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부처의 후광(後光)
섬랑은 혜진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던 아미파 비구니들이 검파(劍把)에 손을 대며 경고하려 했으나 대연이 손을 저어 제지했다.
섬랑은 결국 혜진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뒤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비구니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거칠 것 없이 아미산을 활보하던 어린 대마두가 혜진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니 불안해진 것이다.
잠시 후.
그 걱정은 현실이 됐다.
섬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뼉까지 치는 것 아닌가?
“과연. 교봉(敎鳳)이라고 불리셨다더니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곱게 늙으셨어요.”
“……!”
아미파 제자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감히 아미산에서 아미 제자를 희롱하다니!
저 젊은 나이에 벌써 저런 만행을 저지르는데 세월이 더 흐르면 얼마나 간악해질까!
하지만 혜진은 태연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동의하기까지 했다.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나 종종 듣는 말이긴 하오. 헌데 내가 누구인지 어찌 아셨소?”
“아름다우시니까요.”
섬랑은 어깨를 으쓱하고 조곤조곤 설명했다.
“중원이 아무리 넓어도 소저 같은 분이 흔할 리는 없죠. 본교를 예로 들면 딱 한 사람…… 망할. 왜 하필이면 잔소리쟁이 아줌마일까.”
혜진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나보고 소저라니, 당치도 않소.”
“혼인도 안 하셨고 흰 머리카락이 전혀 없으니 그냥 그렇게 가죠.”
섬랑은 독단적으로 정리하고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요. 선약이 있어서.”
이것 역시 일방적으로 맺은 약속이었다.
불전(佛殿)의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백상(白象)을 탄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에게 꾸벅 인사했다.
“부처님, 안녕하세요.”
“…….”
“잘 계세요, 그럼 이만.”
“…….”
섬랑은 작별 인사까지 마치고 묵영대원들에게 명했다.
“남은 것들 전부 시주해. 여기가 마지막이야.”
“존명!”
마인들은 짊어지고 있던 모든 짐을 내려놔 몸이 가벼워졌고 비구니들은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만년사(萬年寺)가 마지막이라니.
아미산을 더 더럽히지 않게 된 건 다행이긴 하나 이제부터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대연도 그랬지만 담담하게 약조를 상기시켰다.
“여러 사찰을 돌며 부처께 인사를 드리고 시주 역시 끝냈군.”
섬랑이 씩 웃었다.
“그러게요. 해가 지기 전에 마쳐서 다행이에요.”
“아미타불. 그럼 조심히 가시게나.”
“네. 안녕히 계세요.”
“……!”
대연은 오랜만에 정말 놀랐다.
진옥룡이 거둔 사람이니 여느 마인과는 다르게 일구이언하지는 않을 거라 믿긴 했으나 이렇게 깔끔하게 떠날 줄이야!
하지만 오산이었다.
섬랑이 혜진을 보며 손짓하는 것 아닌가?
“가시죠.”
뭐?
“절밥 지겨우시잖아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어린아이를 당과(糖菓)로 꾀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연의 두 눈에 차디찬 살기가 맺혔다.
고승의 옷을 잠시 벗고 척마멸사(斥魔滅邪)에 앞장서던 시절의 무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얌전하게 굴더니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구나.”
“시비라뇨.”
섬랑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중원에서는 한 끼 대접하는 게 실례에요? 이렇게 박한 곳인지는 몰랐네요.”
“말장난 그만하고 왜 혜진에게 그러는지 말해보거라. 무슨 용무로 찾아온 것이냐?”
“아까 말씀드렸는데. 맛있는 거 사드리려고요.”
“아니, 그러니까 왜…….”
대연은 화를 내려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 끝에는 수많은 주름이 얼굴을 뒤덮은 노승이 젊은 비구니에게 업혀 오고 있었다.
대연은 재빨리 다가가 노승이 땅을 디디고 설 수 있도록 부축했다.
“사저, 아직 날이 찬데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노승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깊게 파였다.
“장차 천하마도를 이끌어 나갈 천마신교 소교주가 친히 왔다는데 궁금해서 참을 수 있나. 업혀서라도 나와봐야지.”
“사저.”
“그만하시게. 대사저께서도 입적하시지 않았으면 이러셨을 게야.”
노승은 진물이 흐르는 눈으로 섬랑을 응시했다.
“자네가 섬랑인가?”
“네.”
“노납은 대정이라 하네. 신강에서 머나먼 본산까지 와 듬뿍 시주해 줘 고맙네.”
“부처께 인사도 드렸는데요.”
“그건 부처께서 기꺼워하실 일이니 그분께 생색내야지.”
“그렇긴 하네요.”
섬랑은 대정을 뜯어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후덕한 인상이라 들었는데 아니시네요.”
“어떻길래?”
“얼굴이 온통 주름투성이라 성품이 엿보이질 않아요. 아미산에 산재한 수많은 사찰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복호사(伏虎寺) 주지이자 아미파 장문인이셨던 대정 신니(神尼) 맞으세요?”
“신니가 아닌 것 빼곤 다 맞네.”
“늙어서 이렇게 되신 거구나. 세월이 야속하시겠어요.”
“꼭 그렇지는 않아. 그 세월 덕분에 자네가 이렇게 장성해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노납에게서 거둔 만큼 다른 이에게 베푼 것인데 꽁하면 쓰나.”
섬랑은 대정을 뚫어져라 보다가 합장했다.
“아미타불. 이게 말로만 듣던 선문답인가 봐요.”
대정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늙은이의 실없는 말일 뿐일세. 조금 전에 듣자 하니 혜진에게 밥을 사러 왔다고?”
“네.”
“혜진이 청해성 서녕에서 십여 년 동안 있었지만 신강이 터전인 자네와 친분이 있을 리는 없을 것 같네만.”
섬랑이 인상을 쓰며 불평했다.
“그렇긴 하죠. 서녕에 좀 더 계시지. 그랬으면 귀찮게 아미산을 오를 필요도 없는데 말이에요.”
“귀찮은데도 불구하고 그 먼 길을 달려와 밥을 사주겠다니. 대단한 대접이군.”
“제 말이. 뭐 오래전부터 결심한 일인데 어쩔 수 있나요.”
대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문답은 자네가 하고 있구먼. 정말 밥을 사려고 온 게 맞나?”
“이러다간 끝이 없겠네요. 장문인은 어디 계시죠? 직접 뵙고 허락을 받을게요.”
“일이 있어 출타한 지 며칠 됐네. 듣는 귀가 너무 많아서 곤란하면 노납에게만 은밀하게 말해보게. 지금은 노납이 본파 최고 결정권자야. 들어보고 판단하지.”
섬랑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대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간을 끌수록 손해인 건 자신이었다.
-밥 먹으러 가는 김에 겸사겸사 반주도 곁들이려고요. 천하에서 손꼽히는 술꾼이라던데 한 번쯤 겨뤄봐야죠.
대정은 섬랑의 전음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무어라? 누가 천하제일 술꾼인지 겨루겠다고?”
“…….”
섬랑은 하도 어이가 없어 멍하니 대정을 바라봤다.
자기만 들을 수 있게 얘기하라고 해놓고는 입 밖으로 꺼내면 어쩌자고?
대정이 쭈글쭈글한 얼굴에 주름을 더 만들며 부탁했다.
“흘흘.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나.”
“지금 안 그러게 생겼어요?”
“내 몰골을 보게. 전음 같은 걸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야.”
“덕분에 크게 깨달았네요. 앞으로는 방심하지 않을게요.”
깨달음을 얻은 건 섬랑뿐만이 아니었다.
아미파 비구니들은 입을 떡 벌리고 섬랑을 쳐다봤다.
‘얼마나 사특한 계교를 부리는가 했더니…….’
‘……누구의 주량이 센지 대결하러 온 거라고?’
혜진은 속가제자인 데다 중년에 접어들었기에 술을 마셔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주량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알음알음으로 알려진 지 오래였다.
심지어 천하제일이라는 풍문까지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
술꾼이라 자부하는 자라면 승부욕이 치솟을 수밖에.
그런데 그건 그거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교 소교주가 무공도 아니고 주량을 겨루려고 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대정 역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말 큰일이군.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자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고.”
“저기요, 저 아직 여기 있는데요.”
“그러니 문제란 말일세. 조금 전에 말한 내용이 사실이라고 맹세할 수 있나?”
“물론이죠. 제 일행을 인질로 여기 두고 갈까요?”
단성오가 묵영대를 대표해 분통을 터뜨렸으나 섬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진지한 얼굴로 대정만 주시했고, 대정 또한 장난기를 걷어내고 엄숙하게 대응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믿을 수밖에. 혜진아, 이리 오거라.”
“네, 사숙조.”
혜진이 오자 대정이 물었다.
“네 의향은 어떻느냐?”
“소교주가 한 가지만 더 맹세하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혜진은 섬랑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기면 결과에 승복하고 조용히 떠나시오.”
섬랑도 혜진을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그대로 돌려 드리죠. 졌다고 난동부리시면 안 돼요.”
“그럼 받아들인 것으로 알겠소.”
“저도요. 빨리 가죠.”
두 사람은 아미산을 내려갔다.
마인들과 비구니들이 그 뒤를 따랐다.
섬랑이 뒤를 힐끔 돌아보고 투덜거렸다.
“믿기는 개뿔. 엄청나게 끌고 오시네.”
비구니들이 얼마나 많이 따라오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대연에게 업힌 대정이 있었다.
대정이 섬랑의 불평을 듣고 대꾸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게. 다시 못할 구경인데 가봐야지.”
“네, 네. 암요, 그렇고말고요.”
“저런. 자네 설마 토라진 건 아니겠지?”
“그러기 직전이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 편히 감상하실 수 있는 곳에서 하죠.”
섬랑은 그럴듯한 노상 반점으로 안내해 달라 요구했고 대정은 기꺼이 승낙했다.
잠시 뒤, 그들은 아미산 근처에 있는 마을로 가 널따란 노상 반점을 통째로 빌렸다.
섬랑은 중앙에 있는 탁자 앞에 앉아 호기롭게 외쳤다.
“여기요! 잘 팔리는 요리와 술 좀 주세요! 술은 동이째로, 있는 거 전부 다요!”
반점 사람들은 섬랑의 말도 안 되는 주문과 마인들의 흉악한 얼굴을 보고 기겁했으나 아미파 여승들도 있었기에 열심히 요리하고 접시와 술동이를 날랐다.
“여, 여깄습니다.”
“고마워요.”
섬랑은 탁자가 빈틈 하나 없이 빼곡히 채워지자 마주 보고 앉은 혜진에게 말했다.
“먼저 한 잔 따라 드릴게요.”
혜진이 담담히 거절했다.
“되었소. 동이로 마십시다.”
“네?”
섬랑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고 혜진은 행동으로 확인시켜줬다.
커다란 술동이를 번쩍 들어 입에 대는가 싶더니 모조리 마셔 버렸다.
그리고 땅바닥에 빈 술동이를 사뿐히 내려놨다.
섬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망할. 듣던 것보다 더하잖아.”
“누구에게 어떤 소리를 들은 것이오?”
“말 많은 아저씨한테 며칠 동안 고문당했죠.”
섬랑도 술동이를 들어 그 속에 가득 찬 술을 말끔히 삼켰다.
“자, 다시 시작하죠.”
“기다리던 참이었소.”
“네?”
절대고수가 일검으로 산을 가르는 것처럼 혜진은 단번에 술동이를 비웠다.
섬랑도 지지 않았다.
중원에 네가 있으면 신강에는 내가 있다는 듯이 술을 들이켰다.
“크으. 목구멍이 뻥 뚫리네.”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도 잠시.
혜진이 거침없이 다음 술동이를 잡자 숨통이 꽉 막히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소, 소저. 남은 술동이가 별로 없으니 잔으로 가죠.”
“벌써 어둑어둑해지려 하오. 밤을 꼬박 새울 셈이오?”
“아니, 불문에 한 발 걸치신 분이 성격이 왜 그리 급하세요. 주도(酒道)를 지키며 마셔야죠. 향과 맛을 음미하며 대화도 좀 하고 그래야 술자리 아니겠어요?”
혜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승낙했다.
“마시는 방식까지 정한 건 아니니 그렇게 합시다.”
섬랑은 환하게 웃다가 혜진의 이어지는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점소이, 이곳 술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니 다른 곳에서도 구해주시겠소? 사례는 하리다.”
“아, 알겠습니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구경하던 점소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술이란 술은 모조리 모아왔다.
반점 안팎은 원래 있던 마인들과 비구니들로도 모자라 소문을 듣고 몰려온 구경꾼들까지 더해져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섬랑은 점소이들이 친절하게도 피워준 화톳불의 온기를 받으면서도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빌어먹을. 두주불사(斗酒不辭)가 아니라 술 귀신이 따로 없네. 지면 개망신인데.’
어려운 때일수록 강하게 나가야 하는 법.
정신을 바짝 차리고 위엄 있게 제안했다.
“생각해 보니 잔은 너무 작네요. 대접으로 가죠.”
“그럽시다.”
“분위기도 풀 겸 서로 따라주고요.”
“편한 대로 하시오.”
주거니 받거니.
두 사람은 번갈아 상대의 대접을 채우고 자신의 대접을 비웠다.
그렇게 몇 대접이나 마셨을까?
섬랑이 불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친. 자오 아저씨 말을 그대로 믿은 내가 바보지.”
혜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단주가 그대를 거둔 건 알지만 자오 대협을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줄은 몰랐소.”
“수다를 하도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은 만큼 친분도 쌓였죠.”
혜진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괜히 다설범협(多舌凡俠)이 아니지 않소. 그래도 자오 대협의 수다가 그립소. 잘 계셔야 할 텐데.”
“크흐. 대인과 함께 가셨는데 뭐가 문제겠어요? 아저씨를 만나는 사람들이 문제지.”
“대인은 단주를 지칭하는 말이오?”
“단주가 대인을 의미하는 말이면 맞겠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정도무림에서는 정광을 진옥룡이라 불렀고 천마신교에서는 천신으로 떠받들었지만, 두 사람은 정광과의 끈끈한 유대에서 비롯된 다른 호칭을 썼기에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끄윽. 조, 조금 천천히 마시죠.”
“그럽시다.”
섬랑은 술을 따라주며 정광을 험담했다.
“대인이라고 완벽한 건 아니에요.”
혜진은 술을 마시고 섬랑의 대접을 채워줬다.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범인보다 한참 모자란 부분도 있고요.”
“그렇소? 그런데 왜 아까부터 내공을 펼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오?”
“아까 아미산에서 실수했는데 또 그럴 순 없죠.”
“아직 완전히 취하진 않았군. 하던 얘기나 계속해 보시오.”
“대인이 많이 모자란 부분요?”
섬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허나 정광의 험담이 아니었다.
그와 어떻게 만나고 어떤 일을 함께했는지에 대한 얘기였다.
혜진은 묵묵히 듣다가 섬랑의 입이 닫히자 물었다.
“갑자기 단주에 관한 말만 하다니. 그와 쌓은 추억을 내게 나눠주는 것이오?”
“히끅.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섬랑은 술을 마셔서 딸꾹질을 가라앉혔다.
“대인은 사람 마음을 잘 몰라요.”
“그런 편이긴 하오.”
“여인의 마음은 더 모르고요.”
“…….”
혜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나직이 동의했다.
“그런 편이기도 하지.”
두 사람은 묵묵히 술을 마셨다.
먼저 침묵을 깬 건 혜진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시오?”
“하하. 대인은 원래 그렇고 자오 아저씨도 무척 둔감하지만 저는 아니거든요.”
“나를 위로하는 것이오?”
“대인께 신세 진 게 워낙 많다 보니 이런 거라도 하려고요. 맞다, 부동심을 이루셨어요?”
“잘 모르겠소.”
“대인을 좋아하셨어요?”
혜진은 아무 말 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처연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후회나 슬픔,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영원히 변치 않을 마음 또한 있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리라.
섬랑은 혜진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복잡하기로 따지면 그대의 앞길만 할까.”
혜진은 서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만 밤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들 중에서 유난히 큰 별이 눈이 시리도록 빛났다.
마치 마음속에 굳건히 남아 있는 누군가가 씩 웃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의 별호 중 하나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단주는 마협(魔俠)이었는데 소교주는 무엇이 될까 궁금하오.”
“뻔하죠. 천하제이인! 대인께서 좀 빨리 가주시면 천하제일인이 될 거예요.”
섬랑은 주즉시공(酒卽是空)을 일으켜 취기를 말끔히 날려 버렸다.
“너무 늦었네요. 그만 갈게요.”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오?”
“어허. 끝이 안 보이니까 이쯤에서 무승부로 마무리 지으려는 거죠.”
섬랑이 정색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갈게요.”
“배웅하진 않겠소.”
“바라지도 않았거든요.”
“아미타불. 그대의 무운과 건승을 비오.”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섬랑은 대정과 대연에게도 대충 인사를 던지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규서를 비롯한 마인들이 조용히 따라왔다.
섬랑은 한동안 걷다가 뒤를 슬쩍 돌아봤다.
혜진이 섬랑을 응시하며 합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일렁이는 화톳불이 부처의 후광처럼 빛났다.
섬랑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부동심을 이룬 게 아니라 부처가 되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