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41화
그러실 줄 알았어요
두 눈에 죽어라 힘을 주고 주시하면 뭐 하나.
빨라도 좀 빨라야지, 대연무장에 모인 마인들 중 싸움을 제대로 보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쏟아내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살기와 마기까지 느끼지 못할 리 있나.
두 손에 땀을 쥐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가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기다리는데.
어느 순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도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
‘짜악!’ 하는 상쾌한 소리와 함께 천마신교주 연휘준의 고개가 홱 돌아가고 입에서는 이빨들이 튀어나오는 것 아닌가?
숨죽인 채 지켜보던 마인들은 입을 떡 벌리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기 마련.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인들은 놀란 가슴을 와락 움켜쥐고 지금껏 목도했던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지옥의 겁화(劫火)처럼 흉포하게 일렁이는 거대한 악귀.
천마신교주 연휘준에게 부상을 입히는 놀라운 신위.
그것도 하필이면 뺨을 손바닥으로 갈겨서 이빨들을 털어내는 잔악한 심성까지.
금방 결론이 나왔다.
마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머릿속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지, 진천마(眞天魔).”
“지존?”
“전대 교주잖아!”
제각기 다른 호칭이었으나 단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들이었다.
마중마(魔中魔)이자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로 불리던 위대한 마인 혁련후!
성품은 물론이오, 일 처리 방식도 흡사해서 그의 후인답다고 느껴왔건만 본인이라니!
연휘준을 따라온 총단 고수들 중 한 깡마른 노인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아니야.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주변에 있던 몇몇 마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란 말 때문이었다.
‘숨통이 트여서 산 지 이십여 년밖에 안 됐거늘, 또다시 종노릇을 하며 굴러야 한다고?’
‘빌어먹을! 절대로 안 해! 아니, 못 해!’
반발하는 것도 잠시.
그들의 눈이 짙디짙은 공포심으로 물들었다.
모두 지위가 높은 고수였기에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어서였다.
검은 악귀가 연휘준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금빛 광채를 줄기줄기 쏟아내던 보검은 어느새 검집에 집어넣고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악귀가 바짝 달라붙어서 접근전을 강요하자 연휘준도 응할 수밖에 없었다.
“갈!”
신검을 가까스로 납검(納劍)하고 권각술로 맞섰다.
초혼마보(招魂魔步)를 밟아 귀신처럼 악귀의 뒤로 이동한 뒤 파성권(破城拳)을 펼쳤다.
성곽이라도 단숨에 무너뜨릴 것 같은 강력한 일격이 악귀의 등을 향해 쏘아졌다.
그 순간, 악귀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뒤돌아섰다.
흑염(黑焰)의 일부가 살짝 갈라지고 하얀 선이 생겨 있었다.
악귀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이었다.
그 잇새로 차디찬 칭찬이 흘러나왔다.
“늘긴 늘었네.”
말과 행동이 달랐다.
이미 검은 불길이 쭉 늘어나 연휘준이 내지른 주먹을 옆으로 밀어내고 팔을 뱀처럼 휘감은 상태였다.
연휘준이 대응할 새도 없었다.
흑염이 그의 팔을 물어뜯었다.
천하마도의 종주 천신혁련가(天神赫連家)가 자랑하던 비기, 파골금나수(破骨擒拿手)였다.
빠가각!
연휘준의 오른팔이 박살 났다.
동시에 악귀가 다른 불길을 휘둘러 오른쪽 뺨을 후려갈겼다.
연휘준이 왼손으로 막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짜아악!
아까보다 더 청량한 소리가 탁목이봉을 울렸다.
연휘준 역시 전보다 더 많은 이빨을 토해냈다.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던 마인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역시!’
때린 곳을 또 때려서 육신을 꺾는 걸 넘어 마음마저 무너뜨리는 악랄한 손속!
적에게만큼은 뒤끝이 넘치도록 있었던 전대 교주 아닌가!
어째서 저렇게 강한지, 간밤에 향리객잔에서 황금빛 유성을 쏘아 올린 게 누구인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됐다.
덕분에 긴가민가하던 마음이 확실히 굳어졌다.
‘진혼이 그분이었어!’
또 다른 의문을 느낀 이들도 있었다.
교주의 신검이야 원래 그랬으니 그렇다 치고.
진혼의 것도 검신이 검붉은 데다 똑같은 금빛을 발했다.
천하에 그런 검이 흔할 리 있나.
그래도 비슷한 것을 쓴다는 무인이 있었는데…….
풍문으로만 전해 듣던 별호를 떠올린 마인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 진옥룡?”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진혼이 진옥룡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 중 한 명도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였다.
자오의 눈동자가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난 쪽배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정광이 이 사달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무력으로 짓누르든 음모를 꾸며서든 간에 말끔히 해결하리라.
하지만 그가 고금제일마 진천마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믿기 싫었지만 무턱대고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파명문 곤륜파의 제자가 마공을 능수능란하게 펼치고 수많은 마인들을 거둔 게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자오의 몸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가늘게 경련했다.
‘정말 사실이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생사투가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연휘준은 정광에게 계속 구타당하다가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본좌를 우습게 보지 말아라!”
무거운 장력을 쏟아내고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주르륵 물러났다.
그리고 성한 왼손으로 신검을 뽑았다.
검붉은 검신이 내공을 듬뿍 머금고 눈부신 광채를 쏟아냈다.
장기인 검술로 최후의 일격을 펼치려는 것이다.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껏 집어넣게 했는데 또 꺼내네.’
놀이는 여기까지, 끝낼 시간이었다.
-일어나.
마혼이 응답했다.
정광의 육신에서 일렁이던 흑염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화르르르르-
흉포한 악귀가 몸집을 불리며 형상을 변화시켰다.
잔혹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마신(魔神)으로 화해 연휘준을 오연히 굽어봤다.
정광은 그 상태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었지만 마신에겐 천하를 군림하는 위대한 행보였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천마신교주의 상징이었으나 천신혁련가의 맥이 끊긴 이후로 사라졌던 절기가 재현됐다.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이 연휘준을 빈틈없이 옭아매고 짓눌렀다.
콰직-
“끄윽.”
연휘준이 신음을 흘리며 마보를 하는 것처럼 두 무릎을 꺾었다.
마신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콰아악-
“커헉!”
연휘준이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풀썩 꿇었다.
그리고 또 한 걸음.
이렇게 단 삼보(三步)면 충분했다.
콰아앙!
“끄아악!”
연휘준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신검을 떨어뜨렸다.
동시에 나머지 무릎도 꿇으며 단단한 화강석을 뚫고 들어갔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떡 벌린 그의 입에서 부서진 내장 조각이 검은 핏물에 실려 흘러내렸다.
정광은 머리를 제외한 온몸이 바닥에 파묻힌 연휘준에게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만. 잠시 기다려.
걸음마다 정광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불길이 마신의 형상을 그렸다가 흩어지고 다시 그리는 걸 반복했다.
연휘준은 정광이 다가와서 가만히 내려다보자 피를 몇 번 토하다가 간신히 말했다.
“쿨럭. 쿨럭. 분명히 귀천했는데 다시 나타날 줄이야. 당신에겐 불가능한 일이 없구려.”
“말이 꽤 짧아졌네?”
“크으윽. 나, 나도 늙을 만큼 늙었소.”
“나이가 벼슬이냐? 그래도 본좌 타령은 안 했으니 넘어가 줄게.”
연휘준의 눈이 커졌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리다가 간신히 물었다.
“이렇게 많이 변하다니.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오?”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살다 보니 조금 변하더라고. 너도 그렇잖아. 자존심 강한 놈이 정공을 받아들이고.”
연휘준의 이마에 밭고랑 같은 굵은 주름이 파였다.
“경우가 다르오. 당신에게 한 치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소. 더는 엎드리기 싫어서 최선을 다한 것이오.”
“고생한 보람이 있네. 덕분에 부복하지 않고 무릎만 꿇은 채 파묻혀서 죽게 됐으니까.”
“…….”
연휘준은 허탈한 눈으로 정광을 올려다보다가 얼굴을 굳혔다.
“솔직히 대답해 주시오. 오늘의 나, 어땠소?”
정광은 싱긋 웃었다.
“아까 얘기했잖아. 늘긴 늘었다고.”
연휘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 봤자겠지. 위로해 줘서 고맙소.”
“뭐 그런 걸 가지고.”
정광은 망설임 없이 마지막 걸음을 걸었다.
마신이 거대한 발을 들어 올렸다가 위엄 있게 내디뎠다.
쿠우웅!
연휘준의 머리통이 산산이 조각이나 주변에 흩뿌려졌다.
천하마도를 다스리는 천마신교주답지 않은 허무한 최후였다.
지켜보던 마인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정광이 내공으로 차단해서 대화가 새어나가지는 않았으나 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진천마가 재림(再臨)했으니 만마(萬魔)가 앙복(仰伏)할 수밖에.
마인들이 급히 부복하며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를 외치려고 하는데.
비무대 밑에 있던 악령강시(惡靈僵屍) 다섯 구가 정광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연휘준이 미리 명해둬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제조할 때부터 주인이 죽으면 복수하게 되어 있어서였다.
정광은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정도로 놀랄 위인도 아니었고.
‘악령은 개뿔. 그래봐야 본바탕은 마령강시지.’
어차피 기다리던 참이다.
이왕 하는 거 크게 터뜨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놈들을 이용해서 진천마니 진옥룡이니 하는 의혹을 전부 벗어버리는 거다.
-들어가.
마혼은 지시에 담긴 무거움을 느꼈는지 순식간에 중단전 옥당(玉堂)으로 들어갔다.
정광은 때맞춰 선기(仙氣)를 개방했다.
상반된 두 기운이 옥당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로 뒤엉켰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천위(天爲)로 합일된 옥당의 성질과 항마토납술로 하단전 석문(石門)을 열고, 상단전 인당(印堂)으로 살핀 자연지기를 받아들였다.
하단전에 들어온 자연지기가 중단전을 거쳐 상단전까지 올라간 뒤, 다시 아래로 내려와 순환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이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정광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손목에 차고 있던 항마주(降魔珠)가 위엄 있게 진동하며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역천경은 그새 눈치가 늘었는지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정광은 내심 만족하며 쇄도하는 악령강시들을 향해 쌍장을 뻗었다.
쌍장에서 찬란한 금광(金光)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순수한 기운이 쏟아져 나와 악령강시들을 집어삼켰다.
정광은 하얀 재로 변했다가 결국 소멸해 버리는 악령강시들을 보며 오대산 현통사(顯通寺)에서 읽었던 감몽구법설(感夢求法說)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가 꿈에서 황금빛이 나는 신인(神人)을 보았다. 그가 부처라 생각한 명제는 천하 곳곳에 사람을 보내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대월씨국(大月氏國)에서 천축의 고승 가섭마등과 축법란을 모셔와 불교를 퍼뜨렸는데 그 덕에 나라가 안팎으로 평안해질 수 있는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먼 훗날 천하가 도탄에 빠지면 황금빛을 내는 신인이 또 나타날 테니 천하는 명제의 예를 따라야 하리라.]
정광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신화라는 건 보통 그놈이 그놈이지.’
그의 생각대로였다.
정광을 진천마의 재림이라 여기고 부복하려던 마인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천신(天神)이 남겼다던 경고를 떠올렸다.
[언젠가 천하가 도탄에 빠지면 다시 세상에 내려와 스스로를 성화(聖火)로 불태우며 세상까지 정화시킬 것이다. 나를 믿어야 금빛 성화에 타지 않고 살아남아 태평성세를 누리게 될 거다.]
마인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시, 신검도 없이 맨몸으로 황금빛 광채를!’
‘겨우 귀천하나 싶더니 하늘에서 뭘 한 거야! 전대 교주가 천신이 되어 돌아왔어!’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두 손을 툭툭 털고 자신들을 둘러보는 것 아닌가!
아직도 그의 몸에 은은히 맺혀 있는 금광이 마인들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그 결과는 뻔했다.
천신강림(天神降臨) 만마앙복(萬魔仰伏)!
마인들이 일제히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며 목놓아 외쳤다.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위대한 천마신교의 조종(祖宗)이시며 드높은 하늘 위에서 세상을 굽어보시는…….”
“거기까지요.”
“……!”
마인들은 외침을 급히 끊느라 내상을 입을 지경이었지만 아무도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정광은 연휘준이 떨어뜨린 신검을 주워 들고 이맛살을 모았다.
‘검집을 챙기려면 연가 놈을 꺼내야 하잖아.’
굳이 저울질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 검에 맞는 검집을 새로 만드는 것보다 바닥을 깨는 게 편할 수밖에.
장력을 떨쳐서 화강석을 부수고 연휘준을 꺼냈다.
이왕 꺼낸 거, 편안하게 눕혀 주고 검집을 챙겼다.
검을 검집에 넣어 허리춤에 찔러 넣은 뒤 발걸음을 옮겼다.
일행이 있는 천막 쪽이었다.
모두 다른 마인들처럼 오체투지하고 있었으나 단 한 사람만큼은 아니었다.
정광은 그자 앞에 서서 담담히 얘기했다.
“다들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냥 저예요.”
“……!”
별것 아닌 말이었으나 듣는 이에겐 다르게 들렸다.
“드릴 말씀은 다 드렸고.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
자오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