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47화
고향
천마신교에 오랫동안 산적해 있던 문제들이 빠르게 정리됐다.
새로운 교주 선출 때 그랬듯이 만장일치, 또 만장일치의 연속이었다.
정광이 매만지고 있는 두 손 때문이었지만 거의 모든 사안들이 공평무사하게 처리됐기에 교도들은 대부분 만족했다.
정광에 의해 생긴 공석도 일사천리로 채워졌다.
“좌우광명쌍뇌(左右光明雙腦)부터 시작할까요? 귀곡자 어르신이 복귀하시고. 어르신의 제자인 나민 소저가 사이좋게 함께 하시면 되겠네. 불만 있으신 분?”
교도들이 납작 엎드린 채 부르짖었다.
“만세만세만만세! 절대로 없습니다!”
“시원시원하시네요. 그럼 좌우광명사자(左右光明使者)로 넘어가죠. 흑조 어르신과 호교당 삼향주님이 어떨까요? 참고로 흑조 어르신은 흑서(黑鼠)…… 음. 이런 자리에서는 좀 길게 가야지. 과거 마도칠대가문에 속했던 북천호가의 소가주이자 본교의 한 축이 될 것이라 기대받으셨던 기재, 흑암표류살객(黑暗漂流殺客)이세요.”
“……!”
교도들도 놀랐으나 당사자들은 경악했다.
흑서와 곽상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말도 안 돼! 또 무슨 음모를 꾸미시는 것이지?’
‘이럴 수가! 내게 이런 중책을 맡기실 줄이야!’
평소라면 의문을 표했으련만.
자리가 자리인 데다 정광의 기세에 짓눌려 아무 말도 못 했다.
다른 교도들도 마찬가지.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목 놓아 만세를 외칠 뿐이었다.
이런 과정이 쉼 없이 반복됐고 해가 떨어지기 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정광은 흡족한 얼굴로 마무리를 지었다.
“세부적인 건 교주님과 좌우광명쌍뇌께서 차차 정리하시는 거로 하죠. 이제 전대 교주님의 장례만 남았네요. 예기주(禮旗主)님과 아극소연가주님이 진행해 주세요.”
양방과 연혁소가 앞으로 나와 예를 표했다.
연휘준의 장례는 성대하지만 간략하게 치러졌다.
정광은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다가 손을 흔들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그럼 이만.”
마인들이 천지가 진동하도록 만세를 외쳤다.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소리 하려다가 그게 더 귀찮아서 발걸음을 뗐다.
“교주님, 가시죠. 앞으로 지내실 곳을 안내해 드릴게요.”
“존명.”
단가휘가 재빨리 일어나 휘적휘적 걷는 정광을 따라갔다.
정광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이런 판국에 단가휘라고 무슨 말을 하랴.
보조를 맞춰 조용히 걷는데 화마에 휩쓸려 볼품없어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단가휘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정광이 기다렸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다지 보기 좋지는 않지?”
경어가 아닌 반말이었으나 단가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전대 교주를 반면교사로 삼겠습니다, 지존.”
“천신 타령은 안 하네.”
“천신이 되셨어도 예전과 똑같으시니, 그때의 호칭이 맞는 것 같아서 그럽니다.”
“뭐 편할 대로 해.”
그들은 어느덧 천마궁에 이르렀다.
단가휘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소인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겁니까?”
정광은 천마궁 안으로 들어가며 되물었다.
“은혜라니?”
“총단에 도착하자마자 영이가 알려줬습니다. 아버님께선 건강을 회복하고 벽을 깨기 위해 부단히 수련하고 계시다더군요. 전장 사업에도 여러 가문이 협조하기로 약조했다 들었습니다. 게다가…….”
“교주 자리까지?”
“……그렇습니다.”
“착각이 심하네.”
정광은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앞엣것들은 네가 아니라 네 아비와 자식이 나름 기특한 면이 있어서 준 거야. 네 몫은 교주라는 지위뿐이지.”
“그것만 해도 과분합니다.”
“그러면 곤란한데.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거야. 내가 왜 널 택한 줄 몰라?”
단가휘는 솔직히 답했다.
“오래전 지존께서 소인을 제법 똘똘하고 성품도 나쁘지 않은 데다 싸울 줄도 안다고 칭찬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쓸데없이 겸양 떠는 것보다는 낫네. 근데 하나 더 있어.”
정광은 어느새 가까워진 천마전을 바라봤다.
단가휘의 시선도 그곳을 향했다.
불에 타 흉물스레 변해 버린 지붕이 인상적이었다.
정광은 천마전 안으로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화재로 훼손된 천장화가 두 눈 가득 들어왔다.
“너는 자기 자신을 조절할 줄 알아. 야망은 있지만 과한 욕심을 부리지는 않지. 연가 놈처럼 나대다가 총단이 이 꼴이 될 확률은 낮다는 얘기야.”
“……!”
정광은 차갑게 경고하고 단가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하기에 따라 네 수명과 가문의 흥망이 결정될 거야. 귀곡자와 나민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라는 게 아니야. 협력할 땐 협력하고 견제할 땐 견제하며 네 뜻을 펼쳐봐. 그리고 섬랑의 다음 대를 노려. 할 수 있지?”
천마신교주는 천하마도의 정점.
엄청난 협박이 동반된 과실이었지만 단가휘는 거절할 수도, 거절할 마음도 없었다.
가슴이 뜨겁게 뛰고 전신의 피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부복했다.
“네, 지존.”
“좋아, 기대할게.”
정광은 천마전 제일 안쪽에 있는 보좌(寶座)를 가리키며 명했다.
“이제 올라가서 앉아.”
“존명!”
* * *
정광은 단가휘에게 옛집을 내어주고 비어 있는 전각들 중에서 괜찮은 것을 골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한 사람들을 모아 조촐한 잔치를 열었다.
즐겁게 먹고 마시며 떠든 지 얼마나 됐을까?
정광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문을 떼었다.
“단 소가주님, 다른 가문들과 잘 협력해 전장 사업 번창하시고요. 아극소연가주님께 부탁해 그분 셋째 아들 연규서가 섬랑과 자주 어울리게 해주세요.”
“같이 절차탁마하게 조처하라는 말씀이군요.”
“네. 섬랑이 멸혼생사투 일차 예선에서 박살 내고 서신을 보내 꼬시려 했던 애들도 불러 모으시고요.”
“장차 소교주님의 수족이 될 아이들은 빨리 모을수록 좋지요. 화전오가에도 연락하겠습니다.”
다음은 귀곡자였다.
“잘하실 테니 딱히 드릴 말씀이 없네. 아. 연세도 있으신데 취미 삼아 하실 만한 걸 찾아 즐기세요.”
“그럴 틈이 없을 것 같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나 소저는 조급해하지 말고 길게 보시고요. 특히 사람을요. 다루기 어렵다고 내칠 생각부터 하지 마세요. 이번 광명좌사자님처럼 잘 쓰면 명검이 되는 분도 있거든요.”
“네, 이해했습니다.”
“모든 일 처리는 공평무사를 기본으로 삼되 아니다 싶을 땐 단칼에 쓱싹. 아시죠?”
“명심하겠습니다.”
“관 숙수는 섬랑과 아이들을 부탁드려요. 사정없이 몰아치면 쑥쑥 클 거예요.”
“존명! 목숨을 바쳐 기필코 해내겠습니다!”
“뭘 또 그렇게 씩이나.”
정광은 민현유를 보며 웃었다.
“누이와 회포는 풀었어?”
“그렇습니다. 지존 덕분입니다.”
“가문 분들, 그만 한등격리봉으로 돌아오시라 하고 성녀님이 엉뚱한 마음 품지 않게 잘 챙겨드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은 흑서였다.
“안녕히 계세요. 그만 자죠.”
흑서가 다급히 물었다.
“지, 지존! 왜 저를 여기에 남기시는 겁니까?”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오랫동안 타지에서 고생하셨는데 잠드는 건 고향에서 하셔야죠.”
“……!”
흑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광도 의아해했다.
“왜요?”
“지, 지존께서 어떻게 그런 배려를 다 하시는지…….”
“그래서 싫으시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흑서는 두 눈을 끔벅이며 깊이 생각했다.
남고 싶은가, 아닌가?
머리가 아닌 마음이 알려줬다.
늙은 육신에 여전히 마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너무나 편안했다.
흑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윽. 소인, 끝까지 지존을 따르고 싶으나…….”
“그럼 같이 가시고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귀 떨어지겠네. 그럼 내일 아침에 봐요.”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좋은 방으로 갔다.
사람들은 그를 붙잡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정광이 원하지 않을뿐더러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기 마련, 아쉬움을 억지로 삭이며 공손히 예를 취했다.
하지만 섬랑은 아니었다.
정광이 방문을 닫기도 전에 따라 들어가 따졌다.
“저는요? 네? 저는 왜 없는 사람 취급하세요?”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앉아.”
“역시! 믿고 있었다니까요!”
섬랑은 특별 취급받는 게 신이 나 문을 닫고 앉았다.
정광은 섬랑을 빤히 보다가 무겁게 충고했다.
“잡아먹히지 말고 집어삼켜.”
중단전 옥당(玉堂)에 심어준 마혼(魔魂)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쉽게 얻은 것에 기대지 마. 결국엔 너 스스로 서야 해.”
명념반추대법(銘念反芻大法)으로 뇌리에 새겨준 마공들을 직접 탐구하라는 의미였다.
“네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베풀고 슬슬 기어오르는 놈은 가차 없이 밟아버려.”
사람을 대하는 도리까지.
섬랑은 진지하게 듣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만 믿으세요.”
“못 믿으니까 이러지.”
“와! 최소한 제 사람은 아껴왔잖아요.”
“언제?”
섬랑이 벌떡 일어나 돌아서더니 상의를 벗었다.
시랑대주(豺狼隊主)가 나민에게 던진 비수를 대신 맞아 등줄기에 새겨진 긴 상처 자국이 드러났다.
섬랑은 등 근육에 힘을 주었다가 푸는 걸 반복하며 으스댔다.
“아줌마를 구하며 생긴 영광의 흔적, 보이시죠?”
“그 호칭을 계속 쓰다간 나 소저가 너를 죽일걸.”
“없는 곳에서만 쓰니까 괜찮을 거예요.”
“게다가 영광의 상처는 무슨.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는 교훈이지.”
섬랑은 그럴듯한 인재였으나 은근히 못 미더운 면이 있었다.
‘이래 가지고 얼마나 버틸까. 한 번쯤 기사회생(起死回生)할 기회는 줘야겠지.’
정광은 품속에서 작은 목갑을 꺼내 내밀었다.
자연지기 운용법을 깨닫고 더는 필요 없어진 물건이었다.
“받아.”
“뭔데요?”
“소림 소환단(小還丹).”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말과 행동이 달랐다.
섬랑은 절세고수보다 빠르게 목갑을 잡았다.
하지만 정광도 마찬가지였다.
섬랑이 죽어라 용을 써도 목갑은 미동조차 안 했다.
“헉. 헉. 대인, 그만 놓으시죠.”
“이런. 몸이 저절로 반응했네.”
“익! 이익! 알게 됐으면서 왜 잡고 계세요?”
“그러게. 내 말이.”
정광은 손을 바들바들 떨다가 놓았다.
섬랑은 목갑을 냉큼 챙기고 투덜거렸다.
“모양새 빠지게 진짜. 담담히 주시면 얼마나 멋있어.”
정광은 담담히 말했다.
“그걸 쓰는 일이 없기를 바랄게.”
“왜요? 도로 뺏어가시게요?”
“아니, 그게 네게 좋으니까.”
소환단은 내공을 늘리는 게 아니라 요상(療傷)에 특화된 영약이었다.
그런 것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건 크게 다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의미.
섬랑의 두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흥. 저를 뭐로 보시고. 쓸모없는 걸 받아버렸네. 나중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오세요. 잘 보관하고 있다가 하시는 거 봐서 드릴게요.”
“어? 우냐?”
“제가 언제요! 내일 봐요!”
다음 날 아침.
정광은 배를 든든히 채우고 짐을 챙겼다.
“자오, 가죠.”
“네, 단주.”
천신도, 진천마도 아니라고 아무리 부정하면 뭐 하나.
교주 단가휘를 비롯한 수많은 교도들이 정광을 배웅했다.
“만세만세만만세! 위대한 천마신교의 조종(祖宗)이시며 드높은 하늘 위에서 세상을 굽어보시는 천신의 귀환을 기다리겠습니다!”
정광은 발걸음을 옮기다가 씩 웃으며 돌아봤다.
“정말요?”
“…….”
그럴 리가.
“저 아직 창창한 거 보이시죠? 혹시라도 돌아왔을 때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기를 바랄게요.”
“……!”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인들은 땅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충성을 다짐했다.
정광은 그 소리를 들으며 첫 번째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두 번째 고향으로 향했다.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곤륜산이었다.
* * *
떠도는 짐승은 물론이오, 하늘을 나는 날짐승도 없는 탑극랍마간(塔克拉瑪干) 사막.
두 눈만 빼놓고 얼굴 전체를 천으로 둘둘 감은 노인이 치를 떨었다.
“날이 조금 풀리나 싶더니 바람이 더 강해져?”
매서운 모래바람이 쉬지 않고 몰아쳤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여기서 굴러야 하는 거야?”
급기야 욕설까지 내뱉으니 그와 엇비슷한 차림새를 한 여인이 나무랐다.
살존(薩尊) 검후(劍后)였다.
“당 시주, 듣는 귀가 많습니다. 체통을 지키시지요.”
“체에에통?”
독존(毒尊) 당기황은 주먹을 움켜쥐며 반발했다.
“아니, 내 말이 틀렸어? 이 짓거리도 하루 이틀이지, 화 매(妹)도 솔직히 짜증 나잖아. 보타산(普陀山)에 계신 관음보살(觀音菩薩)께서도 우리 같은 처지면 진작 돌아가셨을걸.”
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불회당(不悔堂) 당주 황웅은 물론이오, 불회당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만큼 지친 것이다.
심지어 검후 옆에 엎드려 있던 무각공(無角公)도 끙끙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검후도 내색은 안 했지만 힘든 건 똑같았기에 더는 뭐라 못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미타불. 이러는 게 당연하나 이래선 안 돼. 지금 마음이 흔들리면 얼마 안 가 모조리 무너질 게야.’
어떻게든 희망을 줘서 일으켜 세워야 했다.
허나 그럴 새가 없었다.
‘이건!’
갑자기 엄청난 마기가 느껴졌다.
그것도 개인이 아닌 거대한 집단의 것이었다.
독존과 검후의 시선이 동시에 한 방향으로 향했다.
두 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렇게 많은 마졸들이 왜 청해성 쪽에서 오는 거지?’
‘설마 정마대전(正魔大戰)이 끝난 건가? 저들의 승리로?’
그런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승리한 것치곤 분위기가 이상하리만치 무거웠고 패주했다기엔 너무 멀쩡해 보였다.
게다가 마인들도 이쪽을 봤을 텐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듯 빠르게 이동하고 있지 않은가?
‘뭔가 있구나!’
‘대체 뭐길래!’
그들은 마인들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지켜보다가 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독존은 불회당 군사 서도한을 닦달했다.
“어서 말해봐. 어떻게 된 거지? 저놈들이 왜 돌아온 거야?”
서도한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소,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뭐? 그게 할 말이냐?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서도한은 목을 움츠리면서도 두 눈을 빛냈다.
독존이 자신을 인정해서였다.
“가정일 뿐입니다만, 마교에 변고가 생겨서 회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애매한 분위기와 행색으로 돌아온 게 설명됩니다.”
“흐음.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어떤 변고인데?”
“그, 그것까지는…….”
서도한은 말끝을 흐리다가 독존이 눈을 부릅뜨자 급히 내뱉었다.
“지, 진옥룡이 뭔가 해낸 것 같습니다.”
독존이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역시 내 제자…… 가만. 원군을 더 못 보내게 들쑤시는 건 가능하겠지만 원정군을 전부 회군시키는 건 살짝 무리 아니야? 차라리 반란이 일어나서 그러는 거면 이해나 하지.”
서도한은 단호히 부정했다.
“그건 아닙니다.”
“이놈 봐라. 왜?”
“바, 반란 때문이면 아까처럼 질서정연하게 가는 게 아니라 중구난방으로 달렸을 겁니다. 남보다 일찍 가야 뭐라도 더 차지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마인이라면 그럴 수밖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존도 그러다가 성질을 부렸다.
“망할. 그럼 대체 뭐야? 누가 좀 가서 물어보고 와봐.”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그럴까.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이것들이 진짜!”
독존이 화를 내려고 하자 검후가 말렸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지요.”
“언제까지?”
“진옥룡이 잘못됐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으시지요?”
독존이 허리를 바로 세우고 가슴도 활짝 폈다.
“당연하지. 누구 제자인데.”
독존이 댄 근거에 동의하진 않았으나 불회당도 검후도 그렇게 믿었다.
“곤륜산으로 갔던 마인들이 돌아왔으니 마교에 잠입한 그가 곧 돌아와 연유를 말해줄 겁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됩니다.”
독존은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하다가 두 손을 들었다.
“알겠어, 화 매. 그렇게 하자고.”
불회당 군사 서도한이 재빨리 덧붙였다.
“기다리되 언제라도 움직일 준비는 해둬야 합니다.”
“사람은 각자 알아서 하면 되고. 낙타는 동방장(東方將)한테 관리해놓으라고 하면 되잖아.”
“그, 그게. 제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서 말입니다.”
사실이었다.
동방장은 오랜 전투를 통해 낙타를 부리는 기예가 더 출중해져서 그만큼 존중받았지만 과할 정도로 거만해진 상태였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이렇게 다들 모여서 회의를 하는 와중에도 홀로 낙타들 틈에 끼어 단잠을 자고 있지 않은가?
독존이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닫고 암기를 꺼내 던지려 하는데 검후가 만류했다.
“살살 달래가며 떠받들어줘야 제대로 일하는 시주입니다. 제가 잘 타일러볼 테니 화내지 말고 편히 쉬십시오.”
검후의 장담대로 한껏 추켜세워 주니 동방장은 의기양양하게 으스대며 승낙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의 인내심이 조금씩 사라지더니 그리 오래지 않아 바닥이 나버렸다.
마교가 회군한 사실을 몰랐으면 모를까, 몸이 이미 달아오른 상태라 참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제일 먼저 폭발한 건 독존이 아니라 무각공이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게 엄살이었던 것처럼 모랫바닥을 뚫고 들어가 놀라운 속도로 사라졌다.
불회당원들은 큰 전력이 사라지자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독존과 검후는 다른 것에 집중했다.
‘아주 멀리서 휘파람 소리 같은 게 들렸는데 뭐지?’
‘휘파람? 가만! 설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크게 웃었다.
“우하하하! 왔구나, 왔어!”
“역시 무사했군요. 다행입니다.”
예상대로였다.
돌아온 무각공은 익숙한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다.
천하제일미청년과 평범하기 그지없는 중년인이었다.
정광이 훌쩍 뛰어내리자 무각공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정광의 몸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정광이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머리를 대충 쓰다듬어주니 무각공이 용기백배했다.
흉악하게 날름거리던 혀로 정광의 볼을 핥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받게 됐다.
“더럽게 진짜!”
콰앙!
크롸라라랏!
“시끄러워 인마. 원래 철월을 고치려면 네 피 한 말이 필요한데 당장 뽑아줄까?”
……뀨웅.
무각공이 바로 꼬리를 말았다.
독존은 정광을 얼싸안고 한참 동안 기뻐하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자야, 뽀송뽀송한 얼굴로 돌아온 건 좋은데 어떻게 된 거냐?”
“곤륜산에 가서 한꺼번에 말씀드릴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후우. 아니다. 네 뜻대로 해라.”
독존은 고집을 부리려다가 포기했다.
정광이야말로 천하제일고집쟁이 아니던가.
검후는 정광을 한번 따뜻하게 안아주고 몇 마디 덕담을 나눈 뒤 신형을 돌렸다.
독존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화 매, 어디 가는 거야?”
“동방장을 타이르러 갑니다.”
“또? 그럴 필요 없어졌잖아.”
검후의 전신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이번엔 말이 아니라 검으로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