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화기애애(和氣靄靄)
“내가 네 사조니라. 어서 인사 올리거라.”
“……!”
노인의 말에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천마신교 소교주에게 사조라고 자처하다니,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섬랑 역시 황당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
이런 헛소리를 지껄일 위인이 천하에 또 있을까.
당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모습도 그랬고 세월 탓에 더 늙은 것이겠지만 몰골 역시 듣던 것과 거의 일치했다.
“저기요, 어르신.”
“어르신이 아니라 사조!”
“귀 떨어지겠네. 아직도 정정하시네요.”
“크흠. 흠.”
유정풍에게는 이미 반쯤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소리를 빽 질렀던 노인이 섬랑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꼿꼿이 섰다.
“아무렴. 정정하고말고. 내가 누군데.”
“예전에 독존(毒尊)이라 불리셨죠?”
당기황이 두 눈을 차갑게 빛내며 부정했다.
“예전이라니! 얼음덩어리 아들놈이 그렇게 행세하고 다니지만 진짜 독존은 나밖에 없어!”
“과연. 듣던 대로시네요.”
“누구한테 뭘 들었길래? 설마 정광 그 녀석이 사부 흉을 본 건 아니겠지?”
정광이 아니라 자오였고, 흉을 본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얘기해 준 것뿐이었다.
하지만 섬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기 귀찮기도 했고 더 급한 일이 있어서였다.
“잠시만요.”
품속에서 깨끗한 천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당기황의 눈에 맺힌 진물과 양 뺨에 새겨진 눈물 자국을 꼼꼼히 닦았다.
“눈물이야 그렇다 치고. 이놈의 진물, 닦아도 닦아도 계속 나오죠?”
당기황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으, 응.”
“귀찮다고 이러고 다니시면 되나요. 남들이 흉봐요.”
섬랑은 당기황의 얼굴에 더 닦을 부분이 있는지 면밀히 살피며 나무랐다.
과거 치병에 걸린 귀곡자를 돌보다가 생긴 습관이었다.
“미, 미안.”
섬랑은 얼결에 사과하는 당기황을 위로했다.
“왜 어르신이 미안해하세요. 진물 이놈이 나쁜 거지. 기죽지 말고 당당해지세요.”
“……!”
당기황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조금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는 섬랑의 언행에 생이 얼마 안 남아 나날이 차가워져 가던 심장이 따뜻해져서였다.
그 온기가 쇠약해진 자신감을 끌어 올렸다.
당기황은 두 눈을 형형히 빛내며 다짐했다.
“아암. 그래야지. 내가 누군데. 네 사조 아니더냐?”
“그건 너무 많이 나가셨네요.”
“그렇다면 토 달지 말고 그런 줄 알아!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내 처소로 가자. 가르칠 게 많아. 각오 단단히 하거라.”
당기황이 신형을 돌려 발걸음을 떼는데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할아버님, 그건 곤란합니다.”
“음? 흘흘. 그래, 사조가 아니라 그렇게 부르는 것도 괜찮…….”
당기황은 크게 기꺼워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뒤돌아보니 진짜 손자가 어느새 와 있었다.
현 사천당가주 당오군이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냐?”
당오군은 할아비에게 담담히 청했다.
“외인이 있는 자리입니다. 공적으로 대해주십시오.”
당기황이 발끈했다.
“외인이라니! 이 아이는 어엿한 내 사손이야, 가주!”
“소교주에 대한 건 나중에 다시 논의하고, 저 마인들은 본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습니까?”
당기황은 손자를 마땅찮은 눈으로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엄정한 자세로 선 채 마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마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으음…….”
당기황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사손에게 정신이 팔려 신경 쓸 겨를이 없었거늘, 하나같이 저 모양이라니.
대다수를 차지하는 흉악무도하게 생긴 사람 백정들은 차라리 나았다.
서릿발 같은 살기를 기생오라비 뺨치게 곱상한 얼굴로 감춘 여우와 얼굴이 온통 흉터로 뒤덮인 승냥이, 눈이 쏟아질 것처럼 튀어나온 멧돼지에 사내인지 여인인지 헷갈릴 만큼 요사하게 생긴 물건까지, 정말 별의별 놈들이 전부 모여 있는 것 아닌가?
당기황은 섬랑을 보며 타박했다.
“취향 한번 독특하구나. 왜 하필 저런 녀석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냐?”
“평가가 무척 박하네요. 쟤들이 어때서요?”
“중원에 소란을 피우러 들어온 것이면 너무 비실비실하고 좋은 마음을 품고 왔다면 쓸데없는 오해를 사기 딱 좋게 생겼잖아.”
“왜 열심히 수련한 애들을 기죽이세요? 그리고 생긴 게 어때서요. 어르신보단 준수한 편인데.”
“이놈이 진짜! 네 사부가 그렇게 가르쳤…… 아니지, 그 녀석은 더했어. 어쨌든 자꾸 말대꾸할래?”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뻐하는 법인데 너무 하시잖아요.”
당기황과 섬랑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사천당가주 당오군은 마인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그리고 머지않아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할아버님의 말씀이 맞아.’
고수가 아닌 이가 없었고 몇몇은 감탄스러울 정도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숫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뜻으로 왔다는 얘기인데…….’
그나마 순하게 생긴 이들을 골라온 게 저 지경이라 치자.
무모한 건 마찬가지였다.
강호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거늘 지나치게 부주의한 처사 아닌가?
‘그래도 만만한 전력은 아니야. 규율도 제대로 잡혀 있어.’
마인들은 당기황의 폭언을 듣고도 분노한 기색만 드러낼 뿐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 규율이 아무리 강해도 본질은 마인.’
마인이 괜히 마인일까.
소교주라는 지위만으로 그들의 흉성(凶性)을 짓누르지는 못할 터.
‘믿기 힘들지만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그만한 자신감이 있어서 이 인원만 데리고 나온 것이리라.
소교주는 고수였다.
사천당가주인 자신조차 그 경지를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고수!
‘마침 유 형이 와줘서 그나마 다행이야.’
평소라면 다소 불편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들인 당사성을 못 믿는 건 아니나 연륜도 안목도 유정풍이 위인데다 개방의 정보까지 낱낱이 알고 있지 않은가?
당오군은 유정풍에게 전음을 보냈다.
-유 형, 상황이 급박하니 인사는 생략합시다. 마교 소교주와 밖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셨소? 개방이 알아낸 정보 중 주의할 만한 게 있으면 그것도 부탁하오.
유정풍은 중요한 점만 짧게 얘기하고 덧붙였다.
-정광 아우와 닮은 점이 많소.
-그래 보이는구려. 즐겁긴 하나 머리가 지끈거리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오. 아까 어르신을 챙기는 모습을 보지 않으셨소?
-무척 놀라운 일이긴 하나 안심하긴 이르오.
-더구나 아미와 청성 장문인께서도 계시외다.
당오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유 형께 무엇을 속이겠소. 솔직히 그 점이 더 문제외다.
당가는 이십 년 전부터 사천성의 수장 노릇을 해왔다.
헌데 아미와 청성의 장문인에 있는 자리에 마교 소교주가 오다니,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동안 지켜온 지위가 크게 흔들리게 될 게 뻔했다.
유정풍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으음. 하필이면 태상가주께서 무림맹에 가신 사이에 이런 일이.
-유 형도 그 틈을 타서 오시지 않았소?
이 역시 사실이었다.
나이가 들어 내공조차 거의 상실한 당기황의 지팡이질은 웃으며 맞을 수 있지만 독존으로 군림하는 태상가주 당영중의 손속을 무슨 수로 버틸까.
-크흠. 그래도 실보다는 득이 클 것이니 힘내시오.
-고맙소. 잘 부탁하오.
-엥? 부탁이라니?
-의협을 기치(旗幟)로 삼는 개방의 후개에게 불필요한 말을 했구려. 어련히 알아서 잘 도와주실까.
-아니, 잠깐…….
당오군은 개방까지 끌어들이고 섬랑과 당기황 사이에 끼어들었다.
“할아버님, 그만하십시오. 자네도 체면을 지키시게.”
당기황이 길길이 날뛰려고 했으나 섬랑이 더 빨랐다.
“제 말이. 어르신, 가주님은 사천당가의 얼굴. 예의를 지켜야 하니 가만히 계세요. 가주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천마신교 소교주 섬랑이에요.”
당기황은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말을 듣고도 더 떠들면 자신의 가문에 함부로 하라고 종용하는 꼴이 되는 것 아닌가?
당오군은 할아비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섬랑에게 감탄했다.
“본가에 방문한 걸 환영하네. 자네의 명성은 익히 들었네.”
“그럼 얘기가 빨라지겠네요.”
“무슨 의미인가?”
섬랑이 당당히 말했다.
“저는 얘기를 빙빙 돌리는 걸 싫어하거든요.”
“마찬가지일세.”
“그러니 더 다행이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거기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게나.”
“시원시원하시네요. 가죠.”
“그전에 알려줄 게 있네.”
당오군은 나직이 설명했다.
“사성이가 먼저 얘기했을 것이네만 정기 회합 중이라 아미와 청성의 장문인께서 와 계시네.”
“네, 들었어요”
“자네는 본가에 용무가 있는 것이지?”
“물론이죠.”
“그분들이 본가에 없으셨으면 모를까, 계신 이상 함께 들어야 하네. 자네의 신분이 사천성에 그만큼 큰 의미가 있어서야. 이해해 주겠나?”
내심 거절하길 바랐건만.
섬랑의 대답은 의외였다.
“무슨 이해씩이나. 그게 사리에 맞는데요 뭐.”
당오군이 가만히 응시하자 섬랑이 미소 지으며 전음을 보냈다.
-저를 배려해서 하신 말씀인 거 알아요.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게 뻔하고 도발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신 거죠? 제가 볼일은 당가에만 있다고 거절하면 아미도 청성도 떼를 쓰기 힘들겠죠.
-본가를 위한 것이 더 크네. 자네가 자신감이 없으면 이렇게 왔겠나? 자네의 방문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
섬랑이 씩 웃었다.
-무혈단 부단주셨다더니 과연. 대인께서 믿고 맡기실 만하네요. 하지만 저도 대인이 거두시고 심득을 물려주신 인재예요. 일을 크게 키우지는 않을 테니 믿어보세요.
대인이라는 게 정광을 지칭하는 것임을 모를 리 있나.
당오군은 섬랑의 의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세나.”
“네.”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꾹 참고 있던 당기황이 성질을 부렸다.
“설마 나를 떼놓고 가려는 건 아니지? 절대 안 돼! 나도 간다!”
어림도 없지.
아미와 청성 장문인 앞에서 무슨 난동을 부릴지 알고 데려갈까.
당오군이 엄하게 명했다.
“안 됩니다.”
“왜!”
당오군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어렸다.
당기황은 찔끔하면서도 악을 썼다.
“아주 제 아비랑 똑같이 구는구나! 한 대 치려고? 응?”
“소손이 어찌 감히. 일을 마무리 지으면 따로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 처소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소교주도 그게 편할 겁니다.”
그렇다마다.
이 골칫덩어리 노인이 있는 곳에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섬랑도 당기황을 달랬고 당기황은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 나서야 떨어졌다.
당오군은 작게 한숨을 쉬고 섬랑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뭘요.”
“저기 보이는 전각으로 가면 되네. 자네의 수하들이 몇 명이나 들어가길 원하나?”
섬랑이 그냥 나 혼자 갈 거라고 말하려는 순간, 뒤에 있던 연규서가 대답했다.
“두 명이외다.”
당오군은 천천히 신형을 돌려 서늘한 눈으로 연규서를 응시했다.
“배분이 명백히 다른데 예의를 안 지키는군.”
연규서가 화사하게 웃었다.
“서로 가는 길이 다른데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소?”
맞는 말이었다.
오히려 당장 혈전을 벌이지 않는 게 이상한 관계였다.
당오군은 그 점을 인정하고 양손을 들어 예를 취했다.
“일깨워 줘서 고맙네.”
연규서도 답례했다.
“도움이 됐다니 기쁘오.”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당가 사람들은 마인들을 차갑게 쏘아보고 마인들은 이를 드러내며 살소(殺笑)를 흘렸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도는 그때.
섬랑이 연규서를 나무랐다.
“애써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는데 찬물을 끼얹으면 어쩌자는 거야. 가주님, 신경 쓰지 마세요. 하루에 최소 몇 번씩 입바른 소리를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녀석이에요.”
“괜찮네. 저자의 말이 맞아. 이대로 갔으면 이상한 오해를 살 뻔했어.”
그들은 곧 전각에 도착했다.
연규서와 단성오가 섬랑을 호종했다.
유정풍은 멀뚱거리다가 당오군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서야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따라갔다.
안에 들어가니 아미 장문인 한성과 청성 장문인 우공이 굳은 얼굴로 일어섰다.
섬랑은 먼저 한성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천마신교 소교주 섬랑이에요. 아미산에 올라 넉넉히 시주했으니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한성은 황당해하면서도 답례할 수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고맙네. 부처께서도 기뻐하셨을 걸세.”
“당연하죠.”
“으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다음은 우공 차례였다.
섬랑은 그를 보며 포권했다.
“안녕하세요, 청성 장문인이시죠?”
우공은 한성만큼 수양이 깊지 않았다.
미리 주의를 듣고 조심하겠다 해놓고도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렇네.”
“표정도 목소리도 퉁명스러우시네요.”
“간혹 그런 오해를 받곤 하니 개의치 말게나.”
“다행이네요.”
섬랑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청성산이 불타고 멸문하다시피 했다고 들어서 그것 때문에 아직도 꽁하신가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