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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508화 (507/569)

2부 237화

낭만

철혈무쌍용갑이 아무리 대단한 기물이라 해도 근골에 가해지는 충격까지 해소해 줄 수는 없었다.

거기에 내상까지 입은 몸으로 한나절 넘게 무리를 했는데 상태가 좋을 리 있나.

정광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요상(運氣療傷)을 시작했다.

무각공(無角公)의 내단이 배 속에서 녹아 비릿하고 눅눅한 향이 훅하고 올라왔으나 참을 수밖에.

연휘준이 준 사흘을 다 쓰지 않고 하루 만에 해치웠으니 이럴 시간이라도 있지.

그렇게 서둘렀는데도 벌써 저녁이 됐으니 실질적으로 몸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은 이틀뿐이었다.

하지만 정광은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아끼고 아끼던 내단까지 삼켰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야지, 치료만 하면 쓰나.

곤륜의 개파조사가 창안했으나 지금껏 제대로 익힌 이가 없는 괴공(怪功) 삼청합일신공(三淸合一神功)을 운기했다.

단전에서 순후한 내공이 일어나 내단의 막대한 효능을 머금었다.

그것은 전신의 경락(經絡)을 주유하며 막힌 경맥(經脈)은 가볍게 뚫고 손상된 낙맥(絡脈)은 부드러이 어루만졌다.

이렇게 쓸 만한 내단과 정순한 내공이 함께하는데 그깟 내상이 무슨 대수랴.

시간이 갈수록 큰 효험을 보았다.

모든 곳을 치유한 후에도 남은 효능을 품은 채 면면부절(綿綿不絕)하게 흘렀다.

‘여기까진 됐고.’

이제 앞으로 나아갈 차례였다.

한창 운기하고 있는 삼청합일신공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삼청(三淸)은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이며 원시천존(元始天尊), 태상노군(太上老君), 영보천존(靈寶天尊)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하나의 도(道)가 세 신으로 일기화삼청(一氣化三淸) 했는데 원래대로 삼청화일기(三淸化一氣) 하지 못할 게 무엇인가?

개파조사는 이 삼청이 합쳐진 게 자신이라 믿었고 그 오만함을 자랑하기 위해 창안한 게 바로 삼청합일신공이었다.

‘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영감이긴 하지.’

이는 정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자격이 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넘쳐흐를 지경.

삼청합일신공을 자기식으로 탈바꿈하려 해왔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세상의 도는 하나로 통하기 마련.

달리 말하면 그놈이 그놈이다.

삼청이 합일하듯 정(精), 기(氣), 신(神)을 품은 삼단전(三丹田)을 하나로 이은다.

남이 들으면 경악하며 말릴 일이었으나 정광은 태연했다.

그간 귀곡자를 치료하며 얻은 경험과 마령강시들에게 사용하며 능숙해진 솜씨 덕분이었다.

평지에서 고개를 한껏 젖히고 올려다보는 산꼭대기와 중턱까지 올라가 보는 정점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먼저 도도히 흐르는 진기를 중단전으로 인도했다.

내단의 효능과 단전의 내공을 전부 끌어올려 중단전을 보호했다.

만일을 위한 대비가 끝난 것이다.

‘이 정도면 몇 번 실패해도 견딜 수 있겠지.’

다음은 상단전이었다.

인당(印堂)을 열어 자연지기(自然之氣)의 흐름을 살폈다.

중단전 옥당(玉堂)의 성질을 중용(中庸)의 도(道)로 이끌며 항마토납술(降魔吐納術)로 호흡하여 하단전 석문(石門)을 열었다.

이제껏 몇 번이나 해온 일이라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허나 그건 그거고.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원래대로라면 들숨에 실려 들어온 자연지기가 석문에 쌓이기 직전, 숨을 도로 내뱉으며 밖으로 배출해야 했지만.

‘간다.’

텅 빈 하단전에 자연지기를 밀어 넣었다.

동시에 그대로 끌어올려 중단전으로 보냈다.

자연지기를 하단전에 가두지 않고 자신을 통로로 삼아서 들이고 내보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단전 옥당은 무공의 성질을 정하는 곳.

편법으로 마(魔)도 정(正)도 사(邪)도 아닌 중용(中庸)의 성질로 바꾸었으나 순수한 자연의 기와 같을 리 있나.

자연지기를 상단전까지 올려서 순환시키기는커녕 중단전에서부터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콰앙!

‘……!’

정광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내단의 효능과 기존의 내공으로 보호하고 있는데도 엄청나게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빠드득-

이를 갈며 비웃었다.

‘제깟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앙탈이야?’

혼에 마(魔)를 심어서 마혼도 키웠는데 그깟 자연지기쯤이야.

끊임없이 하단전으로 받아들여 중단전으로 끌어 올렸다.

자연히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쾅! 콰앙! 쾅!

‘……!’

망할.

어찌나 아픈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만큼 오기가 치솟았다.

편법으로 안 되면 제대로 된 방법을 쓰면 된다.

본래의 자신으로 상대해 주기로 했다.

‘나와 인마.’

혼(魂)을 감싸고 있던 선기(仙氣)를 거둬내고 그 속에 묻혀 있던 마혼(魔魂)을 꺼냈다.

천하마도의 종주(宗主)라 할 수 있는 압도적인 마기(魔氣)가 해방되어 중단전을 채웠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악(善惡)을 품고 있기 마련.

진천마라 불리던 시절의 정광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마기를 견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기는 있었던 것이다.

‘현생은 더하지.’

정기(精氣)가 충만한 곤륜산에서 나고 자라 수많은 선을 접하고 정공을 수련한 지 어언 이십여 년.

자연스레 선기도 전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아까 거둬냈던 그것을 마혼과 함께 풀었다.

선악이 하나가 되면 곧 자연일지니.

자연으로 자연의 기를 받아들이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마기와 선기가 손을 잡고 자연지기를 맞이했다.

물론 이론과 실전은 달랐다.

콰아앙!

‘……!’

아까처럼 욕할 틈도 없었다.

정광은 정신 줄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놈, 제법이네.’

솔직히 제법 정도가 아니라 대단했다.

이쯤 되면 포기하는 게 정상이거늘, 정광은 달랐다.

이를 드러내며 얼음보다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한번 해보자 이거지?’

큰 방향을 정했으면 속도를 조절하거나 돌아갈 수는 있으나 반드시 끝까지 달린다.

전생에도 그래서 살아남았고 결국엔 천하를 발밑에 둘만큼 강해지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랬다.

할 수 있는 변주는 다 해볼 생각이었다.

‘인위적으로 합쳐서 역효과가 나는 것일지도 몰라.’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고통을 참으며 계속 시도했다.

전생에 걸었던 피의 길. 거기에서 마주치고 꺾어온 수많은 악의와 그 때문에 생긴 노여움과 슬픔. 그것들이 뭉쳐져 탄생한 마혼이 앞장섰다.

현생에 걷고 있는 꽃길. 그곳에서 만나고 받아들인 무수한 선의와 그로 인해 느끼게 된 기쁨과 즐거움. 이것들이 만들어낸 선기가 그 뒤를 따랐다.

정광은 두 기운을 조종하려 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뒀다.

그것들은 자연지기와 충돌할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연스럽게 하나로 뒤엉켰다.

사람이 조작하는 인위(人爲)가 아니라 하늘의 이치인 천위(天爲)로 이루어진 합일이었다.

오답은 아니었는지 효과가 있었다.

스으으윽-

중단전이 자연지기를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자연지기는 그대로 올라가 상단전 인당에 진입했다.

소혜처럼 자연지기를 쌓아놓고 심공으로 쓰는 건 어려웠으나 받아들이는 것쯤이야.

상단전을 극도로 단련한 정광이었다.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 다시 중단전으로 내려 보냈다.

그리고 또 하단전으로.

이것에 항마토납술을 통해서 하단전에 새로 들어온 자연지기가 합쳐졌다.

그것은 다시 중단전으로 올라갔고 상단전을 거쳐 아래로 내려오는 순환을 시작했다.

그러자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정광의 몸이 은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요귀와 부처의 형상이 번갈아 새겨져 있는 서른여섯 개의 구슬, 그것들이 하나로 꿰어진 단주(短珠) 항마주(降魔珠)가 진동하며 찬란한 금빛을 발산했다.

역천경은 몸을 부르르 떨며 비명을 질렀다.

-우우우우웅!

그러든 말든.

정광은 만족했다.

그래, 바로 이거지.

창문과 문틈을 두꺼운 천으로 꼼꼼히 가려놓길 잘했다.

자연지기가 순환하면 할수록 양이 무섭게 불어나며 빛도 강해지는 것 아닌가?

동시에 자신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보게 됐다.

‘이대로 조금만 더 하면 무아지경에 빠질 거야.’

하늘과 영(靈)이 통하고 심기체(心氣體)가 합일되어 자연과 하나가 될지도.

무인들이 추구하는 신화경(神化境)의 경지요, 도인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

정광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어쩐지 허공에서 자신의 모습을 관조하는 느낌이더라니!

내가 미쳤냐?

운후도 안 보냈는데 내가 직접 가버리게?

즉시 자연지기를 받아들이는 걸 멈췄다.

삼단전에서 순환시키던 것은 천장을 향해 장력을 떨쳐서 분출했다.

어두운 밤.

찬란한 유성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콰아아앙!

* * *

정광이 푹 잘 테니 건드리지 말라고 주의를 준 이후, 민현유는 총력을 동원해 정보망을 재가동했다.

정보가 쉼 없이 들어왔다.

“총단 소식입니다. 화재는 완전히 진압했으나 피해가 크다고 합니다. 복구 작업이 한창인데 흉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왔다더군요.”

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혼의 소행이라고 확신하면서도 증거가 없으니 끙끙 앓고 있나 봅니다.”

“마뇌에 관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갑자기 사라지고 천요대(天妖隊)까지 전멸했습니다만 역시 증거를 찾을 수 없어 계속 조사만 하고 있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혼은 신전에 있었다고 증언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단영은 민현유와 눈이 마주치자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일반 교도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대부분 마뇌가 역모를 일으켰고 그게 실패하자 도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역시 대세는 그런가. 수고했네.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고생하는 건 모두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거니 받거니.

분위기가 더 화기애애해지는데.

묵묵히 듣기만 하던 관엽이 불쑥 물었다.

“소교주는?”

민현유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설명했다.

“본교의 역사와 교리를 배우시느라 애를 먹고 있지만 몸만큼은 안전합니다.”

“그렇군.”

관엽은 이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허어.”

귀곡자가 관엽을 응시하며 장난스럽게 타박했다.

“흑조와 혈조가 있었으면 섭섭해했겠어. 그들의 안위는 왜 안 묻는가?”

“그건…….”

관엽은 머리를 굴려서 간신히 대답했다.

“고수들이어서입니다.”

“허허. 자네치곤 애썼군. 나쁘지 않은 핑계야.”

관엽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귀곡자도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더 불안해하지 않도록 확실히 설명해 주지. 교주는 자신의 후계를 직접 치는 오욕을 뒤집어쓸 위인이 아닐세. 그럴 짬도 없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눈앞에 두고 있지 않나?”

사람들은 말없이 이 층을 올려다봤다.

귀곡자는 그런 그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소란을 부리는 이들이 없도록 신경 쓰게.”

모두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어르신.”

향리객잔은 철통같은 경계에 들어갔다.

고이륵단가 무인들은 물론이오, 독두를 비롯한 전주 패거리까지 불러서 객잔 외곽을 지키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생사투를 하루 남겨둔 날 저녁.

결국 염려했던 일이 터졌다.

그것도 엄청난 규모로!

콰아아앙!

눈부신 황금빛이 일어나며 객잔 지붕이 통째로 날아갔다.

모두 깜짝 놀라 다급히 올라가 보니 가부좌를 튼 정광이 배를 부여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나민이 다급히 물었다.

“진혼! 자객이 들어와서 퇴치하신 겁니까?”

“으으…….”

“주화입마입니까? 단전에 이상이 생긴 겁니까?”

정광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그럼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왜 배를?”

“배가 너무 고파서요.”

“……네?”

“배가 터질 만큼 먹고 시작했는데도 다 꺼져 버렸네. 현유, 밥 좀 해줄래?”

민현유는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급히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근데 오늘이 며칠째야?”

“사흘째입니다. 내일 총단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럭저럭 맞췄네.”

정광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손을 내저었다.

“밤이 깊었는데 뭐 하세요? 그만 방으로 가서 푹 주무세요.”

“…….”

지붕이 전부 날아가 버렸는데 어떻게?

정광은 사람들의 마음을 귀신처럼 읽고 웃었다.

“다들 낭만이 없으시네. 무슨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밤하늘을 이불로 덮고 별을 세다가 잠드시면 되잖아요.”

“…….”

낭만 운운하더니 과연.

꽤 그럴듯한 말 아닌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다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한숨을 쉬었다.

“현유, 다른 객잔에서 방 좀 구해줘. 나는 거기서 자고 아침에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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