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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503화 (502/569)

2부 232화

지존께 만에 하나는 없습니다

촤악-

은호정의 오른쪽 손목이 깨끗이 절단되며 핏물을 쏟아냈다.

급소 중의 급소인 낭심, 명치, 단전을 하, 상, 중 순으로 노리는 암습은 가볍게 막아냈으나 허공에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린 맹렬한 일격을 피할 순 없었던 것이다.

은호정은 다급히 뒤로 물러나 손목 주변의 혈도를 짚었다.

그리고 유성추(流星鎚)를 휘돌려 전면을 방어하며 흉수를 힐난했다.

“진혼 네 이놈! 이런 더러운 암습을 하다니!”

정광은 가볍게 착지하고 담담히 답했다.

“실례한다고 양해를 구했는데요.”

“그걸로 될 일이냐?”

“소교주님을 장력으로 때려죽이려고 하셨잖아요.”

“그야 저놈이 먼저…….”

“소교주님께 놈이라뇨. 역도는 어쩔 수 없네.”

정광은 짧은 대화를 나누며 전황을 전부 파악했다.

순식간에 우선순위가 정리됐다.

-관 숙수, 섬랑을 보호하세요. 나 소저는 손이라도 잡아 주시고요. 관 숙수 말고 섬랑 손이에요.

섬랑은 눈을 감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전신에서 검은 마기가 불규칙하게 일렁였다.

통제가 풀려서 날뛰는 마혼(魔魂)을 집어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었다.

관엽은 기형도를 굳게 쥐고 주변을 경계했고 나민은 얼결에 섬랑의 손을 잡았다.

정광은 뒷정리를 시작했다.

“역도는 죽어야지.”

속전속결.

은호정이 대꾸할 겨를도 없이 전질보(箭疾歩)를 밟아 거리를 좁혔다.

만마(萬魔)를 하늘을 찌를 기세로 치켜들었다가 땅을 뚫을만한 위력으로 내려쳤다.

혈천마검(血天魔劍) 제일초 혈성화(血星火).

만마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며 허공을 붉게 태웠다.

그 속도와 열기로 유성추가 물샐틈없이 회전하여 만들어낸 장막을 세로로 양단했다.

장막이 갈리고 뒤에 있던 은호정이 드러났다.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맺힌 모습이었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혈천마검?”

정광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천신혁련가(天神赫連家)의 비기가 아니라 진천마가 말년에 소일거리삼아 창안한 검법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은호정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진동 때문에 혈선이 더 짙어지고 폭도 벌어졌다.

그만큼 사고의 폭도 넓어졌다.

‘아무리 천재여도 벌써 이것까지 익혔을 리는 없어.’

그렇다면 답은 하나.

은호정은 입과 혀가 더 갈라지기 전에 간신히 말했다.

“빌어먹을. 후인이 아니라…….”

말을 끝맺기도 전에 혈선이 확연히 굵어지며 핏물을 토해냈다.

은호정은 결국 수직으로 양단되어 땅바닥에 처박혔다.

정광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오른쪽 어깨를 빙빙 돌렸다.

손에 들린 만마가 허공을 휘돌며 핏방울을 뿌렸다.

‘이제 혈천마검까지 써봤고. 몇 개만 더 되짚어 볼까.’

아직 쓸 만한 상대가 남아 있었다.

광명우사자 우경환이었다.

흑서와 연혁소 무리의 합공에 당해 혈인(血人)이 됐다가 마기가 폭주한 상황.

마기를 폭발시키며 날뛰어 전세를 뒤집고 있는 모습이 꽤 먹음직스러웠다.

정광은 신형을 날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금방 끝낼게. 조금만 더 버텨.’

우경환이 아니라 섬랑에게 한 말이었다.

섬랑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경련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심각한 상태였다.

그 머리맡에 앉은 나민은 잡고 있던 섬랑의 작은 손에 힘을 강하게 줬다.

우드득-

‘분명히 경고했거늘, 또 무리해서 이런 사달을 일으켜?’

덕분에 죽지 않았으나 아닌 건 아니었다.

이렇게 본인의 목숨을 가벼이 여겨서야 천하마도의 정점에 어떻게 올라가겠는가?

사람이야 구름처럼 몰려들겠지만 살아야 뭘 하지.

‘일단 이 고비부터 넘겨야 해.’

나민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진혼이 다른 일부터 처리하려고 한다는 건 그가 돌아올 때까지 견딜 수 있다는 얘기야.’

섬랑에게 집중하고 있어서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랐으나 진혼은 반드시 돌아올 터.

그만큼 진혼의 무력을 믿었다.

당연히 그가 내린 판단도 신뢰했지만…….

‘이런!’

나민은 이를 지그시 물었다.

섬랑의 안색이 더 나빠진 것이다.

전신에서 일렁이던 마기의 움직임도 거세져서 저도 모르게 손을 놓을뻔했다.

‘으윽. 이 정도까지 심해지다니. 정말 괜찮을까?’

내공을 더 끌어올려서 견디며 마음을 다잡았다.

‘할 수 있어. 여기서 끝날 아이가 아니야.’

마치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섬랑이 눈을 떴다.

벽안(碧眼)이 아닌, 마기에 새카맣게 물든 눈이 드러났다.

나민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여기까지인가?’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잠시.

용납할 수 없었다.

나민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섬랑. 네가 죽어버리면 내 꿈도 묻어야 해. 상대가 뭐든 간에 집어삼키고 일어서렴. 내가 널 선택한 이유를 증명해줘.”

그 순간.

섬랑의 몸에서 넘실거리던 마기가 나민을 덮치려 했다.

너무 빨라서 호법을 서던 관엽이 나설 틈도 없었다.

애초에 피할 생각도 없었던 나민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속으로 외쳤다.

‘넌 할 수 있어!’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지킨 믿음에 돌아온 대답은.

기적이었다.

화아아-

코앞까지 다가왔던 마기가 물안개처럼 흩어지더니 섬랑의 몸에 내려앉아 그대로 스며들었다.

섬랑의 몸에도 변화가 생겼다.

새카맣게 변했던 눈이 암청색으로 옅어진 뒤 원래의 벽안으로 돌아왔다.

나민은 그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짧게 칭찬했다.

“수고했다. 잘했어.”

섬랑이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나민은 깜짝 놀라 다급히 물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닌가? 무엇이 문제냐?”

섬랑이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왜 갑자기 친한척해요? 소름 끼쳐 죽겠네.”

“…….”

“손은 또 왜 그렇게 꽉 잡는지 원. 아파서 눈물이 날 뻔했잖아요.”

나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 거였군. 실제로 눈물이 나게 해줄까?”

섬랑은 재빨리 일어나 손을 몇 번 털고 말을 돌렸다.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네요. 대인은 어디 가셨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민의 입에서 살벌한 잔소리가 쏟아졌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네가 품은 그것, 마혼이지? 아니라고 하지 마.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아. 그 위험한 걸 지녔으면서도 이렇게 무리를 해? 정말 죽고 싶은 것이냐? 이번엔 어떻게 넘겼다 해도 다음도 그럴 것이라 믿어? 겁이 없는 것이냐, 생각이 없는 것이냐?”

섬랑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가슴을 활짝 폈다.

“저도 바보가 아니에요. 마공을 익힌 자의 숙명이니 담담히 받아들이고 싸워야죠. 평생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원론적으로는 옳은 말이었다.

마공을 익히는 자가, 그것도 마혼을 품은 이가 그 정도 마음가짐도 없이 뭘 이루겠는가?

죽음을 각오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나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구나. 누가 한 말이지?”

섬랑이 겸연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대인요. 근데 어디 가신 거예요? 은호정 그 변태 영감의 손목을 자르시는 것까진 봤는데.”

곧 알 수 있었다.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

“진혼이 광명좌사자, 우사자에 이어 남은 놈들까지 전부 죽였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신위를! 정말 대단해! 마뇌가 도주한 게 아쉽구나!”

정광은 주위를 둘러보며 정중히 포권했다.

“저 혼자 했나요? 모두 같이 해낸 일인데요. 고생하셨습니다.”

“…….”

이렇게 겸손할 수가.

마인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광이 씩 웃었다.

“그러니 어떤 후폭풍이 불어도 같이 책임지셔야 해요.”

“……!”

이렇게 악랄할 수가!

마인들은 감탄하는 걸 넘어 치를 떨었다.

놀 때는 좋았으나 불안감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정광은 그런 그들을 안심시켰다.

“역모를 막았을 뿐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한 노인이 슬그머니 물었다.

“마뇌는 교주께서 명하신 일이라고 주장했소. 정말 괜찮을 거라 보시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경어를 쓰고 있었다.

조금 전에 목도한 신위에 압도돼서였다.

정광은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

“네. 제가 시험을 통과하자 곱게 놔주신 분인데 그런 더러운 짓을 하실 리 없죠.”

“아!”

사람들은 그제야 정광이 천마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걸 알았다.

정신없이 싸우느라 천마전에서 하늘로 솟구친 검은 불덩이를 못 본 것이다.

“그래도 불안하시면 이렇게 하죠.”

정광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어디 보자. 교주님께서 제일 믿을 만하신 분이…… 호교당 삼향주님이시네. 삼향주님, 치료를 받고 천마궁으로 가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보고해주실래요? 그럼 교주님께서 답을 주시겠죠?”

있었던 일을 솔직히 말하고 교주의 대답을 듣는다.

교주가 마뇌에게 그런 명을 내리지 않았으면 곽상은 무사히 돌아올 것이고, 명했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터.

다른 이라면 정광의 청을 거절했겠지만 곽상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세.”

“시원시원하시네요. 그럼 신전에 들어가셔서 치료를 받으시고 천마궁으로 가세요.”

정광은 다른 마인들에게도 권했다.

“뿔뿔이 흩어지시지 말고 여기서 잠깐 기다리시죠. 혹시라도 제 예상이 틀리면 각개격파 당할 게 뻔하잖아요.”

모두 동의했다.

‘홀로 도망 다니다가 죽느니 힘을 모아 싸우다가 쓰러지는 게 낫지.’

‘더구나 진혼도 있어. 아극소연가주를 비롯한 고수들도 있고.’

마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쉬거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정광은 싱긋 웃은 뒤 신전으로 가며 일행을 모았다.

섬랑이 제일 먼저 달려왔다.

“대인! 축하드려요!”

“뭘?”

“시험을 통과하신 거요.”

“뭐 그런 걸 가지고. 너야말로 축하해.”

“네?”

“그놈을 스스로 또 눌렀잖아.”

마혼의 파편을 말하는 것이었다.

섬랑은 여느 때와 달리 진지하게 답했다.

“방심하면 안 될 놈이에요. 앞으로도 주의할게요.”

“더 마음에 드네.”

정광은 섬랑의 머리털을 헝클어뜨렸다.

다른 이들도 격려하며 신전에 들어갔다.

신관 등현과 성녀까지 위로하고 곽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치료가 빨리 끝나도 한 식경 후에 출발해.

곽상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존명.

-만에 하나 네가 죽으면 복수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지존께 만에 하나는 없습니다.

-오오. 늦었지만 출세하겠는데?

-사실입니다.

-이렇게 대꾸만 안 하면 말이야.

정광은 피식 웃은 뒤 일행에게 몸을 치료하고 휴식을 취하라 지시했다.

성녀와 신관들이 그들을 도왔다.

정광은 다친 곳이 제일 적은 흑서에게 따라오라 눈짓하고 일행이 묵었던 예배실로 향했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섬랑이 눈치 없이 물었다.

“대인, 어디 가세요?”

“예배드리러.”

“네?”

“마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잖아. 겸사겸사 운기조식도 하고.”

섬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흑서는 은근슬쩍 따라왔다.

정광은 예배실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비밀통로를 열었다.

“흑서. 신관 중에 연가 놈의 세작이 있을지도 몰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운기조식 중이라 둘러대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막아.”

“어디를 가시길래 그러십니까?”

“마뇌를 죽이려고.”

“죄송합니다. 아까 쳐 죽이셨으면 되는데 소인들을 구하시느라 이런 번거로운 일을…….”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정광은 귀곡자에게 마뇌를 곱게 죽이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그러기 위해선 한산한 장소가 필요했고 지금 마뇌가 향하고 있을 곳이 그런 곳이었다.

“다녀올게.”

흑서가 비장하게 맹세했다.

“네, 지존. 철통처럼 지키며 지존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놈도 출세하려고 그러나.”

“네?”

“아니면 말고.”

정광은 비밀통로로 들어가 질풍처럼 달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아직도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딱 좋네.’

잠행술을 펼쳐 한 곳으로 향했다.

마뇌가 가고 있을 장소는 뻔했다.

‘연가 놈이 마뇌가 신전을 치는 걸 대놓고 허락했을 리 없지.’

그런데 실패까지 했으니 천마궁으로 갈 리 있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재물을 챙겨서 도주하든가 연휘준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찾아가 살려달라 빌 것이다.

‘후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지만 거처로 가고 있을 거란 건 똑같지.’

마뇌는 자신의 목숨을 건지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총력을 기울여서 정광을 죽이자고 할 것이다.

마뇌가 뭘 바치느냐에 따라 연휘준의 마음이 변해서 둘이 손을 잡을 수도 있으니 그 전에 죽인다.

구경꾼들의 발을 묶어놨으니 당장 소문이 퍼지지는 않을 터.

곽상에게 한 식경 뒤에 출발하라고 했으니 그 안에 끝내야 했다.

‘늦지 않았네.’

정광은 잠행술을 펼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앞에 한 무리가 달리고 있었는데 시랑대주(豺狼隊主)에게 업힌 마뇌도 보였다.

‘일단 거처까지 따라가야지.’

그리 멀지 않았다.

조금 더 달리다 보니 주위가 한적해졌고 높다란 담벼락에 둘러싸인 전각이 나타났다.

마뇌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좋아. 다 왔…… 응?’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담벼락 중앙에 있는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나왔는데 느껴지는 기운이 익숙했다.

마뇌가 그들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요대(天妖隊), 천요대주는 어딨는가?”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천요 뭐?

이름도 그렇고 기운도 그렇고.

사천성에서 한 번 부딪혔고 동정호 속에 사술을 펼쳤던 천요문(天妖門) 아닌가?

정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것 봐라? 이놈들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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