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31화 (531/569)

외전 12화

후계자

섬랑의 도발에 우공은 두 눈을 부릅떴다.

청성산이 불타고 비급까지 모두 빼앗긴 뒤 멸문 직전에 이르렀던 수모를 어찌 잊을까.

더구나 우공은 그 수치를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전대 장문인 청유의 제자 아닌가?

청유는 청성의 세를 회복하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며 우공에게 한탄하곤 했다.

‘본문이 이 지경이 된 건 속세의 이익을 지나치게 탐해서다. 본산이 위기에 처했을 때, 속가 문파들이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는데도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야.’

청성은 속가까지 은연중에 돌아설 정도로 재물과 권력을 그러모으다가 적을 많이 만들었고, 손익을 따져가며 그때그때 맺은 벗과의 신의는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우공아, 네 사조께선 임종에 이르러서야 후회하시며 도문(道門)다운 모습을 되찾으라고 당부하셨지만 네 사부 역시 헛된 욕심에 젖은 지 오래라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그 수모를 겪었다. 그때는 진옥룡이 있어 본문이 명맥을 잇게 되었으나 차후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면 누구에게 기대겠느냐?’

청유는 언제나 강조했다.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양에 힘쓰며 어려운 이들을 돕다 보면 본문의 힘은 자연히 강해지고 참다운 벗 역시 늘어날 것이야.’

원점이라…….

도문다운 도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우공은 사부의 충고를 떠올리다가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사부가 틀렸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당가와 아미파는 넘기고 굳이 청성에게 시비를 걸다니!

여기서 더 밀리면 천하에서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우공은 마음을 다잡고 섬랑을 노려봤다.

“본문이 멸문하다시피 했던 일 때문에 아직도 꽁하냐고 물었나?”

“네.”

섬랑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더 화가 났다.

“본문은 도문이긴 하나 무문(武門)이기도 하지. 부정하지는 않겠네.”

“분위기도 그렇고 말씀도 그렇고, 중도가 아니라 무(武) 쪽으로 많이 기운 것 같네요. 그거 좀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었다.

청유가 십 년이 넘게 최선을 다했건만 그 성과는 미약했다.

민초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받게 되었으나 정작 중요한 무림, 관부, 상계는 여전히 청성을 소홀히 대했다.

자연히 청성 제자들도 지쳐갔다.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예전의 성세를 되찾는단 말인가?

참다못해 몇 차례나 간언했는데도 청유는 요지부동이었다.

우공의 입에서 청성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도(道)를 버린 건 아닐세. 다만 무의 중요성을 확실히 깨달아 행하는 것일세. 무공 수련에 힘을 쏟고 속가 무문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섬랑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곤륜과 너무 차이가 나네.”

우공의 눈썹이 솟구쳤다.

“비교할 곳과 하게. 곤륜이 본문처럼 큰 피해를 입었나?”

“그럼 비슷한 화를 당한 무당은요? 무당의 행보도 청성과 대동소이해요?”

“……!”

우공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마교 소교주가 사부와 엇비슷한 말을 지껄일 줄이야.

사부는 무당을 언급하며 정도를 걷는 게 옳다고 고집했다.

‘아니야. 그런 식으론 안 돼.’

무당과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기반 자체에서 큰 차이가 나니 저력 또한 다르기 마련.

무당은 정도만 걸어도 눈에 띄게 세를 회복해 갔다.

그렇다고 마교 종자에게 약한 소리를 할 수 있나.

우공이 말을 돌리려고 하는데 섬랑이 더 빨랐다.

천하의 그 누구보다 발이 넓다고 할 수 있는 개방의 후개에게 물었다.

“무당은 어때요? 잘나가요?”

“……!”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잘나가냐니.

시정잡배도 아니고 무슨!

유정풍도 어이없어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앞날이 기대되는 편이긴 하지.”

“왜죠?”

“정광 아우의 종적이 묘연한 상황에 정사대전(正邪大戰)에서 큰 공을 세우고 수많은 협행을 한 무당혈선(武當血仙) 대진 진인만큼 소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무인이 어디 있겠나?”

“아! 그분.”

섬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별호가 근사하긴 하죠.”

그 멋진 별호를 짓는 데 동참했던 유정풍이 목을 벅벅 긁으며 딴청을 부렸다.

“그, 그런가?”

“물론이죠. 무당에 인재가 구름처럼 몰렸겠네요.”

유정풍은 우공의 눈치를 슬쩍 보고 동의했다.

“그건 사실일세. 대진 진인이 거둔 첫 제자이자 강호에서 협룡(俠龍)이라 불리는 유은을 필두로 수많은 후기지수를 배출해 내고 있지.”

“과연. 앞날이 밝을 만도 하네요.”

이렇게 무당은 강산이 몇 번만 변하면 예전의 위세를 뽐내게 될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우공은 그 차이를 다시 되새기게 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급함은 곧 분노로 변했다.

섬랑을 쏘아보며 날카롭게 경고했다.

“본문은 본문일세. 곤륜과도 무당과도 비교하지 말게.”

“네. 그럼 화산과 종남은 어때요?”

“갈! 보자 보자 하니까 감히!”

우공이 화를 못 참고 대라신공(大羅神功)으로 쌓아온 정심한 내공을 끌어 올리는 순간.

화르르르-

섬랑의 벽안(碧眼)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눈이 마주친 상대의 육신은 물론이오, 영혼까지 모조리 집어삼킬 것처럼 공포스러운 흑염(黑焰)이었다.

‘헉!’

크게 놀란 우공이 반사적으로 내공을 더 끌어 올렸으나 소용없었다.

흑염이 어둡게 일렁이는 모습이 우공의 뇌리에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말살한다.]

‘……!’

그랬다.

분명히 그런 의미였다.

우공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제껏 그렇게 노력해 왔건만 싸우기도 전에 마음이 꺾인 것이다.

그러자 흑염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정말 싸울 생각이었어?]

‘……!’

그랬나?

원래는 그런 줄 알았는데.

마음이 아니라고, 단지 얕보이지 않으려 그랬을 뿐이라고 맹렬히 소리쳤다.

우공의 일그러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대와의 격차를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의 진심을 깨닫다니.

아니, 진심이었던 게 아니라 두려워서 바뀐 것일지도 몰랐다.

‘대체 어느 쪽이지?’

제발 전자였으면.

그래야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지 않겠는가?

‘허어. 허허허.’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자 또 우스워졌다.

이런 옹졸한 마음을 지닌 위인이 사문의 부흥을 도모한다는 게 말이 되나.

천하에 이렇게 한심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치밀어 올랐던 분노와 일으켰던 내공이 산산이 흩어지며 허탈감만 남았다.

그 허탈감이 어느새 바싹 마른 우공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무량수불…….”

섬랑의 벽안을 채우고 있던 흑염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그라들었다.

“어라? 안 싸우실 거예요?”

우공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본인 마음조차 어느 것이 맞는지 갈피를 못 잡는 판국에 누구와 싸울까.”

“선문답은 사양할게요. 그래도 그런 말씀을 하셔서 그런지 이제 좀 도사 같으세요.”

“도사는 도를 닦아야지, 나처럼 집착만 키우는 존재가 아닐세.”

“저런. 도사가 아니라 도장이셨네요.”

“그새 내게 쌀알만 한 도라도 생겼나 보군. 편한 대로 하게.”

“그럼 진인으로 가죠. 그게 더 어울릴 것 같거든요.”

“…….”

조금 전이었으면 비꼬는 말로 들렸겠지만 엇나간 신념을 버린 지금은 아니었다.

우공은 혼탁했던 시야를 깨끗이 해준 섬랑을 물끄러미 보다가 당오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주, 소교주가 도사답게 행동하라며 얼굴에 금칠까지 해주는데 더 있을 수가 없구려.”

당오군이 살짝 굳은 얼굴로 물었다.

“장문인, 아직 얘기가 안 끝났는데 가시려는 겁니까?”

“내가 더 들어봐야 뭐 하겠소? 청성은 당가의 뜻에 따를 테니 편히 정하시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잡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우공은 말끝을 흐리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뒤, 눈꺼풀이 다시 열리자 잔잔한 호수같이 변한 눈이 나타나 맑은 빛을 토했다.

“본문은 한동안 강호 출입을 삼가고 기조를 바꿀 것이오. 아예 봉문(封門) 하는 건 아니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하시오.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도우리다.”

우공의 담담하지만 큰 뜻이 담긴 말에 당오군이 정중히 포권했다.

“알겠습니다. 배웅해 드리지 못하는 걸 양해해 주십시오.”

“귀한 손님이 계시니 그러시는 게 마땅하지.”

우공은 아미 장문인 한성에게도 예를 취한 뒤 떠났다.

한성은 목에 건 염주를 손가락으로 한 알씩 돌리며 감탄했다.

‘선재(善哉), 선재로다. 조급하기 그지없던 마음을 저렇게 훌훌 털어버리다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연히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섬랑이 기특해질 수밖에.

“자네, 정말 대단하군.”

섬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장문인께서도 대단하시네요. 마인을 칭찬하시고.”

“상대가 누구든 간에 좋은 일을 했으면 칭찬해야지.”

“그런데 염주 알은 왜 계속 돌리세요? 설마 암기로 쓰시려는 건 아니죠?”

한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대단한 마기는 잘 조절하면서 왜 입은 그러지 못하는가?”

“입도 억누르고 있는 건데요.”

“……아미타불. 미처 몰랐군. 고맙네.”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보다 이제 앉아도 되죠?”

한성은 당오군에게 시선을 돌렸고 당오군은 섬랑에게 사과했다.

“계속 세워둬서 미안하네.”

섬랑이 냉큼 의자에 앉으며 권했다.

“두 분도 앉으시죠. 아, 유 대협도요. 설마 직업 때문에 바닥이 편하신 건 아니죠?”

한성과 유정풍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앉았다.

하지만 당오군은 아니었다.

“주인으로서 대접을 해야지. 차라도 한잔하겠나?”

“독이 든 차를 주시려고요?”

“손님에겐 그러지 않네.”

섬랑이 손사래 쳤다.

“그럼 손님이 아니라 적으로 취급해 주세요.”

당오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당가의 독을 견식하러 왔으니 마음 편히 주시라고요.”

“……!”

한성과 유정풍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당가의 독을 맛보려고 머나먼 신강에서 당가타까지 직접 찾아오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유정풍은 하도 어이가 없어 섬랑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독을 너무 가볍게 보는군.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그러면 안 되네.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라 할지라도 한순간에 훅 보낼 수 있는 게 독이야. 다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는가?”

한성도 황당한 표정을 애써 지우고 섬랑을 타일렀다.

“도발은 그만하고 진짜 목적을 말하게나. 그래야 우리가 해결할 시도라도 해볼 것 아닌가?”

섬랑이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독 먹으러 온 거 맞는데요. 설마 아까워서 그러세요? 당가 것인데 왜 두 분이…….”

유정풍이 버럭 화를 냈다.

“적당히 좀 하게! 그게 말이 되는가? 천하에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사람이 어디…… 아!”

말하다 보니 떠올랐다.

과거에도 그랬던 사람이 있지 않은가!

이 사실을 깨달은 건 당오군과 한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입에서 한 사람을 지칭하는 두 호칭이 흘러나왔다.

“저, 정광 아우?”

“지, 진옥룡?”

섬랑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하하. 이제야 말이 통하네. 그분도 드셨으니 저도 먹어야죠.”

유정풍이 눈을 끔뻑이다가 혹시나 하고 물었다.

“정광 아우가 그랬으니 자네도 그래야 한다? 설마 흉내를 내는 건가?”

“어허. 흉내라뇨.”

“그럼?”

섬랑이 정색하며 설명했다.

“후계자가 선인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건데 그렇게 폄하하시면 쓰나요.”

“……!”

전각 안이 깊은 침묵에 잠겼다.

섬랑의 말에 담긴 무거운 의미 때문이었다.

냉정한 당오군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정광 아우는 정파 사람이네.”

섬랑이 손가락을 하나 펴서 좌우로 흔들었다.

“본교 분이기도 하죠.”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그걸로 분란을 일으키려는 것인가?”

섬랑은 눈을 부라리는 단성오와 환하게 웃는 연규서를 못 본 척하며 대답했다.

“설마요. 굳이 나눌 필요 있나요, 대인은 대인인데. 아, 이건 곤륜에 계신 덕성께서 하신 말씀이니 마음에 안 들면 그분께 따지세요.”

“……그건 차차 확인하기로 하고. 정광 아우를 스승도 아닌 대인이라 칭하면서 그런 주장을 하나?”

“호칭이 중요한가요? 제가 후계자라는 게 중요하지.”

당오군이 차갑게 받아쳤다.

“정광 아우의 진짜 제자는 이쪽에 있어.”

“그건 제가 직접 만나서 누가 진짜인지 가릴 테니까…….”

섬랑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독이나 주세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