며 부정했다.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죠. 그랬다간 추후 어느 관리도 그들을 믿지 않을걸요. 무엇보다 상황이 그 지경까지 흐르도록 놔두시지는 않을 거고요.”
“우리가 어떻게 할 것 같은가?”
“그들 역시 돈으로 회유하시겠죠. 사업 규모가 갈수록 커질 텐데 드넓은 중원에 산재한 수많은 업무를 홀로 처리하려 드는 건 미련한 짓이잖아요. 천하 곳곳에 숙련된 일꾼들이 떡하니 있는데 뭐 하러 헛심을 써요. 설령 정족상단만으로 가능하다 해도 황상이 싫어하실 거고요.”
“황상이 우리를 견제할 거란 말인가?”
“말이 나온 김에 좀 물을게요. 황상이 정족상단의 지분을 갖고 계신 건 아는데 그것만으론 불안하실 것 같거든요. 황상의 또 다른 패는 뭐예요?”
“…….”
백승무는 섬랑을 빤히 보다가 위진홍에게 시선을 돌렸다.
위진홍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고 섬랑을 응시했다.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물을 게 있다.”
“뭐죠?”
“지금껏 네가 말한 것들은 네 머리에서 나온 것이냐, 지마(智魔)에게 들은 것이냐?”
“지마가 누군데요?”
“천마신교 군사 나민.”
“아하, 그 아줌마의 별호가 지마였구나. 별걸 다 아시네요.”
“계속 농이나 할 거면 그만 나가거라.”
“딱딱하시긴. 평생 홀아비로 사시겠…… 지금 말하려고 하는데 왜 손을 내저어요?”
섬랑은 자세를 바로 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생각한 거예요.”
“네가 여기 온 건?”
“아줌마의 잔소리도 있고 마침 다들 여기 계셔서죠.”
“지마가 네게 본 상단과 접촉하라고 했다는 말이군. 하지만 사마련까지 손을 잡으려는 와중인 건 최근에야 알아서 네가 추측한 바를 말한 거고.”
“아까 했던 말 취소할게요. 아줌마와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사양하마.”
“아줌마도 그럴걸요. 은근히 마음에 품고 있는 분이 있거든요.”
섬랑이 투덜대든 말든 위진홍은 할 말을 했다.
“천마신교가 어떤 식으로 끼겠다는 말이지? 설득해 봐라.”
“중원에서만 돈과 물자가 돌면 뭐 하나요. 밖의 것들을 들여와야 더 윤택해지지.”
“장강을 이용해 서로의 것을 대량으로 교역하자는 말이구나.”
“역시 척하면 착이네요.”
“허나 아쉬운 건 네 쪽이야.”
신강은 변방 중의 변방이라 중원 물건이 귀했다.
서역을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거래하긴 하나 그래봐야 그 양이 얼마나 될까?
반면 중원 입장에선 크게 아쉬울 게 없었다.
신강에서 나는 건 중원에도 거의 있기 때문이었다.
섬랑 또한 이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다고 신강에 쓸 만한 게 아예 없진 않죠. 게다가 본교에서 주로 제안하려는 건 지금까지 문제가 많았던 서역과의 교역이에요.”
“계속해라.”
위진홍이 흥미를 보이자 섬랑은 싱긋 웃은 뒤 다른 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백가상단의 주력 사업 중 하나이니 뭐가 문제인지 잘 아시죠?”
백승무가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답했다.
“위험부담이 커서 상행을 하려는 이들이 한정돼 있고 그만큼 이문을 많이 붙이기 때문에 가격이 너무 높은 것일세.”
“만약 교역을 활발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물동량이 증가하니 가격이 내려가겠지. 자연히 많은 이들이 구매할 수 있게 될 테고.”
“가격이 내려간다고 상인이 손해를 볼까요?”
“전혀. 이때껏 유통된 양이 너무 적어서 날개 돋친 듯 팔릴 것이고 막대한 이득을 볼 게 분명하네. 물론 시간이 흐르면 어느 시점에서 수요량이 평행선을 그리다가 내려가기 시작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물량을 조절하면 될 일이지.”
“들여오는 것과 내다 파는 것 모두 그렇죠?”
“그렇네. 교역량을 늘릴 복안이 있는가?”
“당연하죠.”
“고견을 듣고 싶네.”
백승무가 몸이 달아서 묻자 섬랑이 어깨를 으쓱했다.
“간단해요. 본교가 허가하면 되는 일인데요, 뭐.”
“……그게 다인가?”
“네. 더 필요한 게 있나요?”
백승무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군.”
서역과 중원을 오가는 상인이 적은 가장 큰 이유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는데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선 고수가 동행해야 했다.
교역하려는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수의 숫자도 늘려야 했는데 그렇게 많은 고수가 있는 표국(鏢局)이 어딨겠는가? 필연적으로 거대 문파나 가문에 손을 벌려야 했고 신뢰하기 위해선 정파 무림에서 찾아야만 했다.
허나 천마신교가 자신들의 영역에서 정파 고수들이 오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리 있나.
이런 사정 때문에 불가능하다시피 한 일이었거늘 그걸 허가해 주겠다니, 백승무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호송하는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나?”
“네. 신강에서는요. 교주도 허락한 일이에요.”
“더없이 기쁜 소식이긴 하나 수많은 교도들을 전부 통제할 수 있는가? 분명히 반발하는 이들이 나올 텐데.”
“먼저 도발하지만 않으면 그럴 일은 없어요.”
“만에 하나를 따져야지.”
섬랑이 고개를 갸웃했다가 씨익 웃었다.
“일리가 있네요. 만약 명을 어기는 자가 생기면 확실한 본보기가 되게 만져줄게요. 귀 상단에 적절한 피해 보상도 해드리고요.”
“……!”
백승무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섬랑의 벽안을 스쳐 지나간 뜨거운 흑염 때문이었다.
반면 위진홍의 눈에는 차디찬 빛이 맺혔다.
“통행세를 올릴 셈이냐?”
“아뇨. 교역량이 늘면 통행세도 많이 거둘 수 있는데 뭐 하러요. 게다가 중원 물자를 풍족하게 얻게 되니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교역하는 이들을 죽여놓고 시비를 걸기에 그랬다고 발뺌하면?”
“그런 식으로 치면 본교도 귀측을 못 믿죠. 신강에서 빠져나가자마자 내분을 일으킨 뒤 본교에게 당했다고 거짓말할 수도 있잖아요.”
위진홍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런 바보짓을 하지는 않을 거라 믿으마.”
“저도요. 이왕 하는 거,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게 잘해봐요. 이제 된 거죠?”
상대의 배신을 우려해 결렬하기에는 너무 큰 건이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즉시 중지하면 복수는 일단 둘째치고 더 이상의 피해는 없을 것 아닌가?
하지만 백승무의 생각은 달랐다.
“군사, 나는 반대하오.”
위진홍이 눈살을 찌푸렸다.
“크게 보시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소.”
“잘 아오. 허나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정마대전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소. 그걸 어떻게 감당하실 것이오?”
“정 그러면 다른 방법도 있소.”
위진홍의 시선이 후위진을 향했다.
“련주, 귀련의 무인들을 투입할 수 있소? 응하면 그만한 대가를 챙기실 것이오.”
후위진은 맑은 눈으로 위진홍을 응시하다가 거절했다.
“그럴 만한 여력이 없소. 이십여 년 전에 본 피해를 아직도 복구하는 중이오.”
“무림맹이나 정의회가 기회를 틈타 장강을 넘을 것 같소?”
“관군도 있지. 만사는 불여튼튼이라 이럴 수밖에 없소. 계속 종용하면 아예 빠지리다.”
“…….”
위진홍이 이맛살을 모으자 섬랑이 위로했다.
“그럼 빠질 사람 빠지고 할 사람만 하죠. 그래도 이익이잖아요.”
“이제 와서 그러긴 아까워. 결국 방법은 단 하나군. 다소 손해를 보겠지만 어쩔 수 없지. 섬랑, 네가 말해라.”
“뭘요?”
“아까 풍류를 아는 이에게 고용할 수 있냐고 묻지 않았더냐? 입 밖으로 꺼낸 말을 행하기 좋은 때야.”
섬랑은 크게 깨닫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진짜 대단하시네. 아줌마와 정말 잘 어울려요.”
“농은 그만하고…….”
“진담인데 부끄러워하시긴.”
섬랑은 위진홍이 노려보자 슬그머니 낭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르신, 강호가 너무 평화로워서 어색하시죠?”
낭왕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긴 한데 네가 그러니 아닌 것 같기도 하군.”
“솔직해지시죠. 일이 없다시피 해서 온몸이 근질근질하시잖아요.”
낭왕이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전부 정광 그 녀석 때문이야. 그래도 동방장 그 녀석은 사정이 낫지. 불회당이라는 놈들과 관군에 붙어서 달자(韃子)들이나 해적 새끼들과 놀고 있는데 거기 낄 수도 없고.”
“불안하시기도 할 거예요. 이익을 위해 뭉친 세력을 유지하려면 일거리가 있어야 하잖아요. 더구나 어르신의 수하들은 낭인들, 역마살이 낀 사람들이 참아봐야 얼마나 더 참겠어요.”
“본론만 말해.”
“어르신께서 낭인분들을 이끌고 상인들을 호위하시는 건 어떨까요.”
낭왕이 으르렁거렸다.
“상인 나부랭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라고? 내가 미쳤냐?”
“가시면 낭인다운 일을 하시게 될걸요. 서역은 중원처럼 조용하지 않거든요. 항상 정세가 급변해서 싸움도 잦고 패잔병들이 무리를 이뤄 도적질도 많이 하죠.”
낭왕의 귀가 움찔했다.
“진짜?”
“네.”
“이거 영 의심스러운데. 그런 좋은 걸 왜 직접 안 하고 내게 권하는 거야?”
“저도 가까운 곳엔 몇 번 가봤는데 귀찮아서요. 보통 줄행랑을 치거나 그럴 여유도 없으면 싸우던 놈들끼리 뭉쳐서 결사 항전하는데 전쟁으로 커지기 일쑤죠.”
낭왕의 눈이 커졌다.
“저, 전쟁까지?”
“네.”
꿀꺽.
낭왕은 침을 삼키고.
섬랑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갔다.
“사실 처음 뵀을 때 낭왕 어르신이 맞는지 긴가민가했어요.”
“왜?”
“백마야 밖에 있지만 가죽 투구와 흉갑을 착용하지 않으셔서요. 수많은 종류의 병기들을 넣은 철사를 엮어 만든 광주리도 없고요. 그것들을 갖추고 전장을 말달리는 게 진짜 낭왕의 모습이잖아요.”
“……!”
낭왕의 눈에서 불길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