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28화
천위(天爲)와 인위(人爲)
정광은 옛집인 천마전(天魔殿)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지붕에 불이 붙었다가 꺼진 흉물스러운 형상을 보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화시(火矢)를 많이 쏴서 아예 전소시켜 버릴 걸 그랬나. 들어가기 더 편했을 텐데.’
그래도 천마궁(天魔宮)에서 유일하게 예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니 지금이 더 나을지도.
그때, 막 내디디려는 땅바닥이 갑자기 꺼졌다.
기관 장치가 발동된 것이다.
정광은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도약했다.
비조(飛鳥)처럼 허공을 날며 슬쩍 내려다보니 푹 꺼진 바닥에서 수많은 단창들이 세차게 솟구치고 있었다.
동시에 전면의 바닥이 연이어 사라졌다.
그곳에서도 단창들이 쏘아질 터.
첫 번째 함정을 뛰어넘어 착지하게 해놓고 연이어 공격하는 무서운 기관 장치였다.
하지만 상대는 정광이었다.
‘쓸데없는 돈지랄을 하다니.’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허나 현생의 사문인 곤륜파에는 이런 상황에 딱 맞는 절기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 있지 않은가?
물론 그걸 쓸 생각은 없었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나는 나야.’
이곳은 천하마도의 종주 천마신교였고, 본인은 천마신교의 지배자 진천마였다.
장소와 신분에 맞게 가야 했다.
참새 무리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대붕(大鵬)의 방식으로.
정광은 대붕처럼 양팔을 활짝 펼쳤다.
장자(莊子)는 소요유편(逍遙遊篇)에서 붕(鵬)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번 날면 하늘을 뒤덮는 구름과 같고, 날갯짓하면 삼천리를 날며 구만리를 올라가 여섯 달을 날고 나서야 비로소 쉰다.]
세상 모든 것에는 선악이 있듯이, 붕 중에도 악에 물든 마붕(魔鵬)이 있기 마련.
보통 붕도 그렇겠지만 마붕은 더더욱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할 수밖에.
방향을 바꿔 피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정광은 천신혁련가(天神赫連家)의 비기를 펼쳤다.
마붕비천(魔鵬飛天) 제이식 붕정만리(鵬程萬里).
활짝 펼쳤던 양팔을 날갯짓하는 것처럼 뒤로 쳐냈다.
화아아악-
검은 화염에 휩싸인 정광의 신형이 놀라운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흑염(黑焰)으로 화한 마혼이 불태우고 지나간 허공을 기관 장치가 쏘아낸 단창들이 간발의 차이로 꿰뚫고 지나갔다.
그렇게 정광은 모든 함정을 일직선으로 돌파한 뒤 바닥에 착지했다.
대붕이 잠시 내려앉아 속세를 구경하는 것 같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 순간, 땅속에 은신하고 있던 자들이 동시에 튀어나와 파도처럼 몰려왔다.
손에 쥔 병기마다 알록달록하게 번들거리는 것이 극독을 바른 게 틀림없었다.
정광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응했다.
광룡참파(狂龍斬波).
검집 속에 웅크리고 있던 만마(萬魔)가 현세로 나왔다. 마혼이 깃들어 검게 이글거리는 검신으로 파도를 참했다.
촤아악-
인(人)의 파도가 깨끗이 갈라졌다.
마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핏물을 쏟아내며 허물어졌다.
붉은 피가 아니라 검은 피를.
애초에 암습이 실패하면 독혈(毒血)로 죽이려고 한 것이다.
엄청난 양의 독혈이 후각이 마비될 것 같은 악취를 풍기며 정광에게 쏘아졌다.
정광의 눈썹이 꿈틀했다.
애써 잊고 있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청해성주의 아내가 만들었던 요리가 이런 냄새였지.’
그때도 안 먹었는데 지금 날아오는 것들을 맞을 이유가 있나.
독의 상극은 불.
정광의 왼손에서 마혼의 불길이 격하게 일어났다.
화르르-
그 손을 주먹 쥐고 허리에 붙였다가 강하게 내질렀다.
후우웅-
폭열권(暴熱拳).
극도로 달아오른 검은 불길이 날아가 독혈과 충돌했다.
콰아앙!
검은 불길이 독혈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며 폭발했다.
그 열기와 충격이 주변으로 퍼져서 다른 독혈에 닿아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폭음이 이어지며 뿌연 독연(毒煙)이 시야를 가렸다.
정광은 호흡을 멈추고 독연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전륜보(轉輪步)를 밟아 신형을 세차게 돌렸다.
근력으로 일으킨 원심력에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더해 뇌격검(雷擊劍)을 펼쳤다.
벼락이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만마에서 수평으로 쏘아졌다.
그 일격이 독연을 뚫고 쇄도한 마령강시 두 구를 휩쓸었다.
콰자작!
허리가 절반쯤 잘린 마령강시들이 달려들던 속도보다 빠르게 튕겨 나갔다.
뒤따라 오던 마령강시 두 구가 놈들과 부딪쳐 나동그라졌다.
짧지만 거칠었던 충돌의 여파로 허공을 메우고 있던 독연이 저 멀리 밀려났다.
덕분에 방립(方笠)을 눌러쓴 마령강시들이 거세게 밀려오는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정광은 참았던 호흡을 다시 시작하며 이녕(伊寧)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전에 해치웠던 호경과 관태보다 약한 놈은 없는 것 같네.’
움직임도 그렇고 손맛도 그랬다.
그 증거로 두 동강 내긴커녕 반밖에 못 자르지 않았는가?
놈들은 빠르고 단단했다.
‘그때 사용했던 도보다 지금 쓰는 검이 나으니 피장파장인가.’
고이륵단가에서 얻었던 귀도(鬼刀)와 달리 이녕임가가 제작한 만마는 검신이 멀쩡했다.
정광은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귀종보(鬼從步)를 밟았다.
두 개의 손과 한 개의 무릎이 정광이 남긴 잔영을 잔인하게 찢어발겼다.
정광은 마령강시들 틈을 귀신처럼 비집고 들어가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십 구라니. 너무 많아.’
잠깐이라면 모를까, 끝까지 돌파하는 건 무리였다.
금세 포위당해 발이 묶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실력이나 확실히 파악해 볼까.’
치열한 격전이 시작됐다.
정광은 정신을 집중하고 싸움에 임했다.
좌측에서 날아온 주먹을 신형을 틀어 피했다.
천령개로 떨어지는 수도는 옆으로 움직여 흘린 뒤 만마를 휘둘렀다.
콰직!
마령강시의 상박이 거의 쪼개져서 덜렁거렸다.
왼손으로 아예 잡아 뽑은 뒤 붕혼각(崩魂脚)으로 옆구리를 걷어찼다.
쾅!
포탄처럼 날아가는 놈은 신경 쓰지 않고 왼손에 쥔 놈의 팔을 단창으로 삼아 주먹을 날렸던 마령강시에게 내질렀다.
끝이 뾰족하게 잘린 뼈가 쇠기둥처럼 단단한 목을 꿰뚫었다.
콰악!
그 충격으로 마령강시가 쓰고 있던 방립이 벗겨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그다지 좋은 기억이 있는 놈은 아니었다.
정광은 내심 혀를 찼다.
놈의 정체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으나 다른 이유가 더 컸다.
‘하여간 이렇다니까.’
사람이면 바로 절명했을 것을.
목이 뚫린 마령강시의 얼굴이 급격히 확대됐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밀고 들어온 것이다.
허나 정광이 더 빨랐다.
특별한 초식을 쓴 건 아니었다.
마령강시의 사타구니를 시원하게 올려찼다.
뻐엉!
놈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며 목에 박혀있던 다른 녀석의 팔이 자연스레 뽑혔다.
정광은 그것을 횡으로 휘둘러 뒤에서 덮쳐오던 마령강시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방립이 먼저 박살 나고.
까앙!
꽤 강한 놈인지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머리통이 반쯤 우그러진 상태.
정광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하면 누군지 모르니 좀 낫네.’
굳이 마령강시의 얼굴을 보고 싶진 않았다.
기분만 더 더러워질 것이고 호경과 관태에게 했던 것처럼 저승길에서 노잣돈으로 쓰라고 돈을 주기엔 숫자가 너무 많아서였다.
기이하게 구부러져 쓸모없어진 마령강시의 팔을 버리고 만마도 검집에 넣었다.
상체를 재빨리 숙여서 다른 녀석의 공격을 피한 뒤 머리가 망가져 비틀거리는 놈의 발목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들어 올려 거칠게 휘둘렀다.
마령강시의 가볍지 않은 무게와 단단한 몸.
거기에 정광의 완력과 회전력이 더해지니 훌륭한 결과가 나왔다.
이이제이(以夷制夷)가 따로 있나.
콰콰콰쾅!
마령강시와 충돌한 마령강시들이 튕겨 나갔다.
정광은 놈을 계속 휘두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돌파하는 건 힘들어.’
가능하다 해도 많은 타격을 받게 되리라.
철혈무쌍용갑이 아무리 단단해도 충격조차 막아주는 건 아니었다.
‘체력과 내공도 많이 낭비하게 될 거고.’
노상 반점에서 마뇌와 내기를 했을때처럼 신법을 펼쳐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땐 반점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규칙이었기에 마령강시들이 더 이상 쫒지 않았으나 이번은 다르지 않은가?
‘연가 놈이 척살령을 내렸다고 했지.’
아까 죽인 궁기대주가 분명 그렇게 외쳤었다.
그렇다면 마령강시들에게도 똑같은 명을 했을 터.
놈들을 훌쩍 뛰어넘어도 끝까지 따라오리라.
‘그러다 뒤를 잡히느니 지금 고생하는 게 나아.’
그렇다고 자신만 고생할 생각은 없었다.
마령강시를 계속 휘두르며 애초 계획대로 역천경(逆天鏡)을 불렀다.
-뭐 해, 인마. 빨리 일어나서 일하지 않고.
마령강시는 죽은 이에게 사기(死氣)를 극도로 응축시켜 넣어서 생을 불어넣은 존재.
역천경을 부려서 사기를 흡수하게 하면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역천경은 정광의 품속에서 진저리를 치며 거부했다.
-우웅! 우웅!
-쓸모없는 놈 같으니. 측간에 빠트리는 게 나으려나. 평생 거기서 똥독이나 실컷 빨아먹어라.
-……!
천하에 이런 악랄한 새끼가 있나!
사람이 아니라 악귀 그 자체 아닌가!
-마지막 기회다. 할 거지?
역천경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웅! 웅!
-큰 활약을 못해도 괜찮아. 길은 여러 개니 하나씩 두드리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
역천경은 작은 감동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그래도 한 번에 가는 게 좋지 않겠어? 여러모로 피곤하잖아.
-…….
역천경은 커다란 위협을 느끼고 어떻게든 해내겠노라 결심했다.
그 효과는 놀라웠다.
우우우우웅-
역천경이 거칠게 진동하며 마령강시들이 흘리는 사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정광이 휘두르고 있던 마령강시가 제일 먼저 영향을 받았다.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푸르딩딩했던 피부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졌고, 단단했던 몸은 다른 마령강시들보다 약해져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부서져갔다.
정광은 효용을 다한 놈을 던지고 두 손을 매만졌다.
-잘한다, 천경이. 배 터질 때까지 빨아먹어.
-우욱.
-뭐?
-웅! 웅!
역천경은 죽어라 사기를 흡수했다.
정광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상단전 인당(印堂)을 열어 주변에 떠도는 자연지기(自然之氣)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마혼을 회수해 중단전 옥당(玉堂)에 봉인한 뒤 옥당의 성질을 중용(中庸)의 도(道)로 이끄는 것과 동시에 항마토납술(降魔吐納術)의 구결로 호흡하여 하단전 석문(石門)을 열었다.
그리고 들숨에 실려 들어온 자연지기가 석문에 쌓이기 직전, 날숨을 내뱉으며 끌어올려 양손에 담았다.
호경과 관태를 영면(永眠)에 들게 한 반쪽짜리 운용법이었다.
허나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귀곡자를 치료하며 쌓아온 경험이 자연지기를 전보다 능숙하게 사용하도록 만든 것이다.
‘좋아. 간다.’
정광은 바로 신형을 날리며 쌍장을 뻗었다.
자연지기가 깃든 장력에 맞고 날아간 마령강시 두 구가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쳤다.
놈들이 품은 사기(死氣)에 자연지기가 머금은 생기(生氣)가 침투한 결과였다.
정광은 만족했다.
호경과 관태에게 했던 것처럼 꾸준히 밀어넣은 건 아닌지라 끝을 보진 못했으나 한동안이라도 무력화시킨 게 어딘가?
더구나 역천경이 마령강시들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상황.
자연지기로 발을 묶고 마혼을 불러내 처단한다.
극도의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으나 행하면 행할수록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서로 모자란 점을 보완해주는 느낌까지 들 지경.
이론상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자연지기는 하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천위(天爲)요, 마공은 사람에 의한 조작으로 만들어진 인위(人爲)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으나 천위와 인위가 함께 하는데 무엇이 막아설 수 있으랴.
거칠 것이 없었다.
마령강시들도 정광을 거세게 공격했으나 피해는 입힐지언정 쓰러뜨릴 능력은 없었다.
혈투가 계속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정광 홀로 우뚝 섰을 때.
천마전을 둘러싸고 있던 적혼대(赤魂隊)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 돼. 마령강시들이 오십 구나 있었는데 단신으로 전부 해치우다니.”
“왜 갑자기 느리고 약해졌지? 장법 한두 대 맞았다고 괴로워하고.”
“사술(邪術)이다. 저건 사술일 수밖에 없어.”
새로 얻은 장난감의 묘용에 즐거워하던 정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여간 약한 놈들이란. 제 놈들이 못하는 건 다 사술이야.”
적혼대주가 정신을 차리고 분노를 토했다.
“네 이놈! 왜 갑자기 말투가 그따위냐?”
“…….”
왜긴.
원래 이랬고 내 마음이지.
정광은 자연지기를 쏟아냈던 왼손을 보다가 마혼을 부렸던 오른손을 봤다.
‘역시 손맛은 이쪽이 나아.’
오른손에 든 만마로 적혼대주를 겨눈 뒤 까딱거렸다.
“가기 귀찮으니까 와. 빨리 끝내자.”
적혼대는 연휘준이 고르고 골라 뽑은 정예.
정광에게 두려움을 품었으나 투지를 잃지는 않았다.
적혼대주가 내공을 끌어 올리며 명했다.
“쳐라!”
정광도 마혼을 개방해서 지옥의 겁화(劫火)처럼 새카만 마기를 불태웠다.
“잘 가.”
검은 화염을 쏟아내는 폭풍이 적혼대를 휩쓸었다.
* * *
연휘준은 묵묵히 문을 쳐다봤다.
정광이 천마전 문을 열고 들어와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연휘준은 보좌에 앉은 채로 정광을 노려봤다.
그의 눈에는 진득한 살기와 짙은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대단하군.”
“별말씀을.”
연휘준은 정광을 유심히 뜯어보며 감탄했다.
“보의를 입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렇다 해도 그 정도 피해만 보고 이곳에 이르다니. 훌륭하다.”
정광의 옷은 넝마가 된 지 오래고 철혈무쌍용갑은 여러 곳이 찌그러져 있었다.
작지 않은 내상도 입은 상황.
허나 정광은 내색하지 않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했다.
“뭐 대단한 거라고 그러세요. 이 정도쯤은 해야죠.”
“…….”
연휘준의 눈에 맺힌 살기가 짙어지고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래, 본좌를 상대하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