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43화
사람이 살아봐야 얼마나 산다고
다음 날 아침.
정광은 자연지기(自然之氣)로 귀곡자의 치병을 완치했다.
귀곡자는 하해와 같은 은혜에 깊이 감동하여 만세를 외쳤다.
지긋지긋한 천형을 완전히 떨쳐내게 되어서 그런 것도 있었으나 흉측한 역용이 풀린 게 더 컸다.
“만세만세만만…….”
“뭐 하냐?”
“……네?”
“다 나았으면 일해야지.”
정광은 가볍게 핀잔을 주고 귀곡자의 등을 떠밀었다.
“원래 용모로 돌아왔으니 애들이 눈곱만큼이나마 더 따를 거야. 시간 없는 거 알지? 빨리 해.”
“조, 존명.”
하해와 같은 은혜는 개뿔.
정광이 전날 경고했던 것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시작됐다.
귀곡자는 제자 나민과 함께 마뇌의 집무실부터 뒤져 비밀 장부와 서류를 챙겼다.
그리고 총단에 산재한 크고 작은 조직을 돌며 천마신교의 현황을 파악했다.
마도칠대가문의 가주와 소가주라는 신분에 걸맞게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연혁소와 단영이 그들을 도왔다.
마인들은 이십여 년 만에 나타난 귀곡자를 보고 경악했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전대 교주가 천신이 되어 강림한 판국에 이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열심히 협조했다.
정광이 두려워서도 그랬으나 귀곡자가 마뇌보다는 훨씬 덕이 있던 상관이어서였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
귀곡자도 그들에게 따뜻한 친절을 베풀었다.
장부와 서류, 현물 등을 일일이 대조하며 확인하기 전에 주의를 줬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네만. 피치 못할 ‘실수’나 우연찮은 ‘착오’가 있으면 미리 말하게. 조사 중에 드러나면 ‘그분’께서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을 게야.”
“……!”
윗선은 물론이오, 실무자들까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뇌는 자신의 욕망이 엄청나게 큰 만큼 수하들의 욕심도 어느 정도 선까지는 인정해 준 유능한 상관이었다.
허나 그 ‘어느 정도 선’이라는 게 말이 그렇지. 티끌 모아 태산 된다고, 이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해먹은 게 얼마나 많겠는가?
아무리 교묘하게 빼먹었어도 귀곡자의 눈을 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꿀꺽.
한 노인이 침을 크게 삼키고 간신히 물었다.
“지, 지금 솔직히 고하고 가산(家産)을 바치면 식솔은 건드리지 않고 당사자만 죽이는 것으로 끝내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허허. 광명을 되찾으려는 이에게 그런 가혹한 처분을 내릴 수는 없지.”
귀곡자는 인자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 폈다.
“재산이야 성의를 생각해 다 받겠지만 본인 목숨에 식솔까지 해치면 쓰나. 팔 하나에 다리 한 짝만 내놓게. 그러면 없던 일로 하고 자리도 보전하게 해주겠네.”
“……!”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인들이 생각보다 너무 가벼운 징계에 크게 기뻐하며 병기를 뽑으려는 순간.
나민이 공손한 말씨로 허락을 구했다.
“스승님, 미욱한 제자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장차 네가 관리할 일이니 편히 말하거라.”
귀곡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허하자 마인들의 시선이 나민에게 쏠렸다.
오로나가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 귀곡자의 후계자가 된 것을 자연스레 깨달은 것이다.
나민은 마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스승에게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재산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거기에 팔다리까지 더하는 건 다소 과한 처사인 것 같습니다.”
“호오. 왜 그리 생각하느냐?”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인데 능률이 떨어져서입니다. 양손에서 손가락 하나씩, 양발에서 발가락 하나씩만 거두면 몸의 균형도 잘 맞고 일하는 데도 큰 지장이 없으니 그렇게 하는 게 어떨지요?”
“으음. 네 성품이 선한 건 칭찬할 만하나 그런 가벼운 징벌로 당사자들의 마음이 편해질까?”
편해지다마다.
나민의 의견을 듣고 속으로 환호하던 마인들은 귀곡자가 거부할 것처럼 말하자 애가 타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그들을 나민이 구원했다.
더 악랄한 방식으로.
“지금은 그 정도로 그치되, 앞으로 녹봉을 조금 올리는 대신 단 한 번이라도 부정을 저지르면 당사자와 식솔을 전부 연옥(煉獄)에서 거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특별 관리하면 형평성이 맞을 것 같습니다만.”
마인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전부 연옥에 처넣는 것으로도 모자라 특별 관리하겠다니!
이게 인두겁을 쓰고 할 소리냔 말이다!
허나 귀곡자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좋은 의견이구나. ‘그분’께서도 흡족해하실 게야. 이참에 아예 교칙(敎則)을 뜯어고치시겠지.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
마인들은 최악의 처분이라 느꼈으나 천신이 흡족해할 거라는 말에는 동의했다.
아까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이 방식이 훨씬 유리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잠시 뒤.
탁자 위에 손발가락이 높이 쌓였다.
귀곡자는 그것들보다 훨씬 드높이 쌓인 장부와 서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피로를 풀었다.
“그럼 그간 축적된 피치 못할 실수와 우연찮은 착오를 바로잡아 보세나.”
“존명!”
그들은 전시(殿試)를 준비하는 공사(貢士)들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흑서와 관엽도 마찬가지.
호교당 삼향주에서 하룻밤 새에 호교당주로 직위가 수직 상승한 곽상과 함께 아직도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을 척살했다.
이렇게 피와 비명이 안팎으로 끊이지를 않으니 분위기가 흉흉해질 수밖에.
물론 이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었다.
민현유는 향리객잔의 정보망을 총동원해 신강의 민심을 살피는 한편, 천신의 강림을 좋은 쪽으로 각색해 소문을 퍼뜨렸다.
성녀와 등현은 총단 곳간에서 식량과 재물을 꺼내 마인들에게 나눠주며 천신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천신도 무척 바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술을 들이켰다.
“하아아아. 신전을 통해서 뿌리고 있는 것들은 부정을 저질렀던 놈들이 토해내는 재산으로 충당하겠지만 너는 어떡하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도 아니고 원. 그렇게 많이 가르쳐 줬는데 어떻게 하나도 제대로 못 해?”
섬랑이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아니, 다짜고짜 이건 참마수(斬魔手), 요건 혈천마검(血天魔劍), 그리고 이게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야. 다 알겠지? 뭐? 모르겠다고? 왜? 농담하는 거지? 이러시면 어떡하란 말이에요?”
“내가 무공명만 말했냐? 구결도 알려주고 시범도 보여줬잖아. 못한 건 너야.”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요! 천하에 누가 그걸 할 수 있다고!”
“나.”
“……아.”
“네 탓 맞지?”
“…….”
확실히 그렇긴 한데.
이렇게 억울할 수 있나.
섬랑은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자오에게 사정했다.
“혈조 아저씨,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이건…… 이건 너무 가혹하잖아요.”
깨달음을 얻고 눈빛이 더 잔잔해진 자오가 미소 지었다.
“저도 단주께 그런 식으로 지도받았습니다, 소교주.”
“크윽.”
자오는 좌절하는 섬랑을 부드럽게 달랬다.
“단주는 안 될 일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복안이 있어서 이러시는 것일 테니 굳게 믿고 따르십시오.”
“……네. 그래야죠. 고마워요, 혈조 아저씨.”
섬랑은 열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광에게 복안 따위는 없었다.
정도(正道)를 걸었다.
머리가 안 되면 몸에라도 새겨야지.
안 되면 될 때까지!
섬랑을 끊임없이 몰아쳤다.
“이건 이렇게, 요건 요렇게. 이게 살짝 까다로운데 잘 봐. 어때? 이해했지?”
“망할! 이해는 무슨…… 아악!”
“정신 똑바로 차려. 천신혁련가(天神赫連家)의 적자가 가전무공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하면 누가 믿고 따르겠어?”
섬랑은 열이 뻗친 와중에도 황당해했다.
“저는 묵영권가(黙影權家) 사람인데요?”
“가문 따위는 버린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챙기네.”
“그건 그거고 무슨 말씀이죠?”
정광은 놀라운 비밀을 알려줬다.
“네 부친이 전전전대 교주의 사생아셨거든. 잊지 말고 외워.”
“전전전대면 대인의 부친 되시는 분요? 말도 안…… 끄르륵.”
섬랑은 기절했다가 깨어나는 걸 반복하다가 결국 축 늘어졌다.
조금만 더 했다간 심신이 크게 상할 상황이었으니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정광에겐 자연지기가 있었다.
화아아아아-
치병도 소멸시켰는데 이깟 상처들쯤이야.
영약이 따로 있나.
대자연의 숨결이 섬랑을 말끔히 치유했다.
정광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만 끔벅거리는 섬랑을 내려다보며 자애롭게 웃었다.
“다시 시작해 볼까?”
“차, 차라리 죽여…… 어억!”
“이제는 좀 알겠지?”
“그, 그런 것 같기도…… 끄윽.”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근 며칠간 그랬듯이 섬랑을 열정적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예기주(禮旗主) 양방이 천마전(天魔殿)에 조심스럽게 들어와 부복했다.
“천신이시여. 명하셨던 대로 칠대가문 수장들이 전부 총단에 도착했습니다.”
“벌써요?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양방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천마전이 울릴 정도로 강하게 내려찍었다.
쿵! 쿵! 쿠웅!
“소인을 당장 죽여주십시오! 최선을 다했으나 이제야…….”
“할 일은 다 하고 가셔야죠.”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생각 좀 해보고요. 다들 어디 계세요?”
“처, 천마궁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반 시진 후에 모셔와 주세요.”
“존명!”
양방이 사라지자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오가 정광의 마음을 헤아리고 얼굴을 굳혔다.
“칠대가문을 상대하기 귀찮아서 그러십니까?”
“그보다 얘 때문에 그런 게 크죠.”
어느새 정신을 잃고 쓰러진 섬랑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네. 빠른 길로 가야겠어요.”
“어떤 길입니까?”
정광은 행동으로 보여줬다.
기절한 섬랑의 팔다리를 차곡차곡 접어 가부좌를 틀게 한 뒤 백회혈(百匯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명념반추대법(銘念反芻大法)을 펼쳤다.
으스스한 마기가 일어나며 정광의 의념(意念)이 섬랑의 뇌리로 쏟아져 들어갔다.
천신혁련가의 무공과 전생에 창안한 절기들이 섬랑의 뇌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길 한 식경.
정광이 손바닥을 떼고 크게 심호흡했다.
“후우우. 은근히 피곤하네.”
빈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이마에 땀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묵묵히 호법을 서고 있던 자오가 깨끗한 천을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마워요. 운기조식 좀 할게요.”
정광은 땀을 닦은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자연지기를 받아들여 순환시키자 그리 오래지 않아 심신이 완전히 회복됐다.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소환단(小還丹)이 하나 남았는데 쓸 필요가 없어서 좋네.’
눈을 뜨자마자 자오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물었다.
“아까 그것 말입니다. 보통 신공이 아닌 것 같은데 무엇입니까?”
“강제로 기억하고 무의식중에 음미하게 하는 거요.”
깨달음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자오였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어. 그런 것까지 가능한지는 몰랐습니다. 평소 사용하지 않으시다가 쓰신 걸 보면 장점보다 단점이 더 큰가 봅니다.”
“네. 형(形)과 법(法)의 모양새만 새겨준 거예요. 한동안은 편하겠지만 길게 보면 또 다른 벽이 될 공산이 크죠.”
“아! 본인이 외우고 궁리하며 시행착오를 반복하다 보면 그만큼 얻는 게 있는데 그걸 어느 정도 건너뛰게 되니 공(功)을 단련하는 데 애 좀 먹을 거란 말씀이군요.”
“시간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죠.”
자오는 섬랑을 내려다보다가 싱긋 웃었다.
“단주께서 택하신 인재입니다. 소교주는 잘 해낼 겁니다.”
정광도 피식 웃었다.
“들었지? 실망시키지 마.”
섬랑의 눈을 덮고 있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조금 전에 정신을 차렸는데 들킨 것이다.
정광은 섬랑의 머리털을 헝클어뜨리고 문 쪽을 바라봤다.
이마가 깨진 양방이 문을 열고 정중히 보고했다.
“칠대가문의 수장들이 왔습니다.”
“들어오시라 말씀해 주세요.”
사람들이 들어왔다.
정광은 환하게 웃으며 마혼을 개방했다.
흑염(黑焰)이 세차게 솟구쳐 거대한 마신(魔神)으로 화했다.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됐다.
그들은 전대 교주가 살아 돌아와 현 교주를 때려죽이고 너희들을 불렀다는 서신을 받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왔다.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조금만 꾸물거려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해서였다.
그런데 진짜라니!
‘이럴 수가! 어찌 이런 일이!’
‘천하가 도탄에 빠지겠구나! 이 일을 어이할꼬!’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광은 마혼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자연지기를 받아들여 순환시킨 뒤 발산했다.
화아아아아-
찬란한 금빛 광채가 일어나 반발심을 품은 마인들을 덮쳤다.
극랍염가 태상가주와 객십설가 태상가주, 토로번손가 원로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오랫동안 가꿔온 마(魔)가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자연지기에 녹아 상당 부분이 소멸된 것이다.
그들은 검게 죽은피를 꾸역꾸역 토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바닥에 엎드려 경배했다.
“만세만세만만…….”
“피 튀기잖아요. 편히 앉으세요.”
“조, 존명!”
정광은 다들 명을 따르자 조곤조곤 물었다.
“사람이 살아봐야 얼마나 산다고. 괜히 일찍 죽을 필요는 없죠. 안 그래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곤륜산에 가신 분들도 그만 오시라 하죠. 많은 피해를 입었을 텐데 더 끌어봤자 손해잖아요.”
“물론입니다!”
“혹시 불만 있으신 분?”
다른 이들은 모두 정광의 진체를 알고 있었거나 나민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이들인데 그런 게 있을 리 있나.
아극소연가주 연혁소, 고이륵단가 소가주 단영, 이녕임가주 임종호, 오로나가 대원로는 한목소리를 냈다.
“모두 천신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정광은 단영을 시켜서 미리 써둔 서류를 꺼냈다.
“직인 챙겨오시라고 전해 드리라 했는데 가져오셨죠? 대충 읽어보시고 꾹 찍으세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직인 찍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뒤.
천마신교 총단에서 전서응이 여러 마리 날아올라 신강 곳곳으로 흩어졌다.
‘칠대가문의 이름으로 모두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서신을 뿌렸으니 헛짓거리를 하는 놈은 없겠지.’
정광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칠대가문의 동의는 방금 구했지만 며칠 전에 이미 전서응들을 보낸 곤륜 방향이었다.
‘뭐 잘 버티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