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마룡출현(魔龍出現)
자타가 공인하는 운남성의 패자이자 구파일방(九派一幇) 중 구파(九派)에 속하는 명문 점창(點蒼).
그들은 소림이나 무당처럼 불문(佛門)과 도문(道門)이 대다수인 구파에서 유일하게 속인(俗人)으로 이루어진 문파다.
속인이 어떤 존재인가?
오욕칠정(五慾七情)에 충실하다 보니 추구하는 점도 다를 수밖에.
점창은 속세에 큰 관심이 없거나 최소한 대놓고 이권을 탐하는 걸 피하는 여타 문파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평소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조상(潮商)의 부탁을 받고 부두까지 댓바람에 달려와 흉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 일의 책임자로 뽑힌 고양환은 장강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직이 탄식했다.
“내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 먼 거리를 허겁지겁 말달려와 반 시진째 강바람이나 맞고 있다니.”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제자 한지웅이 조심스레 위로했다.
“사부,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장문인께서 그만큼 믿으시기에 맡기신 거 아니겠습니까.”
고양환은 인상을 찡그렸다가 풀고 허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되었다. 밀려난 게 사실이니 마음 쓸 것 없어.”
“사부.”
“장문인은 그 많은 장로 중에서 나를 지목했다. 하고많은 사안 중에서 하필이면 이런 체면 깎이는 일에 말이다. 이보다 확실한 방증이 또 있을까.”
한지웅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얘기여서였다.
선량한 상인과 백하문(白河門)에게 행패를 부린 악적을 처벌해 이 땅에 협의(俠義)가 살아 있음을 알리라는 명이었으나 누가 봐도 조상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 아닌가?
한지웅은 안타까워하는 척하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그러게 줄을 좀 잘 서시지 그랬소. 사부 때문에 나까지 앞길이 막히게 됐는데 어떻게 책임질 거요?’
사람이 욕심이 있어도 정도껏 있어야지.
수년간 계속됐던 차기 장문인 경쟁에서 유력한 후보를 지지하면 얻을 것이 적다며 엉뚱한 이를 밀다가 결국 져버렸다.
이런 판국에 신임 장문인이 고양환을 곱게 볼 리 있나.
누구나 꺼리는 일에나 쓰이게 된 것이다.
한지웅은 어리석은 사부를 흘겨보고 현 상황을 되짚었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어. 지금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좋은 시대야.’
야만족들은 이십 년 전 관군과 무림맹이 힘을 합쳐 토벌한 이후로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대명(大明) 황제는 선정(善政)을 펼쳤고 그 은덕은 변방에 위치한 운남성까지 미쳤다.
어디 그뿐이랴.
정족상단(鼎足商團)이 장강 물길을 잘 닦아놓은 덕분에 유통이 활발해진 상태.
점창의 동업자라 할 수 있는 조상이 정족상단에 밀려 영향력이 쪼그라든 건 사실이나 그간 얻은 이익은 물량이 늘어난 덕분에 이전보다 더 많지 않은가.
‘더구나 본파(本派)는 본파를 제외한 구파일방과 칠대세가에 비해 전력 손실이 거의 없었어.’
야만족들을 상대하느라 곤륜산에서 치러진 정마대전(正魔大戰)에 참전하지 못한 덕분이었다.
‘운남은 갈수록 번영할 것이고 본파는 여전히 강하다. 소림은 넘기 힘들겠지만 그다음 자리는 가능할지도. 치고 나갈 적기고 장문인도 그러려고 해.’
점창이 최전성기에 오를 기회를 맞이한 시점에 멍하니 밀려나 있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공을 세워 장문인의 눈에 들어야 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쓸모부터 증명하자.’
권력자는 능력이 뛰어난 이만 중용하는 게 아니다.
부리기 쉬운 자일수록 더 곁에 두기 마련.
‘그깟 체면 좀 상하는 게 뭐 대수라고. 훗날 힘을 가지게 되면 가뿐히 덮어주마.’
세상은 과정보다는 결과다.
한지웅은 속으로 되뇌다가 두 눈을 빛냈다.
점처럼 보일 정도로 멀리 있던 배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장강수로제일운방이 자랑하는 특급 쾌속선이었다.
한지웅은 선수(船首)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확신했다.
‘적의(赤衣)를 걸친 대단한 미청년이라. 저놈이군.’
한 패거리로 보이는 놈들은 하나같이 흉악한 얼굴에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백하문도들을 일방적으로 구타했다니 어중이떠중이는 아니겠지만 그래봤자지.’
속가는 속가일 뿐이고 속가 간에도 급이 있다.
백하문은 점창이 거느린 수많은 속가무문(俗家武門)에서 평균 이하의 조직이었다.
‘일단 비위부터 맞춰주자.’
한지웅은 고양환에게 머리를 공손히 숙였다.
“저놈들인 것 같습니다. 소를 잡는 칼로 닭을 잡는 건 말이 안 되니 제자가 처리하겠습니다.”
쾌속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고양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네 뜻이 정 그러면 그렇게 하거라.”
“감사합니다, 사부.”
한지웅은 한 번 더 예를 표하고 뒤에 늘어서 있는 동문(同門) 사람들을 슬쩍 둘러봤다.
체면 깎이는 일에 왜 적극적으로 나서는지 의아해하는 얼굴들이었다.
한지웅은 내심 비웃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거늘, 배가 불렀구나.’
어떤 임무를 받든 간에 앞장서서 처리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장문인의 부름을 받게 되리라.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부두 끝까지 걸어가는 사이, 쾌속선도 부두에 접안해 무거운 닻을 내렸다.
그러자 선수에 선 미청년이 씩 웃으며 인사했다.
“반가워라. 점창?”
“……!”
한지웅의 눈썹이 솟구쳤다.
어린놈이 무슨 말이 이렇게 짧단 말인가?
“그렇다. 너희가 선량한 상인과 백하문도들을 해쳤느냐?”
미청년의 다음 말은 조금 길었다.
“더러운 돼지와 시정잡배였는데.”
“……입이 참 걸구나.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는 건가.”
“복수하려고? 덤벼.”
“이놈이 감히!”
한지웅은 더 참지 못하고 분노를 토했다.
“듣던 대로 망종이로구나! 당장 내려와라! 본때를 보여주마!”
“싫은데.”
미청년이 빙글빙글 웃으며 약을 올렸다.
“급한 사람이 와야지. 올라와.”
“…….”
“아, 어서. 왜, 겁나?”
“…….”
한지웅은 주먹을 움켜쥐고 미청년을 쏘아봤다.
놈이 다른 배에 타고 있었으면 벌써 창응신법(蒼鷹身法)으로 날아올라 목을 베었으련만, 장강수로제일운방의 특급 쾌속선이다 보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비겁한 놈. 지금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를 믿고 이러는 것이냐?”
미청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 장강수로십팔채가 두려워서 입만 놀리는 거였어? 똥개도 자기 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거늘. 점창이 운남성의 패자라더니, 낭설인가 보네.”
한지웅이 폭발했다.
“이놈! 당장 죽여주마!”
“그래? 한번 해봐.”
“헉!”
한지웅은 두 눈을 부릅떴다.
미청년이 어느새 귀신처럼 내려와 이죽거리고 있는 것 아닌가?
반사적으로 발검해 휘둘렀으나.
선수필승(先手必勝)은 무슨.
늦게 출발한 미청년의 손바닥이 더 일찍 도착했다.
한지웅의 왼쪽 뺨을 시원하게 후려갈겼다.
짜아악!
“크악!”
한지웅은 부러진 이빨들을 토하며 훨훨 날아갔다.
미청년은 한지웅이 강물에 빠지는 모습을 보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받은 고양환은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보통 놈이 아니구나!’
느낌이 영 안 좋아 간교한 제자 놈이 나대는 걸 허락했는데 잘한 일이었다.
놈이 아무리 방심했다 해도 일수에 처리할 줄이야.
“너는 누구냐?”
미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배에서 뒤이어 뛰어내린 이들 중 화려한 녹의(綠衣)를 입은 곱상한 장년인에게 투덜거렸다.
“규서, 어떻게 된 거야? 명문정파는 개뿔. 코를 킁킁거리지 않아도 악취가 진동하잖아. 같은 구파일방인데 곤륜과 왜 이렇게 차이가 나?”
“괜히 위선자들이라고 폄하하겠습니까. 곤륜이 특별한 겁니다.”
“그렇긴 하지.”
“저도 하나 여쭙겠습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뛰어내린 거? 배를 오래 탔더니 뱃멀미가 나서 그만. 우웩.”
미청년은 토하는 시늉을 하고 얼굴에 자상이 가득한 장년인에게 동의를 구했다.
“성오, 너도 그렇지?”
장년인이 얼굴을 바짝 디밀며 으르렁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십시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저희는 뒀다 뭐에 쓰려고 이러시냔 말입니다.”
미청년은 장년인의 얼굴을 손으로 밀며 중얼거렸다.
“너희만 재미를 보면 쓰나. 더구나 호호백발 노인이 왔는데 이쪽도 걸맞는 예를 갖춰야지.”
“아니, 예는 무슨…….”
“시끄러워.”
미청년은 고양환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당방위인 거 보셨죠? 제자분 잘못이에요.”
미청년의 정체를 재차 물으려던 고양환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다른 점창 제자들이 강에 뛰어들어 한지웅을 건지는 모습을 슬쩍 보고 미청년을 주시했다.
“내 제자인 걸 어떻게 알았지?”
“배 타고 오면서 들었죠.”
“……그 먼 거리에서?”
“공을 세우려고 과욕을 부리는 제자와 그 제자를 이용해 상대의 실력을 떠보려는 사부의 대화다 보니 귀에 쏙쏙 박히던데요.”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구나. 곤륜에도 들렀다 온 것이냐?”
“네.”
“진옥룡이라는 천하제일인을 배출했으나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신선놀음이나 하는 곤륜을 본파보다 높이 보다니.”
“하늘과 땅 차이인데.”
“……너는 대체 누구길래…….”
“저기요.”
미청년이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무랐다.
“복수하러 오셨으면 그냥 하면 되지 왜 자꾸 누군지 물어요? 백하문 사람도 그러던데 상대를 재가며 복수하는 게 점창의 전통이라 이해하면 돼요?”
“……!”
이런 모욕을!
점창 제자들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고양환도 마찬가지였다.
‘죽여야 해. 무조건.’
이 부두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상인, 선부, 무인 등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멀찍이 물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 예감이 안 좋다고 어찌 물러날까.
점창 제자들에게 손짓으로 경거망동하지 말라 명하고 미청년을 향해 걸었다.
미청년도 일행에게 끼어들지 말라고 협박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스르릉-
고양환은 검을 뽑아 검첨(劍尖)으로 미청년을 겨눴다.
“병기를 들어라.”
미청년이 양손을 매만지며 대꾸했다.
“일단 해보고 생각할게요.”
“……적수공권으로 싸워서 졌다고 핑계를 댈 셈이냐? 죽은 자는 말을 못 한다.”
미청년이 히죽 웃었다.
“그러게요. 남기실 말이 있으면 지금 하시죠.”
“갈!”
고양환은 호통을 치며 검을 내질렀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검첨이 미청년의 가슴팍에 이르렀다.
천하가 인정하는 점창파의 절기(絶技), 사일검법(射日劍法)이었다.
고양환은 확신했다.
‘죽였다!’
허나 아니었다.
미청년은 검에 꿰인 잔상만 남기고 사라졌다.
“합!”
고양환은 당황하지 않고 즉시 사상보(四象步)를 밟았다.
신형을 움직이자마자 뼈가 시릴 만큼 세찬 바람이 그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실로 간발의 차이.
옷이 바스러지며 불에 덴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슨 놈의 권풍(拳風)이 이런 위력을!’
그게 끝이 아니었다.
등줄기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전율이 흘렀다.
수염과 머리털이 꼿꼿이 곤두서며 등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경고했다.
고양환은 공포심을 억누르며 신형을 돌렸다.
동시에 전력을 다해서 검을 휘둘렀다.
검이 분광검(分光劍)의 검로를 따라 움직이며 살벌한 검광을 수없이 뿌렸다.
‘팔 하나는 가져가 주마!’
소용없었다.
평생을 수련한 분광검. 그 절기로 만들어낸 검광들 사이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실낱같은 틈으로 주먹이 들어왔다.
그 주먹이 고양환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말도 안 돼!’
이게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콰앙!
* * *
고양환은 한동안 기절해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둘러보니 점창 제자들이 전부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어찌 이런 일이…….”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말끝을 흐리는데.
마침 부두를 떠나는 배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사람은 없으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고양환은 간신히 일어나 멀어져 가는 미청년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신의 기운이 빠지고 무기력한 마음만 남게 되었다.
‘구파일방의 장로씩이나 되어서 저렇게 어린 녀석에게 당하다니. 꼴좋게 됐군.’
고양환은 자신을 비웃다가 눈을 부릅떴다.
비슷한 얘기가 떠올라서였다.
‘아! 진옥룡이 강호초출(江湖初出) 때 공동파(崆峒派) 장로 영추자를 때려서 기절시켰다고 했는데!’
고양환은 웅묘(熊猫:판다)처럼 시꺼멓게 멍든 오른쪽 눈을 매만지며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너는 대체 누구냐?”
미청년이 피식 웃었다.
“아직도 복수하시려고요? 구파일방은 대를 이어서, 될 때까지 한다더니 과연.”
“그게 아니라…….”
“그래 주시면 심심하지 않을 테니 더 좋죠. 신강에 있는 탁목이봉(托木爾峰) 꼭대기로 찾아오세요. 제집이 거기 있으니까요.”
“무어라? 서, 설마?”
미청년이 두 손을 모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천마신교 소교주이자 장구한 세월 동안…… 아. 자꾸 하려니 귀찮네.”
“섬랑이구나!”
“네. 그냥 그걸로 쭉 가죠. 괜히 귀찮은 짓을 했네요.”
섬랑은 투덜거리며 선실에 들어갔다.
고양환은 쾌속선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인세(人世)에 마룡(魔龍)이 나타났구나! 어서 알려야 해!’
이날 오후.
점창산에서 수많은 전서구가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