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34화
다다익선(多多益善)
세상 모든 일은 천리(天理)에 따라 이루어지기에 사람은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허나 사람 중에는 반드시 반골이 있기 마련.
거기에 뒤틀린 성품과 그릇된 탐욕까지 가진 자라면 역천(逆天)을 꿈꾸곤 한다.
물론 그런 이들이 흔한 건 아니었다.
그럴 만한 각오와 능력을 지닌 자가 천하에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도 분명히 존재했으니, 천요문(天妖門)이 바로 그런 이들이 모인 조직이었고 천요문주는 그곳의 수장이었다.
하지만 순천자존역천자망(順天者存逆天者亡)이라.
천리를 따르는 자는 번성하고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천요문주는 천하의 그 누구보다 역천을 꾀했기에 하늘의 이치를 어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일인지 잘 알았다.
그래서 역천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품은 진혼을 보자마자 두려움을 느끼고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요경(照妖鏡)이라니!
뒷면 한가운데에 역천경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범어(梵語)로 새겨져 있었으나 분명 조요경의 일종이었다.
아니, ‘역천’이라는 오만한 이름과 엄청난 사기(死氣)를 쏟아냈던 위용, 거기에 진혼이 말할 때마다 진동하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신묘함까지. 조요경 중에서도 최상위에 있는 신물(神物)인 게 분명했다.
천요문이 천하를 뒤져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기물을, 그것도 최상품인 것을 마침내 찾은 것이다!
‘드디어! 드디어!’
천요문주는 격동에 휩싸인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진혼이 처음 봤을 때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조요경에게 먹히긴커녕 자유자재로 부리고 있어.’
저것을 제대로 다루려면 지고한 경지의 마기나 사기, 무엇보다 절대로 꺾이지 않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은 곧 진혼이 그런 자격을 갖춘 위인이고 천요문의 사술(邪術)과 상극인 존재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
태연한 척하고 있으나 진혼 역시 자신처럼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었다.
조요경 역시 마찬가지.
아까 토해냈던 지독한 기운은 천마궁을 지키는 마령강시들의 사기를 흡수한 것일 터.
아무리 최상품이라 해도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요력(妖力)을 회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천재일우의 기회!
이런저런 의혹들은 일단 접어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요경을 탈취해야 했다.
“하압!”
천요문주가 두 손을 모으고 요기(妖氣)를 발산하자 문도들도 따랐다.
삽시간에 핏빛 안개가 일어나 그들의 몸을 감쌌다.
그것으로 몸을 보호하며 주문을 암송했다.
천요문의 모든 사술 중에서 다수로 한 사람을 칠 때 가장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영백멸렬대법(靈魄滅裂大法)이었다.
스으으으-
천요문도들이 걸친 백색 장포에 빽빽하게 그려진 붉은 그림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갖가지 요귀의 형상으로 화해 괴성을 질렀다.
귀로 꽂히는 게 아닌 혼을 뒤흔드는 소리였다.
끼아아아악-
흥미롭게 지켜보던 진혼이 눈살을 찌푸렸다.
“깜짝이야. 갑자기 소리 지르면 어떡해요?”
천요문주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대법이 시작됐는데도 저렇게 태연하게 굴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
‘그래. 그러니 저런 신물을 쉽게 부리겠지.’
당황스럽긴 했으나 굴복할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전심전력으로 술법을 부려서 요귀들에게 명했다.
저놈의 혼을 찢어라!
갈기갈기 찢어서 흩트려라!
그리고 그 파편을 모조리 집어삼켜 없애 버려라!
끄아아아아-
붉은 요귀들이 진혼을 팔방에서 덮쳤다.
천하제일고수라도 피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치밀한 합공이었다.
진혼은 순식간에 적색 구(球)에 갇혀 모습이 사라졌다.
천요문주와 문도들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이며 주문을 중얼거렸다.
요귀들로 이루어진 적색 구가 더 붉은빛을 토하며 압축됐다.
천요문도들은 굵은 땀방울을 쉴새 없이 흘리면서도 밝은 표정을 지었다.
대적(大敵)을 영백멸렬대법으로 가두는 데 성공해서였다.
이제는 시간문제일 뿐, 승리를 확신하는데.
천요문주의 안색은 어두웠다.
‘이 반응은 뭐지?’
사술의 기본은 적의 욕심을 부추기거나 분노하게 해서 폭주시킨 뒤 심마(心魔)에 빠뜨려 자멸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천요문주의 영(靈)과 이어져 있는 적색 구에서는 거친 움직임은커녕 희로애락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답은 하나였다.
‘이럴 수가! 대법에 걸렸는데 흔들리지도 않다니!’
부처의 부동심(不動心)이 이럴까?
의지가 대단하리란 것은 짐작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천요문주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래봐야 한낱 마인일 뿐이거늘 부처는 무슨!’
그래, 의지가 정말 강한 자라면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남몰래 품고 있는 더러운 욕망이 한두 가지쯤은 있기 마련.
심한 것일수록 강하게 자극하면 급속도로 폭주하게 된다.
천요문주의 눈이 기이한 빛을 내며 번들거렸다.
‘틈을 드러내게 해서 영백멸렬대법으로 해치운다.’
문도들에게 영백멸렬대법을 계속 펼치게 하고 자신은 다른 술법을 꺼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나직한 소리가 빠르게 새어 나왔다.
안색은 갈수록 창백해졌고 굳게 모은 두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문이 완성되자.
우우우웅-
진혼을 감싼 붉은 구가 강하게 진동했다.
사람의 일반적인 욕심은 물론이오, 그릇된 욕망까지 불러일으키는 사욕격기사령술(邪慾激起使令術)이 펼쳐진 것이다.
천요문주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놈! 꼭꼭 숨기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드러내라! 그 순간이 네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효과가 나타났다.
붉은 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점점 거칠어졌고 결국엔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천요문주의 눈에 환희의 빛이 맺혔다.
‘됐어! 놈의 욕망이 폭발하는 순간 놈을 감싸고 있는 영백멸렬대법으로 참한다!’
천요문도들도 사기가 올라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다들 얼굴이 핼쑥해졌으나 상관없었다.
한마음 한뜻으로 내심 외쳤다.
더!
조금만 더!
그러면 저 악귀를 죽일 수 있다!
아니었다.
급속도로 커졌던 붉은 구가 차차 작아졌다.
천요문주와 문도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요기를 쏟아부었다.
말도 안 돼! 마인이 저렇게 절제력이 강하다니!
최후의 발악일 뿐이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돼!
예상대로였다.
붉은 구가 수축과 팽창을 미친 듯이 반복했다.
끝이 다가온 것이다.
‘이제 다 됐…….’
천요문주는 생각을 멈추고 입을 떡 벌렸다.
붉은 구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있는 것 아닌가?
‘……분노조차 사라졌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경악하는 그때.
사아아악-
종이가 예리한 칼에 잘리는 듯한 소리가 나며 붉은 구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진혼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넣으며 밖으로 나왔다.
실로 믿기지 않는 신위!
천요문주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정광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게요.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긴 처음이네요.”
“……!”
천요문도들은 귀를 의심했다.
마음이 흔들렸다고?
그런데 어떻게 뿌리치고 나온 거야?
천요문주가 대표로 물었다.
“어떤 욕망이 고개를 들었느냐?”
정광은 솔직히 답했다.
“식욕과 재물욕요.”
“……겨우 그것들뿐이라고?”
“겨우라뇨. 얼마나 중요한 것들인데.”
천요문주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가 동의했다.
“그래. 기본적인 욕구가 가장 클 수밖에 없지.”
“바로 그거죠.”
“어떻게 떨쳐냈지?”
정광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배가 고프면 이따가 먹으면 되고. 재물은 생각해 보니 모을 만큼 모았더라고요.”
“…….”
천요문주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릇된 욕망이 없을뿐더러 기본적인 욕구는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조절한다.
마인이 어찌 이럴까?
마치 부처나 신선 같지 않은가?
천요문주는 그제야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역천의 기운이 그것이었나? 너는…… 거의 모든 것을 초탈하고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할 줄 아는 신인(神人)이구나.”
사람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것을 버리고 뜻대로 본인을 다루니 신인이라는 표현이 크게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가요?”
정광은 피식 웃었다.
그게 아니라 환생해서 그런 것이었으나 굳이 말해줄 필요 있나.
“무슨 신인씩이나. 살다 보면 무덤덤해지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죠.”
정광은 고개를 좌우로 꺾고 마무리 지을 준비를 했다.
“슬슬 끝내죠. 제가 좀 바쁘거든요.”
천요문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선공을 하지 않은 건 네 부동심을 믿고 우리의 힘을 빼려고 한 것이냐?”
“네. 저번처럼 일부라도 도주해 버리면 귀찮아지니까요. 역천경을 보셨으니 평생 귀찮게 따라다니실 거잖아요.”
“저번이라니? 네가 언제 본문을 상대했다고 그런 말을…… 아!”
천요문주의 눈이 커졌다.
“서, 설마 사천성에서 본문의 장로 세 명을 죽인 게 네놈이냐?”
“꼬박꼬박 존대해 드리는데 계속 놈 놈 거리시네.”
“그 일은 분명 진옥룡의 소행인데…….”
“마침 그게 저거든요.”
“……!”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정광의 신형이 폭풍처럼 움직였다.
모든 힘을 소진한 천요문도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천요문주가 간신히 입을 벌렸다.
시뻘건 핏물이 쏟아져 바닥을 붉게 적시고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와 정광의 귀를 간질였다.
“마(魔)와 정(正)을 함께 지니다니. 너, 너 자체가 역천…….”
“그만. 물어볼 게 있으니까 기력을 보존하세요.”
정광은 천요문주의 가슴에 박아넣은 오른손으로 움직임이 멎어가는 심장을 자극했다.
조물조물.
“역천경, 아니 곧 가실 텐데 조요경이라 해드리죠. 그걸로 무슨 짓을 하려고 천하를 뒤지신 거죠?”
천요문의 비원을 이룰 수 있는 귀물을 겨우 찾았는데 멸문에 이른 상황.
천요문주는 악에 받쳐서 울부짖었다.
“불사영생(不死永生)! 그게 안 되면 환생이라도 하는 것이다!”
“……!”
천요경은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를 비추어 그 진체를 드러나게 하는 기물.
그것을 이용해 사신(死神)을 잡아 생을 늘리고 죽은 자와 갓 태어난 이의 혼백을 교환함으로써 환생을 이루려고 한 걸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정광은 황당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된다 쳐도 그렇게 오래 살아봐야 뭐 좋을 게 있다고. 하긴, 그래도 환생은 한 번쯤은 할 만하죠.”
“그게 무슨 뜻…….”
“바빠서 이만.”
정광은 오른손에 힘을 줬다.
파악-
간신히 수명을 이어가던 심장이 터졌다.
천요문주는 가늘게 경련하다가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정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할 때는 제대로 해야 하는 법.
천요문주의 목까지 수도로 자르고 나서야 손에 묻은 핏물을 깨끗이 털어냈다.
‘서론은 끝났고.’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허나 그 전에 장소를 옮겨야 했다.
밖에서 포위하고 있던 시랑대(豺狼隊)가 먼저 진입한 천요문이 감감무소식이다 보니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대로 있으려나.’
마뇌의 뒷덜미를 잡고 화려한 의자 뒤쪽으로 갔다.
의자에 박힌 보석들을 특정한 순서대로 누르니 의자가 밀려나고 뻥 뚫린 바닥이 드러났다.
‘이런 건 돈지랄을 할 만하지.’
정광은 미련 없이 뛰어내렸다.
의자가 바로 원래 위치로 돌아가고 시랑대주의 고함이 들렸다.
“이럴 수가!”
정광은 바닥에 착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비밀통로 천장에 야명주가 줄을 지어 박혀 있었다.
‘예전보다 더 많아졌잖아. 비상금 삼아 쟁여둔 건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재물은 모을 만큼 모았으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사양하지 않고 야명주를 챙기며 나아갔다.
얼마 가지 않아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거야 원. 굴을 더 팠어?’
편히 가려면 물어볼 수밖에.
정광은 마뇌를 내려놓고 뺨을 시원하게 갈겼다.
짜악!
“정신 차려.”
평소와 달리 단 한 방이었다.
마뇌는 어금니 세 개를 토해내며 눈을 떴다.
“아악! 네, 네놈이 감히!”
모자랐나 보다.
짜악!
마뇌의 고개가 홱 돌아가고 입에선 또 이빨이 튀어나왔다.
“크흑.”
정광은 앓는 소리를 내는 마뇌를 위로했다.
“괜찮지? 군더더기 없이 가자. 눈알 굴리지 말고. 그건 나중에 뽑을 거거든.”
마뇌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정광이 소운룡을 꺼내 엄지 한 마디를 잘라 버려서였다.
서걱-
“아아악!”
“그래, 아프면 그렇게라도 해소해야지. 소리를 차단하고 있으니 좋을 대로 해.”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정광은 마뇌의 한 손을 조각조각 내버렸다.
마뇌가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사정했다.
“이, 이보게 진혼. 나 좀 살려주게나.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줄 테니 제발!”
“어느 쪽으로 나가야 신전과 가까워?”
마뇌의 눈이 데구루루 구르고.
정광은 다른 손을 자르기 시작했다.
“끄아악! 아악! 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정광은 지혈을 해주며 부드럽게 설명했다.
“네가 뜻을 펼칠 기회가 없다고 한탄할 때 길을 열어준 사람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었는데 머리를 굴리고 있잖아.”
마뇌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서, 설마…… 지존?”
정광은 환하게 웃었다.
“응.”
“아니야! 말도 안 돼!”
“머리가 너무 잘 돌아가는 놈은 이게 문제라니까.”
정광은 마뇌의 팔에 소운룡을 댔다.
“옛날처럼 믿음을 심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