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02화 (501/569)

2부 231화

비장의 수

나민은 숨 가쁘게 흘러가는 전황을 살피며 지시를 내렸다.

“단가는 뒤로! 호교당 전진! 연가는 우측을 치십시오!”

최전선에서 시랑대(豺狼隊)를 막으며 피를 흘리던 고이륵단가가 물러나고 후열에 있던 호교당이 앞으로 나와 시랑대를 맞이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아극소연가는 적의 공세가 거세지는 우측을 방어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밀려났다.

이는 호교당 역시 마찬가지.

나민은 전장을 면밀히 둘러보다가 내심 탄식했다.

‘쉽지 않구나.’

솔직히 암담했다.

단순한 만큼 효과적인 반원진을 운용해 억지로 저지하고 있으나 전력 차이가 너무 커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순 없었다.

‘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자책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휘자가 약한 마음을 품어서 어쩌자는 것인가?

마음을 다잡았다.

상황이 변화할 때마다 그에 맞는 명을 내렸다.

동시에 다른 두 전장을 살피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함정!

광명좌사자 은호정이 빈틈을 보이자 그곳을 찌르려던 곽상은 나민의 전음을 듣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물러났다.

은호정은 일부러 허점을 드러낸 뒤 곽상을 쳐죽이려다가 실패하자 분기탱천해서 유성추(流星鎚)를 쏘아내려 했다.

그 전에 나민의 전음이 다른 이의 귀에 꽂혔다.

-위험!

곽상과 함께 은호정을 상대하던 자오가 나려타곤(懶驢打滾)의 수법으로 땅바닥을 뒹굴었다.

자오의 오른쪽 뺨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유성추가 곽상이 아니라 자오에게 날아간 것이다.

은호정은 유성추를 회수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놈들! 간악한 쥐새끼들답게 눈치가 빠르구나! 언제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피해야 하는 건 은호정이었다.

쉬이익-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비표(飛鏢) 세 개가 품자(品字) 모양으로 날아왔다.

은호정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피했다.

비표들이 그의 값비싼 장포를 스쳐 지나갔다.

장포에 생긴 흠집보다 자존심에 난 생채기가 더 아팠다.

‘어떤 놈이 이런 짓을!’

유성추를 크게 휘돌려 적들이 후퇴하게 한 뒤 비표들이 날아온 방향을 힐끔 봤다.

광명우사자 우경환이 백태로 뒤덮인 눈을 치뜨며 흉악하게 생긴 노인을 몰아치고 있었다.

흉성(凶性)이 폭발한 것이다.

“이 새끼가! 감히 나를 상대하는 와중에 한눈을 팔아?”

새끼라 불린 노인은 흑조.

은호정에게 비표를 던진 건 바로 그였다.

허나 흑조. 아니, 흑서(黑鼠)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간악한’이라는 표현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상관없으나 ‘쥐새끼들’이라니!

아무리 적이라 해도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은 가려야지.

사람이 만들어낸 수많은 욕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을 들었는데 어찌 참겠는가?

오히려 은호정과 우경환보다 더 분노한 상태.

그렇다고 앞뒤 없이 흥분하여 날뛰지는 않았다.

시간을 끌라는 지존의 명을 되새기며 연혁소와 연합하여 우경환에게 대항했다.

우경환의 공세가 더 거세졌다.

그의 손에 들린 상문봉(喪門棒)이 타배신공(駝背神功)의 막강한 힘을 담고 태산도 박살 낼 기세로 춤을 췄다.

흑서와 연혁소는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밀렸다.

그래도 그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은호정을 상대하는 자오와 곽상은 조금만 삐끗해도 당장 피를 토하고 쓰러질 지경.

곽상은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워지자 지존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네가 교를 위한 일이라 판단하고 움직이면 다른 녀석들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너를 이용해 명분을 쌓고 동조하는 세력을 만든다. 이게 내 계획이야.”

그래, 이쯤이면 됐다.

피가 충분히 끓어올랐을 터.

은호정의 유성추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거나 귀두도(鬼頭刀)로 간신히 튕겨내며 소리쳤다.

“누가 역도인가? 가만히 있는 자들은 자존심도 없는가? 두려운가? 교를 지키지 않을 셈인가?”

“……!”

구경꾼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고지식하기론 천하제일을 다툴만한 곽상이 교에 해가 되는 일을 할 리 있나.

지금껏 지켜본 바로도 그랬다.

마뇌가 억지를 써가며 신전에 들어가려 한다는 걸 어찌 모를까.

‘저 노물이 이젠 신권(神權)까지 탐하는 건가? 교주의 아들 아극소연가주까지 죽일 각오로? 완전히 미쳤구나!’

욕심을 부리는 건 이해하나 적당히 부려야지.

반감이 치솟았다.

손에 땀을 쥐고 혈투를 지켜보다 보니 흥이 일어나고 몸도 근질근질해진 상태.

거기에 곽상이 자존심을 긁으니 살기가 솟구쳤다.

‘마뇌고 뭐고 간에 그냥 확 재껴버려?’

마뇌는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는 걸 눈치채고 시랑대주(豺狼隊主)에게 속삭였다.

“오로나가 년부터 죽여. 그럼 고이륵단가와 아극소연가 놈들은 금방 무너진다.”

“존명.”

마뇌를 지키느라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시랑대주가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높이 도약했다.

허공으로 올라가자 여러 사람에게 가려져 목소리만 들리던 나민이 또렷이 보였다.

그녀를 향해 비수 세 개를 연달아 던졌다.

비수들이 꼬리를 물고 유성처럼 날아갔다.

나민은 그것들을 보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능력을 과하게 썼어.’

사태가 너무 위급하여 아낄 여력이 없었다.

덕분에 거의 탈진해서 정신력으로 지휘하던 상황.

아니, 심신이 멀쩡했어도 저것들을 막을 실력은 없었다.

‘이렇게 끝인가.’

아니었다.

그녀 곁에는 관엽이 있었다.

“크악!”

그는 마기를 폭발시키며 지존이 하사한 기형도로 비수를 쳐냈다.

쩌엉!

기형도는 이녕임가가 제작한 명도답게 멀쩡했다.

허나 그것을 쥔 관엽의 왼손은 감각이 없어질 만큼 충격을 받았다.

비수에 실린 힘이 그만큼 강해서였다.

허나 관엽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기를 재차 폭발시키며 두 번째 비수를 막았다.

까앙!

손아귀가 찢어지고 입에선 핏물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그 대가로 나민을 보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세 번째 것도 쳐내려 했으나 왼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으로라도 막아보려 했으나 다리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완전히 마비된 것이다.

관엽이 이를 악물고 나민은 눈을 지그시 감는 순간.

“망할!”

신전에서 뛰쳐나온 섬랑이 나민을 뒤에서 안고 엎어졌다.

나민은 땅바닥에 얼굴을 박기 직전 손으로 짚어 다치지 않았으나 섬랑은 달랐다.

비수가 등을 훑고 지나갔다.

“……!”

등줄기가 길게 찢어지며 수많은 핏방울이 붉은 안개처럼 비산했다.

나민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섬랑의 상처를 살피며 책망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하아아. 구해줘도 잔소리하시네. 출혈 멎게 점혈이나 해주세요.”

마비가 풀린 관엽이 신속히 혈도들을 짚었다.

나민은 벌떡 일어나 다시 사람들에게 명을 내리다가 잠깐의 틈을 타 섬랑에게 화를 냈다.

“목숨을 중히 여겨야지! 너는 이제 소교주야!”

“아직도 반말하시면서 소교주는 무슨.”

“안에서 기다리시라고 했잖습니까? 제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으으. 차라리 반말을 하시죠.”

“너는 안에 있었어야 해! 진혼이 곧 돌아올 것이다! 그를 못 믿느냐?”

섬랑은 이 급박한 순간에 금창약까지 꺼내 상처에 바르려는 관엽을 말렸다.

그리고 옷을 툭툭 털며 일어나 당당히 답했다.

“설마요. 믿죠.”

“그런데 왜!”

“그렇다고 다 죽을 때까지 기다려요? 대인이라도 이러셨을걸요.”

“……!”

관엽의 눈에서 검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찢어진 왼손으로 기형도를 고쳐 쥐고 투지를 일으켰다.

나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슬며시 풀었다.

그녀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 어떻게 하려고.”

“잘해야죠. 관 숙수, 잠깐 실례할게요.”

섬랑은 관엽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오른 뒤 얼마 안 되는 내공을 끌어모아 외쳤다.

크기는 작지만 강한 의지가 실려 있어 모두의 귀에 똑똑히 박히는 소리였다.

“소교주로서 명합니다! 모두 멈추세요!”

소교주는 교주의 제자이자 장차 천마신교를 이끌어갈 고귀한 존재.

그런 이가 명하는데 누가 쉽게 흘려듣겠는가.

허나 마뇌 직속 무력대인 시랑대는 아니었다.

마뇌가 핑계를 댔다.

“동요하지 말고 계속 쳐라! 소교주는 역도들의 술법에 걸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다!”

섬랑이 인정했다.

“마뇌 어르신! 제가 그런 처지니 이해해주세요!”

“…….”

뭘?

모두 의아해했으나 곧 알 수 있었다.

섬랑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폭풍처럼 토해냈다.

“마뇌! 이 늙어도 죽지 않는 더러운 노물아! 신전이 위험하다고? 내가 안에 있다가 나왔는데 무슨 개소리야? 치병에 걸렸냐? 그러면 벽에 똥칠이나 하며 안빈낙도의 삶을 즐길 것이지 무슨 욕심이 이리도 많아? 나까지 죽이고 네놈이 교주님의 뒤를 이으려는 거지? 내 말이 틀렸어? 틀렸으면 엎드려서 개처럼 짖어보든가!”

“……!”

쿠차에서 밑바닥을 구르며 체득한 욕설에 정광에게 지도받으며 자연스레 물려받은 말발, 거기에 자오에게 시달리며 깨달은 수다의 힘까지 더해지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구경꾼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마뇌도 잠시 그랬으나 분노를 삭이고 힘주어 외쳤다.

“소교주의 상태가 정말 심각하구려! 조금만 기다리시오! 구해 드리겠소!”

섬랑이 얄밉게 이죽거렸다.

“혀가 왜 이리 길어? 그냥 죽인다고 말하지 빙빙 돌리기는!”

“교주의 명을 받은 일이오!”

“그걸 믿으라고? 다 같이 가서 한 번 여쭤볼까?”

마뇌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적당히 하고 물러나시오! 눈먼 칼에 맞을 수도 있소!”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 망할 영감탱이야!”

섬랑은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하하! 이렇게라도 화를 푸니 정신이 돌아오네요!”

“……!”

“저 역도, 짜증 나지 않으세요?”

“…….”

짜증 나다마다.

“잡죠! 사냥을 즐기는 거예요!”

“……!”

사냥?

사람들은 황당해했고 나민은 한숨을 쉬었다.

허나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

지금이 아니면 안 됐다.

나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모두 전진!”

“우와아아아!”

방어에 치중하고 있던 단가, 연가, 호교당이 함성을 지르며 시랑대를 밀어붙였다.

절대열세인 상황에서 오히려 돌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 용맹한 모습에 구경꾼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병기를 꼬나쥐고 마뇌의 수하들을 덮쳤다.

난전이 시작됐다.

피가 솟구치고 내장이 쏟아지는 혈전이었다.

섬랑은 전장을 둘러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성녀에겐 정말 못 봐줄 상황이니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나왔으나 솔직히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빌어먹을. 역시 내가 낄만한 싸움이 아닌가.’

적잖게 의기소침해진 그때.

관엽이 섬랑을 바닥에 내려놓고 서툰 위로를 던졌다.

“소교주, 할 만큼 하셨으니 마음 쓰지 마시오.”

평소와 다른 호칭에 경어였으나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머릿수가 불어나자 전황이 확실히 나아지고 있었다.

광명우사자 우경환을 상대하는 흑서와 연혁소도 그랬다.

여유가 생긴 아극소연가 고수들이 달려가서 도왔다.

연가 비전의 진법을 펼치고 공격을 쏟아붓자 우경환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허나 광명좌사자 은호정과 싸우는 이들은 아니었다.

곽상과 자오는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나민이 다른 이들에게 명해 두 사람을 돕게 했으나 고수들의 싸움에 합도 제대로 안 맞춰본 하수들이 무슨 큰 도움이 되랴.

도우러 가놓고 먼저 쓰러졌다.

섬랑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비장의 수를 썼다.

“모두 조심하세요! 광명좌사자님은 마령강시가 없으면 그걸 못하는 변태세요!”

늦었다.

은호정의 유성추가 날아가 곽상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쾅!

은호정의 장력이 자오의 어깨를 때렸다.

퍼억!

그래도 아주 늦지는 않았던 걸까?

곽상은 뼈가 부러지진 않았는지 쓰러지지 않았고 자오는 탈구로 그쳤는지 뒤로 훌쩍 물러나 관절을 끼워 맞추려 했다.

섬랑의 도발 때문에 은호정의 마음이 살짝 흔들린 결과였다.

자연히 은호정의 분노는 섬랑에게 향했다.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을 봤나!’

그때 우경환의 비명이 들렸다.

깜짝 놀라서 슬쩍 보니 피를 줄줄 흘리며 날뛰고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간이 더 흐르면 자신도 저 꼴이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은호정은 곁눈질로 마뇌를 확인하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겁쟁이 새끼! 제 목숨만 귀한 줄 아는구나!’

마뇌는 시랑대주를 비롯한 수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나도 수를 내야 해!’

지금껏 상대한 놈들은 고수였다.

아무리 은호정이라 해도 멀쩡하지는 않은 형편.

‘그래, 인질을 잡자!’

섬랑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자오와 곽상이 급히 쫓았으나 그보다 빠를 순 없었다.

관엽과 나민이 재빨리 섬랑 앞을 막아섰다.

섬랑은 두 눈을 부릅뜨고 속으로 외쳤다.

‘얌전히 당해줄 줄 아냐!’

생포 당하든 죽든, 그 전에 한방은 먹여야지.

‘나와 인마!’

관엽과 나민이 은호정을 어찌 막겠는가?

진짜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옥당(玉堂)에 웅크리고 있던 마혼이 머리를 향해 질주했다.

섬랑은 녀석을 통제하려고 들지 않았다.

네 모든 힘을 쏟아내라고, 그래야 둘 다 살 수 있다고 외칠 뿐이었다.

마혼이 그러겠다고 응답했다.

섬랑의 벽안(碧眼)이 암청색을 거쳐 검게 변했다.

둘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검은 불꽃을 일으켰다.

그 불은 섬랑의 삼신기(三神器) 중 하나인 비섬(秘閃)을 불살랐다.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은호정이 관엽과 나민을 치려고 할 때.

섬랑은 두 사람 사이로 비섬(秘閃)을 던졌다.

비섬이 눈부신 속도로 날아가 은호정의 낭심을 노렸다.

나이가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일격이었으나.

은호정이 누구인가?

천마신교에서 손꼽히는 강자 아닌가?

인상을 찡그리며 손으로 쳐내려 하는데.

또 다른 검은 불길들이 명치와 단전을 노리고 날아왔다.

섬랑이 던진 쌍교(雙蛟)였다.

‘이런 얕은수를!’

상당히 지친 상태이긴 하나 이런 것도 못 막을까?

쌍장을 휘둘러서 전부 쳐내고 사람까지 죽이려는 순간.

진짜가 나타났다.

섬랑과 미리 약조한 건 아니었으나 정광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만마(萬魔)를 내려쳤다.

“실례!”

은호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핏물이 튀었다.

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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