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37화 (537/569)

외전 18화

참초제근(斬草除根)

“싸우시려고요? 중원 사대 명루(名樓) 중 하나인 악양루를 무너뜨리면 역사에 악명을 남기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섬랑은 낭왕을 도발해 놓고 속으로 웃었다.

‘쓸데없이 살기는 왜 이렇게 뿌려? 어차피 치지도 못할 거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악양루를 믿어서가 아니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신분 때문이었다.

예전보단 이빨이 조금 빠졌으나 중원의 젖줄인 장강을 관리하는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 수왕과 천하에서 손꼽히는 거대 상단으로 우뚝 선 백가상단의 단주이자 그 엄청난 부를 아낌없이 베풀어 민초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금군(金君) 백승무, 정도명문 남궁세가의 군사이며 천하를 삼분한 정의회(正義會)의 이인자인 만뇌(萬腦) 위진홍에 낭왕 본인의 아들이자 장강 이남을 다스리는 사마련의 수장 후위진까지.

더구나 백승무는 곤륜 속가 제자라 무림맹과도 각별한 관계였다.

이렇게 쟁쟁한 거물들이 싸움에 휘말려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중원이 발칵 뒤집힐 터.

모든 세력이 서로를 의심하고 탓하다가 결국 시산혈해를 이루는 격전을 벌이리라.

이런 내분이 일어날 게 뻔한데 미쳐도 보통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손을 쓰겠는가?

허나 낭왕은 남달랐다.

“그런 걸 꺼렸으면 낭인 짓도 안 했지. 잘 가라.”

도갑에 갇혀 있던 곡도(曲刀)가 뛰쳐나와 눈이 시릴 만큼 차가운 섬광을 토했다.

난다 긴다 하는 고수라 할지라도 영문도 모른 채 목이 잘릴 만한 놀라운 쾌도!

하지만 섬랑은 당황하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광인이 득실거리는 천마신교에서 나고 자랐기에 나온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의 벽안(碧眼)이 암청색으로 물들고 허리춤에서는 두 줄기 흑광(黑光)이 솟구쳤다.

마도제일야장들이 모인 이녕임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섬랑의 신삼신기(新三神器) 중 쌍룡(雙龍)이 중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열십자(十字)로 엇갈린 쌍단봉이 곡도와 부딪혔다.

쩌엉!

충돌의 여파는 대단했다.

머리털이 세차게 휘날릴 정도로 강한 바람과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이 장내를 휩쓸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병기를 맞댄 채 이죽거렸다.

“진짜 치사하시네. 이게 무슨 행패예요?”

“정말 치사했으면 작별 인사도 안 했어. 너야말로 뭐 하는 거냐? 기다렸다는 듯 받아치기나 하고.”

“어르신에 대해 들은 얘기 중에 어디 좋은 게 있어야죠.”

“누가 할 소리를. 그게 천마신교 소교주씩이나 되는 녀석이 할 말이냐?”

“성품은 비긴 거로 하고. 무공은 제가 낫네요. 이제 됐죠?”

“둘 다 내가 뛰어나. 그리고 이제부터다.”

낭왕은 이대로 끝낼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섬랑이 회합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었는데 한순간의 방심으로 놓쳐 버려 개망신을 당하지 않았는가.

‘정말 방심해서 그랬는지 확인해 볼까.’

낭왕은 단전에 쌓여 있는 막대한 내공을 끌어 올리며 곡도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상대의 중심을 흔든 뒤 일격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섬랑은 한술 더 떴다.

마혼을 개방해 두 눈은 물론이오, 전신에서 흑염을 뿜으며 쌍룡을 세차게 내질렀다.

순간 힘에서 밀린 낭왕은 한 걸음 뒷걸음치는가 싶더니 바로 균형을 잡으며 기합을 질렀다.

“파(破)!”

마치 기합에 화답하듯 쌍룡과 손가락 하나 크기 정도 떨어졌던 곡도가 그 짧은 거리를 질주해 무시무시한 힘으로 쌍룡을 후려쳤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익히는 기본기로 치부되곤 하나 제대로 펼치는 이는 없다시피 한 촌경(寸勁)이었다.

콰앙!

하지만 섬랑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폭음이 터지는 순간 양손에 쥔 쌍룡으로 기묘한 원을 그렸다.

그러자 열십자로 엇갈려 있던 단봉 중 하나가 낭왕의 곡도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콰가가각-

쇠와 쇠가 서로를 긁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다른 단봉이 바람을 가르며 낭왕의 옆구리를 노렸다.

후우우웅-

넉 냥의 힘으로 천근의 힘을 흘리는 사량발천근(四量發千斤)의 기예와 아무런 허식도 없어 그 무엇보다 빠르고 강한 일격이 어우러진 절묘한 수였다.

‘……!’

섬랑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응에 낭왕의 팔등에 소름이 돋았다.

아까 방심해서 놓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섬뜩한 느낌과 함께 짜릿한 쾌감이 솟았다.

더없이 평화로운 요즘 세상에 이런 상대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인가.

귀중한 기회이니만큼 제대로 놀아야지.

밀려나는 곡도에 힘을 줘서 회수하긴커녕 오히려 그 흐름에 순응해 옆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간발의 차이로 옆구리를 박살 내려는 단봉을 피하고 쇄응십팔연환도(殺鷹十八連環刀)를 펼쳐 주도권을 되찾으려고 하는 그때.

‘음?’

낭왕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섬랑이 쌍단봉을 허리춤에 꽂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 아닌가!

심지어 눈조차 원래의 벽안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꼬마, 지금 뭐 하는 거냐?”

“역시 낭왕이라 불리실 만해서요. 여기까지만 하죠.”

“어허. 섭섭하게 왜 이래. 제대로 놀아봐야 확실히 알지.”

“국을 전부 마셔야 맛을 아나요? 간만 보면 되지. 게다가 대충 하시던데 더 해서 뭐 해요.”

“그야 어쩔 수 있나. 나도 자네처럼 풍류를 아는 사내인데 황궁에 불을 지르면 모를까, 악양루를 훼손하긴 그렇지.”

“다른 분들이 다칠까 봐 그러신 게 아니고요?”

“여기 그렇게 약해빠진 놈이 어딨다고. 다들 멀찍이 물러서 있는 거 안 보여? 제 몸 하나는 거뜬하게 건사하고 있잖아.”

거뜬하긴 개뿔.

낭왕의 말은 반만 맞았다.

수왕이야 멀쩡했지만 후위진은 의복이 흐트러져 있었고 백승무는 머리를 단정히 묶었던 끈까지 끊어져 산발이 된 상태.

의외인 건 무공을 전혀 모르는 위진홍이었다.

양 팔뚝을 가슴 앞에 붙인 채 전신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며 한 자 정도 떠올라 있었는데 그를 중심으로 세찬 선풍이 휘돌았다.

섬랑이 그 기이한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

“정말 멋지네요. 어떻게 하신 거죠? 사파의 술법인가?”

그럴 리가.

과거 남궁화운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났을 때 정광의 충고를 듣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특정한 자세를 취하면 진(陣)이 발동되도록 몸에 문신을 새긴 것이었다.

천하에서 본인과 정광만 아는 비장의 수를 남들에게 보여줬으니 기분이 좋을 리 있나.

위진홍은 싸늘한 눈으로 낭왕을 노려봤다.

“이 일은 잊지 않겠소.”

낭왕이 고개를 슬며시 돌리며 변명했다.

“너무 그러지 마.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섬랑, 너도 마찬가지다.”

“이거 왜 이러세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네가 난데없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야.”

낭왕이 ‘옳다구나!’ 하며 맞장구쳤다.

“잘 들었지? 전부 섬랑 너 때문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나가서 놀아보자.”

“설령 그게 사실이라 쳐도 그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그러세요.”

“아 좀 나가자고. 무슨 놈의 마인이 이래? 피를 보고 싶지 않아?”

낭왕이 애가 달아 보챘으나 섬랑은 요지부동이었다.

“피를 보더라도 정도껏 이어야죠. 제 일행이 올 때가 됐는데 싸우는 모습을 보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걸요. 그럼 바로 마정대전(魔正大戰)이에요.”

아니나 다를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섬랑은 혀를 차며 창가 쪽으로 다가가 크게 외쳤다.

“여긴 평화로우니까 싸우지 말고 서로 인사나 하세요!”

연규서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고 단성오는 분기탱천해서 소리쳤다.

“소교주! 속하들을 떼어놓고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이관휘도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섬랑!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인가! 어서 말해보게!”

악양루를 둘러싸고 경계하다가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올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던 정파인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소교주에 섬랑이라니! 설마 마교? 말도 안 돼! 언제 어떻게 숨어들어 간 거야?”

“명을 기다릴 때가 아니다! 사악한 무리를 쳐라!”

사파인들도 광분했다.

“간악한 위선자 새끼들!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닥치는 대로 죽이고 련주를 보호해!”

천마신교도 지지 않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묵영대 이조! 절멸추형진(絶滅錐形陣)으로 삼 층까지 돌파한다!”

“존명!”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들러 탁월한 시문을 남긴 악양루가 정사마(正邪魔)의 충돌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할 상황.

이 지경이 되자 백승무와 후위진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오해외다! 모두 무사하오!”

“그만! 본좌의 허락 없이 누가 움직이는가!”

섬랑도 거들었다.

“마정사(魔正邪)의 거두들이 천하의 대세를 논하는데 뭐 하는 거야? 거기서 쉬고 있어!”

“……!”

피를 보기 직전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힌 세 세력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사마련이야 그렇다 쳐도 마교가 뭐?’

‘위군자 놈들이야 일단 넘어가도 마귀들이 왜?’

‘소교주가 드디어 미쳤구나!’

정파와 사파는 가는 길이 달라도 같은 중원에서 몸을 부대끼며 사는 사이지만 천마신교는 그들과 물과 기름처럼 영원히 섞일 수 없는 관계 아닌가?

어이없어하는 건 악양루 삼 층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백승무가 떡 벌리고 있던 입을 억지로 움직였다.

“이보게, 소교주. 그게 무슨 말인지 설명 좀 해주겠나?”

“당연히 그래야죠. 모여서 얘기하죠.”

섬랑은 원탁에 앉아 손짓했다.

“뭐 하세요? 어서 오시지 않고.”

다들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데 위진홍이 모으고 있던 팔뚝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빛과 바람이 사라지며 그의 신형이 바닥에 떨어졌다.

“일단 들어보지.”

위진홍이 의자에 앉아 섬랑을 노려보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 한 자리씩 차지했다.

섬랑은 그들을 한번 둘러보고 진지하게 물었다.

“호남성 미곡 건으로 만나신다고 들었는데 아니죠?”

수왕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렇게 단순한 일이면 굳이 낭왕 어르신이 행차하실 필요가 없죠. 정족상단 분들이 중간에 따로 논의하고 사마련주님과 신경전을 펼칠 리도 없고요.”

맑은 눈으로 섬랑을 지그시 보고 있던 후위진이 입을 열었다.

“시간 버릴 것 없이 자네가 추측한 바를 말해보게.”

섬랑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부럽지 않은 부를 쌓은 정족상단이 대척점에 서 있는 사마련과 논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장강 이남의 물자를 장강을 이용해 천하 곳곳에 파는 것밖에 더 있나요.”

못마땅한 얼굴로 듣고 있던 낭왕이 한숨을 쉬었다.

“누가 그놈이 거둔 녀석 아니랄까 봐 머리가 잘도 돌아가는군. 역시 죽이는 게 낫겠어.”

수왕도 동의했다.

“손을 대려면 반드시 참초제근(斬草除根) 해야 해. 밖에 있는 놈들은 내가 맡지.”

낭왕이 콧방귀를 뀌고 눈을 부라렸다.

“영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도 몰라? 나와 함께 이 녀석을 상대해야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더니 갑자기 무슨 소리냐?”

“싸우는 것과 죽이는 건 다르니까. 잠깐 놀아보니 물러서지는 않되, 흘릴 줄은 아는 녀석이야.”

낭왕의 눈이 번들거렸다.

“이게 무슨 말이냐. 죽이려면 나도 어느 정도의 손해는 각오해야 한다는 얘기지. 그런데 그 틈을 노리고 영감이 덤비면 귀찮아지잖아.”

“여전히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영감만 할까. 지겨우니 그만 좀 죽지 그래?”

두 사람이 서로를 쏘아보며 살기를 일으키자 섬랑이 말렸다.

“그만하세요. 대사를 앞두고 뭐 하시는 거예요. 싫으시면 나가서 싸우시고요.”

두 사람의 살기가 섬랑을 향했다.

“한쪽에서 조용히 즐기다가 간다더니 아까부터 뭐 하는 거야? 그냥 죽여 버려?”

“아무래도 그러고 시작하는 게 낫겠군.”

섬랑이 반대했다.

“성격 급하시긴. 일단 들어보기나 하세요.”

백승무가 급히 끼어들었다.

정광과 연이 있는 자를 죽게 할 순 없어서였다.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나? 상세히 말해보게.”

섬랑이 씩 웃으며 답했다.

“그 사업, 본교도 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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