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마군(魔君)
섬랑이 막무가내로 어서 독이나 달라고 보채자 당오군은 냉정하게 따져봤다.
‘자신이 있으니 이렇게 적은 수하를 이끌고 중원에 왔을 것이라 짐작했건만, 생각보다 더해.’
청성의 세가 아무리 약해졌다 해도 우공은 장문인 아닌가?
그런 우공을 입으로 농락하다가 마기만으로 승복하게 하다니, 오만하기 그지없는 언행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허나 독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지.’
조금 전 개방 후개 유정풍이 지적했듯이 독이란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해도 꺼릴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천하에서 유일한 예외였다.
당오군은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전 정광 아우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한 재주가 있네.”
섬랑이 작게 한숨을 쉬고 위로했다.
“저런. 많이 창피하셨겠어요.”
“솔직히 그랬지. 그런데 정광 아우가 그러더군. 당가에도 독기를 몰아내는 운기법쯤은 있지 않으냐, 그걸 발전시키면 되는데 설마 당가가 그것도 못하겠냐고.”
“아. 주즉시공(酒卽是空) 말씀하시는 거예요? 말이 쉽지, 그런 비기를 창안하는 건 힘들죠.”
“자네 말대로였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됐어. 자네는 어떻나?”
섬랑이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애쓸 필요 있나요. 배운 걸 쓰면 되지.”
“역시 그랬군. 정마대전(正魔大戰)이 또 벌어지면 힘들어지겠어.”
당오군의 얼굴이 굳자 섬랑이 싱긋 웃었다.
“마정대전(魔正大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인의 당부도 있었고 저는 평화주의자거든요.”
“……잘못 들은 것 같네만. 뭐라 그랬나?”
“잘 들으신 것 같은데요. 설령 싸움이 일어나도 그래요.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인품에 문제가 있는 이에게는 전하지 않…… 아니지, 그럼 전수할 녀석이 없잖아. 저는 대인께서 주신 걸 아무에게나 나눠줄 만큼 헤프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당오군은 더 서늘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즉시공을 익힌 이에게 독이 무슨 소용인가? 승패가 뻔한 대결을 해서 본가에 모욕을 줄 셈인가?”
“비약이 심하네요. 단지 맛보고 싶은 것뿐이에요. 깔끔하게 제일 강한 놈으로 주시죠.”
“그럼 자네가 이미 복용했고 이겨냈다 치세.”
“네? 왜요?”
“수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만든 소중한 독을 낭비하긴 싫네. 잘 가게나.”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라고?
섬랑은 오기가 솟았다.
“알뜰하시기는. 그러면 돈으로 사죠. 얼마면 되는데요?”
제대로 된 독은 영약만큼 비싼 법.
당오군이 금액을 말하자 섬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망할. 당장 거지가 되겠네.”
이미 거지인 유정풍이 조언했다.
“거지라는 게 보기보다 쉽지 않은 직업일세. 몸에도 안 좋은 것을 굳이 먹어가며 힘든 길을 걸을 이유가 없지 않나?”
아미파 장문인 한성도 타일렀다.
“아미타불. 자네가 그런 몰골로 신강에 돌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게. 우리가 자네를 핍박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어. 그러면 귀교에서 가만히 있겠는가? 자칫하면 천하에 피바람이 불게 될 터. 천하를 위해서라도 그만 떠나시게.”
유정풍의 말도 한성의 충고도 확실히 일리가 있었는데.
섬랑은 기분이 나빠졌다.
“저기요, 왜 세 분 모두 똑같은 전제를 깔고 말씀하시죠?”
당오군이 대표로 물었다.
“무슨 말인가?”
“주즉시공요. 왜 제가 그걸 쓸 거라고 확신하시냐고요.”
당오군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것 없이 본가의 독을 먹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을 거라 믿어서네.”
“그냥 먹으면 되지, 뭘 또 만용씩이나.”
“진심인가? 주즉시공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원래는 내공으로 상대하다가 정 안 되면 쓸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천마신교 소교주가 주즉시공으로 독을 몰아내고 으스대려다가 당가에서 돈이라도 내고 그러라 하니 꽁무니를 뺐다는 소문이 퍼질 텐데 어찌 물러날까.
“물론이죠.”
“……!”
섬랑의 당당한 선언에 당오군은 물론이오, 유정풍과 한성도 경악했다.
심지어 경악한 걸 넘어 분노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으니.
연규서가 섬랑을 쏘아보며 살벌하게 웃었다.
“하하하. 아미산 아래에서 워낙 과음하신 탓에 아직도 술이 덜 깨셨군요.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어서 취소하십시오.”
단성오도 섬랑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을러댔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속하도 곤란하게 만들어 드리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이왕이면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기분 좋게 가시지요.”
섬랑은 연규서의 시선은 고개를 돌려 피하고 단성오의 얼굴은 손바닥을 들어 밀어냈다.
“취기 따윈 전혀 없고 얼굴 붉힐 일도 없어.”
두 사람이 반박하려 했으나 섬랑이 더 빨랐다.
“너희까지 나를 못 믿으면 쓰나. 대답해 봐, 내가 누구지?”
“……!”
두 사람은 섬랑을 노려보다가 자세를 바로 하며 단호히 말했다.
“장차 본교의 지존이 되실 소교주이십니다.”
“천하제일인이 될 거란 건 왜 빼?”
섬랑은 가볍게 투덜대고 당오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즉시공을 안 쓰면 공짜죠?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주세요.”
“……자네가 잘못되면?”
“그럴 일은 없는데.”
섬랑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활짝 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되어도 본교가 당가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게 할게요. 제 의지고 제 책임인데 누굴 탓해요.”
“……!”
더없이 당당한 태도와 진심이 가득 담긴 말에 한성과 유정풍은 크게 감탄했다.
‘아미타불. 마교 소교주에게 이렇게 광명정대한 면이 있다니. 천하의 홍복이구나.’
‘허어. 가벼운 언행 속에 이런 진중함이 숨어 있을 줄이야. 정광 아우가 거둘 만한 인재야.’
당오군도 정광을 떠올리고 정광이 입버릇처럼 하곤 했던 말을 입에 올렸다.
“그럼 문서로 남겨주게.”
“네?”
천하의 그 누구보다 당당했던 섬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네요. 상인도 아니고 무인이 무슨 놈의 문서를.”
“오해가 생겨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선인의 발자취를 뒤따른다고 했지? 마침 그 선인도 항상 이래왔네.”
정광까지 들먹이는데 어쩔 수 있나.
섬랑은 태연히 말했다.
“까짓거, 쓰면 되죠. 지필묵이나 주세요.”
“자네 손닿는 곳에 있네만.”
“아, 그러게요. 여기 있었네.”
섬랑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탁자 한쪽에 있는 붓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일필휘지로 글을 썼다.
힘찬 기세에 어울리지 않는 악필이었다.
당오군은 물끄러미 보다가 칭찬했다.
“정광 아우보다 나은 점도 있군.”
“더 있는데 차차 보여 드리죠. 다 썼어요. 이제 됐죠?”
“내용은 괜찮은데 수결(手決)을 둬야지. 지장(指章)도 찍고.”
“……하아아. 까다로우시긴.”
똑같은 문서가 두 장 완성됐다.
당오군은 한 장을 소중히 챙기고 문 앞에 있는 무인에게 명했다.
“소교주가 본가 제일의 독을 맛보길 원하니 어서 가서 전하게.”
“네, 가주.”
무인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섬랑은 할 일이 없어 두리번거리다가 한 사람을 보고 의아해했다.
“측간이라도 가고 싶으세요? 안색이 왜 그러세요?”
얼굴이 창백해진 유정풍이 억지로 웃었다.
“으하하하. 원래 이랬거늘 무슨 소리인가.”
“땟국물이 짤짤 흐르던 얼굴이 하얘졌는데. 아! 전대 독존께서 오셔서 또 지팡이질 하실까 봐 그러시는구나.”
“응? 그분이 오신다고?”
“당가 제일의 독을 가져오실 분이 그분밖에 더 계세요?”
“휴우우. 난 또 뭐라고. 당대에 독을 제일 잘 다루는 이는 다른 사람일세.”
“하긴. 아까 보니 오늘내일하시더라고요. 그럼 새로 독존이 되신 태상가주님이시겠네요.”
유정풍이 당오군을 슬쩍 보자 당오군이 설명했다.
“소교주, 큰 비밀도 아니니 말하겠네. 아버님께선 지금 무림맹에 가 계시네.”
“점점 재밌어지네요. 그럼 대체 누구…… 아하. 지금 오고 계신 분이구나. 생각보다 고수는 아니신데. 누구시죠?”
곧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섬랑은 그녀를 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혜진 소저에게 전혀 안 밀리시네요. 독봉(毒鳳)이라고 불렸던 분 맞으시죠?”
당예지는 섬랑을 응시하며 차갑게 답했다.
“나는 그 별호를 좋아하지 않네.”
“과연. 냉봉(冷鳳)이 더 어울릴 것 같긴 하네요.”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으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겠지만 당예지는 섬랑을 유심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대로군. 단주가 택할 만해.”
“저에 대해 많이 들으셨어요?”
“처소에 틀어박혀 독 연구에 매진한 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눈과 귀를 닫고 산 건 아닐세. 단주가 자신과 닮은 이를 거두었어.”
섬랑의 어깨가 위로 올라갔다.
“안목이 있으시네요.”
“아까 들었는데 단주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게 맞는가?”
“물론이죠.”
“잘됐군, 정말 잘됐어.”
“네?”
당예지의 차가운 눈에 묘한 열기가 어렸다.
“내가 백아(伯牙)라면 단주는 종자기(鍾子期)였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기꺼이 응해줬어. 그런 그와 똑같은 길을 걸으려고 하는 이가 이렇게 나타났는데 어찌 좋아하지 않겠나?”
정말 기쁜지 당예지는 희미한 미소까지 지으며 섬랑에게 다가갔다.
섬랑은 살짝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대, 대인은 대인이고 저는 저죠. 너무 동일시하지 마세요.”
“그 정도는 인지하고 있으니 안심하게나.”
“그것참 다행이네요.”
“본가 제일의 독을 맛보길 원한다고 했지?”
“네. 그런데 너무 가까이 오신 것 같은데요.”
“그럴 수밖에.”
당예지는 섬랑 바로 앞에서 멈추더니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꺼냈다.
그 손에는 손가락 한마디만 한 작은 병이 들려 있었다.
“받게나.”
“이, 이게 뭐죠?”
“자네가 원한 것. 본가 제일의 독, 진합만향(塵合萬響)일세.”
진합만향은 오래전 정광이 진합다향(塵合多響)을 복용하고 조언했던 내용을 참고해서 극도로 개량한 것이었다.
“이치는 전의 것과 대동소이하네. 사소한 것들을 모아 다양한 효과를 내도록 한 것인데 다향(多響)에서 만향(萬響)으로 바뀌었다고 자부할 만큼 다채롭고 강한 독성을 지닌 독으로 탈바꿈시켰으니 안심하고 들이키게나.”
섬랑의 입이 열리는 대신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꿀꺽.
안심하긴 개뿔, 겁이 더럭 나는 얘기 아닌가?
섬랑이 말없이 병을 바라보기만 하자 당예지가 이맛살을 모았다.
“혹시 내 말을 못 믿는 것인가? 이제껏 혼인도 안 하고 노력한 결정체일세.”
섬랑은 과장되게 손뼉을 치며 유정풍을 비난했다.
“유 대협! 당 소저께서 홀로 가시밭길을 걸으시는 동안 뭐 하신 거예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는 법, 사부께 개처럼 얻어맞든 말든 개방에 속가를 만들고 속가 제자가 되어서 혼인을 하셨어야죠.”
당예지는 그제야 안색이 시커멓게 죽은 유정풍을 발견했다.
“유 대협, 언제 오셨습니까?”
“아, 아까 왔소이다.”
“청혼은 몇 번이나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동료로 남고 싶으니 앞으로 다시는…….”
유정풍이 급히 말을 끊었다.
“와하하하! 그건 차차 얘기하면 되는 것이고 여기 온 목적을 이루셔야 하지 않겠소?”
“맞는 말씀입니다. 이쪽이 더 중요한 일이지요.”
“크윽.”
유정풍이 가슴을 부여잡든 말든 당예지는 섬랑을 주시했다.
“어서 먹고 품평해 주게.”
섬랑이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래도 제가 멀쩡할 거라고 믿어주시네요.”
“당연하지. 결국엔 주즉시공을 쓸 것 아닌가?”
섬랑의 얼굴에 어설프게 걸렸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안 쓸 건데요.”
“쓰게 될 것일세.”
“누구 마음대로요.”
섬랑은 병마개를 빼고 병 속에 있던 독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크윽! 뭐야 이거!’
혀와 식도는 물론이오, 위장까지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새 뻣뻣해진 다리를 억지로 접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정신을 집중하고 운기행공을 하니 단전에 있던 막대한 내공이 솟구쳐올라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독기를 억눌렀다.
‘후우. 겨우 한숨 돌렸네.’
아니었다.
마치 그러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독에서 음습한 기운이 고개를 들더니 전신의 내공을 야금야금 흩어버렸다.
‘미친! 마비독(痲痹毒)인 척하더니 산공독(散功毒)이었어?’
그것 역시 아니었다.
머리가 띵하더니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미혼산(迷魂散)까지!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나하나 제거해 봐야 소용없었다.
그야말로 설상가상!
수많은 독성이 쉼 없이 나타나 섬랑을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빌어먹을. 이러다간 끝이 없겠네.’
언젠가는 모조리 몰아낼 수 있겠지만 그 언젠가가 언제쯤이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내공으로 대응하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섬랑이 저도 모르게 주즉시공을 펼치려고 하는 순간.
당예지가 그녀답지 않게 채근했다.
“독성은 실컷 맛보았나? 어서 주즉시공을 펼쳐 독을 몰아낸 뒤 감상을 말해주게.”
‘……!’
자고로 사람이란 하려던 것도 남이 하라고 하면 하기 싫어지기 마련.
섬랑은 속으로 비명을 토하며 머리를 굴렸다.
‘으윽. 그렇다고 이대로 가는 건 싫고. 조금만 더하다가 해약을 주면 못 이기는 척 받아먹을까.’
당예지가 감탄했다.
“더 하시려는가? 정말 대단하군. 아직 해약도 못 만들었을 만큼 지독한 진합만향을 이렇게 오래 억누르다니.”
‘……!’
아니, 사람이 책임감이 있어야지!
독을 만들어놓고 해약을 안 만들어? 그게 정파인이 할 짓이야?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단 하나였다.
혼도 먹어치우는 놈이 독이라고 못 먹을까.
아직 해본 적은 없지만 해볼 수밖에.
‘침 꼴깍꼴깍 삼키지 말고 어서 나와 인마!’
중단전 옥당(玉堂)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마혼(魔魂)이 기지개를 켰다.
지난 이십 년 동안 덩치를 크게 불린 놈은 신이 나서 전신의 경락(經絡)을 질주했다.
그러자 섬랑의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화아아아-
가부좌를 튼 섬랑의 육신에서 무저갱의 암흑보다 어두운 흑염이 솟구쳤다.
그것은 곧 악귀의 형상으로 화해 흉포한 불꽃을 뿜으며 도도히 일렁였다.
장차 마신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마군(魔君) 자리에는 이미 오른 존재가 중원에서 본신의 힘을 드러낸 것이다!
그 모습을 목도한 이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속으로 외쳤다.
‘마인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마귀! 역시 마귀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