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35화
당연히 나한테지. 그거면 충분해
믿음을 다시 심어주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마뇌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들어도 가슴에 와닿을 만큼 간절한 목소리로 빌었다.
“믿습니다, 지존! 지존이심을 정말로 믿게 되었으니 제발 멈춰주십시오!”
그냥 믿는 게 아니었다.
말도 표정도 어찌나 절실한지.
마치 광신도가 신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십여 년 만에 강림한 신은 만만치 않았다.
“아까는 말도 안 된다며?”
마뇌의 입과 혀가 눈부신 속도로 움직였다.
“속하가 잠시 미쳐서 실언을 했습니다! 말이 되니까 이렇게 입으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광은 작게 혀를 찼다.
“조금 아프다고 벌써 믿어? 너무 어수룩하잖아.”
“고, 고통 때문이 아닙니다. 지존의 위엄을 다시 접하니 자연스레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건 더 위험하지. 위엄이란 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확신해?”
“속하는 진심으로…….”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딱 좋네. 차근차근 가보자고.”
정광은 팔뚝을 헤집는 걸 멈추고 손에 쥐고 있던 소운룡을 가볍게 눌렀다.
서걱-
“끄아악!”
마뇌의 손목이 깨끗이 절단됐다.
정광은 처절한 비명을 토하는 마뇌를 부드럽게 달랬다.
“지혈은 확실히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
창백해졌던 마뇌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지혈을 안 해서 빨리 죽는 게 낫지, 언제까지 이런 극심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돌아온 마신(魔神)은 그런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공을 불어넣어 마뇌의 심신에 가해지는 충격을 적절히 해소해 줬다.
“한결 나아졌지?”
확실히 그렇긴 한데.
잠시뿐이었다.
소운룡이 움직일 때마다 팔에서 극통이 일어났다.
너무 아파서 감각이 없어지자 다른 팔로 넘어갔다.
그것까지 끝나니 이젠 다리였다.
마뇌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신전과 가까운지 토설하는 건 물론이오,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주제도 모르고 정점에 서려 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탓하는 게 아니야. 내 사후에 네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라고. 교를 차지하고 싶고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면 그래야지.”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귀곡자와 너무 비교되잖아. 공평하게 대해줬는데 너만 뒤통수를 때렸어. 감히 내가 폐기한 마령강시를 복원하고 나까지 그렇게 만들어서 가지고 놀려 해?”
“그, 그건…….”
마뇌가 다급히 변명하려 했으나 정광이 더 빨랐다.
“반면에 귀곡자는 내 시신을 빼돌려서 네놈에게 욕을 당하는 걸 막았지. 게다가 극랍염가(克拉閻家)에서 이십 년이 넘게 고문당하면서도 입을 다물었어.”
때맞춰 걸린 치병 덕이기도 했지만 엄청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광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마뇌의 몸을 훑었다.
“시간이 없는데 아직도 손 볼 곳이 많네. 속도를 올려야겠어.”
마뇌는 포기하지 않았다.
노상 반점에서 빈한한 현실을 한탄하며 불만을 토로하던 젊은 시절이면 모를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이런 곳에서 죽는단 말인가?
‘지존의 성정을 생각하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희망이지만…….’
세월이 꽤 흘렀다.
거기에 환생까지 했으니 어느 정도는 변했을 수도 있었다.
호기심을 자극해서 거래하는 것을 시도했다.
“지, 지존! 속하가 불충하게도 숨기고 있던 것들이 있습니다! 전부 숨김없이 고할 테니 그만 멈춰주십시오!”
“눈알 굴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끄아악!”
마뇌는 결국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완전한 암흑 속에 갇히니 극심한 공포심이 피어올랐다.
살고 싶은 욕구가 사그라지고 최대한 빨리 죽고 싶어졌다.
마뇌는 엄청난 고문을 당하면서도 계속 떠들었다.
“아아악! 무, 무당의 태극검존(太極劍尊)! 그는 지존에게 패한 뒤 다시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연휘준이 도중에 몰래 죽였습니다!”
쉼 없이 움직이던 소운룡이 정지했다.
“이것 봐라? 태극 늙은이가 사라진 게 연가 놈의 짓이었어?”
마뇌가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헉. 헉. 그렇습니다.”
“함정에 빠뜨리고 암습했겠네. 고생깨나 했겠어.”
“맞습니다. 간신히 죽였습니다.”
“왜 그랬지?”
“연휘준은 속하를 포섭하려고 했습니다. 속하를 품을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하라고 했더니 천하제이인을 잡아서 보여주겠다고…….”
소운룡이 잠시 멈췄던 일을 다시 이어갔다.
서걱서걱-
“연가 놈이 그 이유만으로 그런 위험을 무릅쓸 리 있나.”
“끄아아아!”
“또 다른 이유를 알려줄 테니 그만 편하게 보내달라 이거지?”
“마, 맞습…….”
“너도 무엇인지 잘 모르잖아. 확실히 알았으면 진작 말하고 죽여달라 빌었겠지.”
정광은 연휘준이 왜 그런 모험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한계까지 내몰려 할 말을 다 한 마뇌에게 더 들을 얘기는 없었다.
속도를 올렸다.
마뇌를 단죄하며 그에 관한 좋은 추억도 나쁜 기억도 모조리 잘라냈다.
그러길 얼마나 했을까?
어느덧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마뇌의 머리털이었다.
정광은 그것을 움켜쥐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건 귀곡자의 몫이야. 빡빡 밀어달라고 간청하더라.”
마뇌는 혀가 잘려서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정광은 귀곡자의 부탁을 들어주고 나서야 불충한 종복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만 가라. 내가 열어준 길이니 내가 닫아주마.”
“……!”
피로 물든 마뇌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거라는 안도감과 마신에게서 해방된 기쁨으로 가득 찬 미소였다.
‘이 정도로 그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존.’
서걱-
마뇌의 머리통이 미소를 머금고 목에서 떨어졌다.
정광은 장력으로 바닥에 구멍을 판 뒤 마뇌의 시신을 곱게 수습해서 넣어줬다.
마지막으로 말끔히 덮어주고 두 손을 슬쩍 모았다.
망자를 위한 축원이었다.
정광은 무심코 그랬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하여간 귀찮게 하기는.’
곤륜에 너무 오래 있어서 이런 게 아니었다.
전부 잘라냈다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에 아직도 마뇌의 파편이 남아 있어서였다.
양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마지막 추억도 허공에 흩날렸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 * *
정광은 비밀통로를 통해 신전 예배실로 돌아왔다.
문을 지키고 있던 흑서가 조심스레 맞이했다.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일은 잘 마무리하셨습니까?”
“응.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췄네. 내 봇짐에서 새 옷 한 벌 꺼내줘.”
“네, 지존.”
흑서가 새 옷을 대령하는 사이, 정광은 넝마가 된 옷을 벗었다.
여러 곳이 찌그러진 철혈무쌍용갑이 드러났다.
“망할. 평평하게 펼 시간도 없잖아.”
곽상이 천마궁으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새 옷을 대충 걸치고 흑서에게 명했다.
“운기조식을 할 테니 문밖에서 지키다가 곽상이 돌아오면 알려줘.”
“존명.”
정광의 예상대로 곽상은 무사히 돌아와 신전 밖에 있는 마인들에게 교주의 말을 전했다.
“마뇌의 소행을 교주께 낱낱이 고했소! 교주께선 그에게 신전으로 가라는 명을 내린 적이 없다고 하셨소! 역심을 품은 마뇌를 직접 징치하겠다고 천명하셨으니 모두 안심하셔도 좋소이다!”
“……!”
내심 불안해하고 있던 마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정광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신전에서 천천히 나왔다.
곽상에게 수고하셨다고 말한 뒤 마인들을 위로했다.
“화재가 거의 진압되고 있네요. 역도를 잡느라 피땀을 흘린 우리가 도울 필요는 없겠죠.”
마인들도 동의했다.
상처를 치료하고 휴식도 취했으나 더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정광은 그런 그들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그럼 다음에 봬요.”
한 마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보게, 진혼. 어딜 급히 가려는 겐가?”
“총단이 지긋지긋해서요. 빨리 온숙(穩宿)에 가서 밥이나 먹고 자려고요.”
밥을 먹고 자겠다니.
이 짧은 말이 마인들의 허기와 피로를 심하게 자극했다.
“후우우. 우리도 그만 가세.”
“그래, 더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어.”
마인들이 떠날 채비를 하는 사이, 정광은 섬랑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사흘 후에 보자.”
섬랑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저를 여기에 두고 가시려고요?”
“그래야지. 넌 소교주잖아. 신전에서 칠주야 동안 본교의 역사와 교리를 배워야 하는 거 잊었어?”
“아니, 이 상황에 무슨.”
정광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소교주시면 소교주답게 행동하셔야죠. 본인의 지위에 책임을 지세요. 이 정도 일로 흔들리시면 누가 소교주님을 믿고 따르겠어요?”
대화를 들은 마인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 진혼이 후견인인 건 옛일이고. 지금은 교주의 제자지.”
“교의 상황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소교주의 책무를 다하는 게 맞아. 설마 겁먹은 건 아니겠지?”
섬랑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교도들에게 얕보일 뻔한 것이다.
‘대인께서 이러시는 건 내가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야.’
섬랑의 짐작대로였다.
연휘준은 천요문도가 전부 죽고 마뇌까지 실종된 걸 알면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 최후의 결전에 집중할 위인이었다.
일말의 두려움조차 사라진 섬랑은 가슴을 활짝 펴고 선언했다.
“제 책무를 다할게요! 대인께서도 그러시길 바라요!”
“내게도 의무가 있었나?”
정광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섬랑이 나직이 설명했다.
“교주를 이기셔야죠. 천신께 기도드릴 테니 반드시 이기세요.”
정광은 피식 웃었다.
“소교주님, 기도를 드릴 대상이 틀렸네요.”
“그럼 누구한테 해야 하는데요?”
“당연히 나한테지. 그거면 충분해.”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막아서 섬랑만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섬랑의 눈이 커졌다가 환한 빛을 뿌렸다.
평생의 목표로 삼은 우상이 하는 말에 무슨 토를 달겠는가?
“잠깐 착각했네요. 제가 믿는 건 대인뿐인데.”
“그것참 영광이네.”
정광은 시선을 돌려 두 사람에게 눈짓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호위를 붙이려는 것이다.
흑서와 자오가 섬랑에게 다가가 너스레를 떨었다.
“며칠간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들어갑시다, 소교주.”
“짬짬이 말벗도 해드릴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섬랑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정광은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고 나민을 포함한 원래 일행에게 명했다.
“가죠.”
“네, 진혼.”
정광 일행은 탁목이봉을 빠르게 내려갔다.
마인들이 그 뒤를 쫓았다.
온숙에 도착해 보니 총단처럼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여기저기서 호각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향리객잔 새끼들! 여기도 가짜 안가(安家)잖아!”
“벌써 몇 번째인지! 도주로도 마찬가지야! 저쪽에서 호각을 불었으니 어서 가보세나!”
토로번손가(吐魯番孫家) 무인들이 호각 소리가 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민현유도 귀곡자도 잘 버티고 있네.’
마뇌가 향리객잔을 치도록 명한 조직이 토로번손가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안 들던 놈들이니 손맛이 더 좋지 않겠는가?
정광은 일행을 둘러보며 크게 손짓했다.
“저런! 여기도 난리네요! 어서 가보죠!”
뒤따라오던 마인들이 더 흥분했다.
싸움 구경을 어느 마인이 마다할까.
더구나 진혼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알려진 향리객잔이 쫓기고 있는 상황.
진혼이 꼴 보기 싫은 토로번손가 놈들을 박살 내는 신위를 감상할 기회였다.
마인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도 가자!”
모두가 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토로번손가 무인들이 작은 포목점을 포위하고 있는 게 보였다.
무인들 중엔 토로번손가주 손재등과 그의 아우 손재우도 있었다.
손재우는 정광 무리를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헉! 지, 진혼! 네가 어떻게 여기에!”
반면 손재등은 가주답게 정광을 무섭게 쏘아봤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어떻게 된 것이지?”
정광은 가볍게 대꾸했다.
“제가 못 올 곳을 왔나요?”
“설마 교주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냐?”
“그러니까 여기 있죠.”
“……그래. 그렇겠지.”
손재등은 정광과 함께 온 나민 등을 보고 마뇌가 신전을 치는 것 역시 실패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놈이 그렇게 대단한 고수일 줄이야.’
아니, 그 정도론 설명이 안 됐다.
마신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하늘이 나를 버리는 건가.’
약한 마음도 잠시.
손재등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호통쳤다.
“간도 크구나! 온숙에서 행패를 부릴 셈이냐?”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뼉을 쳤다.
“말씀 잘하셨네. 감히 온숙에서 이런 행패를! 신실한 교도로서 용서할 수가 없네요!”
“신실하다니! 무슨 헛소리를!”
“갈!”
정광의 전신에서 짙은 마기가 솟아올랐다.
“천신 곁으로 보내 드릴 테니 그분의 발치에 엎드려 참회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