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13화 (512/569)

2부 242화

나는 나

자오는 조금 전에 들은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다들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냥 저예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단주는 괜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터.

자오의 이마에 굵은 주름살이 잡혔다.

‘나는 그냥 나라니. 가만, 단주가 어떤 사람이었더라?’

아까 마인들이 떠들어댔던 살벌한 호칭들과 그것들이 의미하는 두려운 사실은 일단 제쳐두고.

단주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되짚어봤다.

‘사마련에 몸담고 있을 때, 상소운의 명을 받고 철혈장에서 그를 감시하다가 발각됐었지.’

은신술을 알아챈 무공 실력도 대단했지만 더 대단한 건 따로 있었다.

나름 험한 곳에서 굴렀다고 자부했는데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극악무도한 고문을 가하며 신음도 안 내는 사내대장부라고 칭찬하던 모습이라니.

본인이 짚어놓은 아혈(啞穴)을 풀어줘야 비명을 지르든 토설하든 할 것 아닌가?

자오는 저도 모르게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크윽.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마귀가 따로 없었어.’

거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기이한 섭혼술을 걸어 정신을 어지럽히는가 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러운 독까지 먹여가며 괴롭혔다.

게다가 알고 보니 그냥 독도 아닌 만성독약(慢性毒藥).

여기까지 왔는데 버티면 사람이 아니지.

천하의 마귀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부복하며 가르침을 청할 잔인무도한 심성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걸 포기하니 모든 게 달라졌다.

“별호가 뭐예요?”

“자오(慈烏)입니다.”

“까마귀가 뭐야, 까마귀가. 내가 각응(角鷹)으로 바꿔주죠.”

“감사합니다. 앞으로 제 별호는 각응입니다.”

“별호를 바꾸면 뭐 해요. 실력을 먼저 키워야지.”

“……그 말씀은?”

“각응으로 불릴 수 있게 가르쳐 드릴게요. 그러니 열심히 하셔야 해요.”

빈말이 아니었다.

무인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한 영약과 무공, 거기에 뛰어난 병기까지.

단주는 마치 하수분(河水盆)에서 물이라도 퍼내는 것처럼 끊임없이 베풀었다.

자연히 실력이 쑥쑥 늘고 성품도 조금씩 변할 수밖에.

그뿐이랴.

그를 따라다니며 좋은 사람들도 많이 사귀었다.

그 덕에 많은 걸 느끼고 조그마하게나마 협(俠)을 행하게 되었으니. 그로 인해 다설범협(多舌凡俠)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호남성에서 사마련과 건곤일척의 혈투를 벌인 후 요녕성에 이르렀을 때.

단주는 모용세가 대공자 모용상현에게 자오를 각응이라 소개했다.

그렇게 불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조를 지킨 것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윤회를 끝없이 반복해도 이런 은인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단주의 은혜는 계속 쏟아졌다.

황궁에서 사부가 살수답게 죽게 해줌으로써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사부의 그림자를 깨끗이 지워줬다.

또한 영인문(影人門)의 무공과 재산까지 물려받게 해줘서 전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올라설 수 있었다.

자오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되짚어보면 볼수록 받은 것이 너무 많아. 이 은혜를 어찌 갚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군으로 모시며 충성을 바치는 것밖에 없건만.

단주는 그것마저 거절했다.

과거 무림맹 숙영지에서 몰래 빠져나와 주유천하(周遊天下)를 시작할 때,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지은 우인회숙(友人會宿)의 한 구절을 읊으며 주종 관계가 아닌 친우임을 확실히 주지시켰다.

‘마귀…… 는 오래전에 끝났고. 은인이자 친우라…….’

그래, 단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진체가 뭐든 간에 자오에게는 그랬다.

한 가지 문제를 풀자 다음 문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드릴 말씀은 다 드렸고.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어떡하긴.

단주는 항상 그랬듯이 때가 됐으니 알려준 것이다.

그가 왜 하고많은 이들 중에서 자신만 데려왔겠는가?

‘그만큼 믿어서지.’

자오는 형언할 수 없는 고마움과 가슴 벅찬 자부심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런. 울면 안 돼. 그랬다간 ‘우세요? 우는 것 같은데?’ 하며 놀리실 거야.’

마음을 다스리고 정광을 똑바로 바라봤다.

“제가 단주를 모신 게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단주께서 계신 곳이 곧 제가 있는 곳입니다.”

이 말이 끝날 때쯤엔.

자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광도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역시 자오답네요.”

“저답다니요?”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어요?”

“…….”

당연히 모르니 묻지.

자오의 이마에 다시 굵은 주름이 생겼다.

‘나다운 게 뭘까?’

전직 사파인?

다설범협? 각응? 혈조?

아니면 영인문주(影人門主)?

‘거참. 단주는 어떤 사람인지 금방 정리해 놓고 나 자신은 왜…… 아!’

조금 전에 궁리하며 깨달았듯이 사람이란 소속 문파나 별호, 신분 같은 것으로 설명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뭐지? 단주는 내게서 뭘 봤기에 나답다고 한 걸까?’

생각이 깊어졌다.

자오는 자연스럽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귀주성 정안현에서 삼남이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나이 열하나에 사흑맹 소속 방파인 파천방에 입문하여…….’

이렇게 삶을 세세히 되돌아보며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간 지 얼마나 됐을까?

자오의 전신이 은은한 빛에 휩싸였다.

깨달음을 얻어 무아지경에 빠진 것이다.

정광은 하도 어이가 없어 머리를 긁으며 지켜보다가 아직도 부복하고 있는 일행에게 권했다.

“그만 일어나세요.”

모두 재빨리 일어나 정중히 예를 표했다.

섬랑도 그랬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모깃소리만 한 목소리로 물었다.

“엎드리고 있을 때부터 훔쳐봤는데요. 혈조 아저씨, 무아지경에 빠지신 거 맞죠?”

“응.”

“역시. 두 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그래요?”

그들이 나눴던 대화는 정광이 내공으로 막았기에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정광은 대충 둘러댔다.

“글쎄. 별것 아니었는데 갑자기 저러시네.”

한마디로 얻어걸렸다는 얘기.

섬랑은 너무 부러워서 크게 한숨을 쉬다가 두 손으로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정광이 이건 또 뭐 하는 짓이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섬랑이 나직이 속삭였다.

“혈조 아저씨가 운 좋게 벽을 깨고 계시는 중인데 시끄럽게 하면 안 되잖아요.”

“난 또 뭐라고.”

정광은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안 들리게 하고 있으니 괜찮아.”

“망할. 진작 말씀하시지.”

옆에 묵묵히 있던 관엽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전처럼 지존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였으면 모를까, 이런 무례를 어떻게 넘어가겠는가?

섬랑을 차갑게 쏘아보며 전음을 보냈다.

-소교주, 아까 못 보셨소? 감히 누구에게 망발을 하는 것이오? 예의를 지키시오.

“……!”

섬랑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목을 움츠렸다.

정광은 어찌 된 일인지 눈치채고 손을 내저었다.

“됐어. 예전처럼 대해.”

섬랑의 목이 순식간에 펴졌다.

“헤헤. 그렇죠? 그게 편하시죠? 어차피 대인은 대인이시니까요.”

“네가 더 편하겠지.”

섬랑은 머쓱한 얼굴로 딴청을 부리다가 자오를 쳐다봤다.

“이제 다 끝났는데 깨달음을 얻으시네. 뭐에 쓰시려고.”

정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세상은 넓고 다툼은 많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잘된 거지.”

섬랑이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다.

“대인…… 아니, 진천…… 망할. 히끅! 아, 아시죠? 저한테 욕한 거예요. 처, 천신님께서야말로…….”

“대인으로.”

“……대인이시야말로 무슨 말씀이세요. 신강에 쭉 계시면 남과 싸울 일이 없잖아요.”

“일단 뒷정리부터 하자.”

정광은 오체투지하고 있는 마인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다들 뭐 하세요? 어서 일어나시지 않고.”

“……!”

누구의 명인데 거부하랴.

마인들이 절세고수처럼 빠르게 일어섰다.

정광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그들에게 부드러이 웃으며 설명했다.

“하하.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진혼이에요.”

그런 신위를 떨쳐놓고 오해하지 말라니.

아무도 믿지 않았다.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저러는지, 공포에 질려 일제히 부복했다.

“만세만세만만…….”

“일어서시라니까. 전부 귀가 안 좋으세요?”

그럴 리 있나.

모두 재빨리 일어나 소리쳤다.

“아닙니다!”

“교우님들도 오해하신 게 좋잖아요. 사실이면 꽤 불편하실 텐데.”

마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절대 아닙니다!”

“그래요? 한 분만 그러신 건가.”

정광은 그들을 눈으로 훑다가 한 사람을 지목했다.

“도철대주(饕餮隊主)님, 아까 뭐라고 하셨죠?”

“……!”

사흉대(四凶隊) 중 도철대를 이끄는 깡마른 노인이 기절초풍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처, 천신이시여. 소, 소인은 그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셨죠.”

“크흑!”

도철대주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다른 마인들도 비슷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교주와 싸우는 와중에도 그걸 들었구나!’

‘뒤끝하고는! 천신이 되었는데도 똑같잖아!’

그래도 그들은 나았다.

그 뒤끝에 걸린 당사자는 그대로 허물어져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쓸모없고 부덕한 놈을 그냥 죽여주십시오!”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정광은 훈훈한 음성으로 도철대주를 다독였다.

“이런 좋은 날에 또 피를 볼 수는 없죠.”

“……!”

절대 좋은 날이 아니었으나 도철대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허나 잠깐뿐이었다.

“많이 흥분하셨네. 연옥(煉獄)에서 푹 쉬면서 머리를 식히세요. 생명은 소중하잖아요.”

“……!”

도철대주는 머리를 바닥에 박은 채 두 눈을 부릅떴다.

‘차라리 사지를 두 개쯤 자를 것이지, 그 악명 높은 뇌옥에 집어넣겠다고? 이판사판이다! 죽더라도 반항은 하고 죽으마!’

하지만 덧없는 망상이었다.

과거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질렀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던가?

게다가 상대는 그때의 진천마가 아니었다.

천신의 성화(聖火)를 품고 돌아와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아아…….’

도철대주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천하가 도탄에 빠지면 강림한다더니. 천상(天上)도 금방 싫증이 났는지 그새 내려와 천하를 도탄에 잠기게 하는구나.’

정광이 말하기도 전에 호교당(護敎堂) 무인들이 죄인에게 다가갔다.

도철대주는 저항하지 않았다.

마혈을 제압당하는 와중에도 천신의 덕을 칭송했다.

“천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가슴에 품고 살겠습니다!”

정광은 짧게 명했다.

“시끄러우니까 아혈도 짚으세요.”

“존명!”

호교당 무인들은 힘차게 답하고 도철대주를 끌고 갔다.

정광은 다음 명을 내렸다.

“예기주(禮旗主)님.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천마신교 행정 조직들인 육기(六旗)에서 각종 행사와 외교를 담당하는 예기(禮旗)의 우두머리가 다급히 나왔다.

멸혼생사투 본선을 진행했던 양방이었다.

“부탁이라는 말씀, 소인은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명해주십시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뭐든 말할게요.”

양방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리고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아예 새파랗게 질렸다.

“교주님께서 안타깝게 귀천하셨으니 넋을 위로해 드려야겠죠? 암. 한 식구로서 당연히 그래야죠.”

직접 밟아 죽여놓고 뭐가 어째?

하지만 입은 다르게 움직였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칠대가문의 수장분들을 모아주세요. 고이륵단가는 소가주님이 대리하고 계시고 아극소연가 역시 가주님이 이곳에 계시니 두 가문은 빼고요.”

“……!”

한자리에 모아놓고 몰살시키려는 건가?

최대한 빨리라는 말은 지금 당장 도착하게 하라는 것일지도.

‘신강이 얼마나 넓은데 어떻게?’

허나 명을 내린 자는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양방은 과거의 값진 경험들을 떠올리며 솔직히 고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무리 빨리 모여봤자…….”

“그러실 시간에 더 빨리 움직이시면 어떨까요.”

“존명!”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정광은 여러 마인에게 임무를 주고 전부 해산시켰다.

그러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아극소연가주 연혁소가 조심스레 감사를 표했다.

“소인의 아비를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정광은 싱긋 웃었다.

“그래도 교주셨으니 그에 걸맞는 예우는 받으셔야죠.”

연혁소는 복잡한 눈으로 정광을 응시하다가 공손히 예를 표하고 사라졌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섬랑이 정광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진체를 드러내신 거예요? 제 생각엔 ‘이왕 하는 거, 화끈하게 해버리자’ 이런 마음이셨을 것 같은데.”

“오오.”

섬랑의 어깨가 하늘로 치솟았다.

“맞죠? 그럴 줄 알았어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 헛짚냐?”

“……네?”

연휘준을 죽이려면 진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연지기까지 써가며 천신의 재림인 것처럼 보여준 건 과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래야 했어.’

섬랑의 추측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모자란 것보다는 과한 게 낫지.’

이곳을 떠난 후에도 마인들이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천신의 신화를 통해 쭉 이어져 오던 ‘믿음’과 진천마에 대한 ‘두려움’이 합쳐지면 누구도 쓸데없는 욕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헛짓거리를 하는 놈이 생기면 패주면 되고.’

정광은 생각을 정리하고 담담히 말했다.

“진체를 드러내긴 무슨. 나는 나야.”

“아니, 그래도…….”

“시끄러워.”

따악!

“아악!”

정광은 섬랑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깨달음이 절정에 달한 자오를 쳐다봤다.

그리고 일행에게 당부했다.

“한동안 바쁠 테니 오늘은 푹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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