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21화 (521/569)

외전 2화

중원행(中原行)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라.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이 곤륜파의 실무는 허 자 배에서 정 자 배로 넘어간 지 오래.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을 넘은 정우는 그런 정 자 배의 대사형이었다.

원래부터 듬직한 성격과 성실함을 갖췄고 정마대전을 치르며 무공과 사고가 더 깊어져 곤륜은 물론이오, 정파무림에서까지 신망을 받는 그가 무엇에 흔들리랴?

하지만 뜻밖의 불청객을 맞이한 지금은 아니었다.

마인들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에 급히 문도들을 이끌고 달려왔거늘 마교 소교주라니.

게다가 천신혁련가(天神赫連家)의 후예란다.

그 저주받은 핏줄은 진천마가 죽으며 끊기지 않았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정우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담담히 물었다.

“혁련의 맥이 이어지고 있었을 줄이야. 귀인이 오셨군. 헌데 이름이 진천(眞天)이라 했소?”

“네. 멋지죠?”

“…….”

정우는 하도 어이가 없어 크게 벌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움직였다.

“빈도의 취향은 아니외다. 귀하의 부친께서 무척 큰 기대를 하신 것 같소.”

자식한테 진짜 하늘이라는 광오(狂傲)한 이름을 붙이다니, 네 아비가 누군지는 모르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점잖게 쏘아붙인 것이었건만.

제정신이 아닌 이는 따로 있었다.

미청년의 허리가 곤륜산처럼 꼿꼿이 서고 가슴은 청해호보다 넓게 펼쳐졌다.

“아뇨. 제가 정한 이름인데요.”

“……그걸 직접?”

“네. 소싯적엔 모종의 이유로 본성을 숨겨야 했기에 아예 이름도 짓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제자리를 되찾고 어울리는 것으로 해봤죠.”

“……어울리는 것이라.”

정우는 미청년의 말을 되뇌고 다른 마인들을 훑어보다가 감탄했다.

천마신교주를 호위하는 묵영대(黙影隊)라더니 과연.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할 법도 한데 눈동자만 미미하게 흔들릴 뿐, 곤륜 문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하는 모습이 정예 중의 정예답지 않은가?

“소교주의 배포만큼 교도들도 대단하구려. 그래, 본문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겸사겸사요.”

정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미청년의 대답이 무례해서가 아니었다.

그 속에 담긴 의미 때문이었다.

“다른 곳에 가는 길에 들렀다는 말로 들리오만.”

“맞아요.”

“서장(西藏)이오, 중원이오?”

“글쎄요.”

미청년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여기 계속 세워두실 거예요? 장문인께 인사드리고 싶은데.”

정우는 거부하지 않았다.

마교 소교주가 서장으로 가든 중원으로 가든 간에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거라 믿겠소.”

“물론이죠. 우리 사이에 무슨.”

“…….”

정파명문 곤륜과 천하마도의 종주인 마교가 무슨 사이라고?

불과 이십 년 전에 이곳에서 혈전을 벌이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소수만 온 데다 적의도 없어 보였기에 정우는 객들을 안내했다.

“이쪽이오. 갑시다.”

“네.”

정우는 미청년과 나란히 걸으며 오래전 정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쿠차라는 소도시에서 괜찮은 아이를 찾아 마공을 가르쳤다고 했지. 그 아이가 소교주가 되었고. 별호가 섬랑이라는 것만 알 뿐, 사제가 귀찮다고 말을 아껴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렇다고 더 알아보기도 힘든 것이, 천마신교는 무척 폐쇄적인 집단이었기에 외부로 흘러나오는 정보가 극히 적었다.

‘정광 이 녀석, 기묘한 마인을 거뒀구나. 이자는 대체 무슨 일로 나온 걸까?’

미청년 역시 정우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내고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대인이 내게 정통성을 심어주기 위해 혁련가의 후예로 꾸민 걸 모르네. 곤륜에 많은 걸 얘기하시진 않았나 봐.’

보나 마나 귀찮아서 그랬으리라.

속박받기 싫어서 또 떠난 것이고.

입가에 절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 성격에 여기서 어떻게 버티신 거지? 근 이십 년을 지내셨다고 들었는데.’

미청년이 곤륜의 풍경을 둘러보며 묘하게 웃자 정우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러시오?”

“직접 와보니 너무 조용한 곳이라서요. 그래도 구파일방답네요. 전각들이며 석상들이며 하나같이 때깔이 좋아요.”

빈말이 아니었다.

곤륜파 도관(道觀)은 화려하진 않지만 우아하고 멋스러웠다.

이렇게 명백한 칭찬을 했으나 정우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좋게 봐줘서 고맙소.”

“표정은 전혀 아닌데. 왜 그러시죠?”

비밀도 아닌지라 정우는 솔직히 답했다.

“너무 많이 변해 불편해서 그러오. 비바람만 피할 수 있으면 충분한 것을, 황상께서 이렇게 과하게 보수하고 증축하실 줄이야. 청빈해야 할 도사로서 부끄러운 일 아니오?”

대명(大明) 황제는 전전대 황제의 약조를 지켰다.

정광의 사문인 곤륜에 막대한 혜택을 내린 것이다.

미청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네? 과하게 보수하고 증축한 게 겨우 이거예요?”

“……겨우가 아니라 무려요.”

“원래는 헛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얘기인데. 많이 소박하게 사셨네요. 그럼 핑계를 만들어서 거절하시지 왜…… 아하.”

미청년이 눈웃음을 치더니 팔꿈치를 들어 정우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에이. 좋으면서 아닌 척하시기는.”

“…….”

“어? 진짜 싫으신 얼굴이네.”

정우는 어이가 없어 눈만 끔벅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운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불편해도 도리가 있나. 황상께서는 본문뿐만 아니라 청해성 민초들에게도 성은을 베푸셨소.”

“뭔데요?”

“좁은 관도(官道)를 넓히고 한동안 세금을 감면해 주셨소이다.”

미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이제 이해가 가네. 곤륜이 받지 않으면 전부 철회하겠다고 황제가 협박했군요.”

“중원에서는 말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거기 간다고 말씀드린 적 없는데요.”

“말이 아니라 성품을 보고 안 것이오.”

“제 성품이 어떻길래요?”

“신강처럼 황량한 곳에 가는 판국에 이렇게 즐거워할 사람은 아니지. 왜 이름을 진천이라 지었는지도 알 것 같소이다.”

미청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듣던 대로 은근히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으시네.”

“허어. 누가 그런 유언비어를.”

정우는 빙그레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이곳이오. 갑시다.”

현판에 삼청전(三淸殿)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큰 전각이었다.

미청년은 묵영대 이조장 단성오에게 명했다.

“대원들은 여기서 기다리라 하고 너만 따라와.”

수많은 자상으로 뒤덮인 단성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교주, 그건 절대…….”

“그럼 너도 여기 있든가. 규서, 너는 어떡할래?”

연규서가 단성오를 잡아끌며 대꾸했다.

“도산검림(刀山劍林)이 앞에 있어도 소교주를 따라야지요.”

“하아아. 지겨운 감시꾼 같으니. 누가 보면 충신인 줄 알겠다.”

그들은 정우와 함께 삼청전에 들어갔다.

그새 소식이 전해졌는지 좌우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던 노도사들과 중년 도사들이 미청년을 주시했다.

미청년은 개의치 않고 그들 사이로 난 길을 휘적휘적 걸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몇몇 도사들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검파(劍把)에 손을 대는데.

미청년이 가는 길 끝에 앉아 있던 노도사가 작게 웃었다.

“허허. 시원시원해서 좋군. 자네가 섬랑인가?”

미청년이 발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그리고 노도사를 훑어보다가 이를 드러내며 정정했다.

“그건 소싯적 별호고요.”

“오호.”

“천마신교 소교주이자 장구한 세월 동안 천하마도를 다스려온 위대한 천신혁련가의 후예, 혁련진천이에요.”

미리 소식을 받았지만 직접 듣는 것과는 천양지차일 수밖에.

미청년을 노려보고 있던 도사들이 두 눈을 부릅떴으나 노도사는 아니었다.

“너무 기니 그냥 섬랑으로 하세.”

“아니, 그건…….”

“그게 익숙하고. 정광 그 녀석이 자네를 그렇게 불렀거든. 입에 담을 때마다 눈이 둥글게 휘었지.”

“……뭐 그렇다면야. 좋을 대로 하시죠.”

발끈하던 섬랑이 별것 아니라는 듯 받아들였다.

노도사는 섬랑의 얼굴을 뜯어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래, 내게 인사하고 싶다고?”

“진인(眞人)께서 장문인이 맞으시다면요.”

“진인은 아니나 장문인은 맞네.”

섬랑의 눈이 빛났다.

“당금 정파무림의 십존(十尊) 중에서 덕존(德尊)으로 꼽히는 허청 진인요?”

허청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창피한 일이 있나. 그 허명이 신강까지 흘러 들어갔는가?”

“오는 길에 들었죠.”

허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나마 다행이군. 대충 흘려듣게. 어려운 이들을 도운 건 승무인데 엉뚱한 이가 대신 얻은 게야.”

“그건 아닌데.”

섬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백승무 대협의 능력과 협행은 금군(金君)이라는 별호로 보상받았잖아요. 진인의 별호는 오롯이 진인의 덕 때문이죠.”

“빈도가 베풀었다는 선행도 승무가 한 것일세. 정확히 말하면 정광이 열심히 모은 돈을 승무가 잔뜩 불려서 훌륭히 쓴 것이지. 승무가 돕지 않았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됐을 게야. 그건 그렇고…….”

허청은 말꼬리를 늘리다가 눈가에 주름을 잡았다.

“자네, 천마신교 소교주 맞나?”

“네?”

“대협이니 협행이니 진인이니 하는 단어를 잘도 써서 말일세.”

섬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죠.”

“승무와 빈도는 그렇게 불릴 만하다?”

섬랑이 씩 웃었다.

“물론이죠. 어찌 보면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요.”

“음? 그건 무슨 말인가?”

“귀천하신 진천마(眞天魔)께서 천신(天神)이 되신 뒤 진옥룡으로 현신하셨으니 본교와 곤륜은 형제나 마찬가지란 얘기죠.”

“……!”

누가 누구로 현신?

마교와 곤륜이 뭐와 마찬가지라고?

곤륜 도사들이 입을 떡 벌렸다.

심지어 허청조차 그랬다.

“……농이 과하군.”

“진심인데.”

허청이 얼굴을 굳히고 따지려 하는데 더 빨리 나선 이가 있었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도사였다.

“네 이놈! 그게 무슨 망발이냐!”

섬랑은 태연히 대꾸했다.

“허직 도장이시죠?”

“그, 그걸 어떻게?”

“허 자 배에서 이럴 분은 도장밖에 없다고 들었거든요.”

허직이 대노했다.

“대체 어떤 놈이 그딴 소리를! 가만. 장문인은 진인이고 나는 왜 도장이냐!”

“혈조, 아니. 자오 아저씨가요. 성품이 이러시니까 그렇죠, 쯧쯧.”

“무어라?”

허직이 길길이 날뛰려 했으나 허청이 막았다.

“사제, 체면을 지키게.”

“하지만 장문인!”

“사제 누이가 서신을 보냈네. 백가상단(白家商團)에 일손이 필요하다던데 사제를 보내줄까?”

“……!”

허직은 누이 허여민을 떠올리자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허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섬랑을 똑바로 바라봤다.

“왜 정광이 천신의 현신이라 생각하는지 제대로 말해보게.”

“그게 사실이니까요.”

허청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교에서는 도를 깨달으면 사람도 신선이 될 수 있다 하네. 불교에서는 사람이 윤회를 거듭하다가 부처가 될 수 있다 하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현신한다고도 해. 허나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곳은 없네. 신은 엄연히 다른 존재야.”

“본교 교리는 그런데요. 저도 여쭐게요. 그렇지 않으면 정파인이 마공을 어떻게 극성으로 익혀요?”

“정광이니까.”

“말도 안…… 말이 되긴 하네. 그게 다 천신께서 현신하셔서 그런 거라니까요. 사람이 아무리 천재여도 그걸 어떻게 해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 정광이니까 되는 게야.”

“그러니까, 진옥룡은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천신이에요, 천신.”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건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네요.”

두 사람은 나름의 근거를 들어 팽팽히 맞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허청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군. 이런 논쟁을 하려고 온 건 아닌 것 같네만.”

“아. 깜빡했네요.”

섬랑은 어깨에 메고 있던 봇짐을 내려 근처에 있는 정우에게 불쑥 건넸다.

“어찌 보면 곤륜에 신세를 진 것도 있고. 선물을 가져왔는데 장문인께 전해주시겠어요?”

정우가 조심스럽게 받아 살피려 하는데 허청이 손짓했다.

“그냥 가져오너라. 얕은 암수를 쓸 위인이 아니야.”

“역시 장문인. 저는 얕은 게 아니라 깊은 암수를 쓰죠.”

“정우야, 제대로 살펴보고…… 아니, 되었다. 이리 주거라.”

허청은 봇짐을 받아 신중하게 풀었다.

얼마 안 가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퀴퀴한 냄새를 잔뜩 풍기는 고서(古書)들 때문이었다.

“거, 건천일지공(乾天一指功)! 청량십팔선(淸凉十八扇)까지!”

곤륜 도사들이 경악했다.

전부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 절전(絶傳)된 무공들 아닌가!

“이, 이걸 어떻게?”

섬랑이 친절히 알려줬다.

“뭐 이런 걸 가지고. 예전에 본교에서 털었던…… 보관하고 있던 걸 돌려 드리는 거예요.”

“……!”

“대가로 본교의 신검 마혼(魔魂)을 달라곤 안 할 테니 안심하시고요. 그런데 그거, 어딨죠? 삼청전에 떡 하니 걸어놓고 뽐내실 줄 알았는데 안 보이네요.”

허청이 무겁게 답했다.

“정광이 빈도에게 준 선물일세. 다른 이들과 나눌 만한 것이 아니야.”

“듣고 보니 그렇네요. 지난 일은 전부 흘려보내고 이제부터라도 잘해보죠.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잖아요.”

“…….”

가당찮은 말이었으나 비급들을 돌려주는 게 어딘가?

허청을 비롯한 곤륜 도사들의 표정이 한결 부드럽게 풀렸다.

반면 연규서와 단성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뭐길래 직접 메고 나왔나 했더니. 천마비고(天魔秘庫)를 털어?’

‘총단에 난리가 났겠군. 교주도 그렇겠지만 군사야말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어떡하지?’

섬랑은 두 사람을 못 본 척하며 허청에게 예를 취했다.

“그럼 이만.”

허청이 정신을 차리고 급히 잡았다.

“잠시만 기다리게.”

허청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그리고 정중히 예를 표했다.

“고맙네. 곤륜을 대표해서 하는 말일세.”

“뭘요.”

“잠깐 걸으면서 얘기 좀 하지. 일행이 따라와도 좋네. 단, 많이는 안 돼.”

“그러죠.”

허청은 정우를, 섬랑은 연규서와 단성오를 불렀다.

그리고 삼청전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허청이 무겁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까 자네가 천신을 언급하며 주장했던 것 말일세. 자네뿐만 아니라 천마신교의 뜻이겠지?”

“네.”

“소문이라는 건 인력으로 막을 수 없어 언젠가는 반드시 새어 나오게 되어 있네. 양측에서 다른 주장을 하니 큰 혼란이 일어날 게야.”

“그렇겠죠.”

“헌데 왜 굳이 와서 말했나?”

“말씀하신 대로 언젠가는 흘러나올 테니까요. 혼자 고민하긴 억울하잖아요.”

“끄응. 짐을 떠넘긴 거군.”

“하하. 이해해 주세요. 장문인께서 궁리하시는 게 저보다 낫겠죠.”

“그럴지도. 그래서 나도 더 뛰어난 분께 떠넘기려던 참일세.”

“네? 누구에게요?”

곧 알 수 있었다.

작은 화원이 나타났는데 그 한가운데에 두 사람과 한 마리의 산양이 있었다.

섬랑은 셋 중 둘을 알아봤다.

‘산양은 대인의 유모일 테고. 아까 업고 왔던 노파도 있네. 다른 늙은이는 누구지?’

신선이 있으면 바로 저럴까?

생김새도 풍기는 기운도 허허롭기 그지없는 노도사였다.

그 노도사가 노파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축원이 끝났으니 마지막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도우(道友)님, 산군(山君)도 빈도도 곧 따라갈 테니 조금 먼저 가셔서 편히 기다리고 계십시오.”

노파가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에구머니나, 저 같은 것을 따라오시다니요. 노신선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왜 자신을 비하하십니까? 다 같은 생명인 것을.”

메에에에-

갖가지 열매와 새싹을 씹던 산양도 동의했다.

노도사는 노파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라도 전부 털어내셨으니 다행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본문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노파의 창백한 얼굴에 화사한 봄꽃이 피었다.

“한 공자님 덕분이지요. 소신선님처럼 따뜻한 마음을 품고 계신 분이었답니다. 그분이 없으셨으면 저는…….”

“무량수불.”

노파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노도사는 노파를 바르게 눕힌 뒤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정신력이로다. 이런 쇠약한 육신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버텼을꼬.”

어느새 대가온 허청이 노파를 축원하고 노도사에게 예를 표했다.

“사부님, 가르침을 얻으려고 왔습니다.”

“저 공자와 관계된 일이겠구려, 장문인.”

“그렇습니다.”

“공자는?”

섬랑이 자신을 직접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천마신교 소교주이자 장구한 세월 동안 천하마도를 다스려온 위대한 천신혁련가의 후예, 혁련진천이에요.”

“섬랑이었군. 반갑네, 자네가 이 도우를 도와줬지?”

섬랑은 어깨를 늘어뜨렸다가 바로 세웠다.

“네. 곤륜파의 태상장로이자 덕성(德聖)이라 칭송받는 운후 진인이시죠?”

“밥만 축내는 늙은이일세. 고맙네, 자네 덕분에 이 도우께서 편히 가셨어.”

섬랑은 노파의 시신을 힐끔 보고 머리를 긁었다.

“집에 얌전히 있었으면 더 편하게 갔을 텐데. 괜한 고생이나 하고 말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가시지 않았나?”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자네가 함께 온 걸 보면 같은 문제인가 보군. 장문인, 말해보시오.”

“네, 사부님.”

허청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운후는 묵묵히 듣다가 섬랑에게 예를 표했다.

“무량수불. 고맙네. 헌데 이렇게 돌려줘도 되는 건가? 자네 일행의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요. 곧 제 몫이 될 것들을 살짝 끌어다 쓴 것인데요, 뭐.”

운후는 연규서와 단성오를 번갈아 보다가 섬랑의 그림자로 시선을 돌렸다.

“둘은 아니고. 그래도 자네 측에 생각이 같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 다행이군.”

사람들의 눈이 커지고 섬랑의 그림자도 살짝 흔들렸다.

심지어 허청조차 이제야 확실히 알아챘다는 듯 쓴웃음을 지을 정도.

오직 섬랑만 태연했다.

“그러게요.”

“그럼 문제를 풀어볼까.”

운후의 답은 간단했다.

“양측이 정광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아니 잡음이 나올 걸세.”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나 사람이란 믿고 싶은 쪽을 믿기 마련. 저마다 자신이 아는 것이 진실이라 여기며 살게 될 테고 결국엔 옛날이야기 한 토막으로 남게 될 걸세.”

모두 운후의 입을 주시했다.

허나 그 입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섬랑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따졌다.

“설마 그게 끝이에요?”

“뭐가 더 필요한가? 결국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을.”

운후는 섬랑을 지그시 보며 당부했다.

“허나 그 시간 동안 헛되이 뿌려질 피를 줄이려면 명심해야 할 게 있네.”

“뭐죠?”

운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정광은 정광이라는 것. 사람 자체는 그대로이니 그걸 가슴에 품고 사람들에게도 주지시키면 되지 않겠나?”

정광은 정광이다.

실로 옳은 말 아닌가?

섬랑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지만 그럴듯하네요.”

운후가 인자하게 웃었다.

“천마신교 소교주에게 칭찬을 받을 줄이야. 영광이네. 헌데 무슨 일로 귀한 발걸음을 하신 겐가?”

섬랑은 운후의 신선 같은 분위기에 끌려 숨김없이 답했다.

“운신의 폭이 좁아지기 전에 중원에 가보려고요.”

“곧 교주 자리에 오를 예정이란 얘기군.”

“이해가 빠르시네요.”

“어디 보자.”

“뭘요?”

운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더없이 순수하면서도 따스한 빛을 뿜어냈다.

“……!”

섬랑은 속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에 급히 마혼을 개방하려 했으나 운후가 뿜어낸 빛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운후가 약간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이가 조금 걸리지만 그 외의 자격이야 충분하니 그럴 만도 해. 천마신교에 복이 깃들었군.”

“젠장.”

“자책하지 말게. 살기가 담기지 않은 걸 무슨 수로 알아채나? 자연과 벗하다가 얼마 전에야 깨달은 잔재주일 뿐일세.”

섬랑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찝찝하잖아요.”

“허허. 무공도 성품도 대단하군. 정광을 아주 쏙 빼닮았어.”

섬랑이 밝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죠? 살아생전 정파무림의 거성(巨星)께 이런 칭찬을 받을 줄은 몰랐네요.”

운후가 입을 살짝 벌렸다가 미소 지었다.

“하나만 더 말해주면 칭찬이 아니라 칭송이라도 해주지. 중원에서 무엇을 하려는 겐가?”

“별것 아닌데.”

섬랑은 짧은 말을 남기고 곤륜산을 내려갔다.

그 말은 오랜 시간 동안 남아 곤륜 도사들의 가슴을 울렸다.

“대인께서 걸으셨던 길을 걸어 저도 못지않다는 걸 증명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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