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25화 (525/569)

외전 6화

중상모략(中傷謀略)

섬랑은 점창파(點蒼派) 장로 고양환과 싸운 후 선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세상이 어둠에 잠기어 별빛이 내려도 그랬고, 심지어 식사까지 선실로 가져오라 해서 대충 해결했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연규서가 나섰다.

섬랑의 선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 진지하게 물었다.

“소교주, 폐관수련(閉關修鍊)은 잘 되고 있습니까?”

“응.”

“깨달음을 얻으신 것 같군요. 축하드립니다.”

“아직 아닌데. 무슨 소리야?”

연규서는 침상에서 뒹굴뒹굴하는 섬랑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침상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르셨잖습니까. 실로 공전절후(空前絶後)한 일이지요.”

섬랑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 뭐 이런 걸 가지고. 많이 부러운가 봐. 까짓거 내가 도와주지. 한 삼 년 정도 침상에만 누워있게 해줄게.”

연규서가 담담히 사양했다.

“마음은 감사하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잠시 후 하선해서 육로를 달려야 합니다.”

“뭐?”

섬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벌써 의빈(宜賓)이야? 생각보다 꽤 빨리 왔네.”

“금양(金陽)입니다. 의빈에 가려면 최소 이틀은 더 가야 합니다.”

섬랑의 상체가 다시 뒤로 넘어갔다.

“망할. 농이었다니. 운 좋은 줄 알아. 때릴 의욕도 없다.”

“진담입니다.”

섬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따졌다.

“금양이라며. 네가 고집스럽게 짠 계획은 의빈에서 내려 말을 타는 거였잖아.”

“시간을 아끼려면 그래야 하지요. 허나 소교주께서 이렇게 지겨워하고 계신 데 어쩔 도리가 있습니까.”

“……!”

순간 침상에 누워있던 섬랑이 사라지더니 귀신처럼 연규서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흐뭇하게 웃으며 연규서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는 역시 내 장자방(張子房)이라니까. 아암, 이래야지. 이십 년 전에 받아주길 잘했어.”

“제 기억과 다르군요. 제가 싫다고 거절했는데도 못 들은 척하며 가버리셨습니다만.”

“어쨌든 결국에는 승낙했잖아. 그럼 된 거지.”

섬랑은 싱글싱글하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걱정스러운 심경을 토로했다.

“근데 나중에 일정이 늦어졌다고 잔소리쟁이 아줌마가 화내지는 않을까?”

연규서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이 정도 돌발상황은, 아니. 사실 돌발상황도 아니지요. 소교주의 변덕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여유 있게 짰으니 괜찮을 겁니다.”

“기분은 나쁜데 다행이네. 그런데 너,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어. 정말 확신해?”

“소교주께서 변덕을 적당히 부리시면 가능할 겁니다.”

섬랑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연규서를 격려했다.

“후우우. 그래, 수고했어. 서로 노력해보자.”

“소교주께서만 노력하셔야지요. 배가 접안하면 나오십시오.”

연규서는 선실 밖으로 나가다가 우뚝 멈췄다.

섬랑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잔소리할 게 또 있어?”

연규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셔도 됩니다.”

“고마워라.”

“점창 장로를 상대하고 실망하신 건 이해하나 기운 차리십시오. 중원에도 진짜 고수로 추앙받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

섬랑은 연규서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냅다 달려가 손바닥으로 등을 때렸다.

찰싹!

선실을 울리는 경쾌한 소리만큼 시원한 미소가 섬랑의 얼굴에 피었다.

“나를 뭐로 보고 그딴 소리를. 그래도 정성을 생각해서 흘려듣진 않을게.”

* * *

섬랑은 배가 아직 부두에 닿지도 않았는데 선실에서 나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거대한 강이 도도히 흐르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주 탁 트이는구나!”

섬랑의 시선이 뭍으로 향했다.

“강이 이 정도인데 땅은 또 얼마나 광활할까? 뭐 그래 봤자지. 내가 질풍처럼 질주해주마.”

“…….”

묵영대 이조장 단성오는 섬랑의 뒤에 시립해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근처에 있는 연규서에게 전음을 보냈다.

-연 소가주, 금양에서 내리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소.

-무슨 뜻이오?

-의욕이 너무 과해졌잖소. 무슨 사고를 치실지 불안하오.

연규서가 고개를 미미하게 저었다.

-불만이 쌓이다가 폭발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소? 어울리지 않게 무기력해진 모습을 보는 것도 불편하고.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소만.

-…….

단성오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교주는 소교주답게 제멋대로여야 했다.

‘하긴. 그 변덕 덕분에 내가 멸혼생사투에서 패배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지.’

그뿐이랴.

그 묘한 매력에 이끌려 충성을 맹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번 중원행의 경로를 떠올리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점창파 무리는 명분까지 챙긴 상태로 사망자 없이 끝내버려 거리낄 것이 없으나 소교주가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긴 힘든 것이, 근 이십 년 동안 곁에서 보아온 무수한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됐다. 고민해봐야 소용없어.’

머리를 쓰는 이는 따로 있었다.

-이미 쌀이 익어서 밥이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알겠소이다.

-잘 생각하셨소, 이조장.

-앞날이 막막하나 연 소가주만 믿겠소.

-…….

-잠깐. 왜 인상을 찡그리시오? 설마 나처럼 불안한 것을 넘어 머리까지 아픈 게요?

연규서가 인상을 억지로 풀고 환하게 웃었다.

-하하. 농이 과하구려. 묵영대가 있는데 그럴 리 있나. 앞으로 잘 부탁하오, 이조장.

-아니! 무슨 비책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오! 거의 다 왔다. 둘 다 뭐해? 전음으로 쑥덕대는 건 그만하고 내릴 채비나 해.”

섬랑은 점점 가까워지는 부두를 주시하며 양 손바닥을 비볐다.

그러다 서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눈매가 날카로운 중늙은이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장강수로제일운방이 자랑하는 특급 쾌속선의 선장이었다.

“왜요?”

선장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이미 삯을 치르셨으니 여기에서 대기하겠소.”

“배를 통째로 빌렸으니 당연히 그러셔야죠.”

“단, 정해진 기일을 넘기면 바로 출항할 것이오.”

“정 없이 왜 이러세요? 그게 없으면 융통성이라도 발휘하시죠.”

“융통성은 계약서에 명시된 의빈이 아니라 금양에 정박하는 것으로 전부 소진했소.”

“이런, 어떡하지? 늦을지도 모르는데.”

“……!”

섬랑의 말에 단성오가 두 눈을 번들거리며 연규서에게 눈짓했다.

연규서가 한숨을 쉬고 나섰다.

“소교주, 변덕을 안 부리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조하신 지 한 식경도 안 됐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시간은 충분하거늘, 무슨 꿍꿍이로 그러십니까?”

“꿍꿍이라니, 나를 뭐로 보고.”

섬랑이 정색하며 해명했다.

“사람 일이란 건 모르잖아. 만사는 불여튼튼이라고 혹시라도 늦게 되면 어떡하나 그러지.”

무척 일리 있는 말이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참다못한 단성오가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다그쳤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나으니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저희도 대비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누구를 죽이시려는 건지…… 아니, 개인이면 오래 걸릴 리가 없지. 어떤 조직입니까? 설마 여럿입니까?”

연규서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말렸다.

“이조장, 그만하시오.”

“지금 그러게 됐소?”

“외인이 있소이다. 소교주께서 어느 가문, 어떤 문파의 피로 목욕을 하려고 하시는지 소문이 퍼져봐야 좋을 게 없지 않소.”

“아!”

단성오는 탄성을 지르고 섬랑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것들이 진짜! 적당히 해! 그럴 일 없으니까!”

“그럼 됐습니다.”

연규서가 어느새 차분해진 얼굴로 권했다.

“다 왔군요. 내리시지요.”

“……빌어먹을. 계속 튕기다가 승낙했던 그때 차버릴걸, 괜히 받아서 이 고생을 하네.”

섬랑은 못마땅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배에서 뛰어내렸다.

연규서와 단성오, 묵영대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선장은 멀어져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수하에게 명했다.

“총채(總寨)와 상단(商團)에 알려라. 마교 소교주가 사천성 금양에서 하선해 육로로 이동한다고.”

“네, 선장. 사람을 붙일까요?”

“바로 발각될 텐데 뭐 하러. 불필요한 소모다.”

“개죽음당할 게 뻔하다는…… 말씀이군요.”

수하가 중간에 말을 길게 끈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마교 소교주라면 당연히 추적자를 죽이겠지만, 이제껏 겪은 이 소교주는 무공을 모르는 수부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자였기 때문이다.

‘죽이지 않는 건 말이 안 되는데. 거참, 그렇다고 꼭 그럴 것 같지는 않고.’

선장은 내심 갈팡질팡하는 수하와 달리 소교주가 살수를 펼칠 거라 확신했다.

가끔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던 어두운 위엄 때문이었다.

‘위험한 인물이다. 긴장의 끈을 놓쳐선 안 돼.’

선장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수하가 서신에 적을 내용을 덧붙였다.

“정해진 기일로 미루어 보면 상당히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깊은 곳이라 하면……?”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

선장은 왠지 모르게 떠오른 지명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입에 담았다.

“그 근처에 있는 당가타(唐家陀)도 가능하겠지.”

* * *

섬랑은 굳이 힘들게 달릴 생각이 없었다.

바로 마방(馬房)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섬랑 일행이 좀 많은가?

말이 몇 필이나 필요한지 설명하니 마방 주인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재신이 왔구나!’

무척 급하다고 하는데 그 많은 말들을 일일이 확인할 시간이 있을 리 있나.

조금씩 하자가 있는 말들을 팔아치울 기회였다.

하지만 기쁜 마음도 잠시.

마방 주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아니야! 사신이었어!’

보통 무인이 아니라 생김새도 분위기도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자들이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지독한 두려움이 순수한 양심을 끌어냈다.

그는 준마(駿馬)만 추려서 내밀며 더없이 적정한 가격을 제시했다.

그때까지 무료하게 지켜보고 있던 섬랑이 휘파람을 불었다.

“생각보다 싸네. 여기 시세가 이 정도인가.”

마방 주인은 다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더 싼 곳도 있긴 할 겁니다.”

“저런.”

“허나! 이놈들보다 좋은 말은 아닐 게 분명합니다. 또한 이 정도 등급의 말들을 파는 곳이라면 제가 말씀드린 것보다 비싼 가격을 부를 겁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섬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행에서 진심이 물씬 풍기네요. 좋아, 이러면 믿을 수밖에 없지. 가면서 확인해 볼게요.”

“……!”

아니, 믿겠다면서 무슨 확인을!

그게 끝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되팔 예정이니 그때도 잘 부탁드려요.”

주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후에 손해를 보든 말든 간에 빨리 이곳에서 내보내는 게 최우선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근데 아미산(峨嵋山)에 가려면 어떡해야 하죠?”

“그건…… 허억!”

마방 주인은 대경실색했다.

갑자기 보이지 않는 칼날들이 날아와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섬랑이 혀를 차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연규서와 단성오가 쏟아낸 살기가 거짓말처럼 지워졌다.

섬랑은 두 사람을 한 번씩 쏘아본 뒤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마방 주인에게 속삭였다.

“나쁜 사람들이 흉악한 짓 못 하게 했으니 계속 말해보세요.”

“……!”

마방 주인은 전신에 소름이 끼치며 식은땀이 흘렀다.

착한 척하는 이놈이 그 나쁜 놈들의 수괴인 제일 나쁜 놈이었지만 어쩔 수 있나.

열과 성을 다해 떠들었다.

“서, 성도와 이어지는 북쪽 관도(官道)로 가십시오. 팔백리쯤 말달리시다 보면 왼쪽에 아미산이 보일 겁니다.”

“오호라. 어차피 가는 길에 있었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섬랑은 말을 재촉해 달렸다.

연규서가 왼쪽에 바짝 붙어서 말달리며 따졌다.

“갑자기 웬 아미산입니까? 없던 일정을 대충 끼워 넣을 만큼 시간이 넉넉하진 않습니다.”

“아까 못 들었어? 가는 길에 있다잖아. 잠깐 들르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섬랑 오른쪽에 붙은 단성오가 추궁했다.

“역시 이렇게 줄 알았습니다! 아미산을 홀라당 불태우기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생사람 잡지 마, 인마.”

“그럼 아미파에 뛰어들어 칼춤을 추시려고요? 산에서 내려가기도 전에 사천성 무인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덤빌 겁니다. 저희가 마음에 안 들면 직접 목을 치시지, 왜 남의 손을 빌리려고 하십니까?”

“얼씨구. 가지가지 하네. 중상모략(中傷謀略)도 정도가 있지. 작작 좀 해라. 자꾸 그러면 화낸다.”

단성오는 섬랑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연규서는 정면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덕분에 섬랑은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강 위에 둥둥 떠 있기만 하다가 땅을 달리니 좋네.’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사람은 땅을 딛고 사는 존재였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섬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아미에 가는 거, 잘하는 짓일까?’

뭐 아니면 아닌 거고.

오래전부터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는데 어쩌라고.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게 제일이야.’

식사와 노숙을 거듭하며 말달렸다.

그리고 결국, 목적지 근처에 이르렀다.

섬랑은 높이가 천장(千丈)쯤 되는 아담한 아미산을 감상하다가 명을 내렸다.

“인근에서 제일 큰 도시로 간다.”

“……!”

도시?

난데없이 거길 왜?

일행의 군사 역할을 하고 있는 연규서가 무겁게 물었다.

“소교주, 그곳에서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쓸 만한 건 닥치는 대로 사들일 거야.”

섬랑의 이어지는 말에 연규서를 비롯한 마인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절에 시주할 거거든. 금원보 같은 것보다 부피가 큰 현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올라가는 게 더 있어 보이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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