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40화
깜빡할 뻔했네
저렇게 한없이 정제되고 압도적인 힘을 발산하는 마기(魔氣)가 또 있을까.
‘그’의 상징 마혼(魔魂)이었다.
그것으로 이루어진 검은 불길을 전신에 휘감고 쇄도하는 모습이라니.
연휘준의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확대됐다.
당황해서가 아니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순간이어서였다.
‘이미 본좌가 복속시킨 것이다.’
‘그’를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계승했다.
연휘준은 새로운 진천마였다.
본래 지니고 있던 마기는 물론이오, 중단전 옥당(玉堂)에 가둬둔 종복까지 해방시켰다.
소름 끼치는 마기가 들불처럼 일어나고 봉인되어 있던 마혼이 뛰쳐나와 피를 갈구했다.
그것들을 손에 쥔 검에 불어넣었다.
역시 ‘그’가 남긴 신검(神劍) 마혼이 자신과 똑같은 이름의 마기를 듬뿍 머금었다.
그리고 정면을 향해 금광(金光)을 토해내며 달렸다.
목표는 진혼이 거세게 휘두르고 있는 만마(萬魔)였다.
쩌엉!
‘……!’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이 귀를 찌르고 거대한 충격이 검을 잡은 손을 통해 들어와 내장을 뒤흔들었다.
연휘준은 단 한 번의 격돌로 알게 됐다.
적은 강했다.
허나 전생의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내공은 내가 우위!’
아무리 천재고 영약을 밥처럼 챙겨 먹었다 해도 세월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뿐이랴.
연휘준의 검과 달리 적의 것은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가 빠져 있었다.
답이 나왔다.
나의 강점으로 상대의 약점을 부순다.
무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이치 아닌가?
신묘한 보법 따위는 필요 없었다.
두 발로 비무대 바닥을 단단히 밟았다.
콰지직-
신장이 순식간에 두 치는 작아졌다.
그 높이만큼 양발이 화강석을 뚫고 들어간 것이다.
이제 다음 차례.
충돌의 반동으로 뒤로 밀려나려는 신검을 강하게 움켜쥐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마혼이 그 내공을 신검으로 인도했다.
화아아악-
신검이 금빛 광채를 미친 듯이 발산하며 허공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극소연가가 자랑하는 비기(秘技) 현폭사검(懸瀑死劍)이었다.
콰직!
드높은 산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기세가 이럴까.
세차게 내려온 신검이 보검이라 할 수 있는 적의 병기를 삼분지 일쯤 파고 들어가 멈췄다.
연휘준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살(殺)!’
필살의 의지와 함께 내공과 근력을 쏟아부었다.
신검이 눈부신 빛을 뿌리며 적의 검을 그대로 갈랐다.
서걱-
그리고 사람이 아니라 비무대 바닥에 박혔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화강석이 부드러운 두부처럼 가볍게 잘렸다.
연휘준의 눈썹이 역팔자(逆八字)로 휘었다.
‘이걸 피해?’
감탄하거나 분노할 겨를이 없었다.
적은 간발의 차이로 신형을 돌려서 피하고 그 회전력을 이용해 부러진 검을 횡으로 긋고 있었다.
동강 난 검신에서 무시무시한 흑염(黑焰)이 쏘아졌다.
연휘준의 왼팔을 몸통과 함께 양단할 기세였다.
다른 이라면 느닷없이 가해진 반격에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고 재반격을 노렸으련만.
연휘준은 달랐다.
기껏 잡은 승기를 놓아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강적을 죽이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이대도강(李代桃僵).
사소한 것을 포기해 큰 목적을 이룬다.
흑색 악귀의 형상이 수놓인 핏빛 장포(長袍) 속에 보의(保衣)를 입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막아주리라.
그래도 혹시 몰라 왼팔을 내공으로 보호했다.
그리고 검을 움켜쥔 오른손에 집중했다.
단전에서 솟구친 진기가 경락(經絡)을 타고 달려가 바닥에 박힌 신검에 맺혔다.
‘파(破)!’
유폭마공(誘爆魔功)이었다.
진기가 나선형으로 맹렬하게 회전했다.
그 순간, 신검을 강하게 쳐올렸다.
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비무대 바닥이 폭발했다.
쐐애애액-
날카롭게 조각난 화강석들이 신검의 움직임에 이끌려 적을 향해 암기처럼 쏘아졌다.
‘됐어!’
왼팔이 베이는 대신 적에게 수많은 석편(石片)을 꽂는다.
놈의 보의를 뚫을 수는 없겠지만 상당한 충격을 줄 터.
안 그래도 내공이 열세인데 내상까지 입게 될 공산이 컸다.
‘그렇게만 되면!’
이쪽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내공으로 몰아쳐서 목을 베면 된다.
이보다 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나.
드디어 ‘그’의 짙은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진천마 본인이었다.
횡으로 휘두르던 힘을 그대로 살려서 검신이 잘린 만마를 던지고 신법을 펼쳤다.
이형환위(移形換位).
만마가 연휘준의 상박에 박히고 석편들은 정광이 남겨 놓은 잔영을 꿰뚫고 날아갔다.
정광의 신형이 연휘준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두 사람의 이마에 동시에 주름이 잡혔다.
한쪽은 승기를 놓쳐서, 다른 쪽은 예상이 맞아서였다.
“혹시나 했더니. 보의를 걸치고 계시네요.”
“…….”
연휘준은 말없이 자신의 왼팔을 봤다.
찢어진 장포 사이로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검은 가죽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팔을 뒤틀어서 흘리셨다곤 해도 겨우 흠집만 났네. 뭐가 저렇게 질겨?”
정광이 투덜거리자 굳게 닫혀 있던 연휘준의 입이 열렸다.
“네 것만 하겠느냐.”
정광의 옷도 여러 곳이 찢어져 있었는데 그 틈으로 무각공(無角公)의 누런 비늘들이 보였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검은 내 것이 낫구나.”
“과연 그럴까요?”
뒷일은 뒷일이고.
써야 할 땐 써야지.
정광은 허리춤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던 운룡(雲龍)을 뽑았다.
스르릉-
녀석이 세상에 나와 연휘준의 신검과 똑같은 검붉은 검신을 마음껏 뽐냈다.
연휘준의 양 뺨이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보의를 보고도 설마설마했거늘. 현철을 통째로 써서 벼려 낸 검이라니. 네 정체를 생각하다가 나온 결론들 중에서 하나가 또 드러나는구나.”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기분 탓이겠죠.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잖아요. 사람이 만드는 병기와 기물 역시 그렇고요. 비슷한 게 얼마나 흔한데.”
연휘준은 단호히 부정했다.
“그건 흔할 수 없는 것이야.”
“무슨 결론을 내리셨는지는 모르지만 그 어떤 것도 마음에 안 들어서 머릿속에서 지우시겠다면서요. 일구이언(一口二言)이면 이부지자(二父之者)인데 깔끔하게 잊으시죠.”
“…….”
말은 쉽지.
못 봤으면 모를까,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마혼을 품은 후인으로도 모자라 밀약(密約)을 무너뜨린 흉수 진옥룡이라니!
진정한 마혼을 지닌 그가 살아 돌아와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거늘, 정공과 마공을 어떻게 동시에 펼친단 말인가?
연휘준은 티가 나지 않게 이를 지그시 물었다.
‘그는 결코 아니야.’
죽은 자가 멀쩡히 살아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며 답은 하나였다.
‘설마!’
정광은 내심 혀를 찼다.
‘전생에 검에 불어넣어 둔 마혼을 완전히 집어삼켰다더니. 삼키기만 하고 소화는 못 했네.’
원래 지니고 있던 마기와 따로 노는 모습이라니.
저래서야 그 효능을 제대로 쓸 수 있나.
벽을 깼다기에 기껏 봐줬건만 예상을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그래도 상당한걸. 태극 늙은이보다 훨씬 강해.’
천마 노릇을 하는 데 한 치의 부족함도 없었다.
하지만 정광은 마중마(魔中魔)요,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로 경배받던 진천마(眞天魔).
상대의 무구(武具)를 살피고 실력까지 전부 확인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놈의 내공이 더 뛰어난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전생에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항상 그런 적과 싸웠다.
그때마다 이겼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지기(自然之氣)를 쓰면 더 쉽겠지만…….’
천마신교 총단에서 천마신교주를 그런 맑은 것으로 꺾으면 난리가 날 수밖에.
교도들 입장에선 사술(邪術)이 따로 있나.
마공으로 박살 내야 그들을 승복시킬 수 있었다.
-진짜를 보여주마. 가자.
간만에 몸을 한껏 푼 마혼이 기다렸다는 듯이 흉성(凶性)을 완전히 드러내며 폭주하려 했다.
-응, 아니야. 누가 주인이지?
정광은 의념(意念)으로 강하게 명했다.
천하의 그 무엇으로도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의지가 마혼을 짓눌렀다.
놈이 굴복하며 명을 받들었다.
-좋아. 달려.
마혼이 단전의 내공을 짊어지고 정광이 지목한 경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여느 마인이라면 주화입마에 걸리기도 전에 경맥(經脈)과 낙맥(絡脈)이 전부 터져버려 죽어버릴 정도로 기괴한 경로였다.
그런 불가능한 일을 해낸 만큼 그 효능은 놀라웠다.
내공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정광은 그것을 오롯이 갈무리한 뒤 육신과 운룡에 담았다.
육신에서 무저갱의 암흑보다 어두운 불길이 일어났다.
화르르르-
그 흑염은 연휘준의 장포에 수놓인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악귀가 되어 흉포하게 일렁였다.
운룡은 금룡(金龍)으로 화했다.
화아아아-
찬란한 금광을 줄기줄기 토하며 드넓은 창공을 자유로이 비상할 준비를 마쳤다.
연휘준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지금껏 마혼을 일부만 쓰고 있었던 건가!’
이건 무서운 사실을 의미했다.
연휘준의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이 크게 흔들렸다.
‘지, 진천마!’
진천마가 화답했다.
혈천마검(血天魔劍) 제삼초 마도파(魔濤波).
거대한 금빛 파도가 거세게 밀려왔다.
연휘준은 반사적으로 신검을 움직여 전면을 방어했다.
콰아앙!
“흡!”
내공을 그렇게 끌어올려 단단히 보호했건만.
검신이 부러질 듯 휘어지고 신형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내부가 진탕되고 입에서는 핏물이 새어 나왔다.
‘말도 안 돼!’
현실을 부정할 시간이 없었다.
혈천마검(血天魔劍) 제사초 천혈섬(天血閃).
금룡이 포효하며 날았다.
연휘준은 그 움직임을 제대로 불 수 없어 재빨리 마환보(魔幻步)를 밟았다.
날카로운 검기가 왼쪽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촤아악-
“큭!”
굳이 내려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의가 갈기갈기 찢기고 옆구리 살이 한 움큼 사라졌다.
이쯤 되니 두려움이 밀려나고 분노가 치솟았다.
‘내가 영원히 엎드려 있을 것 같으냐!’
내공을 전부 끌어 올리고 마혼도 완전히 개방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금룡을 노려보며 최후의 수법을 펼쳤다.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천하제이인이었던 태극검존(太極劍尊)을 사로잡은 뒤 갖가지 섭혼술과 사술을 펼쳐서 알아낸 무당 비전무공 태극혜검(太極慧劍).
본연의 마공에 그 정공을 접목해서 결국 창안해 낸 역태극마검(逆太極魔劍)이었다.
우우우웅-
신검이 찌그러진 원을 그려서 금룡을 가뒀다.
끊임없이 회전하여 놈의 거력(巨力)을 모조리 해소한 뒤 강하게 쳐냈다.
쾅!
‘……!’
연휘준은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오랜 세월 동안 흘렸던 피땀이 헛되진 않았는지 진천마의 공격을 막아내고 가슴까지 활짝 열리게 한 것이다.
‘천벌이다!’
신검을 대각으로 내려쳤다.
일체의 허식을 배제하고 속도와 힘만 담은 일격이었다.
그 일격이 진천마의 오른쪽 쇄골부터 왼쪽 허리까지 단숨에 양단하려는 그때.
“나도 할 줄 아는데.”
금룡이 기이한 원을 그렸다.
신검이 그 검에 갇혀 끌려갔다.
크게 놀라 다급히 빼내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금룡이 온몸을 뒤틀어 원을 더 강하게 그리더니 연휘준이 했던 것처럼 신검을 맹렬히 쳐냈다.
쩌엉!
연휘준은 이를 악물고 신검을 강하게 잡았다.
덕분에 놓치지 않을 수 있었고 반격을 도모할 길이 열렸다.
그런데 의문이 솟았다.
‘겨우 이 정도 위력이라고?’
아까의 공격들과 비교하면 너무 약하지 않은가?
‘내공이 바닥났구나!’
아니었다.
정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빡할 뻔했네. 사부에게 줄 검인데 손상시키면 안 되지.’
이 사실을 모르는 연휘준은 용기백배해서 비장의 살초를 펼쳤다.
정광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비스듬히 한 걸음 내디뎌 피한 뒤 왼손으로 참마수(斬魔手)를 펼쳤다.
짜악!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 만큼 시원한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연휘준의 고개가 홱 돌아가고 입에서는 이빨들이 튀어나왔다.
숨죽인 채 지켜보던 마인들이 입을 떡 벌리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