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22화 (522/569)

외전 3화

강호(江湖)의 낭만

따스한 햇살이 내려와 얼굴을 간지럽히고 부드러운 바람이 다가와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섬랑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완연한 봄맛을 즐기다가 흥에 겨워 중얼거렸다.

“그래, 이거지. 진작 나올 것을. 유람하기 딱 좋은 날씨야.”

신강(新疆)과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한정된 공간에 갇혀 지내다가 드넓은 곳으로 나오니 왜 이리도 좋은지.

모든 것이 신기했고 뭘 해도 유쾌했다.

특히 지금은 더 그랬는데, 큰 배에 올라 선수(船首)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통쾌감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하. 천하가 넓다 해도 이렇게 거대한 강이 있을 줄이야. 말로만 듣던 바다가 이럴까? 이봐, 규서. 가히 내 배포와 견줄 만하지 않아?”

“그건 무리입니다. 이 강은 장강(長江)이라 하는데 바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 할 수 있으나 길이만 해도 일만오천리(一萬五千里)가 훌쩍 넘지요. 소교주의 배포가 아무리 커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하하. 아냐. 길어봐야 강일 뿐이지. 일만오천리면 뭐 해. 너도 서책으로만 접했고 이번이 처음이잖아. 잘 봐봐. 이렇게 쭉쭉 나아가고 있는 거 안 보여? 이러다간 금방 갈 것 같은데 뭐.”

“장강수로제일운방(長江水路第一運幇)의 특급 쾌속선을 타고 있으니 빠를 수밖에요. 다른 배로 이런 속도를 내는 건 어림도 없을 겁니다. 정족상단(鼎足商團)이 중원에서 청해성까지 물길을 잘 닦아놓은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천하 정세와 지리를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구나. 수고했다. 성오, 너는 어때?”

“뭐가 말입니까?”

“이대로 가면 그리 오래지 않아 운남성에 다다를 거야. 고이륵단가의 뿌리인 대리국(大理國)이 있던 곳이잖아. 네 선조가 목에 힘을 주고 왕족 놀이를 했던 걸 상상해 봐. 가슴이 막 두근거리지?”

“제 고향은 쿠얼러입니다. 멸망한 지 오래된 나라엔 관심 없습니다.”

“……기분이 그다지 안 좋아 보이네. 선실에 들어가 쉬어.”

“제 임무는 소교주를 호위하는 것입니다. 항상 곁에 붙어 있을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하하. 하하하.”

섬랑은 건조하게 웃다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이것들이 진짜! 뭐가 그렇게 불만이길래 삐딱하게 굴어?”

성격이 불같은 단성오가 대꾸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입을 연 건 온유한 연규서였다.

그의 입에서 곱상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소교주, 제정신입니까?”

“무슨 말이야?”

“천마비고(天魔秘庫)를 털은 건 그렇다 칩시다. 교주가 되기 전에 세상 구경을 한 번이라도 해봐야겠다고 그 소란을 피워 나오시더니 이게 뭡니까? 천신께서 걸으셨던 길을 걸어 그분에 못지않다는 걸 증명하겠다니요?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섬랑은 당당히 설명했다.

“못지않은 건 내 잠재력을 고려한 거고. 지금 당장이라도 그분 다음은 돼. 쉽게 말하면 천하제이인이지.”

단성오가 안 그래도 흉악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천하를 발밑에 두긴커녕 비명횡사하겠군. 내가 미쳤지, 이십 년 전 그깟 서신에 속아서 충성을 맹세하다니.”

섬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언제 천하 운운했어? 너를 끌어올려 줄게. 나를 떠받쳐 줘. 그렇게만 되면 우리는…… 이렇게 여운을 남겼잖아.”

“누가 읽었어도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이해했을 겁니다! 그 삐뚤빼뚤한 글씨를 해독하려고 애썼던 게 원통하군요!”

“맞다, 필체만큼은 내가 그분보다 나아. 인정하지?”

이것만큼은 사실이었기에 단성오는 아무 말 없이 이만 갈았다.

허나 연규서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것만큼은 천하제이인이시지요. 악필로 말입니다. 암어(暗語)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만.”

단 한 마디였건만.

연규서와 단성오는 물론이오, 주위에 있던 묵영대원들까지 엄정한 자세를 취하며 섬랑을 응시했다.

섬랑의 표정도 진지했다.

“규서, 너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을 텐데 왜 자꾸 그래?”

연규서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풀어야지요. 너무 위험합니다.”

“그런데도 잘도 따라왔네.”

“오래전에 약조했으니까요.”

섬랑이 싱긋 웃었다.

“그래, 분명 그랬지. 그러니 믿고 따라줘. 내겐 이 길밖에 없어.”

알쏭달쏭한 말에 단성오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소교주, 이번 중원행에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겁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뻔한 얘기야. 나는 천신혁련가의 후예고 멸혼생사투에서 우승했기에 전대 교주나 현 교주와 달리 확실한 정통성을 지니고 있지. 하지만 이 정통성을 전부 뒤덮어 버리는 장애 또한 있어. 바로 대인의 짙은 그림자야.”

“천신께서 소교주의 장애가 되고 있다고요? 그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인 아닙니까?”

“지나치게 든든하니까 문제지. 내가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모양새잖아.”

“그렇게까지는…….”

“좀 더 깊게 들어가 볼까. 대인께선 전대 교주의 목을 치고 현 교주를 세우셨어. 나중에 또 그러시지 않을 거란 보장 있어? 이래서야 교도들이 그분을 두려워하지, 교주를 어려워하겠어?”

“…….”

“지금이야 큰 문제는 없으나 앞으로는 달라. 곤륜산에서 덕성(德聖)이 말했듯이 시간이 흐르면 대인의 일화는 결국 옛날이야기 한 토막으로 남게 될 거야. 그사이 그분에 의해 한번 깎였던 교주의 권위는 점점 무너질 테고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지. 본교가 사분오열해서 치고받는 꼬락서니를 상상해 봐. 대인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하겠어.”

단성오가 눈을 부릅떴다.

“지나친 비약 아닙니까?”

“잘 들어.”

섬랑의 벽안(碧眼)에서 암청색 불길이 일렁였다.

“대인께서 교를 바로 잡아주신 수고를 허사로 만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무조건 막는다. 교주가 교의 내실을 튼튼히 다지고 나는 위엄을 바로 세울 거야.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계속 기대면 쓰나. 대인을 다시 뵙게 될 때, 덕분에 이렇게 잘 커서 교를 훌륭히 다스리고 있다고 자랑해야 하지 않겠어?”

“……!”

단성오는 섬랑의 기세와 말에 압도되어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지당한 말씀이긴 한데. 그것과 중원에서 행패를 부리시려는 게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섬랑의 눈에서 일렁이던 불길이 사라졌다.

“어허. 행패라니. 증명이라니까, 증명.”

모두 안 믿는 눈치였으나 섬랑은 진지하게 설명했다.

“교주의 권위가 깎인 이유가 하나 더 있어. 이십 년 전의 마정대전(魔正大戰) 탓이지. 교내(敎內) 문제로 회군한 것이지만 어째 모양새가 패주한 것 같잖아.”

“……!”

마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당히 많은 전력을 쏟아부었는데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와 자존심에 금이 갔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단성오의 목소리에 진한 살기가 담겼다.

“흐흐. 위선자 놈들을 모조리 쳐 죽여 위엄을 떨치고 교도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시려는 거였군요. 묵영대 이조장 단성오,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

“이 인원으로? 미쳤냐?”

“……네?”

“내가 그따위 망상을 지껄였으면 그 잔소리쟁이 아줌마가 이렇게 보내줬겠냐고.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무슨 헛소리를.”

섬랑은 어이없어하고 단성오는 분노했다.

“그럼 대체 어떡하시려는 겁니까?”

“아름다운 꽃에는 벌들이 꼬이기…… 아니지, 영웅이 걷는 길에는 악적들이 꼬이기 마련. 오는 놈들만 철저히 박살 내면 돼. 일을 크게 키우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족적을 남기는 거야.”

“아!”

“어때? 피가 끓어오르지?”

“…….”

당연한 소리.

시비를 걸고 덤비는 놈들을 누가 마다하랴.

단성오를 비롯한 마인들의 전신에서 투지가 솟구쳤다.

섬랑은 그들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맞추다가 시선을 돌렸다.

광활한 장강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잠시 뒤.

섬랑의 입가에 차디찬 미소가 걸렸다.

“가슴이 탁 트이네. 아예 뻥 뚫리게 함께 놀아보자.”

“존명!”

* * *

“하아아.”

섬랑은 뱃전에 몸을 기대며 긴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탁 트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줄곧 보니 지겨워진 것이다.

“속까지 울렁거리네. 그만 내려서 육로로 갈까?”

연규서가 단호히 반대했다.

“얻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장강을 타야 합니다.”

“지루해 죽을 지경이잖아. 몇 번이나 정박했는데 왜 덤비는 놈이 없어? 이렇게 패기가 없나?”

“서장과 사천성의 경계를 타고 내려오다가 이제 운남성에 들어왔으니 나아지겠지요.”

“아니야. 영 불안해.”

섬랑은 단성오와 묵영대원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렇지, 전부 너희 때문이야. 흉악하게 생긴 사람 백정들이 이렇게 우글거리는데 누가 시비를 걸겠어. 특히 너 말이야, 너. 나 같아도 무서워서 눈 깔고 줄행랑치겠다.”

특별히 지목받은 단성오가 눈을 부라렸다.

“제 얼굴을 이렇게 만든 건 소교주 아닙니까?”

“……이제 보니 다른 녀석이 문제네. 우소묵, 사람들이 무서워하잖아. 왜 그렇게 눈이 부리부리해?”

땅딸막한 체구에 철퇴를 든 장년인이 퉁명스레 사과했다.

“멸혼생사투에서 소교주가 제 두 다리를 꺾고 관자놀이를 때렸을 때 그 충격으로 튀어나와서 그만. 죄송합니다, 되든 안 되든 한번 시정해 보겠습니다.”

“……가만. 이쪽이 아니지, 저쪽이었어. 그래, 구자영 너 말하는 거야. 왜 그렇게 요사하게 생겼어? 마인이 아니라 사파 떨거지 같잖아.”

피부가 곱디곱고 날씬한 사내가 허리춤에 찬 도를 쓰다듬으며 눈웃음쳤다.

“이조장이나 소묵처럼 소교주께서 내리신 은혜 덕분이지요. 사지를 부러뜨리시고 명치를 때리신 건 상관없는데 무릎으로 낭심을 올려 치시지 않았습니까?”

“……음. 그랬었나? 그건 조금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덕분에 새 삶을 살게 되어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구자영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섬랑을 주시했다.

섬랑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가까스로 돌렸다.

“오! 배가 정박하려 한다. 내려서 밥이나 먹자.”

연규서가 수부(水夫)들에게 물어 괜찮은 반점을 알아냈다.

모두 배에서 내려 그곳으로 향하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섬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돼지 같은 놈이 거들먹거리기는.’

화려한 장포를 걸친 비대한 중년인이 턱을 꼿꼿이 든 채 팔자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무공은 익히지 않았고. 짐을 짊어진 이들이 줄줄이 따라가는 걸 보면 상인이네. 돈깨나 있나 봐.’

거리를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분분히 길을 열어주는 걸 보면 성격도 더러운 게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몰골이 초라한 소년이 황급히 피하다가 발을 헛디뎌 부딪치자 상인이 불같이 화를 내며 걷어차는 것 아닌가?

“이 더러운 새끼가 감히! 이 비싼 옷을 더럽혀?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

“아악! 자,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재수가 없으려니. 퉤!”

상인은 땅바닥에 쓰러진 소년에게 침을 뱉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자신의 가슴을 더듬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놈이 진짜!”

신형을 돌린 상인은 소년에게 씩씩거리며 다가가 연거푸 발길질했다.

“살려달라고 했지? 그냥 죽어! 죽으라고!”

“으아악! 대, 대인! 부디 한 번만 용서를!”

소년이 바닥을 뒹굴며 사정했으나 상인은 용서하지 않았다.

“이미 늦은 지 오래다! 힘 빼지 말고 죽어라!”

“억! 커헉! 으윽! 응?”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웅크리고 있던 소년은 발길질은 물론이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자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아이고, 대인. 용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 헉!”

소년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비명을 질렀다.

고급스러운 적의(赤衣)를 입은 대단한 미청년이 한 손으로 상인의 목을 움켜잡고 있는 것 아닌가!

소년은 눈치를 보다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그딴 거 아니야.”

“네? 그,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미청년 섬랑은 다른 한 손으로 소년의 더러운 머리털을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그건 마음대로 하고. 꼬마야, 대인이라는 존칭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붙이는 게 아니야.”

“……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그런 줄만 알면 돼.”

섬랑은 시선을 돌려 상인을 노려보며 손바닥에 묻은 오물을 상인의 장포에 문질러 닦았다.

“돼지, 사람이 실수하면 부딪칠 수도 있지. 애를 이렇게 패?”

“끄르르…….”

섬랑은 피가 안 통해서 얼굴이 시뻘게진 상인이 게거품을 물려 하자 손을 놓았다.

상인은 그대로 주저앉아 기침을 토하다가 항변했다.

그래도 안목은 있는지 무척 정중한 어조로.

“쿨럭쿨럭. 억울합니다, 대협. 저놈은 배수(扒手)입니다. 제 전낭을 훔쳤단 말입니다.”

“확실해?”

“물론이지요.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대협의 뜻대로 하십시오.”

“호칭은 거슬리지만 좋아.”

섬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인은 소년에게 다가가 으르렁거렸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수작을 부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히끅.”

소년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딸꾹질을 했다.

상인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옷을 뒤졌다.

그리고 곧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 없어? 왜?”

섬랑이 상인의 뒷덜미를 잡으며 알려줬다.

“애초에 훔치지 않았으니까 없지.”

“아닙니다! 분명 이놈이…….”

“이제 내 뜻대로 하면 되지?”

“아아아악!”

섬랑은 상인을 두들겨 팼다.

얼마나 찰지게 패는지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였다.

그래도 상인에게 원한이 있었는지 표정만큼은 모두 밝았다.

섬랑은 넝마처럼 변해 버린 상인을 대충 던지고 연규서에게 물었다.

“힘을 썼더니 배가 더 고프네. 아까 어디가 괜찮다고 했지?”

연규서는 상인의 수하들 중 한 명이 어디론가 뛰어가는 걸 힐끔 보고 대답했다.

“온강반점입니다.”

“맞다. 어서 가자고.”

“이쪽입니다.”

섬랑은 연규서와 함께 휘적휘적 걸었다.

단성오는 묵영대와 함께 묵묵히 따랐다.

얼마 안 가 그들은 온강반점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섬랑이 길고 긴 주문을 끝내자 단성오가 불쑥 물었다.

“소교주, 꼬마는 거두시지 않는 겁니까?”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굴 챙겨.”

“천신님 흉내를 내시는 줄 알았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어쨌든 잘하셨습니다. 속이 시원하더군요.”

“잘하긴 했지. 용돈도 벌고 말야.”

섬랑은 소매 속에서 고급스러운 전낭을 꺼내 열었다.

전표 다발이 드러났다.

섬랑은 액수를 확인하며 혀를 찼다.

“역시 전표가 편하다니까. 왜 우리 것은 신강만 벗어나면 통용이 안 되는 거야?”

연규서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고이륵단가가 전표를 발행한 지 이십 년밖에 안 됐습니다. 신강에서나마 제대로 쓰이게 된 게 어딥니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외부에서도 사용될 테니 마음 푸십…… 아닙니다. 중원행은 이번이 끝이니 전혀 상관없군요.”

“굳이 사족을 붙일 필요는 없잖아.”

“훗날 엉뚱한 마음을 품으실지도 모르니 확실히 해야지요.”

단성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 전낭, 상인에게서 훔치신 겁니까?”

섬랑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내가 그럴 것 같아? 꼬마가 훔친 걸 챙긴 거야.”

“그게 그거 아닙니까? 그 꼬마, 배수였군요. 상인만 억울하게 됐습니다.”

“구경꾼들 표정 못 봤어? 다들 좋아했잖아. 당해도 싼 놈이야.”

“아니, 그거야 그렇다 치고. 왜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악적들이 영웅에게 덤비게 하려고.”

“상인들이 소교주에게요? 악적과 영웅이 바뀐 것 같습니다만.”

“시끄러워. 무공도 모르는 놈이 거금을 가지고 거리를 활보했어. 믿을 만한 뒷배가 있다는 얘기지.”

“누굴까요?”

“여긴 운남성이야. 관(官)은 야만족들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정신없을 테고. 그럼 답은 뻔하잖아.”

단성오의 눈이 빛났다.

“점창파(點蒼派)군요.”

“근처에 있는 속가 녀석들부터 오겠지.”

연규서가 첨언했다.

“아까 상인의 수하가 달려갔으니 곧 몰려올 겁니다.”

“네 말대로야. 밥도 먹기 전에 오네.”

섬랑은 고개를 좌우로 꺾고 양손을 매만졌다.

반점 문이 벌컥 열리고 무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떤 놈이 감히 점창의 사람을 괴롭히느냐?”

“역시. 이렇게 순서가 정해져 있구나. 너무 뻔해서 더 마음에 들어.”

“무어라?”

“이게 바로 강호(江湖)의 낭만이겠지.”

선두에 선 무인이 검을 뽑으며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 네놈이 한 짓이냐?”

“뭘?”

“동(董) 대인이 초주검이 되도록 구타한 것 말이다!”

섬랑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 대인은 모르고 돈(豚) 상인은 아는데. 그 돼지 같은 놈 말하는 거야?”

무인이 살기를 쏘아내며 이를 갈았다.

“네놈이란 말이군.”

섬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씩 웃었다.

“그래, 나다 이 새끼들아.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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