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00화 (499/569)

2부 229화

천인공노할 만행

일단 인사는 했겠다, 정광은 천마전(天魔殿) 내부를 슬쩍 둘러봤다.

양측 면에 줄지어 세워져 있는 악귀의 형상을 한 석상들과 피를 머금은 것처럼 검붉은 화강석이 깔린 바닥, 천신이 강림해 자신과 세상을 금빛 성화(聖火)로 불태우며 정화하는 광경이 그려져 있는 천장까지.

외부가 그랬듯이 안쪽 역시 예전 모습과 거의 똑같았다.

‘달라진 건 세 가지인가.’

화시(火矢)를 살짝 많이 쐈었나 보다.

지붕을 휩쓸었던 화마 때문에 천장에 구멍이 나 있었는데 하필이면 천신의 얼굴 부분이었다.

나머지 둘은 보좌(寶座)에 엉뚱한 놈이 앉아 있고 그 앞에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늘어서 있다는 것.

정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연가 놈이야 그렇다 치고. 저것들, 아까 것들과는 수준이 다르네.’

방립을 쓴 강시 다섯 구였는데 모두 병기를 들고 있는 데다 풍기는 느낌이 범상치 않았다.

그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연휘준이 냉소를 지었다.

“악령강시(惡靈僵屍)가 신경 쓰이나 보군. 역시 안목이 있어.”

“……악령강시요?”

“그렇다. 마령강시를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역작이지.”

“…….”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름하고는.

마령강시를 만들다가 운 좋게 잘 나온 것들을 모아놓고는 악령이 뭐가 어째?

‘뭐 이름은 이름이고.’

정광은 자신의 몸 상태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렇게 치열한 격전을 치렀는데 정상일 리 있나.

내공도 많이 소모했고 가볍지 않은 내상도 입었다.

역천경 역시 마찬가지.

사기(死氣)를 너무 과식해서 끙끙 앓고 있었다.

강시들만 상대하면 상관없으나 연휘준이 있는데 어찌 경시할까.

그는 정광의 기준으로 따져도 고수 대접을 받고도 남을 강자였다.

사천당가 대원로 당기철이 준 산공독(散功毒)을 아껴두고 있었지만 연휘준 같은 고수가 아니라 머릿수로 달려드는 하수들을 상대하기 위한 것.

이대로 싸우면 상당한 손해를 볼 수밖에.

더구나 한시바삐 나가서 해야 하는 일도 있지 않은가?

정광은 두 손을 천천히 모았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정광이 손을 움직이자 보좌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연휘준이 얼굴을 굳혔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정광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천마전에 들어오는 시험을 통과했으니 그만 가려고요. 사흘을 주셨었죠? 하루 만에 끝냈네. 이틀 푹 쉬고 그다음 날 올게요.”

연휘준의 눈이 반쯤 투명해졌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생사투를 벌이자는 말이군.”

“바로 그거죠. 그렇게 약조하셨잖아요.”

“……약조라. 분명 그랬지.”

말과 행동이 달랐다.

연휘준의 전신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가 일어났다.

위협하는 게 아니라 극심한 살의(殺意)로 뭉쳐진 진짜 살기였다.

그 살기가 정광을 꽁꽁 옭아맸다.

연휘준의 입이 열리고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좌가 그 약조를 지킬 것이라 믿는 것이냐?”

정광도 북풍한설(北風寒雪)처럼 차가운 살기를 일으켜 맞서며 솔직히 대답했다.

“글쎄요. 그러실 거라 생각하긴 하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워낙 간사하니 원. 확신이 안 드네요.”

평소라면 체면을 지키려 하겠으나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진 않을 것 같다는 얘기.

연휘준의 눈이 거의 투명해졌다.

“재밌는 말이군.”

“다행이네요. 그럼 가도 되죠?”

“…….”

연휘준은 말없이 정광을 노려봤다.

실제로 그는 재밌어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서였다.

‘이놈을 쉽게 죽이고 싶은 건가, 놓아줬다가 일대일로 싸워 통쾌하게 죽이고 싶은 건가.’

진혼이 이곳까지 홀로 돌파한 건 대단한 일이었으나 자신도 할 수 있었다.

놈이 아무리 강해도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그렇거늘…….’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음 한편 구석에서 저놈을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랬다간 체면이 땅에 처박히는 건 물론이오, 교도들에게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될 텐데도 말이다.

‘꼭 그런 건 아니지.’

진혼이 사흉대와 싸우다가 죽었다고 공표하면 된다.

의심해서 떠드는 자들이 있겠지만 곤륜산으로 가서 대승을 거두면 그 기쁨에 취해 대부분 잊어버릴 터.

‘본좌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일까?’

진혼이 말했던 것처럼 그 역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신선해서 재밌게 느껴졌던 감정이 불쾌해졌다.

‘재밌는 게 아니라 우스운 일이군.’

이래선 안 됐다.

천하의 정점에 서기로 결심한 뒤 모든 일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거늘 이런 못난 꼴을 보이다니.

자존심이 상처받은 것을 보상받고 싶었다.

보상으로 받을 대가는 이 일을 초래한 진혼의 목숨이었다.

‘그걸 얻는 시기는…….’

투명한 눈을 빛내며 마음을 한쪽으로 정하려는 순간.

상대가 입을 열었다.

“말씀이 없으시네. 혹시 제가 인사를 간략하게 드려서 토라지신 건 아니죠?”

“…….”

토라지다니?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 바로 말을 못 하는데.

진혼이 어깨를 으쓱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결례를 범했네요. 이번엔 제대로 드릴게요.”

“…….”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었다.

진혼이 악귀상(惡鬼像)들 중 하나에 다가가더니 목을 수도로 쳤다.

서걱-

칼로 종이를 베는 듯한 소리가 나며 악귀상의 목과 머리가 깨끗이 분리됐다.

진혼은 그 머리를 양 손바닥에 끼웠다.

손에서 검은 불길이 일어나 돌을 깎아 만든 머리가 마치 나무로 이루어진 것처럼 불타올랐다.

마혼으로 일으킨 겁화(劫火)였다.

진혼은 흑염(黑焰)에 휩싸인 머리를 위로 던졌다.

그것은 천장에 난 구멍으로 빠져나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정점에 이르러 멈추며 검은 태양처럼 빛날 때.

진혼은 싱긋 웃으며 두 손을 정중히 모았다.

“만세만세만만세! 위대한 교주님의 은덕이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높은 곳에서 천하를 두루두루 비추길 빌어요!”

너무 커서 밖에서도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천마궁 바깥에 있던 구경꾼들은 귀를 찌르는 익숙한 음성과 하늘에 떠오른 불덩이를 보며 전율했다.

“저, 저쯤이면 천마전에서 던진 것 같은데?”

“맞아! 천마전에 있는 악귀상의 머리야! 한 번 본 적 있어! 진혼이 해냈구나!”

“도, 돌을 불태우는 검은 화염이라니! 혹시…… 마혼?”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그분의 마혼을 계승한 건 교주뿐인데?’

‘진혼 역시 그분을 계승한 건가?’

‘단순한 후인이 아니라 진체를 물려받은 계승자였다니!’

너무 놀라면 오히려 조용해지기 마련.

사람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추락하는 검은 태양을 쳐다봤다.

천마전 내부도 쥐 죽은 듯 조용했으나.

변화가 일어났다.

검은 태양이 바닥에 깔린 검붉은 화강석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나며 폭음을 토했다.

콰아앙!

돌가루가 비산하며 사방이 뿌예졌다.

반면 연휘준의 흐렸던 마음은 뚜렷해졌다.

정광이 빼도 박도 못할 수를 쓴 덕분이었다.

‘그래, 그쪽이 맞아.’

왜 교주가 되려 했고 마침내 해냈는가?

무엇을 목표로 살아왔고 그것을 위해 생을 연장하려고 까지 하는가?

모두 ‘그’를 넘어서기 위해서였다.

‘이놈을 지금 죽이면 그가 드리운 그늘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어.’

먼저 ‘그’의 후예부터 당당히 싸워서 죽인다.

그리고 생을 늘린 뒤 ‘그’의 경지에 도전한다.

그래야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연휘준의 눈이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변했다.

그 기이한 눈으로 자신의 삶을 내리누르고 있는 악마의 핏줄을 노려봤다.

“사흘 후, 대연무장이다.”

악마가 하얗게 웃었다.

“존명.”

정광은 천마전에서 나오자마자 신법을 펼쳤다.

사흉대가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으나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천마궁 밖에 모여 있는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정광은 대붕처럼 날아올라 그들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신전이 있는 방향으로 질풍처럼 달렸다.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 *

‘늦었군.’

마뇌는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일반 교도들이 전부 천마궁으로 몰려간 건 아니었다.

총단 곳곳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한 자들도 꽤 있었다.

조용한 곳에 있다가 돌아가는 꼴을 보고 움직이면 되지, 괜히 갔다가 신분이 높은 자에게 잡혀서 불을 끄는 고생을 하기 싫어서였다.

화마가 창궐하지 않는 지역 중 대표적인 곳이 신전.

벌써 많은 이들이 그 주변에 모여 먼 곳에서 넘실거리는 화마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마뇌의 표정이 음침해졌다.

‘그래도 상관없어.’

보는 눈이 많다고 일을 못 벌일 것이었으면 이렇게 오지도 않았다.

명분이야 만들기 나름.

다소 어설픈 것이라도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며 일을 끝내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었다.

마뇌는 진혼의 얼굴을 떠올리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총단이야 그렇다 쳐도 천마궁에까지 불을 질러?’

연휘준이 가만히 있을 리 있나.

지금까진 진혼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으나 반드시 죽이려고 할 것이다.

‘두 놈이 양패구상하면 좋을 텐데.’

금세 실소가 나왔다.

헛된 기대였기 때문이다.

진혼이 아무리 강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연휘준에게 상처를 입히긴커녕 사흉대를 돌파해 천마전에 이르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진혼의 곁가지부터 쳐낸다.’

다음 차례는 사갈(蛇蝎)보다 음험한 놈, 은혜를 원수로 갚은 연휘준이었다.

마뇌는 자신의 거처에 있는 이들과 직속 무력대의 전력을 가늠했다.

‘승산이 없지는 않아.’

머뭇거리다간 연휘준에게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할 수도 있었다.

곤륜산으로 출정하겠다고 선언했으니 교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당장 그러지는 않을 테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가만히 있다가 당할 바엔 선수라도 쳐봐야지.

마음을 정하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가볍게 손짓하니 그를 호종하던 시랑대(豺狼隊)가 일제히 외쳤다.

“모두 길을 여시오! 마뇌께서 오셨소이다!”

“……!”

일반 교도들의 시선이 마뇌 무리에게 집중됐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노물이 이곳에 무슨 일로 온 거지?’

‘직속 무력대를 끌고 온 걸 보면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헉! 저자들은!’

의외의 인물이 둘이나 있었다.

고리눈에 풍채가 좋은 노인과 눈에 백태가 끼고 허리가 잔뜩 굽은 노인이었다.

‘광명좌사자(光明左使者) 은호정!’

‘광명우사자(光明右使者) 우경환까지! 대체 왜?’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사람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나 길을 열어줬다.

마뇌는 수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길을 위풍당당하게 걸었다.

그리고 신전 앞에 이르자 멈춰 섰다.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확실히 나이를 속일 순 없군.’

마뇌는 힘 있게 걸어서 거칠어진 호흡을 다스리며 신전을 물끄러미 봤다.

그보다 훨씬 낡은 신전이 묘하게 크게 보였다.

‘시간이 흐르며 의미가 많이 퇴색되긴 했으나 천신이 직접 지은 신전이라 이건가?’

다른 교도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허나 마뇌에겐 웃기는 일이었다.

‘이미 늦었어.’

신권(神權)을 탐한 지 오래고 한등민가(汗騰閔家)를 주물러서 입맛에 맞는 성녀를 세우려고까지 했는데 무슨.

마뇌는 문을 주시하며 나직이 명했다.

“시작해라.”

“존명.”

시랑대주(豺狼隊主)가 내공을 끌어 올려 외쳤다.

“마뇌께서 오셨소! 신관은 문을 열고 나와 맞이하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전 문이 열리고 신관 한 명이 나왔다.

등현이었다.

그는 마뇌에게 정중히 예를 표하며 용무를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교우님.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빤히 알면서 묻기는.

마뇌는 빙그레 웃으며 인사했다.

“제사장, 소교주 책봉식 때도 느꼈는데 신수가 훤해졌군.”

등현은 침착하게 부정했다.

“십 년 임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물러난 지 오래입니다. 여느 신관처럼 대해주십시오.”

“그야 어려운 바가 아니네만. 왜 후임을 세우지 않는 건가?”

등현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빤히 알면서도 묻는 모습에 분노해서였다.

‘그대 때문이라고 듣고 싶은 것인가?’

신전을 이끄는 건 성녀지만 실무를 보는 건 제사장이다.

마뇌가 은근히 신권까지 탐하는 상황.

제사장을 새로 세우면 그자가 누구든 간에 마뇌의 입김이 닿을 것이기에 막는 것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말할 수야 있나.

공손히 대답했다.

“부끄럽지만 적임자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저런. 신관들의 믿음이 갈수록 약해지는가 보군.”

마뇌는 혀를 끌끌 차다가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천신께서도 외면하신 건가. 신전에서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네.”

“안 좋은 일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마뇌의 음성에 힘이 들어갔다.

“불온한 무리가 신전을 겁박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이 있나. 죄인들을 잡아들이러 왔으니 비키시게.”

“…….”

누가 누구를 겁박하고 있는지.

불온한 무리는 그 말을 내뱉은 본인과 수하들 아닌가?

등현은 주먹을 슬며시 움켜쥐고 반박했다.

“계속 신전에 있었는데 금시초문입니다. 어디서 그런 허언을 들으셨는지는 모르나…….”

그때.

“으아악!”

턱이 뾰족한 신관이 등현을 밀치고 뛰어나왔다.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목소리도 처절했다.

“마, 마뇌 어르신! 여, 역도들이 신전에서 살육을 벌이고 있습니다! 저희를 구해주십시오!”

“……!”

구경꾼들은 모두 경악했다.

신전에서 살육이 벌어지다니!

천마신교 역사상 이런 참사가 있었던가?

등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반박하려고 했으나 마뇌가 더 빨랐다.

득의양양한 얼굴로 신전에 진입할 것을 명했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들어가서 신관들과 성녀를 구원…….”

마뇌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신전 안에서 의외의 인물들이 나와서였다.

교주의 아들이자 아극소연가주인 연혁소.

그리고 전 도올대주이자 현 호교당 삼향주인 곽상이었다.

이번엔 마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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