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20화 (외전) (520/569)

외전 1화

마룡출동(魔龍出洞)

겨우내 잔뜩 움츠렸던 몸을 녹여주는 훈훈한 봄바람이 불자 노파는 조그마한 보퉁이를 어깨에 메고 길을 나섰다.

가느다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모습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으나 꿋꿋이 나아갔다.

그러길 어언 한 시진.

건강한 이라면 아무리 천천히 가도 한 식경이면 갈 거리를 걷고 녹초가 된 그녀는 목적지가 보이자 손에 쥔 지팡이와 꺾여가는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앙상한 지팡이는 버텨도 노파의 쇠약한 육신은 그러질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으려는 그때.

“하여간 노인들이란.”

맑은 목소리와 함께 싸늘한 강풍이 불었다.

그 바람이 노파를 부드럽게 감싸더니 똑바로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난 기사(奇事)에 놀라 눈을 끔벅거리던 그녀는 일장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뒤늦게 발견했다.

“아!”

키가 훤칠하고 벽안(碧眼)이 인상적인 대단한 미청년이었다.

허나 거친 세상을 살아오며 온갖 풍파를 겪은 노파는 미청년의 외모보다 차림새에 주목했다.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고급스러운 적의(赤衣)와 허리춤에 찬 여러 개의 병기.

누가 봐도 명문가 무인임이 분명했다.

그런 귀인을 촌로에 불과한 그녀가 어찌 가볍게 대하랴.

가쁜 숨을 몰아쉬고 말을 더듬거렸다.

“호, 혹시 공자님께서 이 늙은이를 구해주신 겁니까?”

“그런데요.”

“어이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파는 굽은 허리를 연신 굽혔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그래야 했다.

힘없는 이가 힘 있는 자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별것도 아닌 일로 너무 과하시네. 제가 흉악한 마두라도 되는 것 같아요?”

“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노파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청년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동의했다.

“하긴. 아무리 무도한 자라 해도 곤륜산 근처에서 흉악한 짓을 저지를까.”

“아, 아무렴요. 그렇고말고요.”

“그럼 이만.”

눈 깜짝할 사이에 청년이 사라졌다.

노파는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참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하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이 나이에 더 놀라고 무서워할 게 뭐 있다고 이러는지.”

이만하면 살 만큼 살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것 아닌가?

목적지까지 몇 걸음 안 남은 상태.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한 걸음 내디디려 했으나.

“헉!”

진짜 다 산 것일까?

육신이 다시 무너졌다.

그리고 아까처럼 맑은 목소리와 함께 싸늘한 강풍이 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아!”

노파는 쓰러지지 않았다.

어느새 나타난 청년이 손바닥을 내밀었고 그 손바닥에서 쏟아져 나온 세찬 바람이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바로 세웠다.

청년은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노파를 나무랐다.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상노(商奴)도 이러다가 갔는데 또 초상 치를 뻔했네.”

“죄, 죄송합니다. 늙었으면 곱게 죽을 것이지, 이런 주책을…….”

“죄송하면 건강해지시든가. 어디 가시는 거예요?”

“저, 저기입니다.”

노파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정면을 가리켰다.

청년은 곤륜산과 노파를 번갈아 보다가 황당해했다.

“산을 오르려고요? 미치셨어요?”

“그, 그게 아니라 곤륜산 초입에 있는 저 석상(石像)까지만…….”

“아. 십장 앞에 있는 저거요? 반도 못 가서 삼도천(三途川) 건너시겠네.”

청년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냥 지나쳤잖아. 이왕 왔으니 제대로 다 봐야지. 가요.”

“가다니요?”

의아해하던 노파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석상 앞에 와있는 것 아닌가?

청년은 노파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고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석상을 살펴봤다.

그리고 곧 혀를 찼다.

“큰 염소가 노인을 태운 모습을 조각한 것 같은데 솜씨가 엉망이네. 흉물이 따로 없어.”

청년의 혹평에 노파가 민망해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가진 게 워낙 없어서 그만.”

“네?”

노파는 청년을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무량수불. 공자님 덕분에 이 늙은이가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귀신이 돼서 찾아오시는 건 사양할게요. 그보다 겨우 이게 소원이었어요?”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이것을 올리고 축원하는 것이지요.”

노파는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보퉁이를 풀었다.

그 속엔 갖가지 열매와 새싹들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석상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고 눈을 감은 뒤 축원을 올렸다.

속으로 말해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표정도 분위기도 무척 경건해 보였다.

청년은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노파가 눈을 뜨자마자 물었다.

“이 염소가 뭐길래 그래요? 도교에서는 이런 것도 모셔요?”

노파는 원을 풀자 마음이 편해졌는지 청년을 어려워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했다.

“염소가 아니라 산양입니다. 세간에서 진옥룡(眞玉龍)이라 불리시는 소신선님의 유모이시지요.”

종적을 감춘 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났지만 세상의 그 누가 천하제일인이자 고금제일인으로까지 거론되는 진옥룡을 모를까?

청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진옥룡이 어릴 때 젖을 먹였다던 그 산양요? 아무리 봐도 염소인데 무슨.”

“이분께 신세를 진 저 같은 이들이 몇 푼씩 모아 겨우 만든 조잡한 석상이라 오해하실 만합니다.”

“흐음. 결국 죽었나 보네요. 그래도 산양치곤 과하게 산 거지.”

“아닙니다. 나이가 들어 산을 타지는 못하나 아직 살아 계십니다.”

“네? 그럼 올라가서 직접 주시지 왜…… 아. 그렇구나. 딱 봐도 오늘내일하시니 이럴 수밖에.”

노파가 희미하게 웃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청년은 그녀를 잠시 주시하다가 말을 돌렸다.

“그래도 그렇지. 좀 위엄 있게 만들 것이지 노인이나 태우고. 너무 볼품없잖아요.”

“정마대전에서 많은 협객분들을 거대한 수레에 태워 구조하시는 형상으로 만들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에게는 늙고 병든 이들을 등에 싣고 험준한 곤륜산을 오르내리시던 광경이 더 가슴에 와닿아서 말입니다. 다행히 곤륜 신선님들께서도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청년이 감탄했다.

“오오. 곤륜파는 진짜 정파인가 보네요. 저 같으면 석상도 만든 사람도 아주 박살을 내버렸을 텐데.”

“……!”

순간 창백하게 질렸던 노파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청년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무서워하시다가 금세 평정을 되찾으시네. 특별한 심법이라도 익히셨어요?”

“저 같은 것이 어찌 감히.”

노파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공자님을 대하면 대할수록 소신선님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그분도 말씀은 살짝 거칠지만 행동은 무척 따뜻하셨지요.”

“……!”

청년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가 체면을 지키려는 듯 억지로 내려왔다.

하지만 둥글게 휜 눈매는 고칠 수 없었다.

“흠. 흠. 제가 그분을 닮긴 했죠. 아니, 탁본에 가까울지도.”

“…….”

젊은 무인치고 진옥룡을 동경하며 우상으로 삼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랴.

청년이 기쁨을 애써 감추고 으스대자 노파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쳤다.

“아주 비슷하십니다. 소신선님께서 공자님을 보시면 무척 즐거워하실 겁니다.”

“그래요? 진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야 물론…….”

노파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아난 건지,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난 흑의인들이 그녀와 청년을 둘러싸고 소름 끼치는 살기를 쏟아내는 것 아닌가!

이런 살기를 평범한 촌로가 견뎌낼 리 있나.

노파는 기절초풍하여 그대로 허물어졌다.

청년은 그녀가 쓰러지기 전에 재빨리 안으며 흑의인들에게 으르렁거렸다.

“이것들 봐라? 내게 이빨을 드러내? 죽고 싶냐?”

“……!”

노파를 대할 때의 분위기와는 천양지차였다.

암청색으로 변한 청년의 눈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엄청난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흑의인들은 전신을 가늘게 떨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등에 큰 검을 메고 얼굴에 자상이 가득한 장년인이 이를 갈며 한 걸음 나섰다.

“공자야말로 죽고 싶소? 혼자 먼저 가버리면 어쩌라는 거요?”

“빨리 따라오라는 거지. 네 녀석들이 느린 걸 탓해야지 왜 나한테 그래?”

장년인은 청년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경고했다.

“이번만이오.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좌시하지 않겠소.”

청년은 노파의 맥문(脈門)을 잡고 내공을 불어넣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쭈. 어이, 단성오.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건데? 떼거리로 덤비게? 턱을 박살 내서 평생 죽만 삼키게 해줄까?”

단성오라 불린 장년인이 두 눈을 번들거리며 대꾸했다.

“이십 년 전에 이미 부수지 않았소?”

“뼛가루만 남게 갈아버리지는 않아서 두부 정도는 씹을 수 있잖아. 아예 이빨을 못 쓰게 만들어주겠다는 얘기야.”

장년인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공자의 안전을 위해 간언한 것이니 명심하시오. 또 그러면 나 소저에게 연락할 것이외다.”

청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투덜거렸다.

“소저는 무슨. 야차보다 독한 잔소리쟁이 아줌마 같으니. 시집이라도 가면 좀 나아질까 싶어 그렇게 부추겼는데도 왜 진전이 없는 거야? 아니, 상대방도 그래.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청년은 단성오에게 화살을 돌렸다.

“너희 가문 본가 가주께서 사별하신 지 벌써 십 년이 넘었지?”

“그렇소.”

“그런데 왜 그러신데? 가만히 보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땡중처럼 구시냐고.”

대답을 한 건 단성오가 아니었다.

화려한 녹의(綠衣)를 걸치고 허리춤에 장검을 찬 곱상한 얼굴의 장년인이었다.

“정치적인 문제 때문인 걸 알면서 왜 엉뚱한 이를 다그치시오?”

청년이 인상을 쓰며 손을 내저었다.

“연규서, 너한테 물은 게 아닌데 왜 나서?”

“공자가 수많은 반대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온 목적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요. 빨리 곤륜산을 오르겠다고 먼저 떠나더니 뭐 하는 짓인지. 어서 갑시다.”

“아. 그랬었지.”

청년은 안고 있던 노파를 가볍게 업었다.

연규서라 불린 장년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공자.”

“시끄러워, 내 맘이야.”

“그럼 다른 이가 업게 하시오.”

“그것도 내 맘이지. 이 노인이 깨어나면 또 겁먹을 테니 멀찍이 떨어져서 와.”

청년은 노파를 업은 채 산길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연규서는 굳은 얼굴로 보다가 단성오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 변덕을 어찌 막을까. 계속 이러다간 큰일이 생길 것이오. 힘들겠지만 잘 부탁하오, 이조장(二組長).

-본대의 임무가 그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연 소가주.

단성오가 손짓하자 흑의인들의 신형이 사라졌다.

최소한 노파의 눈에는 띄지 않도록 몸을 숨기며 청년을 호위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년은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정신을 차린 노파가 청년에게 업힌 걸 알고 화들짝 놀랐다.

“에구머니나. 고, 공자님. 어찌하여 저를 업고 계신 겁니까?”

“내친김에 소원을 제대로 이루게 해드리려고요.”

“제대로라니요?”

“석상 따위한테 백날 기도하면 뭐 해요. 직접 만나서 해야지. 도사님들한테 축원도 받고 미련 없이 가세요.”

“서, 설마!”

노파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웅장한 풍경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왔다.

죽기 전에 꼭 한번 다시 오르기를 원했으나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곤륜산이었다.

노파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으흐흑. 감사합니다, 공자님.”

“아시면 됐어요.”

“곤륜산은 무척 높고 험한데…….”

“제 집은 더해요.”

“워, 원시천존께서 크나큰 복을 내리실 겁니다. 흑흑.”

“그런 신용 없는 전표는 됐고. 고개 좀 돌려서 우실래요? 제 목덜미에 눈물이 떨어져 찝찝하네요.”

노파는 재빨리 소매를 들어 눈물을 훔쳤다.

“하늘보다 높은 은혜를 베푸신 공자님께 그런 폐를 끼치면 안 되지요. 죄송합니다.”

“그만 울고 웃으세요. 그래야 산양 유모도 좋아하죠.”

노파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더 깊게 파였다.

“그렇지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산 위는 아직도 겨울인지라 마른 풀잎만 드셨을 산군(山君)께 웃는 얼굴로 열매와 새싹을 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

청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산양이 아무리 영물이라 해도 호랑이를 이르는 호칭인 산군을 붙여서가 아니었다.

노파도 곧 알아채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산양이 기뻐하며 먹을 것들을 석상 앞에 두고 온 것이다.

청년이 어색하게 웃으며 지론을 설파했다.

“하하하. 선물 같은 물질적인 것보다 진실한 마음이 중요하죠. 안 그래요?”

노파도 밝게 웃었다.

은인 덕에 이렇게 곤륜산을 오르게 됐는데 그런 사소한 것을 아쉬워해서야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아무렴요.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공자님 덕분에 제 마음을 산군과 신선님들께 전해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원시천존께서도 기꺼워하실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짙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청년은 한 손을 들어 뺨을 긁다가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요. 그분이 저를 보면 무척 즐거워하실 거란 거. 확실하죠?”

“그분이라니요? 아! 소신선님 말씀입니까?”

청년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노파는 오래전 몇 번이나 만나봤던 소신선을 떠올리고 힘주어 확언했다.

“네, 분명 그러실 겁니다.”

“흐흐. 그럴 줄 알았다니까.”

청년이 좋아하자 노파도 즐거웠다.

나이가 들어 흐릿해진 머릿속을 뒤져서 소신선과 관계된 기억을 일일이 찾아 꺼냈다.

“저 봉우리는 추운봉(秋雲峰)이라 하는데 육질이 연한 사슴들이 꽤 많아 소신선님께서 자주 들르셨다 합니다.”

“오오. 곤륜파, 생각보다 꽤 열린 곳이네요.”

“이 위로 올라가면 원숭이들이 사는 곳이 나옵니다. 그 녀석들이 후아주(猴兒酒)를 빚는 솜씨가 일품이고 풍경도 빼어난지라 역시 소신선님께서 틈만 나면 가서 즐기셨다 들었습니다.”

“과연. 어릴 때부터 풍류를 아셨구나. 아암, 사내라면 그래야지.”

나이도 성별도 신분도 판이한 두 사람은 한마음으로 웃고 떠들며 곤륜산을 올랐다.

허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기 마련.

갈수록 녹지 않은 눈이 많아지더니 짙은 운무에 휩싸여 신비하게까지 느껴지는 거대한 일주문(一柱門)이 나타났다.

청년은 그곳을 향해 걸으며 노파에게 당부했다.

“헤어질 때가 됐네요. 좋은 곳으로 가서 푹 쉬세요.”

노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감사합니다. 공자님도 좋은 일 많이 생기시길 빕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청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업고 있던 노파를 내려 일주문을 지키고 있는 두 장년 도사에게 건넸다.

“몸이 불편하셔서 모셔왔어요. 곧 떠나실 것 같으니 잘 부탁드려요.”

도사들도 노파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봤다.

청년에게 정중히 예를 표하고 노파를 챙겼다.

그때, 청년이 한쪽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규서, 거기서 뭐 해? 그건 왜 뒤로 감추고? 챙겨왔으면 드려야지.”

화려한 녹의를 입은 곱상한 장년인이 운무 속에서 불쑥 나타나 청년을 응시했다.

청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또 뭐?”

“됐소. 아무것도 아니오.”

연규서는 노파에게 다가가 뭔가를 내밀었다.

노파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며칠간 힘겹게 모아놓고도 산 아래에 두고 온 각종 열매와 새싹이 든 보퉁이 아닌가?

“이, 이건…….”

“빠짐없이 주워서 넣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노파가 급히 부정했다.

“그게 아니라 너무 죄송해서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연규서는 환하게 웃으며 청년을 탓했다.

“저희 공자가 세심하지 못한 면이 많아 대신 챙기기 위해 따라온 처지니 괘념치 마십시오.”

청년은 눈을 부라리고 노파는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그때까지 연규서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호리호리한 도사가 사각 턱 도사에게 지시했다.

“사제, 도우를 모시고 들어가게. 또 다른 귀한 손님들은 내가 맡겠네.”

“네, 사형.”

사각 턱 도사는 청년과 연규서를 힐끔 본 뒤 노파를 업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호리호리한 도사는 손님들을 번갈아 보며 미소 지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빈도(貧道)는 성한이라고 합니다. 도우들께서도 본문에 용무가 있으십니까?”

청년이 빙긋 웃었다.

“물론이죠.”

성한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억지로 웃으며 시간 끄실 필요 없어요. 왜 그렇게 경계하세요?”

성한의 얼굴에 맺혀 있던 웃음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함께 오신 도우께서 은신을 풀고 나타나셨을 때 아주 희미하지만 익숙한 기운을 느껴서입니다.”

“뭐길래 그러시는지 궁금하네요.”

성한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이십 년 전에 본산을 피로 물들였던 마기(魔氣)지요.”

청년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이봐, 내가 오기 전에 했던 말이 맞지? 곤륜은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니까.”

연규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게 좋아할 일입니까?”

“왜 갑자기 존댓말을 써?”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구경만 하시겠다더니 이게 뭡니까? 곤륜의 대처가 빠릅니다. 바로 눈치채고 몰려오지 않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듬직한 체격의 중년 도사가 여러 도사를 이끌고 날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청년은 눈도 깜짝 안 하고 양손을 매만졌다.

“괜찮아, 오히려 잘됐지. 시끌벅적해야 더 재밌는 법이니까. 그렇지, 성오?”

“절대, 결코 아닙니다.”

단성오가 운무를 뚫고 나와 무겁게 명했다.

“묵영대(黙影隊) 이조(二組), 천지수호소진(天地守護小陣)을 펼쳐라!”

“존명!”

흑의인들이 일시에 나타나 청년을 둘러쌌다.

그들의 전신에서 마기가 뭉클뭉클 흘러나와 팔방을 감쌌다.

다급히 달려온 중년 도사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진을 살폈다.

얼마 안 가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대단한 진이군. 게다가 묵영대라니. 분명 마교 교주를 호위하는 조직인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진득한 마기로 팔방을 두르고 철통같은 기세를 뽐내던 절진이 깨진 것이다.

그것도 내부에서부터.

“망할!”

묵영대 이조장 단성오가 손에 쥐고 있던 대검을 바닥에 팽개치며 소리쳤다.

“대원들을 밀치고 나오시면 어떡합니까!”

청년이 어깨를 으쓱했다.

“방금 못 들었어? 따질 건 따져야지.”

“대체 뭐를…….”

“조용히 들어봐 좀.”

청년은 중년 도사를 쏘아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다짜고짜 덤비지 않으신 건 좋은데 예의가 없으시네요.”

중년 도사가 담담히 물었다.

“무슨 말인가?”

“엄연히 좋은 이름이 있는데 마교라뇨. 제가 곤륜파를 말코 도사들이 모여서 몰래 고기를 뜯고 술을 마시는 산채(山寨)라 하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

남의 문파에 불쑥 나타나 이런 지독한 모욕을 주다니!

도사들이 두 눈을 부릅뜨며 검파(劍把)에 손을 댔으나 한순간일 뿐이었다.

“무량수불.”

중년 도사가 나직이 도호를 중얼거리자 모두 심호흡을 하며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청년이 입술을 오므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수양이 대단하시네요. 다른 정파들도 이러면 곤란한데.”

중년 도사는 청년을 응시하며 천천히 포권했다.

“먼저 실례한 건 이쪽이니 사과하지. 우리끼리 있을 때 칭하는 호칭을 꺼내서 미안하네.”

청년도 답례하며 대답했다.

“성격이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시네요. 누구시죠?”

“정우라 하네.”

“아! 반가워라.”

“아는가?”

“물론이죠. 정 자 배 대사형이시잖아요.”

“불공평한 일이군. 이쪽은 자네를 몰라. 설마 천마신교주는 아닐 테고. 누구인가?”

“묵영대는 교주만 호위하는 게 아니라 소교주도 호종해요.”

정우의 눈이 커졌다.

“어쩐지 벽안이더라니. 오래전 말로만 들었던 섬랑(閃郞)이었군.”

“그건 소싯적 별호고요.”

청년은 씩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가 이어질수록 정우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천마신교의 소교주이자 장구한 세월 동안 천하마도를 다스려온 위대한 천신혁련가(天神赫連家)의 후예, 혁련진천(赫連眞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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