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07화 (506/569)

2부 236화

말도 안 되는 가정

토로번손가(吐魯番孫家)는 투루판의 혹독한 기후를 묵묵히 견디며 세를 키우다가 합밀오가(哈密吳家)가 멸문한 틈을 타 새 교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마도칠대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이렇게 교주를 등에 업고 도약한 가문이다 보니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같은 반열에 있는 명가들은 물론이오, 일반 교도들도 교주의 꼭두각시라고 비웃었다.

전 가주는 무수한 조롱을 감내하며 차근차근 입지를 다지려 했으나 아들인 현 가주 손재등은 달랐다. 더 빠른 길을 달려 보다 높은 곳에 오르길 원했다.

이 원대한 욕망의 실현 가능성은 손강이라는 기재가 태어나며 훌쩍 높아졌다.

교주가 전대 교주와 다르게 후사를 챙긴다면 많은 나이를 고려해봤을 때 조만간 멸혼생사투를 열 터.

손강이 우승해서 소교주가 되고 훗날 교주 자리까지 차지한다.

그리고 총력을 기울여 인재를 양성하면 이미 맥이 끊겨 버린 천신혁련가(天神赫連家)를 대신해 토로번손가가 새로운 천신의 가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 그랬거늘…….’

손재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손강은 결승에서 패하고 죽어버렸다.

복수와 가문을 위해 마뇌가 내민 손을 잡고 일을 벌였건만 이 역시 실패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부 이놈 때문이야.’

손재등은 갑자기 나타나 짙은 마기를 쏟아내는 진혼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전신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꼈으나 그만큼 두려움도 컸다.

사흉대를 비롯한 정예 무력대들로 뒤덮인 산맥을 넘고 마령강시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건너 교주의 시험을 통과한 고수 아닌가?

아니.

그런 위업을 달성한 자라면 무신이라 불려도 과함이 없었다.

당연히 이길 자신은커녕 도주할 엄두조차 안 났다.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단 한칼이라도 먹이고 죽어야 했다.

“천라도진(天羅刀陣)을 펼쳐라!”

아우 손재우가 식솔들과 함께 진혼을 포위했다.

진의 묘용으로 일어난 거센 기운이 진혼을 옥죄었다.

손재등은 만도(彎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명했다.

“살(殺)!”

소용없었다.

진혼의 몸에서 일렁이던 검은 마기가 날카롭게 솟구치며 토로번손가가 자랑하는 천라도진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그리고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됐다.

검광이 번뜩이면 주인을 잃은 팔다리가 허공을 날았다.

권장지각(拳掌指脚)이 어른거릴 때마다 머리통이 폭발하고 심장에 구멍이 났다.

손재등의 표정이 참담히 일그러졌다.

기회를 노려 일격을 먹이려 했건만, 아무런 틈도 보이지 않고 식솔들을 도륙하다니!

더 지켜봐야 의미가 없었다.

입마(入魔)를, 비참한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힘을 개방했다.

“하아압!”

그 효과는 대단했다.

손재등은 순식간에 마(魔)에 잡아먹혀 광인이 되었다.

얼굴은 흉신악살(凶神惡殺)처럼 변하고 입에서는 귀곡성(鬼哭聲)이 쏟아졌다.

“끄아아아아!”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이지를 상실한 대가로 얻은 막대한 힘을 만도에 쏟아 넣었다.

칙칙한 마기가 도신에 맺히는가 싶더니 예리하기 그지없는 도기로 화했다.

손재등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적에게 쇄도하며 마전도(魔電刀)를 펼쳤다.

시커먼 도기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려 그 어떤 것이라도 일도양단하려고 했다.

정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귀찮지만 할 수 없지.’

어차피 토로번손가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황.

신강에 남을 이들을 위해 화려하게 해치워야 했다.

칠대가문이라 해도 내 사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모두의 뇌리에 똑똑히 박아넣어야 했다.

손에 들린 만마(萬魔)가 춤을 췄다.

혈천마검(血天魔劍) 제이초 광풍혈우(狂風血雨).

초식명 그대로 광풍이 일어나 검은 번개는 물론이오, 손재등과 토로번손가 무인들까지 휩쓸었다.

수많은 육편과 함께 피의 비가 내려 사방을 적셨다.

쏴아아아-

정광은 붉은 호수 위에 홀로 우뚝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 누구도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진천마가 말년에 창안한 검법임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으나 그 위력과 잔인함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동시에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진혼에게도, 그의 사람에게도 병기를 겨누면 안 돼.’

정광은 마인들이 두려워하는 걸 보고 만족했다.

이제는 풀어줘야 할 때였다.

먼저 토로번손가가 노리던 작은 포목점을 향해 외쳤다.

“현유! 현로! 정리 끝났으니 그만 나오세요!”

잠시 뒤.

문이 삐걱 열리고 민현유와 귀곡자가 나왔다.

고생깨나 했는지 두 사람 모두 무척 지쳐 보였다.

특히 민현유는 악전고투한 것답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저런!”

정광은 재빨리 다가가 민현유를 부축하며 전음을 보냈다.

-수고했어. 살짝 긁혔네.

그렇게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으나 중상도 아니었다.

-네, 지존.

-이제 마무리를 짓자.

-존명.

정광은 억지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민현유는 지존이 미리 내렸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토로번손가 사람들이 느닷없이 객잔에 들어왔습니다. 무슨 용무냐고 물었더니 마뇌의 명을 받고 소교주의 주변을 정리하는 중이라더군요.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으나 보시다시피…….”

숨죽이고 지켜보던 마인들이 치를 떨었다.

마뇌의 음모에 분노해서였다.

“이런 미친 영감을 봤나. 정말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 건가? 신전에 이어 소교주 주변에까지 손을 뻗치다니.”

“교주에게도 수작을 부릴 수도 있겠어. 교주가 당할 것 같진 않지만 기분이 영 이상하군.”

“아까 총단에서 호교당 삼향주가 말했지 않은가? 교주가 마뇌를 직접 벌할 거라고 천명했다 하니 곧 결과가 나오겠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정광은 장내 분위기가 대충 정리되자 사람들에게 충고했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총단에는 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온숙에서 기다리다 보면 소식이 들리겠죠.”

“…….”

지당한 소리였다.

“가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사이인데 이대로 흩어지긴 좀 그렇고. 제가 밥을 살게요. 가시죠.”

“……!”

이렇게 고마울 수 있나.

정광 일행이 앞장서고 마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정광은 향리객잔에 도착하자마자 황금마차부터 찾았다.

토로번손가는 사람만 쫓았기에 그대로 있었다.

마차에서 재물을 꺼내 마인들에게 적당히 나눠줬다.

“좋은 시간 되세요.”

나에게 반(反)하면 비참하게 죽고 나를 따르면 이런 혜택이 있다.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준 뒤 은혜를 베풀자 효과가 더 커졌다.

마인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연신 고마움을 표하고 떠났다.

정광은 마지막 차례인 연혁소에게 물었다.

“가주님, 원래 묵으시던 객잔으로 가실 거죠?”

“그래야겠지.”

“고생하셨어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연혁소는 정광을 뚫어져라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를 믿겠네.”

“네, 둘 다 믿으셔도 좋아요.”

연휘준을 죽이고 그 후의 약조를 지키는 것.

연혁소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고 식솔들과 함께 떠났다.

단영을 제외한 고이륵단가 무인들도 마찬가지.

정광은 보낼 이들을 다 보내자 나민에게 권했다.

“심력을 많이 써서 피곤하실 테니 방으로 가셔서 잠시나마 눈을 붙이세요.”

나민은 실제로 피곤했고 자리를 피해달라는 의미인 걸 알았기에 군말 없이 사라졌다.

정광은 남은 이들과 한 탁자에 둘러앉았다.

“현유, 향리객잔 사람들과 협조자들의 피해는?”

“대부분 미리 온숙 밖으로 빼놔서 경미한 편입니다. 조금 전에 귀환 신호를 보냈으니 금방 돌아올 겁니다.”

“잘했어. 관엽, 내상은 어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런 놈이 얼굴이 창백하냐?”

“단 소가주가 내상약을 줘서 많이 좋아졌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운기요상(運氣療傷)에 전념해.”

“존명!”

“좀 작게 말해라. 단영, 너희 쪽 피해는?”

단영이 씁쓰레한 얼굴로 보고했다.

“속하가 무능해서 사상자가 적지 않습니다.”

“너 정도면 괜찮은 편인데 무슨.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보상을 아끼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마지막은 귀곡자였다.

정광은 품속에서 작은 천 주머니를 꺼냈다.

“받아.”

귀곡자는 그것을 건네받아 조심스레 열었다.

그 속엔 허연 머리털들이 들어 있었다.

귀곡자는 묵묵히 보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허허. 마뇌 녀석, 아직도 머리숱이 이렇게나 많았군요.”

“네 소원대로 빡빡 밀었지. 그래서 더 많아 보이는 거야.”

“머리 가죽째로 벗기셨으면 편했을 텐데…… 아!”

귀곡자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욕을 보이긴 싫으셨나 봅니다. 한 가닥 정을 끊지는 않으셨군요.”

“네 대머리도 벗겨줄까?”

“지, 지존께 그런 수고를 끼쳐 드릴 수는 없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머리털을 미는 게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귀곡자는 천 주머니를 조심스레 챙겼다.

정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바닥에 팽개치고 짓밟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귀곡자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친우의 유일한 유품인데 그럴 순 없지요.”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친우? 너희가?”

“크흠. 그런 면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른 성품 때문에 대립각을 세우고 경쟁했으나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감탄하기도 하던 복잡한 관계였다.

비록 기나긴 세월 동안 고문을 당하며 치를 떨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감정이 완전히 사라질 리 있나.

귀곡자는 본심을 털어놨다.

“마지막으로 제(祭)라도 지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정광은 어이없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마음대로 해. 각자 방으로 가서 쉬다가 숙수와 점소이가 오면 밥이나 먹자.”

“존명.”

이왕 먹을 거 제대로 먹어야지.

그들은 수면욕부터 해결하고 식욕을 채웠다.

정광은 배가 터질 만큼 먹은 뒤 앞으로의 일을 설명했다.

“교주님의 시험을 통과했고 마뇌 어르신을 귀천시켜 드렸으며 토로번손가주님까지 보내드렸죠. 이제 교주님과 싸울 때까지 방에서 푹 잘게요. 괜히 밥시간 됐다고 깨우러 오시지 말고 각자 심신을 치료하며 쉬세요.”

누가 물어볼 틈도 없었다.

정광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계단을 올라갔다.

귀곡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술병을 하나 들고 후원으로 나갔다.

확연히 포근해진 날씨가 늙은 육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귀곡자는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을 올려다보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뇌야. 네가 낄 자리가 없는 것 같구나.”

그래도 일단 해보기로 했다.

널찍한 바위 위에 마뇌의 유품을 놓았다.

술병을 들어 술을 한 모금 삼킨 뒤 남은 것은 모두 바위 주변에 흩뿌렸다.

화섭자로 불을 붙이자 허연 머리털들이 희뿌연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귀곡자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죽을 때까지 나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을 받았겠지. 잘 가시게. 다신 보지 마세나.”

“그를 정말 아끼셨나 봅니다.”

귀곡자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나민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귀곡자는 손바람으로 연기를 흐트러트렸다.

“그런 건 아니고. 기분에 따라 이렇게도 하는 미묘한 관계지.”

“저도 그런 호적수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있는데 네가 모르거나 언젠가 나타날 것이다. 부러워하지 말고 그때를 대비해 부단히 노력해라.”

“네, 스승님.”

귀곡자의 입매가 희미하게 휘었다.

“허어. 내 제자 노릇을 하고 싶은 것이냐?”

“마음속으론 이미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너처럼 총명한 제자를 누가 마다하랴. 이 늙은이가 늘그막에 호강하는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귀곡자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제자에게 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온 것이지?”

“그렇습니다.”

귀곡자는 단칼에 거절했다.

“안타깝지만 말해줄 수 없다.”

“스승님, 무엇이 궁금한지 아직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밖에 더 있느냐? 가늠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겠지.”

나민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는 대체 누구입니까?”

“누구일 것 같으냐?”

“뿌리는 확신하나 줄기의 정체는 모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가정밖에 안 떠오릅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

귀곡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조언했다.

“그렇겠지. 직접 가서 물어보는 게 빠를 게야.”

나민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모르겠으니 그렇게라도 해야겠지요. 그가 잠을 잘 거라 했으니 내일 아침에 한 번 가보겠습니다.”

귀곡자가 실소를 흘렸다.

“허허. 그가 정말 잘 것 같으냐?”

* * *

정광은 손에 든 것을 노려보다가 꿀꺽 삼켰다.

아껴왔던 무각공(無角公)의 내단이 식도를 뜨겁게 달구며 내려갔다.

정광의 눈이 빛났다.

‘슬슬 한 걸음 더 나아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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