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천하에 몹쓸 대마두 놈
“자네는 마인 중의 마인이라 할 수 있는 마교 소교주면서 왜 협객 행세를 하고 다니는가?”
기골이 장대하고 호방하게 생긴 중년 거지의 말에 섬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교라뇨. 난데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네.”
중년 거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추궁했다.
“자네가 아무리 마기를 갈무리해 봐야 소용없어. 수하들이 풀풀 풍기고 있지 않나?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니 순순히 인정하게.”
“그쪽이야말로 인정하시죠.”
“뭘 말인가?”
섬랑은 또박또박 설명했다.
“마교가 아니라 천마신교 소교주예요. 제가 개방(丐幇)을 거지떼라고 부르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이번엔 중년 거지가 황당해했다.
“기분 나쁠 게 뭐라고. 거지들인 게 사실인데.”
“……진심이세요?”
“물론일세.”
“그럼 어디.”
섬랑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꺼내 내밀었다.
“얼마 안 되니까 아껴 쓰세요.”
옆에 있던 연규서가 눈썹을 꿈틀거리는 순간, 삼장 거리에 있던 거지가 섬랑 앞에 나타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전표를 낚아챘다.
“허어, 뭐 이런 걸 다.”
“……말과 행동이 다르시네요.”
“이런, 정말 얼마 안 되잖아. 그래도 아껴 써보겠네.”
섬랑은 상대를 진심으로 인정했다.
“진짜 거지셨구나. 좋으시겠어요, 놀면서 돈을 버시고.”
거지가 허리춤에 전표를 찔러 넣고 입맛을 다셨다.
“자네 같은 귀인이 흔한 줄 아나? 내 평생을 통틀어 두 번째일세. 정광 아우가 적선했을 때는 당황했지만 지금은 그저 고맙기만 해.”
섬랑이 탄성을 질렀다.
“어쩐지. 흔한 거지는 아니신 것 같더라니. 과거 의룡(義龍)이라 불리신 분이죠?”
“이거 정말 의외인걸.”
유정풍이 피식 웃으며 의문을 표했다.
“아우가 그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떠들 성품은 아닌데.”
“대신 그런 걸 과하게 즐기시는 분이 옆에 계셨죠.”
“자오 대협 말이군. 하하. 확실히 그렇긴 하지. 섬서성에서 그랬던가. 그래, 술을 마시다가 내가 직접 알려 드렸던 기억이 나.”
유정풍은 한동안 웃다가 섬랑을 주시했다.
“그럼 자네도 자오 대협처럼 악행을 등지고 선행을 베풀기로 한 건가?”
“저는 원래 선한데요.”
“농을 하자는 게 아닐세. 운남성에서 불쌍한 아이를 괴롭히는 돼지를 혼내주지 않았나?”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손본 것뿐이에요.”
“정말 성품이 선할지도 모르겠어. 죽이지 않고 골병이 들 정도로 패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다니.”
유정풍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수고료로 돼지의 전낭을 먼저 챙겼나 보군.”
“무슨 말씀이죠?”
“아까 자네가 준 전표 말일세. 조상(潮商)이 운영하는 광동전장(廣東錢莊)에서 발행한 것이야. 마침 그 돼지는 조상 소속이고. 무척 공교로운 일이지.”
“그러게요.”
“전표에 찍힌 일련번호로 확인하면 금방 드러날 걸세.”
“그렇겠죠.”
“그런데 왜 준 거지? 자네 수하도 말리려고 했잖나. 내게 듣고 나서야 깨달을 만큼 어리석어 보이지는 않는데.”
“틀리셨어요. 그것도 두 개나.”
“흥미롭군. 말해보게.”
섬랑은 옆에 있는 연규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첫째, 이 녀석은 말리려고 한 게 아니라 못마땅해한 거예요. 내 말이 맞지?”
연규서가 작게 한숨을 쉬고 정정했다.
“아닙니다. 아주 못마땅했습니다.”
“다 지난 일이잖아.”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습니다만.”
“아니, 두 번째 것을 말하면 이분도 마음이 돌아설 거야.”
섬랑은 날카롭게 빛나는 유정풍의 눈을 담담히 응시했다.
“둘째, 저는 어리석어 보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똑똑해요. 그런데도 전표를 드린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죠.”
“자네가 구한 아이가 전에 배수(扒手) 짓을 한 적은 있지만 그땐 아니었고, 돼지가 괘씸해서 혼낸 뒤 전낭을 챙겼다고 주장하려는 것인가?”
“어라?”
유정풍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명분에 얽매이는 정도무림과 달리 그깟 것이야 만들면 그만이라고 경고도 할 겸 말일세.”
“오오. 꽤 그럴듯하네요. 그냥 그거로 가죠.”
“…….”
유정풍이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못 하자 섬랑이 씩 웃었다.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가진 게 그 전표뿐이어서 어쩔 수 없기도 했고요.”
“……왠지 덧붙인 게 본론 같군.”
“기분 탓이시겠죠.”
“……정광 아우를 닮은 건가, 흉내를 내는 건가?”
“당연히 전자죠.”
유정풍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거참.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모습을 다른 이를 통해서나마 보게 되니 즐겁긴 했으나 불안하기도 했다.
‘정광 아우처럼 속내를 알 수가 없어. 중원에 온 목적이 뭘까?’
궁금한 건 섬랑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자네가 성도로 향하고 있다길래 와봤네.”
“사천성에 왜 오셨냐고요. 다른 성에서 소식을 들으셨으면 이렇게 빨리 오실 수 없잖아요.”
유정풍은 느긋하게 설명했다.
“하하. 거지가 괜히 거지인가. 자유로우니까 거지지. 발길이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여기더군.”
“흐음. 뭔가 수상한데. 직급이 있으신데 자유롭다고요?”
유정풍은 내심 찔끔했다.
젊은 놈이 무슨 놈의 눈치가 이렇게 빠르단 말인가!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을 돌리려고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었다.
녹의(綠衣)를 걸친 당가 청년이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유 대협, 올해도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크흠. 자, 자네도 잘 있었나?”
“덕분에 그렇습니다.”
“그것참 다행이군.”
유정풍은 눈짓으로 섬랑을 가리켰다.
“인사는 이쯤 하고. 머나먼 신강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는 게 좋을 것 같네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당가 청년은 섬랑에게 시선을 돌리고 포권했다.
“당사성이 천마신교 소교주께 인사드리오.”
섬랑이 감탄했다.
“역시 명가라 그런지 누구와 달리 예의가 있으시네요.”
“가주께서 정중히 대하라고 하셨소.”
“이러고 싶진 않으나 명을 받았으니 따른다는 뜻이죠? 역시 자유로운 어딘가와는 다르게 규율이 잡혀 있네요.”
당사성은 딴청을 부리는 유정풍을 슬쩍 보고 섬랑에게 물었다.
“본가에 용무가 있어서 오신 것이오?”
“네.”
“환영하오만 양해를 구할 게 있소. 정기 회합 때문에 아미와 청성의 장문인께서 와 계시오. 괜찮겠소?”
사천성을 이끌어가는 세 세력의 수장이 모두 모여 있는데 감히 들어올 수 있냐는 의미.
하지만 상대는 섬랑이었다.
“그분들은 관심 없는데. 뭐 정 원하시면 잠깐 만나 드리죠.”
“…….”
이렇게 오만할 수 있나.
당사성은 섬랑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안내해 드리겠소. 갑시다.”
“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유정풍도 은근슬쩍 뒤따르려다가 마인들이 섬랑 뒤에 바짝 붙어 호종하니 인상을 찡그리며 맨 뒤로 쳐졌다.
덕분에 섬랑은 당사성에게 편히 물어볼 수 있었다.
“저분, 매년 오세요?”
“유 대협 말이오? 그렇소.”
“왜요? 떳떳한 이유는 아닌 것 같던데.”
당사성이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곤란하오. 소교주는 어떻소? 떳떳한 이유로 오셨소?”
“물론이죠.”
섬랑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저도 말하긴 곤란해요.”
“알겠소.”
“어? 궁금하지 않아요?”
당사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차피 안 알려줄 텐데 또 물어 뭐 하겠소?”
섬랑이 마치 추운 것처럼 양손을 반대쪽 겨드랑이에 넣었다.
“으으. 아주 찬바람이 쌩쌩 부네.”
“집안 내력이오.”
“혹시 가주님 아드님?”
“그렇소. 소가주요.”
“과연. 콩 심은 데 콩 난다더니 부친을 빼닮으셨네요.”
이번만큼은 당사성도 호기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교 소교주가 누구에게 부친에 대해 들었을까?
하지만 물을 틈이 없었다.
당가타 곳곳에서 엄중하게 번을 서고 있던 당가 무인들이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섬랑 일행 때문이 아니었다.
저쪽에서 지팡이를 딱딱 소리가 나게 짚으며 걸어오고 있는 노인 때문이었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말라빠진 몸에 푸르딩딩한 안색을 한 노인은 쭈글쭈글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호통쳤다.
“이놈의 거지가! 여기가 어디라고 또 와!”
여기에 거지가 또 있으랴.
당가 무인들은 노인에게 지목당하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유정풍은 하얗게 질린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강녕 같은 소리! 한 발은 관속에 있고 한 발은 관 밖에 있는 거 안 보여?”
“하하. 농이 느셨군요. 날이 아직 추운데 왜 밖에 나오셨습니까?”
“낮잠을 자다가 흉흉한 꿈을 꿔서 나와봤다. 아니나 다를까, 네놈이 또 왔구나.”
노인은 유정풍에게 다가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가 수십 개로 불어나 유정풍을 후려쳤다.
하지만 모두 잔상이었다.
유정풍은 개방 절기 취팔선보(醉八仙步)를 밟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어이쿠, 어르신.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엄살은! 맞기나 하고 말해!”
유정풍의 발이 조금씩 어지러워지더니 지팡이를 간간이 맞았다.
노인은 신이 나서 더 힘을 냈고 유정풍은 울상을 지었다.
섬랑은 흥미롭게 구경하다가 당사성에게 물었다.
“개방 후개(後丐)께서 저 어르신을 많이 공경하시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내공도 거의 안 담긴 지팡이질을 일부러 맞아주시잖아요. 그것도 보법까지 화려하게 펼치면서. 어르신이 아직 정정하다고 느끼게 해주시려는 거죠?”
당사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증조부님은 그런 수에 넘어가실 만큼 정신이 흐려지진 않으셨소. 유 대협께서는 그저 성의를 보이시는 것이오.”
그의 말대로였다.
노인은 힘이 빠졌는지 지팡이를 짚고 숨을 고르다가 불퉁거렸다.
“이놈의 거지가 갈수록 약아지는구나. 전보다 더 빨리 맞아주는 이유가 뭐냐? 내가 지쳐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유정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저도 사람인지라 죄송한 건 알아서입니다.”
“그럼 다시는 오지를 말든가!”
노인은 소리를 빽 지르고 유정풍을 나무랐다.
“거지 주제에 혼인을 하겠다고? 그것도 내 손녀와?”
“어, 어르신. 소리가 너무…….”
“이 정도는 시끄러워야지 네 녀석이 안 오지! 아니, 그래도 오잖아!”
노인은 아예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천하의 어느 여인이 미쳤다고 거지와 혼인을 해? 뭐? 존장들을 설득해서 개방에 속가를 만들고 속가 제자가 되겠다고?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그것도 후개가?”
“그, 그래도 성의를…….”
“결국 씨알도 안 먹혀서 네 사부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았잖아! 그러면 좀 정신을 차려야지! 이게 벌써 몇 해째야?”
노인은 길길이 날뛰다가 비틀거렸다.
유정풍이 재빨리 부축하려고 하는데 더 빠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섬랑이었다.
“저런. 큰일 나실 뻔했네. 괜찮으세요?”
노인은 진물이 줄줄 흐르는 눈을 비비고 섬랑을 빤히 바라봤다.
“넌 또 뭐야?”
“섬랑요.”
“그게 누구…… 잉?”
노인의 눈이 커졌다.
“마교 소교주 그놈?”
“마교가 아니라 천마신…….”
“시끄럽고. 어쨌든 소교주 맞지? 그렇지?”
섬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이런 천하에 몹쓸 대마두 놈을 봤나!”
노인은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사자후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것으로는 모자랐는지 앙상한 두 팔로 섬랑의 허리를 으스러져라 안았다.
섬랑이 반사적으로 노인의 천령개를 부수려고 하는 순간.
노인이 목놓아 외쳤다.
“왜 이제야 온 것이야!”
“……네?”
“녀석. 무심하긴 제 사부를 쏙 빼닮았구나.”
과거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이자 독존(毒尊)으로 악명을 떨쳤던 당기황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다가 헤벌쭉 웃었다.
“내가 네 사조니라. 어서 인사 올리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