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10화 (509/569)

2부 239화

뭘 이런 걸 가지고

정광 일행은 총단으로 출발했다.

전과는 다르게 귀곡자와 민현유도 함께였다.

어차피 정광이 지면 다 죽게 될 텐데 굳이 향리객잔에 있을 이유가 있나.

사실 그럴 일도 없었다.

그들은 정광의 승리를 확신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하나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진천마를 꺾을 존재가 어디 있을까.

이렇게 굳게 믿었건만.

귀곡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그럴 필요 없는데도 옆에서 조심스레 부축하는 나민 때문이었다.

영 어색해서 뿌리치고 싶으나 처음으로 거둔 제자의 성의를 무시하기도 그렇고.

민망한 기분도 떨칠 겸 정광과의 독대에 대해 물었다.

“어땠느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건만.

총명한 나민은 바로 알아들었다.

객잔에서 나올 때만 해도 얼굴이 굳어있었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숙고를 하고 마음을 다스렸는지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제 기준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스승님.”

“그래서?”

“기인우천(杞人憂天)이라.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할 필요는 없지요.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온전히 받아들이고 따를 수밖에요.”

귀곡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남이 보기엔 흉악한 살소(殺笑)를 흘리며 칭찬했다.

“자신의 그릇을 알고 타인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자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지. 얼마나 갈지 되도록 오래 지켜보고 싶구나.”

스승을 부축하는 제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만족하실 만큼 보시게 될 겁니다.”

“허허. 암. 그래야지.”

귀곡자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존 덕분에 치병을 거의 치료했고 오늘 싸움이 끝나면 완전히 낫게 해주겠다는 말까지 들었으나 하늘이 허락한 수명은 정해져 있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귀곡자는 슬며시 머리를 드는 욕심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허어. 마뇌를 욕했던 게 미안해지는군. 이래서야 그 녀석이나 나나 피차일반이지.’

순리를 따라야 한다.

역행하는 건 천하에 단 한 명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 아닌가?

미련을 깨끗이 털어내고 정면을 바라봤다.

어느새 여기까지 다다른 것인지. 드높은 탁목이봉(托木爾峰)이 그를 반겼다.

오랜만에 오를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이 감개무량했다.

먼저 산 입구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연혁소 무리가 합류했다.

그들은 짧게 인사를 나누고 산을 올랐다.

연혁소는 이맛살을 모은 채 묵묵히 걷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정광을 힐끔거렸다.

‘뭔가 달라진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무엇이 그런지 알 수가 없구나.’

간밤에 일어났던 소란도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예민한 상태니 귀찮게 굴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무슨 담력으로 그럴까.

이는 다른 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정광 일행에게 길을 열어준 뒤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천신이 재림한 것이라느니 진혼이 신위를 떨친 것뿐이라느니 갑론을박했는데, 한 사내가 꺼낸 의견에 모두 조용해졌다.

“어쨌든 진혼은 아니야. 향리객잔이 적이면 모를까 친밀한 사이인데 지붕을 왜 날려? 재물을 그렇게 좋아하는 진혼이 그런 식으로 헛돈을 쓰겠냐고.”

중의(衆意)는 한 사람의 말에 뒤흔들리기도 한다.

심각하게 토론하던 마인들은 진혼이 벌인 수많은 기행에 관해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우게 됐다.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진 상태.

정광은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흘러 정상에 올라가 보니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전 도올대주이자 현 호교당 삼향주 곽상이었다.

곽상이 앞으로 오라고 말하기도 전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마인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교주에게 도전하는 무인에 대한 예우였다.

정광은 일직선으로 뚫린 길을 걸어가 곽상 앞에 섰다.

곽상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정광은 그의 손에 신분패를 쥐여줬다.

곽상은 그것을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돌려줬다.

그리고 두 손을 정중히 모았다.

“들어가시오. 총단에 오신 걸 환영하오.”

“왜 이러세요? 갑자기 존대를 하시고.”

정광의 농에도 곽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들 예우하는데 나라고 편히 대할 순 없지 않소?”

“하긴. 사람이면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죠. 수고하세요.”

정광이 스쳐 지나갈 때 곽상이 전음을 보냈다.

-뭔가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기분 탓이겠지. 여기 계속 있을 거야?

-근무 시간이라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지존의 대승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한없는 신뢰가 깃든 얘기.

그런 말을 한 이에게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정광은 씩 웃으며 총단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 만에 방문한 총단은 여러 곳이 화마에 소실되거나 그슬려 볼품없었다.

허나 이 참사를 일으킨 장본인은 떳떳했다.

‘계속 고이다 보면 쓸데없이 넘치기 마련. 가끔 이런 일도 있어야 평화로워져.’

불구경하며 즐거워하는 건 그때뿐이다.

전 교도가 교는 물론이오,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복원하려고 할 터.

한두 푼 들여서 될 일이 아니니 밖으로 힘을 쓰려면 꽤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하리라.

나민은 아까 잘 타일러 놨고, 다른 녀석들이 들고일어나는 것도 어느 정도는 막은 것이다.

‘비운 만큼 채우는 법이지.’

흐뭇하게 둘러보며 걷는데 훈훈한 봄바람에 매캐한 재가 가득 섞여 날아왔다.

‘음. 조금 많이 태웠나?’

솔직히 ‘조금’이 아니라 ‘너무 많이’였다.

‘나민에게 큰 선물을 줬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란 게 따로 있나, 바로 이런 거지.

‘나중에 한 번 들러볼까? 취향에 맞지 않으면 다시 손봐주고.’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만끽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대연무장에 도착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멸혼생사투를 벌였던 비무대는 사라지고 새로운 비무대가 세워져 있었다.

높이는 전의 것보다 낮았으나 땅을 단단히 다진 뒤 평평한 화강석을 차곡차곡 쌓아서 만든 것이라 무척 단단해 보였다.

‘애들 싸움이 아니니 이쯤은 돼야지.’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차 있던 군중이 조용히 길을 열어줬다.

정광은 일행을 이끌고 비무대 앞에 있는 천막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뒤.

대연무장 서문(西門)이 열리고 악사들이 각종 악기를 연주하며 들어왔다.

경건한 음률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천마신교주 연휘준이 총단 고수들과 악령강시(惡靈僵屍) 다섯 구의 호종을 받으며 나타났다.

연휘준은 멸혼생사투 때와는 다르게 높은 단상으로 향하지 않고 비무대에 올라가 우뚝 섰다.

그를 뒤따라온 예기주(禮旗主) 양방이 황급히 부복하며 소리 높여 외쳤다.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위대한 천마신교의 통치자이신 교주를…….”

“그만.”

연휘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모두의 뇌리에 꽂혔다.

양방의 선창에 따라 후창을 하려던 마인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버렸다.

연휘준은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본교에 흉사가 연달아 일어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

교주가 예조차 받지 않고 바로 무거운 주제를 꺼내자 마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면 연휘준은 담담했다.

“더 자세히 말하지. 총단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누군가 불을 질렀다. 마뇌는 삿된 마음을 품고 신전을 공격했다. 불길은 늦게나마 진압했고 마뇌 또한 도주했으나 모두 알다시피 총단은 이미 뼈아픈 타격을 받았다.”

마인들은 저도 모르게 대연무장 담 너머를 바라봤다.

불에 그을린 전각들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연휘준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른 상처를 입에 올렸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다쳤다. 명예가 산산이 조각났다. 유구한 세월 동안 천하를 굽어보던 본교 총단이 이 꼴이 되다니, 믿었던 이에게 배반을 당하다니. 죽어서 천신을 어찌 뵙겠는가? 먼저 떠난 교우들을 어떻게 똑바로 보겠는가? 본좌만 그런 것인가?”

불을 끄느라 고생했던 이들도, 구경만 하며 낄낄댔던 자들도, 마뇌 무리와 싸웠던 마인들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휘준의 음성에 차가운 살기가 실렸다.

“그대들을 탓하는 게 아니다. 이 모든 일은 본좌가 부덕한 탓이다.”

“……!”

교주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마인들의 눈이 커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생길까. 본좌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반드시 불을 지른 흉수를 잡아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기필코 마뇌를 찾아내 단죄할 것이다.”

마뇌야 그렇다 치고.

방화범이라.

일부 마인들은 정광을 힐끔거렸다.

많은 이들이 신전에 있었다고 증언했으나 불이 난 덕에 천마궁을 뚫기 쉬워졌으니 어떻게든 흉수와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허나 연휘준은 달랐다.

정광의 기색을 살피는 이들에게 경고했다.

“증거 없이 의심하지 말아라. 진혼은 본좌의 시험을 당당히 통과한 훌륭한 무인이다. 그런 이를 무턱대고 치면 상처받은 자존심이 회복되는가? 쓰러졌던 명예가 다시 서느냐? 개인의 다툼이 아니다. 무거운 일은 똑바로 처리해야 한다.”

연휘준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본좌는 불을 지른 흉수와 마뇌가 어떻게든 관계되어 있을 거라 믿는다. 너무나 공교로운 일 아니냐? 이는 곧 다른 사실을 의미한다. 마뇌가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

마인들이 술렁였다.

연휘준의 음성에 힘이 들어갔다.

“마뇌는 직속 무력대만으로 반란을 일으킬 만큼 어리석지 않아.”

사실이었다.

“승산이 있다고 판단해서 일을 벌였을 터. 정파무림 위선자들일 수도 있고 포달랍궁(布達拉宮) 놈들일지도 모른다. 또는 대명 황실과 손을 잡은 것일지도. 짚이는 세력이 너무 많아 고르기도 힘들구나.”

연휘준은 길게 탄식했다.

“마뇌야, 마뇌야. 그토록 권력을 탐하더니 수명이 얼마 남지 않자 짧은 시간이나마 누리고 싶어 그런 것이냐?”

마인들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교주의 추측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어서였다.

연휘준의 음성이 조금 더 커졌다.

“본좌는 우선 시험을 통과한 진혼과 생사투를 벌일 것이다. 그 용기와 실력을 높이 사서 전력으로 죽일 것이다. 그리고 역도를 잡아들여 진실을 밝힐 것이니.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곤륜으로의 출정을 유보한다. 교도들이여, 조금만 참아라. 그대들이 복수할 대상을 찾고 본좌가 선두에서 길을 열 것이다.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뤄서라도 본교의 위엄을 천하에 떨치리라.”

숨죽이며 듣던 마인들이 열광했다.

교주를 연호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정광도 두 눈을 반짝이며 동참했다.

‘이놈 봐라? 제법이네.’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진혼을 변호함으로써 공평무사함을 드러냈다.

여기서 끝났으면 성품은 괜찮으나 무능력한 교주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지만 외부의 강대한 적들을 거론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납득시키고 흔들리던 내부를 단단히 결속시켰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졌다.

‘마뇌의 집무실에서 비밀통로를 발견했을 거야.’

전각 안에 있던 마뇌가 사라졌으니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 은밀한 기관 장치이긴 하나 결국엔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마뇌를 찾았고 조금씩 잘라가며 고문했더니 진혼이 불을 지른 흉수라고 토설했다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살려와서 대질시켜야지, 처참하게 죽여놓고 죄를 뒤집어씌운다며 역으로 한 방 먹여줄 수 있잖아.’

연휘준은 정광을 높이고 죽여서 자신을 더 높일 셈이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정도 지난 뒤에 마뇌의 조각난 시신을 보여주며 이놈을 잡았는데 무림맹과 또 다른 어떤 세력의 짓이라 자백했다고 공표할 것이다.

‘어차피 곤륜을 치기로 했으니 우르르 몰려가서 복수하면 되고.’

천마신교의 피해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포달랍궁이든 대명 황실이든 간에 강적이 더 있으니 한동안 힘을 기르자고 할 것이다.

‘그러면 애들이 말을 얼마나 잘 듣겠어.’

의심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세에 묻힐 수밖에.

연휘준은 총단이 공격당한 불명예를 지겠지만 복수를 하고 힘을 키운 공도 인정받을 것이다.

‘그건 네 생각이고.’

정광은 내공을 끌어 올려 소리쳤다.

그 소리는 마인들의 환호성을 깨고 탁목이봉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언제 싸워요?”

마인들은 입을 떡 벌리고 연휘준은 정광을 노려봤다.

“지금. 올라와라.”

“잠시만요.”

마인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언제 시작하냐고 보채더니 뭐가 어째?

정광은 신경 쓰지 않고 일행을 둘러봤다.

귀곡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조금 전에 도착한 흑서와 자오도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흘렸다.

섬랑도 그랬다.

“기도하고 있을게요.”

“누구에게?”

섬랑이 씩 웃었다.

“당연히 대인이죠. 그거면 충분하잖아요.”

“까먹진 않았네.”

정광은 섬랑의 작은 머리통을 대충 쓰다듬어주고 발걸음을 옮겼다.

성녀와 신관 등현이 눈인사를 보냈다.

연혁소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고 독두처럼 친분이 있는 자들은 두 주먹을 슬그머니 쥐고 속으로 응원했다.

정광은 비무대에 올라가 연휘준과 마주 섰다.

연휘준의 눈이 반쯤 투명해졌다.

“사별삼일(士別三日)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더니 과연.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말이군. 기연을 얻은 것이냐?”

“뭘 이런 걸 가지고 기연씩이나.”

“그래봐야 본좌를 이길 순 없다. 모두 네 짓이지?”

“대범한 척하시더니 생사람 잡으시네요.”

“아무래도 상관없다. 넌 곧 죽는다.”

“제가 할 말인데. 남기실 말씀이 있으면 지금 하시죠.”

연휘준은 유언을 남기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자식을 가장 잘 아는 자는 부모지만 제일 모르는 이 역시 부모라더니. 혁소가 너와 손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러게 잘 좀 대해주시지 그랬어요.”

“네 정체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다만 그 어떤 결론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냥 갈가리 찢어서 죽이고 머릿속에서 지우마.”

“현명하시네요. 차라리 모르는 게 속 편할 때가 있죠.”

천요문(天妖門)이 멸문했으니 수명을 늘릴 수도 없는 상황.

연휘준은 미련을 버리고 현재에 집중했다.

생사투(生死鬪)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그의 눈이 유리알처럼 완전히 투명해졌다.

“와라.”

“그러죠.”

정광은 신형을 날렸다.

흑염(黑焰)으로 화한 마혼으로 전신을 칠흑처럼 검게 휘두른 마신(魔神)이 되어.

허리춤에 있던 만마(萬魔)가 세상으로 튀어나와 날카로운 어둠을 쏟아냈다.

화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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