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36화 (536/569)

외전 17화

사해(四海)가 동도(同道)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두 번째 불청객에게 쏠렸다.

쏟아지는 시선들이 어찌나 강렬한지, 적의(赤衣)를 입은 대단한 미청년은 천천히 한 걸음 물러나 무겁게 경고했다.

“남색(男色)은 관심 없으니 적당히 보시죠.”

이 중요한 자리에 불쑥 나타난 주제에 뭐가 어째?

실로 어이없는 말이었으나.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첫 번째 불청객은 파안대소하며 반겼다.

“으하하하. 뻘쭘하던 참에 잘 왔다. 용모도 그렇고 언행도 그렇고, 네가 그 유명한 섬랑이지?”

미청년은 잘생긴 노인을 보며 고개를 까닥했다.

“그렇긴 한데 누구시죠?”

“어허. 맨입으로 물어보면 쓰나.”

“먼저 그래놓고 박하시기는. 됐어요.”

“아, 어서. 맞추면 살려서 보내줄게. 구미가 당기지?”

노인이 허리춤에 찬 곡도(曲刀)를 쓰다듬으며 을러대자 섬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짜고짜 협박하시는 걸 보면 좋은 분은 아니시네요.”

노인이 작게 탄식하고 충고했다.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 나는 사람은 진국인데 말주변이 없는 편이라 지금처럼 오해를 받곤 하거든.”

“그 오해를 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거고요. 맞죠?”

“꼭 그런 건 아니지. 실력이 받쳐주면 뭘 못할까. 너와 말본새가 비슷한 녀석이 있었는데 종적이 묘연할 뿐 누구보다 잘살고 있을걸.”

노인이 혀를 차자 섬랑이 창가 자리에 앉으며 웃었다.

“하하. 제 실력도 제법이니 다행이네요. 어르신, 이리 오셔서 술이나 한잔하시죠.”

섬랑이 봇짐에서 술병을 꺼내 흔들어 보이기까지 하자 노인은 냉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실력은 일단 넘기고. 처세술은 제법이구나.”

“소싯적에 눈칫밥을 먹고 자란지라. 거물들께서 대사를 논하시는 데 방해하면 되나요. 낭왕(浪王) 어르신도 환영받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외로운 사람끼리 놀죠.”

“이거 왜 이래. 너만큼은 아니거든. 근데 나를 어떻게 알아본 거야?”

“말투와 성품요. 밖에 백마까지 있었으니 뻔하잖아요.”

섬랑은 술잔도 두 개 꺼내 술을 가득 따르고 권했다.

“쭈욱 드시죠.”

낭왕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술을 들이켜고 눈을 크게 떴다.

“어라?”

섬랑도 술을 삼킨 뒤 물었다.

“왜요?”

낭왕이 빈 잔을 탁자에 탁 놓으며 감탄했다.

“천하를 돌며 안 마셔본 술이 없거늘, 백주(白酒)치고는 상당히 상큼하잖아. 뭐야 이거?”

“신강에서 가져온 거예요.”

“마인들은 사람만 잘 죽이는 줄 알았는데 술도 꽤 빚네.”

“천산산맥(天山山脈)에 쌓여 있는 만년설을 써서 그래요.”

“추운 보람이 있는 곳이군. 쩨쩨하게 잔으로 주지 말고 병째로 줘.”

섬랑은 빈 잔을 채워주며 달랬다.

“지금은 이것밖에 없으니 천천히 드세요.”

“망할. 다음에 올 때는 몽땅 가져 와.”

“그러려면 손이 많아야 하는데. 중원 사람들이 싫어할걸요.”

천마신교 마인들이 떼로 몰려오면 누가 좋아할까.

허나 낭왕은 아니었다.

술을 호쾌하게 삼키고 빙긋 웃었다.

“넓게 봐야지. 나는 좋아. 일거리가 많아질 것 아냐. 더구나 전장에서 마시는 맛은 각별하거든.”

“풍류를 아시네요. 우리가 고용할 수도 있어요?”

“조건만 맞으면.”

섬랑이 손뼉을 짝 치고 술을 듬뿍 따랐다.

“과연. 시원시원하신 게 아주 뼛속까지 낭인이시네. 한 잔 더 드시죠.”

“그래, 소소하게나마 달려보자. 신강에도 낭인이 있어?”

“낭인이라 하긴 뭐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며 기분에 따라 칼질하는 자들이야 쌔고 쌨죠.”

“역시 재밌는 곳이네. 자세히 좀 말해봐.”

“예를 들면…….”

두 사람은 자신들만 있는 것처럼 흥겹게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졸지에 소외된 다른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한 사람을 주시했다.

이번 회합의 주최자인 위진홍이었다.

위진홍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제안했다.

“우선 사실 확인부터 합시다. 련주, 낭왕이 사마련에 입단하셨소?”

“아니오.”

“그런데 왜 외인과 함께 온 것이오?”

사마련주 후위진이 담담히 답했다.

“외인이 아니라 부자지간이오. 아버님이 자식이 걱정되어 따라오신다는데 어찌 막겠소.”

“그건 여느 사람 얘기고.”

위진홍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낭왕이 언제부터 응담후가(鷹潭后家)에 신경을 썼다고 이러는지. 기사가 따로 없소이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가문을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살던 자가 이제 와서 아들을 위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후위진은 달랐다.

고개를 젓고 찬찬히 설명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듯이 나이가 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소.”

섬랑과 얘기하고 있던 낭왕이 갑자기 ‘섬랑아,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궁금하지? 아직 팔팔한데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잠깐 들른 거야’라고 떠들었으나 후위진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자고로 부모는 문서 없는 노비라 했소. 자식을 위해 한평생 온갖 고생을 다 하는 건 물론이오, 본인 목숨조차 초개와 같이 버리는 게 당연하오.”

“……지금 귀하의 부친이 거기까진 아니라고 은근슬쩍 항변하고 있소만. 안 들리시오?”

“내 귀는 아주 멀쩡하기에 잘 듣고 있소.”

순간, 저쪽에서 들려오던 낭왕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반면 후위진의 입에선 한껏 힘이 실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허나 그건 본심이 아니외다. 어느 부모가 자신의 희생을 내세우겠소? 이렇듯 천륜이란 끊을 수 없는 것. 부자가 함께함이 마땅하니 더 이상 책잡지 마시오.”

위진홍이 싸늘하게 응수했다.

“사파무림의 현인이라더니 과연. 마치 도덕군자 같소.”

“천륜이 정파인에게만 적용된다 생각하오? 사파인도 사람이외다.”

후위진의 말은 논리정연했고 명분도 확실했다.

문제는 아무도 그걸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위진홍은 소리 없이 탄식하는 낭왕을 힐끗 보고 결론을 내렸다.

‘아들에게 약점이라도 잡혀서 끌려왔나 보군.’

그게 무엇인지도 짐작이 갔다.

‘낭왕이 어려워하는 사람은 단주를 제외하면 단 한 명밖에 없어.’

바로 후위진의 어미이자 낭왕의 아내인 여인이었다.

‘가문을 버린 주제에 아내에게만큼은 간간이 들러서 얼굴을 비춘다고 했지.’

그녀가 병석에 누워 있다가 얼마 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남편에게 아들을 도와달라는 유언이라도 남긴 것이리라.

‘낭왕의 성격상 죽을 때까지 그래 달라고 했으면 아무리 아내의 유언이어도 벌써 내뺐을 테고. 그 기간이 문제인데.’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위진홍은 후위진에게 양해를 구했다.

“련주, 잠시 우리끼리 논의 좀 하겠소.”

후위진이 선선히 자리를 피해줬다.

“그러시오.”

“수왕(水王),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게 내공을 펼쳐주시오.”

이제껏 못마땅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수왕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네 말투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구나.”

저쪽에서 낭왕이 ‘내 말이!’라며 맞장구쳤으나 위진홍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나아졌잖소.”

“한 번 나아졌는데 또 나아지지 못할까.”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니 더 장수하시오.”

살아온 세월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주름으로 뒤덮인 수왕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위진홍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공사를 혼동할 때가 아니오. 어서 일 얘기를 합시다.”

수왕이 내공을 펼쳐 주위에 무형의 막을 두르고 쏘아붙였다.

“네 능력을 봐서 참는 거다. 일을 하다 한 번만 삐끗하면 비참하게 죽여주마.”

“그런 날은 안 올 것이오.”

위진홍은 수왕에게 오늘 회합의 진정한 의의를 설명하고 덧붙였다.

“역시 동요하지 않으시는군. 대충 짐작하고 계실 줄 알았소.”

“짐작과 확신하게 되는 것은 천양지차지.”

수왕이 살기를 일으키자 위진홍이 해명했다.

“황상이 비밀을 엄수하라 해서 어쩔 수 없었소.”

“그를 내세워 겁박할 셈이냐? 무림맹에 사마련까지 더하다니.”

“사업이 확장되니 이득은 더 커질 것이오.”

“내 몫을 양보할 생각은 없어.”

“나도 많은 몫을 떼줄 의향은 없었소만 사정이 달라졌소.”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위진홍은 수왕과 백승무를 번갈아 보며 조금 전에 생각한 바를 얘기하고 경고했다.

“낭왕은 말 그대로 낭인의 왕. 낭인들이 사마련을 도우면 천하 세력 구도에 급격한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소.”

수왕은 한쪽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후위진을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저런 놈이 현인이라니 가당치도 않군. 음흉한 모사꾼이야.”

“사마련이야 무림맹, 정의회, 장강수로십팔채에 관군까지 합세하면 금세 무너뜨릴 수 있으나 사마련주가 낭왕을 끌어들였으니 얘기가 달라졌소. 단주는 어찌 생각하오?”

백승무도 동의했다.

“놀라운 기동력을 가진 낭인들을 소탕하려면 오랫동안 골치를 썩여야 할 것이오.”

수왕이 의문을 표했다.

“낭왕이 황실과 맞설 것이라 확신하느냐?”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밀약(密約)의 난(亂) 때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때는 낭왕이 지은 죄가 있어 황실의 뜻에 따랐으나 이번은 그렇게 볼 수 없지요. 신나게 날뛰다가 악에 받치면 아예 외세에 붙을지도 모릅니다.”

“네 사형이 있으면?”

“눈앞에 나타나면 모를까, 굽힐 위인이 아닙니다.”

수왕이 인상을 쓰면서도 아무 말 못 하자 위진홍이 정리했다.

“싸워봐야 손해요. 일단 협상해 봅시다.”

결국엔 승리하겠지만 사업에 큰 지장이 생길 터, 수왕 입장에서 민초들의 고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나 금전적인 타격은 뼈아팠다.

“최대한 적게 떼줘야 해.”

“나도 그러길 원하오.”

수왕이 펼쳤던 내공을 거뒀다.

후위진이 제자리로 돌아와 위진홍을 응시했다.

위진홍은 눈을 맞추다가 대놓고 물었다.

“련주, 그 천륜은 언제까지 유효한 것이오?”

후위진은 맑은 눈으로 위진홍을 지그시 보다가 입을 열었다.

“천륜에 유효 기간이라니. 이해가 안 가오.”

“귀련에 적절한 몫을 배분하려면 알아야 하오.”

“호남성 미곡(米穀) 시세야 뻔하지 않소?”

“단단히 준비해 왔으면서 자꾸 말을 돌리지 마시오.”

후위진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상대가 만뇌(萬腦)인데 쓸데없는 짓을 했군.”

“알았으면 이제 안 할 거라 믿겠소.”

“얘기를 끝까지 들으시오. 나는 솔직히 털어놓고 싶으나 외인이 있어 곤란…….”

후위진은 말끝을 흐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 외인이 어느새 옆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는 것 아닌가!

“하하. 사해(四海)가 동도(同道)인데 외인이라뇨. 편하게 말씀하세요.”

“……!”

원탁에 둘러앉아 있던 모든 이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심지어 수왕까지!

하지만 섬랑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나저나 부전자전이라더니 아버님과 많이 닮으셨네요.”

그 아버님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가와 섬랑의 뒤에 섰다.

“사람 무안하게 말도 없이 가버리면 쓰나.”

“같이 오실 줄 알았죠.”

“혀만큼 무공도 제법이구나.”

“칭찬 감사해요.”

“칭찬 정도가 아니야.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거든.”

“그럼 영광으로 바꾸죠.”

낭왕의 전신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가 솟구쳤다.

“손을 섞어보면 칭찬이 아니라 칭송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일어서.”

섬랑이 뒤를 돌아보며 사양했다.

“그렇게까지 원하지는 않는데. 지금이 딱 적당해요.”

“그럼 앉은 채로 죽어라.”

“싸우시려고요? 중원 사대 명루(名樓) 중 하나인 악양루를 무너뜨리면 역사에 악명을 남기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런 걸 꺼렸으면 낭인 짓도 안 했지. 잘 가라.”

낭왕의 허리춤에서 섬광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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