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말세(末世)
“그래, 나다 이 새끼들아. 왜?”
“……!”
반점에 들어온 무인들은 멍한 표정으로 자기 귀를 의심했다.
구파일방의 하나요, 명실공히 운남성의 패자(覇者)인 점창(點蒼).
그 영광된 문파의 속가 사람들이 언제 이런 폭언을 들어봤겠는가?
그것도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선두에 서 있던 무인이 정신을 차리고 섬랑을 차갑게 노려봤다.
“오만방자한 것도 정도가 있지. 게다가 그런 욕설까지. 상종 못 할 종자로구나.”
“누가 할 소리를.”
섬랑은 피식 웃은 뒤 엄하게 힐책했다.
“어떤 놈이 감히 점창의 돼지를 괴롭히냐고? 그 돼지는 피골이 상접한 어린아이를 인정사정없이 구타했어. 그런데 복수를 하겠다고 몰려오는 꼴이라니. 이 천인공노할 놈들아,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무인들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의 우두머리는 달랐다.
때로는 대의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고 이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어서였다.
섬랑을 똑바로 보며 또박또박 반박했다.
“동(董) 대인의 손속이 다소 과했던 건 사실이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중요한 거래를 위해 품고 나온 전낭을 도둑맞았는데 누가 성인군자처럼 넘어갈까.”
섬랑이 코웃음 쳤다.
“웃기는 소리. 돼지가 직접 확인했지만 꼬마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
“수를 써서 빼돌렸겠지. 그 아이는 배수(扒手)다. 전에도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다가 잡혔었어.”
“점점 재밌어지네. 꼬마가 배수라 치자. 그 수가 뭔데? 전낭을 어떻게 빼돌린 거야?”
“…….”
정황상 추측한 것일 뿐이지 그걸 알 리 있나.
무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면 섬랑은 떠들 게 아주 많았다.
“거봐, 대답 못 하잖아. 의심만으로 애를 그 지경이 되도록 걷어차? 설령 훔쳤다 해도 그래.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겠어. 성인군자씩이나 갈 것도 없지. 사람이라면 꿀밤 한 대 정도 먹이고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섬랑도 배수 짓을 하며 자라지 않았던가?
상대를 비수로 찔러가며.
“내 말이 틀렸어? 입이 있으면 말해봐.”
있으면 뭐 하나, 유구무언(有口無言)인 것을.
무인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섬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짓했다.
“아직 밥도 안 나왔는데 밥맛 떨어지게 하네. 없으면 그만 꺼져.”
말도 안 되는 소리, 명분에서 밀린다고 자기 동네에서 꼬리를 내릴 수야 있나.
무인의 입에서 차디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까지 모욕하다니. 도를 넘어도 한참 넘는구나.”
“거참. 돼지가 네 패거리에게 돈깨나 찔러주나 봐. 많이 아끼는걸.”
“말조심해라! 본문은 점창의 속가인 백하문(白河門)이다!”
“쯧쯧. 사문 이름보다 ‘점창’을 말할 때 더 힘을 주네. 뒷배를 내세워서 겁박하려고?”
“갈! 나는 순찰당주 서상융이다! 네놈은 어디의 누구냐?”
“당장에라도 쳐 죽일 것처럼 들어오더니 왜 신상을 물을까. 백하문은 상대를 재가며 복수하나 봐.”
서상융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고쳐 잡았다.
이런 폭언까지 들은 이상, 남은 길은 단 하나였다.
섬랑 일행을 다시 한번 면밀히 훑어봤다.
‘장강수로제일운방(長江水路第一運幇)의 특급 쾌속선에서 내렸다고 했지. 하나같이 흉악하게 생겼지만 대단한 기운은 안 느껴져.’
곤륜의 텃밭인 청해성에 이런 무도한 놈들이 있을 리는 없고.
당가, 아미, 청성이 버티고 있는 사천성도 마찬가지.
서장에서 한몫 챙기고 들어온 흑도(黑道) 무리일 가능성이 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는 놈일 뿐이야.’
서상융은 은근히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기수식(起手式)을 취했다.
“말이 안 통하는 놈이구나! 와라!”
섬랑이 지쳤다는 듯 탄식을 하고 이죽거렸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마저 오지 그래? 점창이 와서 등을 떠밀어줘야 덤빌 수 있는 건가?”
“이놈이 감히!”
서상융이 분노를 토하며 섬랑을 향해 신형을 날리는 순간.
누군가 짧게 말했다.
“소묵, 막아.”
서상융의 눈이 커졌다.
세찬 바람이 부나 싶더니 어느새 땅딸막한 체구의 장년인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아닌가!
충돌하기 직전인지라 서상융은 검을 내려칠 수밖에 없었다.
“네 탓이다!”
장년인은 입이 아니라 불룩 솟은 승모근으로 대답했다.
쇳소리를 내며 검을 튕겨낸 것이다.
까앙!
“크윽.”
서상융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뒷걸음질 친 후 비난했다.
“이런 사술(邪術)을!”
땅딸막한 장년인 우소묵이 퉁명스레 정정했다.
“외문기공(外門氣功)이다. 꺼져.”
“헉!”
서상융은 검을 다급히 움직여 전면을 방어했다.
우소묵이 맹렬하게 휘두른 철퇴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철퇴는 서상융의 검을 박살 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육신까지 후려쳤다.
콰앙-
“끄아악!”
서상융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반점 벽에 부딪힌 뒤 바닥에 처박혔다.
그를 따라 섬랑 무리에게 달려들려던 백하문도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리쳤다.
“당주!”
“이럴 수가! 괜찮으십니까?”
바닥에 쓰러진 서상융이 수하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간헐적으로 움찔거렸다.
어쨌든 죽지는 않은 상황.
백하문도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일제히 시선을 돌려 우소묵을 비난했다.
“네 이놈!”
“다짜고짜 살수를 쓰다니! 마두가 따로 없구나!”
섬랑도 동참했다.
아까 우소묵에게 명했던 자를 삿대질까지 하며 나무랐다.
“성오! 미쳤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 걸 왜 가로채?”
단성오가 두 눈을 번들거리며 대꾸했다.
“임무를 행했을 뿐입니다.”
“좀 쉬어! 서로를 위해 요령 좀 피우라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에 안 드시면 제 목을 치십시오.”
섬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탄했다.
“내가 미쳤지. 이렇게 꽉 막힌 녀석을 거두다니…….”
연규서가 미소를 지으며 단성오를 편들었다.
“이조장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체면을 생각하셔야지요. 우도할계(牛刀割鷄)라. 소를 잡는 칼로 닭을 잡으면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소가 아니라 용.”
“그렇다 치지요. 저자들은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김새네. 마음대로 해.”
“존명.”
연규서는 우소묵을 보며 슬쩍 눈짓했다.
“저런. 우 오장(伍長), 괜찮소? 서상융이라는 자의 선공에 크게 다쳐서 반사적으로 반격한 것 같소만.”
우소묵이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눈살을 찌푸리고 억지로 비틀거렸다.
“으윽. 여기까지인가.”
“……!”
백하문도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누가 봐도 쌩쌩하거늘, 무슨 헛소리를!
허나 연규서는 깊이 공감했다.
“후우. 그럴 줄 알았소. 구 오장, 우 오장이 당해서 빈사 상태에 빠졌소이다. 이제 어떡해야겠소?”
고운 피부에 날씬한 몸을 가진 구자영이 큼지막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호. 이렇게 슬플 수가. 강호의 법도대로 복수해야지요. 조장,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단성오는 섬랑이 나서지 못하게 연규서와 함께 앞을 가로막으며 명했다.
“쳐.”
“존명!”
묵영대원들이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수많은 병장기와 손발이 백하문도들에게 쏟아졌다.
아무리 점창의 무공을 익혔다 해도 속가무문(俗家武門)에 속한 자들이 그 오의(奧義)를 어찌 알고 묵영대의 공격을 어떻게 견딜까.
굳이 마기를 끌어 올릴 필요도 없었다.
“끄아악!”
“커헉!”
백하문도들은 숨을 몇 번 쉬기도 전에 비참한 몰골이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섬랑은 인상을 쓰며 단성오와 연규서를 번갈아 봤다.
“쓸데없이 철두철미하기는. 이제 속이 시원하냐?”
단성오는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고 연규서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막는다고 포기하셨겠습니까. 흥이 깨져서 움직이지 않으신 것 아닙니까?”
“됐고. 놈들을 뒤져서 챙길 건 전부 챙기고 반점 밖으로 던져. 탁자도 의자도 여럿 망가졌는데 보상해줘야지.”
묵영대원들은 섬랑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백하문도들을 탈탈 털어 밖으로 던진 뒤 전표며 은자며 전부 반점 장궤(掌櫃)에게 건넸다.
한쪽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던 장궤는 울상을 지으며 두 손을 내저었다.
“소, 소인은 괜찮습니다. 그, 그저 죽이지만 말아주십시오.”
섬랑이 어이없어하며 따졌다.
“아니,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러세요.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 그래도…….”
“후환이 두려워서 그러시죠? 쫓아낸 놈들은 모두 기절해서 모르니 안심하고 챙기세요. 한패가 와서 물어보면 챙기신 건 빼고 있는 그대로 알려주시고요.”
“그, 그렇다면야.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빨리 요리를 마무리하고 술과 함께 내오겠습니다.”
피해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았지만 불안한 건 마찬가지.
반점 입장에선 어떻게든 무시무시한 악귀들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고 빨리 보내야 했다.
“무엇들 하느냐? 대인들께서 기다리신다!”
“네!”
숨죽이고 있던 숙수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필생의 역작을 만들고, 얼굴이 해쓱해진 점소이들은 필사적으로 미소를 머금은 채 시중을 들었다.
“오오.”
섬랑은 만족했다.
천마신교 총단에서 나온 이래로 제일 훌륭한 식사 아닌가?
“저기요, 장궤님.”
“네, 네! 뭐든지 분부만 하십시오!”
“요리도 뛰어나고 접대도 좋네요.”
“감사합니다!”
“숙수분들과 점소이분들께 사례하고 싶어서요.”
“역시 대인이십니다! 모두 기뻐할 겁니다!”
“역시 장궤님, 이해해 주시네요. 아까 받으신 거, 저분들에게 절반만 나눠주세요.”
“……네?”
나눠주라니?
삯만 주면 됐지, 내가 왜?
장궤가 황당해하자 섬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절반만 가지셔도 이득을 많이 보시는 것 같은데. 제가 셈을 잘못했나요?”
그럴 리가.
장궤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으며 되뇌었다.
“이득이지요. 큰 이득입니다. 분부하신 대로 나눠주겠습니다. 지금 당장 말입니다.”
장궤는 즉시 실행했고 온강반점 일꾼들은 졸지에 작은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
자연히 일꾼들이 섬랑을 보는 시선이 바뀔 수밖에.
악귀들의 수괴에서 진짜 대협으로 격상됐다.
식사를 느긋하게 즐기고 떠나는 섬랑의 등 뒤에서 진심이 담긴 인사가 쏟아졌다.
“조심히 가십시오, 대협!”
“대협의 무운과 건승을 빕니다!”
“네, 안녕히 계세요.”
반점 밖으로 나온 섬랑은 아직도 널브러져 있는 백하문도들을 일견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눈이 마주친 구경꾼들이 급급히 고개를 돌렸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곳곳에서 몰래 훔쳐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섬랑은 속으로 웃었다.
‘백하문의 기운이네. 힘이 부족하니 후일을 도모하겠다, 이건가.’
점창파에게 구원을 청했을 터.
제발 빨리 좀 왔으면.
섬랑은 미련 없이 신형을 돌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러다 배 놓칠라. 가자.”
“네, 공자.”
섬랑 일행은 쾌속선이 정박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새 소문이 퍼졌는지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조심스레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딴에는 알아듣지 못하도록 작게 얘기했으나 무림 고수의 귀를 속일 수 있나.
연규서가 발걸음을 옮기며 장탄식했다.
“천마신교 소교주를 진정한 대협이라고 칭송하다니. 말세가 따로 없군요.”
“그러게 말이야.”
섬랑도 인정했다.
“고작 몇 놈 패고 돈 좀 나눠줬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추켜세울 줄은 몰랐네. 백하문이. 아니, 점창이 얼마나 썩었길래 이럴까.”
얼마 전 지나온 청해성은 이러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곤륜 도사들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곤륜의 기상과 저력을 새삼스레 느끼는 하루였다.
‘뭐 대인께서 계시던 곳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섬랑 일행이 배에 오르자 눈매가 날카로운 선장이 기다렸다는 듯 명했다.
“출발한다!”
“하!”
수부들이 일제히 외치며 부산히 움직였다.
배는 장강수로제일운방의 특급 쾌속선답게 쭉쭉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섬랑이 뱃전에 기대어 빈둥거리고 있는데 선장이 다가왔다.
“큰 소란을 일으키셨다 들었소.”
“그 정도까진 아닌데.”
섬랑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자 선장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귀하가 구타한 돼지는 조상(潮商)에 속한 상인이오.”
섬랑이 연규서를 쳐다보자 바로 답이 나왔다.
“조상은 광동성(廣東省) 상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입니다. 운남의 상권을 꽉 잡고 있었지요. 허나 남궁세가, 백가상단(白家商團),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가 공동으로 출자한 정족상단(鼎足商團)에게 밀려났습니다.”
섬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선장을 돌아봤다.
“그래서요?”
선장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정족상단의 한 축인 장강수로십팔채 사람으로서 말하겠소. 조상을 무시하지 마시오. 아직도 그들의 힘은 만만치 않소이다. 점창은 그들의 청을 거절치 못할 것이오.”
“거기에 속가인 백하문도 망신을 당했으니 더하겠네요.”
“그렇소.”
“그리고요?”
선장은 섬랑의 태연한 얼굴을 응시하다가 나직이 물었다.
“내일 정박하는 곳에 점창이 몰려올 것이오. 그들을 모조리 죽일 셈이오?”
“설마요. 저를 뭐로 보시고.”
“그대들이 내 배에서 지낸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 나도 눈과 귀가 있소이다.”
“벌써 소문을 퍼뜨리신 건 아니죠?”
선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밖으로는 아니오. 내부에만 보고했소.”
“그 정도야 당연한 일이니 이해해드리죠. 그리고…….”
섬랑은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주시했다.
“점창은 만나보고 판단할게요. 어느 선에서 멈출지.”
“우리에게 피해만 안 가게 해주시오.”
“그러니까 봐서요.”
* * *
다음 날 정오 무렵.
섬랑은 부두에 모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많이도 몰려왔네. 인사나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