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당가타(唐家陀)
섬랑 일행은 말들을 맡겨놓았던 도시로 가 푹 자고 일어난 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말들은 마방(馬房) 주인이 거의 없다시피 한 양심을 필사적으로 쥐어짜 추려낸 준마들이었기에 힘든 기색 없이 잘 달렸다.
하지만 계속 달릴 수는 없는 법.
적당한 시점에 말을 세우고 휴식을 취했다.
섬랑은 관도(官道) 옆 들판에 큰대자로 드러눕더니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하아아암. 뭐가 이렇게 지루한지. 가도 가도 들판밖에 안 보이네.”
옆에 앉아 있던 연규서가 가볍게 타박했다.
“소란을 피우신 지 하루도 채 안 지났습니다. 벌써 지겨워하시면 어떡합니까?”
“모함하지 마. 소란을 피운 게 아니라 공덕을 쌓았잖아.”
“공덕이라니요?”
“내가 시주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표현을 안 했을 뿐이지 부처도 속으론 좋아 죽을걸.”
“저는 속이 쓰립니다.”
“술을 마신 건 난데 네가 왜?”
연규서는 누워 있는 섬랑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디밀며 환하게 웃었다.
“돈이 아까워서요. 몇 번만 더 그러시면 저희는 거지꼴로 중원을 유람하게 될 겁니다.”
섬랑은 연규서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며 투덜거렸다.
“조금 기분 낸 것 가지고 살벌하게 따지기는. 걱정하지 마. 앞으론 그럴 일 없으니까.”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진심이었다.
정광에게 진 신세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혜진을 위로하고 그녀의 사문에 선물을 한 것 아닌가?
곤륜에게도 천마신교가 강탈했었던 비급들을 돌려줬고.
이제 빼앗으면 빼앗았지, 퍼줄 일은 없으리라.
섬랑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연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그러게.”
“더 다행인 것은 아미파에 과하게 시주한 게 꼭 나쁜 일은 아니란 겁니다.”
“무슨 소리야?”
연규서가 차분히 설명했다.
“본교와 정도무림이 마정대전(魔正大戰)을 치른 지 불과 이십 년밖에 안 됐습니다. 강산은 두 번 변할 수 있어도 원한이 사라지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지요.”
그런 와중에 천마신교 소교주가 중원에 들어온다?
정도무림 입장에서는 벌떼처럼 몰려가 원한을 풀려고 하진 않더라도 크게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섬랑은 아미산에 올라 과한 시주를 했고 이는 정도무림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행위로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악의를 품고 온 건 아니라고 받아들일 겁니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보지도 못할 것이, 소교주께선 아미산에 오르시기 전에 점창파 무리를 두들겨 패셨지요.”
충분한 명분을 가지고 그랬으니 따지지도 못할 터.
너희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지만 나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어중이떠중이가 몰려올 일은 없어지게 됐습니다.”
섬랑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똑바로 앉으며 칭찬했다.
“역시 내 장자방(張子房)이라니까. 내 깊은 의도를 잘도 꿰뚫어 봤어.”
“의도를 가지고 벌인 일들이었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소 뒷걸음치다가 쥐잡기라는 표현이 떠오르는군요.”
“어허. 진짜라니까. 게다가 그것들뿐만이 아니야.”
섬랑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활짝 폈다.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아미산을 내 발밑에 뒀잖아. 역대 교주와 소교주 중에 이런 위업을 이룬 사람이 있어?”
“……아미산을 발밑에 두신 게 아니라 오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그거지.”
“주량 대결도 패배하셨고 말입니다.”
“엄연한 무승부였는데 무슨 소리야? 이렇게 안목이 없어서야 원. 됐다, 그만 가자.”
섬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터는데 조용히 시립하고 있던 단성오가 입을 열었다.
“소교주, 당가(唐家)에서는 절대로 그러시면 안 됩니다.”
“당가? 설마 사천당가(四川唐家)? 내가 거길 왜 가?”
단성오가 잔뜩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렸다.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를 꼭 구경해야겠다고 난리를 치셔서 일정에 넣었는데 그 말을 누가 믿습니까? 성도 근처에 있는 당가타(唐家陀)에 가려고 그러신 거 아닙니까?”
“듣고 보니 가보고 싶어지네. 그런데 뭘 절대로 그러지 말라는 거야?”
“과거 천신께서 그러셨듯이 당가의 독을 견식하고 싶으신 것이지요?”
“오. 갑자기 마음이 동하는걸.”
“능청은 적당히 부리십시오. 오래전부터 몇 번이나 말씀하셔서 귀에 딱지가 앉았습니다.”
단성오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솟았다.
“소교주의 고집을 꺾을 방도가 없으니 거기까진 그러려니 하겠지만, 어제 주량 대결에서 하셨던 것처럼 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주즉시공(酒卽是空)을 쓰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독을 꿀꺽 삼키자마자, 아니, 혀에 닿기도 전에 운기하셔야 합니다. 이해하셨습니까?”
단성오의 기나긴 당부에 비해 섬랑의 대답은 무척이나 짧았다.
“봐서.”
“…….”
봐서?
이런 말을 듣고도 참으면 그게 사람인가? 부처지.
더구나 단성오는 그냥 사람도 아니고 훌륭한 마인.
눈을 까뒤집으며 흉성(凶性)을 폭발시키려 하는데.
섬랑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뭐 하러 걱정해. 어제 받은 상처 때문에 많이 예민하구나? 그럴 수도 있지, 기분 풀어.”
“……상처라니요?”
“아미파 속가 제자들이 사내가 왔다고 환호성을 지르긴커녕 살기를 쏘아냈던 거. 차라리 잘된 일이야. 사람을 외모로만 판별하는 애들이잖아. 친해져 봐야 좋을 게 없지.”
단성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정말 상처를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하도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의 입에서 구슬픈 한탄이 흘러나왔다.
“후우우우. 내가 미쳤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통하지도 않을 간언을 하고.”
고해(苦海)는 끝이 없으나 고개를 돌리면 피안(彼岸)이라 했던가.
현실을 직시하고 포기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떻게든 되겠지요.”
“바로 그거지. 근데 서운하기도 하네. 묵영대 조장이 할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단성오가 간신히 다다른 극락정토가 산산조각이 났다.
“망할! 저보고 대체 어쩌라는 말입니까!”
섬랑이 힘주어 명했다.
“빨리 가자. 이럴 시간이 없어.”
* * *
성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드넓은 평야, 그 평야를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강.
이 강을 끼고 자리한 마을 곳곳에서 손끝까지 뒤덮는 짙은 녹의(綠衣)를 걸친 무인들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장원은 경계가 특히 삼엄했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천당가의 터전인 당가타에서 가주의 처소보다 더 중요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일 년 전 부친인 당영중으로부터 독군(毒君)이라는 별호를 물려받고 가주 자리에 오른 당오군은 장원 한 곳에 있는 전각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교 소교주가 운남성에서 점창 사람들을 친 것으로도 모자라 사천성까지 들어오다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도무림에 시비를 거는 것으로 여길 수는 없었다.
어제 아미산에서 날아온 전서구 때문이었다.
‘부처에게 대충이나마 인사를 하고 막대하게 시주를 해?’
그뿐이랴.
무공을 겨룬 것도 아니고 주량을 견주고 떠났단다.
‘점창과의 싸움도 이상해. 명분이 어느 쪽에 있는지 따져보면 행패를 부린 게 아니라 협행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마교 소교주가 불의를 못 참고 악덕 상인을 징치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악덕 상인의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든 백하문도들과 점창 사람들에게는 또 어떻게 했고?
점창이 보낸 서신에 따르면 악독하기 그지없는 수를 썼다지만 소식통으로 알아본 바로는 심하게 두들겨 패기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진의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건 당오군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탁자를 둘러싸고 앉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당오군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사천을 이끌어가는 세 세력이 주기적으로 가지는 회합이 이런 고민의 장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마침 당오군과 눈이 마주친 비구니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가주, 빈승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교 소교주가 무엇을 노리는 건지 모르겠소.”
“장문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답답하구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소.”
“그래도 아미에 아무런 피해가 없어 다행입니다.”
당오군의 위로에 아미 장문인 한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긴 하나 꺼림칙하오. 전서구가 가져온 서신을 보면 사숙들께서도 그렇고 혜진도 그렇고, 마교 소교주가 아주 나쁜 의도로 온 건 아닌 것 같다고 하는데 말이 안 되지 않소?”
오랜 시간 동안 불도에 정진하였어도 정도무림에 몸담고 있는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의혹이었다.
마인이 괜히 마인일까.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당오군의 생각도 비슷했다.
“성도로 통하는 관도로 향했다고 했으니 본가에도 들르겠지요. 직접 만나서 알아봐야겠습니다.”
“역시 그 수밖에 없겠구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진옥룡이 거둔 사람이니 사리에 크게 어긋나는 짓은…… 으음. 취소하겠습니다. 어긋나는 짓을 할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마두는 아닐 겁니다.”
“아미타불. 그 정도만 돼도 빈승은 기쁠 것이오.”
한성은 불안함을 숨기지 않았다.
허나 당오군은 달랐다.
걱정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단주가 거둔 아이가 어느새 장성해서 중원에 들어오다니. 어떤 인물일지 궁금하군.’
천마신교에서 나고 자란 데다 정광이 선택한 아이이니 평범할 리 있나.
내심 미소를 짓는데.
묵묵히 있던 노도사가 강하게 주장했다.
“빈도는 그자를 믿을 수 없소.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오.”
당오군과 한성의 시선이 청성 장문인 우공에게 모였다.
우공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자는 보통 마인도 아니고 소교주요. 진옥룡이 있으면 모를까, 종적이 묘연한 상태 아니오? 그것도 이십 년이나 말이오. 이런 판국에 갑자기 머리를 디미는데 의심하지 않을 수 있나. 필히 조심해야 하오. 정도무림뿐만 아니라 민초들을 위해서도.”
당오군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참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데다 우공이 왜 저러는지 이해도 가서였다.
‘사마련에게 호되게 당해서 청성산이 불타고 멸문 직전까지 갔었으니 이럴 만도 하지.’
비슷한 일이 되풀이될까 봐 두려울 것이다.
그때는 진옥룡 덕분에 겨우 명맥을 유지했지만 지금은 행방조차 모르는 상태 아닌가?
더구나 마교는 사마련보다 훨씬 더 강하고 악독했다.
‘정말 일이 터지고 이번 역시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복수할 생각은 영원히 접어야 하리라.
과거 청성을 쳤던 흉수인 위진홍에게도 이런저런 이유로 못하고 있는데 마교를 무슨 수로 칠까.
당오군은 우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장문인께서 강하게 대응하고 싶어 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고맙소.”
“허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다르다니? 어떻게 말이오?”
당오군의 음성에 위엄이 실렸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신중히 상대해야 합니다. 장문인께서도 제 의견을 지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우공의 눈동자가 떨렸다.
부탁한다고 표현했으나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였다.
“허나…….”
“아미타불.”
이번엔 한성이 나섰다.
“장문인, 본파도 귀파도 이십 년 전부터 곤륜과 당가에게만큼은 한 발 양보해 오지 않았소? 헌데 이번이라고 다를 게 있소이까? 믿고 지켜봅시다.”
“…….”
우공은 속으로 장탄식했다.
사천성의 수장은 당가였고 아미까지 이렇게 나오는데 아직도 세를 회복하지 못한 청성이 무슨 수로 반대하랴.
“알겠소이다, 장문인.”
“잘 생각하셨소.”
우공은 당오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주, 잘 처리하실 거라 믿겠소.”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으나.
당오군은 담담히 대답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순간, 그럴 때가 왔다.
당가 무인이 다급히 달려와 불청객이 왔음을 알렸다.
“마교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나가봐야겠군.”
“그,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어서 말해보게.”
당가 무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또 다른 불청객과 마을 밖에서 마주쳐 대치하고 있습니다.”
* * *
섬랑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중년인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떡 벌어진 어깨에 훤칠한 키.
사내다운 각진 얼굴에 큼직큼직한 이목구비.
강호의 협객이란 이런 모습이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장한이었다.
“거참, 신기하네.”
중년인도 섬랑을 날카롭게 훑어보며 물었다.
“무엇이 말인가?”
섬랑은 솔직히 대꾸했다.
“허우대는 멀쩡한 분이 왜 거지처럼 하고 다니세요?”
허우대만 멀쩡한 유정풍이 씩 웃으며 되물었다.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군. 거지니까 거지꼴로 돌아다니는 것이지 않겠나?”
“아. 개방 분이셨구나.”
“나도 하나 묻겠네.”
유정풍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네는 마인 중의 마인이라 할 수 있는 마교 소교주면서 왜 협객 행세를 하고 다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