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48화
단주, 이번엔 어딥니까?
곤륜파 정(精) 자 배 제자 정현은 돌담 틈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옆에 있던 정우가 미소 지으며 농을 건넸다.
“저런. 사제, 벌써 노안이 찾아온 것이냐?”
정현이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설마요.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와도 대사형께 먼저 오지 제게 올까요.”
“흰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 아직 팔팔하구나.”
정현이 죽는소리를 했다.
“끄응. 소제를 얼마나 부려먹으시려고. 솔직히 피로가 가시지 않습니다. 전투가 끝난 지 한참 됐는데도 전신에 찰싹 들러붙어 있는 것 같다니까요.”
돌담을 보수하고 있던 사형제들이 마치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관자놀이를 누르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정우는 사제들을 둘러보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리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게 아니긴 하지.”
그들은 구파일방의 한 축인 곤륜의 제자들이다.
정마대전(正魔大戰)이 아무리 치열했다 해도 아직까지 피곤해할 리 있나.
이건 육체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였다.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고 복수나 생존을 위해 사람을 죽이며 차곡차곡 쌓인 괴물인 것이다.
정우는 사제들을 다독였다.
“이렇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말아라. 우리만 이런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래. 어르신들께서 누누이 말씀하시지 않았더냐.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자꾸 떠올리려 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해 다오.”
“네, 대사형.”
말은 알겠다고 했으나 그들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정현은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축 처지자 뒤통수를 벅벅 긁더니 쾌활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하하하. 그나저나 정광은 뭘 하고 있을까요? 왠지 마교주의 수염을 잡아당기며 왜 귀찮게 하냐고 꾸짖고 있을 것 같습니다.”
별것 아닌 말이었건만 그 효과는 놀라웠다.
정우를 비롯한 정 자 배 도사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겠지. 그래도 잘하고 있을 것이야.”
“그렇고말고요. 정광이 남에게 해를 끼쳤으면 끼쳤지, 당할 아이입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현은 뜻한 바대로 분위기가 바뀌자 신이 났다.
여세를 몰아 정광을 놀렸다.
“녀석, 마졸들이 회군한 걸 알게 됐을 텐데도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제법 놀 만한가 봅니다. 하긴, 어찌 보면 본문보다 그곳이 정광과 더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는 아니죠.”
“하하. 아니긴 무슨. 패고 싶으면 패고 빼앗고 싶으면 빼앗고 기분 내키는 대로…… 가만. 중원에서도 그랬잖아. 사제 말이 옳다. 이 사형이 실언을…… 헉! 사제에에에!”
정현은 어느새 나타난 정광을 부둥켜안고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 더 빨리 돌아왔어야지, 왜 이리 무심한 것이냐!”
“열심히 온 게 이건데요. 그보다 좀 놔주시면 안 돼요?”
“아! 그러고 보니 무척 빨리 왔구나. 역시 사제야. 어디 보자,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길래 얼굴이 이렇게…….”
정현은 정광의 양어깨를 잡고 얼굴 곳곳을 살피다가 말을 더듬거렸다.
“……이, 이렇게 뽀송뽀송하냐. 백옥이 따로 없구나.”
“원래 이런데요, 뭐. 사형들, 잘 계셨어요?”
굳어 있던 정 자 배 도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정광을 얼싸안았다.
특히 대사형 정우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잘 왔다. 아주 잘 왔어. 믿고 있었지만 정말 다행이구나.”
다른 사형들의 마음도 그랬다.
믿는 건 믿는 거고, 조금이라도 걱정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몸성히 돌아온 어린 사제를 도닥이며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근처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이었다.
정우가 대표로 물었다.
“정광아, 네가 데려온 것이냐?”
“네, 대사형. 동방장(東方將)님이세요.”
“낭왕의 사방장(四方將) 중 하나인 동방장? 적의 보급을 지연시키기 위해 탑극랍마간 사막으로 떠났던?”
“네. 조금 고생하셨죠.”
“…….”
‘조금 고생’이라니.
모두 입을 떡 벌렸다.
대체 사막에서 어떤 싸움을 해왔길래 사람이 저렇게 넝마처럼 되었단 말인가?
정현이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흉수를 성토했다.
“무량수불! 아무리 적이어도 그렇지, 같은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사람을 이 꼴로 만들다니! 하늘이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 순간, 독존과 함께 돌담을 뛰어넘어 들어온 검후의 의견은 달랐다.
“아미타불. 부처께선 무척 기꺼워하실 것 같네만.”
“아! 어르신! 돌아오셨군요!”
정 자 배 도사들은 급급히 예를 취했다.
허나 검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현에게 따졌다.
“재밌는 얘기를 하더구나. 같은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한다고?”
“그, 그렇습니다.”
정현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인정하자 검후의 얼굴에 싸늘한 서리가 덮였다.
“그걸 먼저 지키지 못한 게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잘도 떠드는군. 이보게, 동방장. 당사자인 자네가 오해를 풀어주게.”
시체처럼 미동조차 안 하던 동방장이 급히 일어서다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당연히 나지. 아암, 나라는 미물이고말고. 이 나이를 먹도록 최소한의 도리도 몰랐다니까. 검날에 베인 게 아니라 검면으로 두들겨 맞은 게 어디야. 이렇게 돼도 싸.”
“……!”
모두 황당해했으나 과거 정광이 인정한 것처럼 잔머리가 뛰어난 정현은 달랐다.
동방장의 처참한 몰골이 누구의 작품인지 깨닫고 바로 돛을 돌렸다.
“검후 어르신, 실언을 해서 죄송합니다. 간난신고(艱難辛苦) 하시다가 가르침을 내리신 것이었군요.”
동방장은 정현을 노려보며 눈을 부라리다가 검후가 쏘아보자 딸꾹질하며 횡설수설했다.
“히끅. 덕분에 내가 정신을 차렸지. 아니지, 나간 건가? 아무렴 어때. 그만! 이제 그만 때려! 으흐흑.”
얼마나 얻어터졌으면 헛소리까지 할까.
모두 측은해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돌담을 뛰어넘어 들어왔다.
정현이 반색하며 맞이했다.
“자오 대협! 무사하셨군요!”
“하하. 정현 도장, 잘 계셨소?”
“또 이러시네. 도장이라니요, 다들 웃습니다.”
두 사람은 예전부터 죽이 잘 맞았기에 무척 반가워했다.
정우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다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정광아, 불회당(不悔堂)은? 혹시 무슨 변고라도?”
“아뇨.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올라오실 거예요.”
“후우. 천만다행이군. 그간 어찌 지냈느냐?”
“다른 분들도 모인 자리에서 한 번에 말씀드릴게요.”
“그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너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무척 많아.”
“네, 이제 돌담 같은 건 필요 없으니 다 같이 가죠.”
“무어라? 그 말은…….”
정우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산양이 끄는 수레에 물과 새참을 싣고 오던 팽수빈이 사부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사부님!”
“응, 수빈아. 유모, 잘 계셨어요? 살이 좀 찌신 것 같은데.”
산양은 허허로운 눈빛을 흘리며 부정했다.
메에에-
팽수빈은 정광을 껴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제자, 사부님을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정광은 제자의 키와 무게를 가늠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몸은 눈곱만큼 성장했는데 학식은 꽤 늘었네. 안 쓰던 표현을 쓰고. 글공부 좀 했구나.”
“부끄러운 제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공도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응, 그런 것 같아. 악력과 팔 힘이 상당히 좋아졌는걸. 이제 그만 놓아줄래?”
팽수빈은 바로 안았던 팔을 풀고 정광을 올려다봤다.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도 환하게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정광은 제자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고 손을 잡았다.
“들어가자.”
“……!”
“왜? 싫어?”
그럴 리 있나.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사부가 손을 잡아주다니!
너무 놀라서 잠시 얼어붙었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사부님! 가시지요!”
팽수빈은 뛸 듯이 기뻐하며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정광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도관(道觀)을 둘러봤다.
상당히 치열한 격전을 벌였는지 성한 곳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오면서 보니 청해성은 크게 변한 게 없던데 본문은 새롭네요.”
옆에서 묵묵히 걷던 정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적지에서 목숨을 걸고 분투하다가 돌아온 네게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면목이 없다.”
“뭘요. 오히려 잘됐죠. 이 기회에 돈 좀 발라서 새 단장 해요. 상대 쪽은 상태가 훨씬 더 안 좋으니 기분 푸시고요.”
정우의 눈이 커졌다.
마교는 상태가 훨씬 더 안 좋다고?
거기서 무슨 행패를 부렸길래 그런 말을?
‘지금 물어봐야 대답 안 해주겠지. 빨리 가서 들어야겠어.’
정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허나 곧 난관에 부딪혔다.
사람들이 정광, 독존, 검후 등을 알아보고 몰려온 것이다.
그중에는 백승무도 있었다.
“사형! 드디어 오셨군요! 소제,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정광은 유일한 사제를 보며 혀를 찼다.
퀭한 눈과 창백한 얼굴은 실내에서 장부를 작성하고 서류를 보느라 그런 것일 테고 또다시 길게 자라난 수염은 그걸 깎을 틈도 없이 바쁘다는 방증 아닌가?
“사제,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하하. 아닙니다. 사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잠시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
“네? 서, 설마 또…….”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심혈을 기울여 다듬어온 수염이 말끔히 사라졌다.
정광은 망연해하는 사제의 등을 토닥이며 칭찬했다.
“훨씬 보기 좋아졌네. 남궁 소저도 좋아할 거야.”
“……그 반대입니다만.”
“그래? 취향은 존중해야지. 그럼 다시 기르면 되겠네.”
백승무의 눈이 커졌다가 둥글게 휘었다.
그가 존경해마지 않지만, 가끔 기피할 수밖에 없는 막내 사형은 원래 이런 사람 아닌가?
“하하.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사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어? 자, 잠깐! 뭐야!”
백승무는 그동안 밀렸던 회포를 풀려 했으나 파도처럼 밀려온 군중에 떠밀려 멀어져 갔다.
독존과 검후, 자오에게 다가가 안부를 묻는 이들도 꽤 있었지만 정광에게 몰려든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아, 안 돼! 사형! 사혀엉!”
“이따 봐, 사제.”
백승무가 인파에 파묻혀 사라졌다.
사람들은 정광을 둘러싸고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진옥룡! 어서 오시게! 자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자네 때문에 마교 놈들이 회군했나? 그게 아니면 무슨 이유로 그런 것이지?”
“진옥룡! 그대의 벗 요지환검(搖之幻劍) 안중이외다! 그간 미뤄왔던 곡차나 한잔…….”
“그대는 조용히 좀 하게! 언제까지 곡차 타령만 할 겐가!”
“도사! 철월이 왔다! 어서 철월을 고쳐라!”
정광은 전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목소리를 높여 깔끔히 정리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사부님과 장문인께 인사드리고 와서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었다.
난데없이 일어난 소란에 곤륜에 있던 모든 이들이 뛰쳐나왔다.
허청은 정광을 보자마자 나는 듯이 달려왔다.
“정광아아아!”
“잠시만요, 실례합니다.”
정광은 장력을 살짝 떨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덕분에 허청은 사랑하는 제자를 안을 수 있었다.
“이놈! 이 무심한 놈! 이 사부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아뇨.”
“그, 그렇겠지. 어쨌든 잘 왔다!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구나!”
사조 운후와 장문인 운적은 물론이오, 곤륜 도사들이 전부 달려와 정광을 반겼다.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일 수밖에 없는 감격스러운 해후였다.
정광은 억지로 견디다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십존 어르신들과 군사도 오셨네요. 이제 다들 모이신 것 같은데. 신강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군사 위진홍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눈을 빛냈다.
허청은 아쉬움을 억누르고 정광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본문을 위해 아낌없이 피를 흘려주신 분들이다. 마교 건부터 말씀드리는 게 맞아.”
“네, 그럼 시작할게요.”
정광은 가볍게 뛰어올라 기우뚱하게 서 있는 전각 지붕에 착지했다.
“다들 보이시죠?”
보이다마다.
“잘 들리시고요?”
말이라고.
사람들은 세차게 뛰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귀를 기울였다.
정광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신강에 잠입했는데 우선 의심을 받지 않아야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겠더라고요.”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운 좋게도 쿠차라는 소도시에 그럴듯한 마공 비급이 있는 거예요. 그걸 잽싸게 익혀서 마인처럼 행세했죠.”
잠깐. 뭐라고?
“될 사람은 되는지 마침 천마신교에서 멸혼생사투라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더군요. 아이들끼리 생사투를 벌여 소교주를 뽑는 건데 그걸 이용하면 총단에 쉽게 들어가겠더라고요. 쿠차에 괜찮은 아이가 있어서 마공을 가르치고 출전시켰죠.”
아니, 대체 무슨 소리를.
아니, 그보다 그래서?
“그 아이는 예선을 전부 통과하고 총단에서 열린 본선에서도 우승해 소교주가 되었어요. 저는 총단을 불태워 혼란스럽게 한 뒤 교주와 싸웠고요. 아, 불을 지른 건 제가 아니라 자오와 수응(首鷹) 어르신이에요. 수응 어르신은 신강이 은근히 맞는다고 눌러앉으셨죠.”
미친! 대체 그걸 말이라고!
“결국 제가 교주를 죽였어요.”
……뭐?
“강시들도 있었는데 어찌어찌 익힌 자연지기 운용법으로 해치웠고요.”
가, 강시? 무슨 운용법?
“그랬더니 마인분들, 성품이 아주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저를 천신으로 떠받들어 주던데요? 그래서 회군을 권하고 새로운 교주까지 정해 드리고 왔죠. 질문 있으신 분?”
“……,”
도대체 말이 돼야 뭘 묻지.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런 말도 못 했다.
하지만 십존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불존이 무겁게 물었다.
“마공을 익힌 게 사실이냐?”
“네.”
“정공을 익힌 몸으로 마공을 어찌. 불가능한 일이다.”
“되는데요.”
정광은 마혼을 개방했다.
흑염(黑焰)이 세차게 솟구쳐 올라 거대한 마신(魔神)으로 화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 올리며 병기를 뽑았다.
“마, 마귀다!”
“진옥룡이 마귀가 되어 돌아왔어!”
장내가 아수라장이 됐지만 정광은 당황하지 않았다.
불존에게 담담히 물었다.
“이제 믿으시죠?”
불존의 눈이 거센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아미타불. 어떻게 이런 일이…….”
“예전에 어르신께서 제게 자연지기라는 화두를 던져주셨던 거 기억하세요?”
불존은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그것마저 통달했단 말이냐?”
“통달은 모르겠고. 가지고 놀다 보니 쓸 줄은 알게 됐죠.”
불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한번 보여다오.”
정광은 삼단전(三丹田)에서 자연지기를 순환시켰다.
화아아아악-
눈부신 황금빛이 터져 나오며 세상 그 무엇보다 순수한 기운이 표출됐다.
사람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볼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불존도 그 빛과 기운을 멍하니 보며 느끼다가 한 손을 들어 올려 반장(半掌)했다.
“아미타불. 선재(善哉), 선재로다. 진옥룡이 하늘이 내려준 쓰임을 깨닫고 정(正)과 마(魔), 마침내 자연(自然)까지 받아들여 정사대전(正邪大戰)에 이어 정마대전까지 종식시켰구나.”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감탄과 불신이 뒤섞여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정광은 신경 쓰지 않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들었다.
검집에서 검을 빼니 운룡과 똑같은 검붉은 검신이 드러났다.
정광은 그것을 든 채 허청에게 물었다.
“사부, 제가 천마신교에서 더 좋은 검을 가져와 선물해 드리겠다고 했었죠?”
“그, 그랬지.”
허청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입을 떡 벌렸다.
“마침 쓸만한 게 있더라고요. 전전대와 전대 천마신교주가 쓰던 마혼(魔魂)이에요.”
“……!”
다른 이들도 모두 경악했다.
심지어 진천마까지 썼던 검이라니!
이건 단순한 전리품이 아니었다.
마교를 짓누른 상징으로써 그 주인은 천하 그 누구보다 드높은 명성을 떨치게 되는 것이다.
정광은 전각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허청에게 검을 내밀며 웃었다.
“이제 사부 것이에요.”
“……!”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하지만 정광이 외치는 말에 모든 소란이 진정됐다.
“드릴 말씀은 다 드렸으니 더 이상 묻지 마세요.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거든요.”
“…….”
무신(武神)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누가 감히 물으랴.
정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불회당 분들이 고기와 술을 짊어지고 올라오셨네요. 꽤 오랫동안 부실하게 드신 것 같은데 허리띠 풀고 마음껏 즐기세요.”
곤륜은 도문이니만큼 도관이 아니라 곤륜을 도우러 온 이들이 묵고 있는 곳에서 잔치가 시작됐다.
장이는 정광의 귀환을 기뻐하며 솜씨를 부렸고 사람들은 얼결에 먹고 마시다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모두 정광에 관한 얘기들이었다.
자오는 그들의 말을 가만히 훔쳐 듣다가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단주, 왜 굳이 전부 말씀하셨습니까?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정광은 희미하게 웃었다.
-소문이라는 건 인력으로 막을 수 없어 언젠가는 반드시 새어 나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신강에서 들려오기 전에 선수를 친 거죠.
-양측에서 단주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아니 잡음이 나올 것 같습니다만.
-자고로 사람은 믿고 싶은 쪽을 믿기 마련이죠. 자신이 아는 게 진실이라 여기며 살게 될 거고 결국엔 옛날이야기 한 토막으로 남게 될 거예요. 이런, 손님이 오셨네.
위진홍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정광을 빤히 보고 있었다.
정광은 그에게 다가가 위로와 칭찬을 건넸다.
“고생하셨어요. 생각보다 훌륭히 지휘하셨네요.”
위진홍은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단주는 정말 불가해한 존재요. 내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그 말씀을 하려고 오신 거예요?”
“앞으로 어떡할 계획이오?”
“글쎄요. 아마 군사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걸요. 어느 쪽을 택하셨어요?”
“나를 먼저 받아준 곳이오.”
“안주보다 모험이라. 중원이 재밌게 돌아가겠네요.”
“과욕을 부리진 않을 테니 안심하시오.”
“물론이죠. 그래야 서로 좋은데.”
위진홍은 몸을 한차례 떨고 정중히 포권했다.
“단주의 무운과 건승을…… 쓸데없는 말이군. 언젠가 만나면 회포를 풉시다.”
“네, 다음에 봐요.”
위진홍은 다음 날 아침 남궁세가 사람들과 먼저 떠났다.
다른 가문과 문파 사람들도 하나둘 산을 내려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광을 흠모하면서도 두려워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 했지만 곤륜 도사들은 달랐다.
예전과 똑같이 대했다.
그들에게 정광은 그저 정광일 뿐이었다.
덕분에 정광은 편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여러 일을 할 수 있었다.
먼저 철월부터 자연지기를 이용해 치료했다.
철월은 한결 또렷해진 눈으로 감사를 표했다.
“도사, 철월은 큰 고마움을 느낀다. 네 덕에 예전처럼 총명한 상태로 살게 되어 무척 기쁘다.”
정광은 한숨을 쉬었다.
원래 바보였는지 말만 길어졌을 뿐, 크게 변한 것이 없지 않은가?
“네, 저도 기쁘네요.”
철월은 장이와 함께 떠났다.
장이 집밥이 최고라나.
정광은 동방장을 풀어줬다.
동방장은 몇 번이나 진짜냐고 물은 뒤 신이 나서 떠나려다 울상을 지었다.
“근데 어디로 가지? 전장을 기웃거리다가 낭왕한테 걸리면 재미없을 텐데.”
“조용한 곳에서 사시면 되죠.”
“무슨 소리. 한번 낭인(浪人)은 영원한 낭인이야.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
“그럼 낭왕께서 오지 않을 전장에서 노시던가요.”
“그런 데가 어딨다고.”
“왜 없어요. 불회당 분들을 생각해보세요.”
“아! 관(官)!”
동방장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먼저 떠난 불회당을 쫓아가는 것이리라.
정광은 곤륜이 조용해지자 제자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팽수빈은 정광이 인정한 천재.
하지만 역시 한계가 있었다.
심심하고 풀밖에 없는 곤륜에 계속 있자니 여러모로 불편했고.
“제자야, 빠르게 가자.”
“어떻게 말입니까, 사부님?”
“이렇게.”
정광은 섬랑에게 썼던 명념반추대법(銘念反芻大法)으로 가르침을 새겨줬다.
팽수빈은 섬랑처럼 엄살 부리지 않고 잘 견뎠다.
정광은 제자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의를 줬다.
“쉽게 얻은 만큼 더 궁리해야 해. 그래야 진짜 네 것이 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또래에 적수가 없다고 방심하지 말고. 신강에 꽤 괜찮은 녀석이 있거든.”
“그 소교주 말씀입니까? 제자가 언젠가 반드시 목을 베어 벌하겠습니다.”
“살벌하게 왜 그래. 애들은 애들답게 코피 정도 터뜨리는 선에서 끝내야지. 그럼 잘 있어.”
“네? 설마…….”
“응. 나중에 보자.”
“아!”
팽수빈은 사부를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간신히 내리고 절을 올렸다.
잡는다고 흔들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제자는 열심히 수련하며 사부님을 기다리겠습니다.”
“응. 나중에 들러서 꼭 확인해 줄게.”
“꼭이요? 감사합니다!”
“대신 지금 바로 나가야 해.”
“네! 사부님!”
팽수빈이 나가자 백승무가 들어와 묵직한 전낭을 내밀었다.
“다행히 소제가 늦지 않았군요. 받으십시오, 사형.”
“뭔데?”
“며칠 전에 제 부모님과 대화하시며 눈을 빛내시던 걸 봤습니다. 그곳에선 전표보다 이게 필요할 것 같아 준비해봤습니다.”
전낭을 열자 속에 있던 보석들이 빛을 발했다.
정광은 씩 웃으며 전낭을 품속에 넣었다.
“역시 사제야.”
“과찬이십니다.”
“준비성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 뇌물을 바치고 빠져나가려는 속마음을 비꼬는 거야. 나랑 가기 싫어? 남궁 소저가 그렇게 좋아?”
“그, 그게 아니라…….”
“돈 많이 벌어둬. 돌아와서 펑펑 써줄게.”
“……크흡. 네, 금으로 산을 쌓아놓을 테니 빨리 오셔서 마음껏 쓰십시오.”
“응. 그때 울면 안 돼.”
정광은 허청, 운후, 운적을 비롯한 곤륜 도사들에게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은 슬퍼하면서도 억지로 미소 지었다.
사조 운후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 말했다.
“네 방랑벽은 손을 쓸 도리가 없구나. 곤륜은 언제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지치거나 그리우면 잠시나마 들러 편히 쉬거라.”
“네, 그럼 이만.”
정광은 두 번째 고향을 떠났다.
함께 걷던 자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단주, 이번엔 어딥니까?”
정광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서쪽을 가리켰다.
“서역(西域)이요. 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나 가보죠.”
자오의 힘찬 대답이 하늘을 울렸다.
“네! 단주!”
곤륜마협 -完-
곤륜마협
작가 Q&A(질답)
Q : 안녕하세요, 작가님.
완결 축하드립니다. 520화 가까이 되는 긴 여정에 대한 간단한 소회 부탁드립니다.
A :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글이지만 끝맺음을 하게 되어 무척 기쁘면서도 섭섭합니다. 항상 응원해주는 소중한 가족과 사랑하는 제 반 쪽 MH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팀장님과 독자님들에 대한 마음은 아래쪽에 있는 Q&A에 적겠습니다.
Q : 곤륜마협을 적으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있다면 그 이유는?
A : 자오가 남긴 암어를 보고 가균 무리가 맛집 탐방을 하는 것과 자오가 무림맹에서 필리버스터 같은 수다를 떠는 것입니다. 팀장님과 의견을 교환하며 웃었던 좋은 추억이 있고 독자님들께서도 즐거워하셔서 무척 뿌듯했습니다.
Q :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그 캐릭터들 중 작가님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A : 정광은 당연히 좋아하지만 장이와 자오가 제일 눈에 밟힙니다. 어머님(부모님)의 희생을 빤히 알아 괴로워하면서도 꿈을 좇다가 결국 성공하는 청년, 잘못된 길에 빠졌다가 기연(사람 또는 다른 것)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중년. 어쩌면 우리 모두 경험해왔거나 바라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장이의 모친도 자식이 훌륭히 성장한 모습을 보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Q : 곤륜마협 집필 중 비하인드가 여러 번 있었잖아요. 이것만큼은 작가님께서 진짜 애썼다, 자랑하고 싶은 집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으실까요?
A : 매 편 최선을 다한 것 같아 자랑스럽지만, 그 결과까지 그렇지는 않아 상쇄되는 느낌입니다. 팀장님, 거의 매일 라이브로 달리는 저 때문에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굳건히 지탱해주셔서 감사합니다.
Q : 보통 다른 작품이 메인 히로인이라 불리는 주인공의 짝을 정해주는 편인데, 완결까지 히로인이 없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A : 배가 아파서입니다. 악필 빼고 다 가진 녀석이 배필까지 있으면 너무하잖습니까?
Q : 작품을 집필하고 나서 특히 아쉬운 점이 있으시다면?
A : 곤륜마협은 원래 3부로 기획한 글이었습니다. 흉노 황족 핏줄인 정광이 또 다른 사건을 만나 풀어가는 것이었는데 1부 완결 전에 제 한계를 느껴 덜어낼 건 덜어내고 합칠 건 합쳐 2부로 정리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하고 건강과 체력에 더 신경 써서 다음 글에서는 독자님들께 실망을 드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Q : 외전을 쓰실 계획이라고 들었는데, 외전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다루실 생각이실까요?
A : 이십 년 뒤, 섬랑이 중원행을 하며 정광이 남긴 발자취와 맺었던 인연들을 만나다가 팽수빈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Q : 차기작을 구상하셨다면 어떤 이야기일지. 구상하지 않으셨다면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신지.
A : 생각은 많은데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떤 형식에 어떤 내용이 되든 간에 독자님들의 지친 하루에 조금이나마 즐거움을 드리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Q : 마지막으로 독자님들께 하고 싶으신 말씀 부탁드립니다.
A : 일 년 팔 개월이 넘게 연재한 글을 꾸준히 읽어주시고 댓글과 별점으로 응원해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아직 많이 모자란 글쟁이지만 독자님들이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상상하며 글을 쓰겠습니다. 곤륜마협을 사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사랑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웃으시는 일 많이 생기길 빕니다.
Q : 팀장님도 제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A : 2018년 11월이 생각납니다.
그때 제가 이직을 결정하고서 작가님께 저만 믿고 따라와 주실 수 있냐고 여쭤봤었거든요.
곤륜마협의 출간은 2020년 3월…….
다시는 그런 패기 넘치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하는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1년 넘는 인고의 시간 동안 끝까지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을 만난 게 제 평생에 있어 가장 큰 행운입니다.
Q : 팀장님, 가장 중요한 독자님들께도 부탁드립니다.
A : 열심히 한다고 하긴 했는데 오타 같은 실수 때문에 불편하셨을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사과의 말씀 꼭 올리고 싶습니다. 더 정진하겠습니다.
그동안 곤륜마협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으면서 재미있으셨다면 작가님의 공이고 모자랐던 부분은 제가 부족했던 탓이니 저를 욕해주세요.
가능하시다면 외전까지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확실한 날짜가 잡히면 공지사항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아, 그리고 환불은 작품홈에서 오른쪽 위쪽을 보면 점 세 개가 있습니다. 거기서 ‘이용권내역/구매취소’를 누르시면 환불이 가능합니다.
독자님들 모두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시고 항상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