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98화 (497/569)

2부 227화

오랜만에 보니 나쁘지 않네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으로 싸우다가 영광스럽게 산화하는 삶을 바랐던 고노진.

그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건 적의 무위에 경악해서도 죽음이 원통해서도 아니었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최후를 당당히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정광은 전생에 들었던 그대로 고노진이 일말의 후회조차 남기지 않고 떠나는 모습을 머릿속에 새겼다.

자연히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녀석. 약조를 지켰어.’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 힘든 걸 제대로 해냈으니 기특할 수밖에.

‘다른 애들은 어떨까?’

은근히 품었던 기대감을 확실히 보상받았다.

도올대원들은 먼저 가버린 전우와 똑같은 눈으로 달려들었다.

‘좋아.’

겉으로는 티를 안 냈지만 내심 기꺼웠다.

끝까지 신념을 지킨 고노진에게 그랬듯이 다른 도올대원들에게도 똑같은 예우를 해줬다.

오직 교주의 명에만 절대복종하며 공통된 신념으로 삶을 불사르는 그들에게 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은혜였다.

일격필살(一擊必殺).

고통 없이 보내줬다.

애초의 목적과도 부합되는 일이었다.

최소한의 피로 최대 효과를 얻는다.

촌각도 지체하지 않고 단숨에 돌파했다.

그 대가로 몇 군데 칼을 맞았으나 이 정도쯤이야.

정도제일(正道第一) 철혈장의 철혈무쌍용갑이 정광을 보호했다.

마도제일(魔道第一) 이녕임가의 만마는 도올대를 방패로 세우고 화원으로 물러나 재정비하려던 마인들을 휩쓸었다.

그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천하의 그 어떤 싸움이든 간에 퇴각할 때 받는 공격이 제일 치명적이기 마련.

교주의 화원을 짓밟으면서까지 태세를 정비하려고 했건만 벌써 따라잡힐 줄이야.

믿고 있던 도올대가 뚫리고 급습을 당하자 사흉대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여기저기서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놈이 보의를 입고 있다! 염두에 두고 쳐라!”

“검도 보검이야! 함부로 충돌하면 안 돼!”

지당한 말이었으나 그걸 알면 뭐 하나.

그것들을 걸치고 휘두르는 상대는 평범한 경장을 입고 녹슨 박도(朴刀)를 써도 천하를 굽어볼 수 있는 무인이었다.

마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일거에 돌파당한 도올대가 즉시 반전하여 진에 합류했으나 이미 늦은 상황.

검은 불길로 화한 마혼(魔魂)이 주인을 압박하는 마기와 살기를 불살랐다.

만마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마인들의 육신이 분리됐다.

거기에 권장지각(拳掌指脚)까지 더해져 머리통을 터뜨리고 심장을 잡아 뽑는데 어찌 막으랴.

어떤 수단을 써도 멈출 수 없었다.

전진, 또 전진.

정광은 거대한 파도였다.

그 해일에 휩쓸린 마인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 한 채 죽어갔다.

그들의 신체에서 쏟아져 나온 붉은 피와 투명한 뇌수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높이가 약 이천삼백장(二千三百丈)에 달해 사시사철 새하얀 만년설로 뒤덮인 탁목이봉(托木爾峰).

그 정상에 있는 천마신교 총단은 얼마나 추울까.

허나 화원은 그 추위를 이기고 피어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기화요초(琪花瑤草)들로 가득했다.

매화, 군자란, 수선화, 동백꽃 등 수많은 꽃이 사람의 피와 뇌수를 맞아 요사스러운 생기를 발했다.

그만큼 마인들의 생기는 빠져나갔다.

안간힘을 써가며 사흉절멸대진(四凶絶滅大陣)에 변화를 주던 궁기대주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자 악독한 표정을 지으며 명했다.

“구(救)! 산(散)! 투(投)!”

사흉대는 천마신교 최강 무력대다웠다.

화재를 진압하고 있던 자들이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일제히 달려왔다.

진을 이루고 있던 이들은 동료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데도 굴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산개했다.

그렇게 투척할 거리를 확보하고 갖가지 암기를 던졌다.

적에게 피해를 줄 수만 있다면 동료가 휩쓸려도 개의치 않는 악랄한 수였다.

하지만 정광이 몇 수는 더 악랄했다.

우드득!

“끄아악!”

만마를 검집에 넣고 파골금나수(破骨擒拿手)로 마인들을 닥치는 대로 제압한 뒤 방패로 삼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고슴도치처럼 변해 버렸다.

사천당가 무인이면 모를까, 마인들이 암기가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암기의 비가 멎었다.

정광은 임무를 다하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들을 사방으로 던져 마인들이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품속에 손을 넣어 화섭자를 꺼냈다.

‘천마궁에 화원이라니. 역시 내 취향이 아니야.’

차라리 기암괴석(奇巖怪石)을 모아놓고 독연(毒煙)을 피우는 게 어울리지, 꽃은 무슨.

여기 눌러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그간 정을 쌓은 섬랑을 위해서라도 정리해 주는 게 나았다.

“후우.”

입김을 가볍게 불어서 불씨를 키운 뒤 바닥에 떨어뜨렸다.

울분에 찬 마인들이 병기를 꼬나쥐고 동귀어진할 각오로 달려드는 그 순간.

마보(馬步)를 취하고 두 손바닥을 가슴 앞에 모았다.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 올리자 마혼이 화답하여 양손에서 검은 불길을 토해냈다.

쌍장을 아래로 뻗으니 그 불길이 날아가 바닥에 있는 화섭자를 터뜨렸다.

화아아악-

화섭자가 품고 있던 불씨가 검은 불길과 만나자 거대한 화마(火魔)로 변했다.

정광은 제자리에서 신형을 맹렬히 회전시키며 양 손바닥을 연달아 내질렀다.

선풍마장(旋風魔掌).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쌍장과 이어진 화마가 그 바람에 실려 팔방으로 질주했다.

꽃들이 듬뿍 머금고 있던 인간의 정혈과 뇌수가 순식간에 기화하여 사라졌다.

화원에서 정광이 서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이 불바다가 되어 마인들을 덮쳤다.

마인들이 경악하며 분분히 외쳤다.

“어서 피해!”

“이깟 불 따위 날려 버려!”

대부분 급히 피했으나 오기로 맞서는 자도 있었다.

장력을 쏟아내거나 병기를 휘둘러 불길을 밀어내려 했다.

허나 선풍마장으로 날려 보낸 화마는 선풍 그 자체였다.

흩어버려도 세차게 밀려와 마인들을 단숨에 휩쓸었다.

“으아악!”

“빌어먹을! 피하라고 했거늘 쓸데없는 고집을!”

그 대가는 참혹했다.

붉은 불길이 솟구치고 시커먼 연기가 퍼졌다.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옥이 따로 있나.

그야말로 아비규환인 상태.

반면 불바다에 갇힌 정광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정면을 응시하며 검집에 넣었던 만마를 다시 뽑았다.

그것에 마기를 불어넣고 높이 치켜들었다가 강하게 내려쳤다.

폭렬마검(爆裂魔劍) 제오초 태산압란(泰山壓卵).

시장통에서 행패를 부리는 악소(惡少)들조차 쓸 줄 아는 태산압정(泰山壓頂)이라는 초식과 이름도 형식도 비슷했으나 위력은 천지 차이였다.

태산 같은 진천마의 위엄 앞에선 드넓은 천하도 보잘것없는 알 같은 존재일 뿐.

화아악-

만마에서 쏘아진 웅혼한 검기(劍氣)가 절대자의 앞을 가로막는 불길을 갈랐다.

모든 걸 집어삼킬 기세로 몸집을 불리던 화마가 진천마의 명에 복종하며 좌우로 물러났다.

그러자 폭이 일장쯤 되는 새카맣게 탄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범부가 도주하는 혈로(血路)가 아니었다.

마도의 종주가 옛집으로 귀환하는 통로가 열린 것이다.

정광은 그 길을 오연히 걸었다.

마인들은 불길 너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전신을 떨었다.

약관 정도밖에 안 되는 청년이 저런 신위를 보이다니.

마치 전대 교주의 재림 같지 않은가?

더 이상 항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정광은 발걸음을 옮겼다.

길 끝에 홀로 서 있는 땅딸막한 노인을 주시하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사흉대를 지휘하는 궁기대주.

불길을 가른 검기에 베였는지, 그는 어깨를 지혈한 뒤 구겸창(鉤鎌槍)을 고쳐 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눈동자도 목소리도 떨렸다.

“어, 어떻게 사흉절멸대진을 속속들이 알지? 마혼과 무공도 그렇고. 서, 설마 전대 교주의 모든 걸 물려받고 통달한 것이냐?”

그럴 리가.

물려받은 게 아니라 원래 갖고 있던 것들인데 쓸데없는 소리를.

정광이 대꾸를 안 하자 궁기대주의 눈에 혈광이 맺혔다.

그의 입에서 자존심과 조바심이 뒤섞인 외침이 흘러나왔다.

“네 이놈! 네놈이 아무리 뛰어나도 마령강시들을 이길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면 교주께서 은혜를…….”

“더러워라.”

“……무어라?”

궁기대주의 의문에 정광은 행동으로 답했다.

곧장 정면으로 쇄도해 만마를 내려쳤다.

“……!”

궁기대주는 어느새 뇌리에 새겨진 공포심 때문에 감히 맞받아칠 엄두를 못 냈다.

혈교보(血蛟步)를 밟아 옆으로 피하며 구겸창으로 포호마창(咆號魔槍)을 펼쳤다.

거리를 둬서 병기의 이점을 철저히 살리려는 것이다.

허나 이는 크나큰 패착이었다.

정광이 그런 수를 예상 못 했을 리 있나.

궁기대주의 성정과 무공 또한 전부 아는데.

더구나 그의 심신은 정상이 아닌 상황.

속도도 변화도 위력도 부족했다.

정광은 바로 허초를 거두고 신형을 돌렸다.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던 만마가 검은 불꽃을 토하며 급격히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궁기대주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럴 수가!’

구겸창은 정광의 겨드랑이를 스쳐 지나가고 만마는 궁기대주의 양팔을 잘랐다.

서걱-

“끄윽!”

궁기대주의 입이 살짝 열리며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육체적 고통 때문이 아니라 너무 쉽게 당해서 생긴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내, 내 무공을 알아? 마음도 읽은 거고? 그렇다면…….’

궁기대주는 생각을 끝맺지 못했다.

만마가 그의 가슴을 뚫고 들어가 등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가슴의 상처는 좁았으나 등은 어린아이 머리 크기만큼 터져 나갔다.

퍼억!

“……!”

심장이 터지며 등에서 핏물이 뿜어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광의 왼손이 궁기대주의 머리칼을 낚아채고 오른쪽 무릎은 복부를 올려 쳤다.

산이라도 부술 것 같은 일격.

퍼엉!

“우웨엑!”

인내심 따위로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궁기대주의 입에서 핏물과 토사물, 내장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속삭였다.

“예나 지금이나 말하는 게 더럽더니 입에서 나오는 건 다 그렇네.”

“……!”

그래, 그래야 말이 되지.

궁기대주는 그제야 확신했다.

“교, 교…….”

정광은 궁기대주를 꿰뚫고 있던 만마를 뽑은 뒤 그의 입속에 넣고 휘저었다.

혀가 잘리고 이빨이 조각났다.

궁기대주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눈물만 줄줄 흘렸다.

정광은 만족했다.

“진작 좀 그러지. 과묵해지니까 얼마나 좋아.”

만마를 회수하고 왼손바닥을 궁기대주의 안면을 향해 내밀었다.

더는 볼 일이 없어서였다.

쇄월광풍장(碎月狂風掌).

콰앙!

달도 부수는 장법을 사람의 머리통이 어찌 견딜까.

궁기대주의 머리가 산산이 조각나며 통째로 사라졌다.

정광은 바닥에 떨어진 구겸창을 주운 뒤 창날 밑에 달린 갈고리를 수도로 가볍게 쳤다.

쨍-

갈고리가 잘리며 구겸창은 평범한 장창이 됐다.

정광은 그 장창으로 궁기대주의 사타구니에서 목까지 꿰었다.

그것을 높이 든 뒤 창 자루 끝으로 땅바닥을 강하게 내려쳤다.

쾅!

창 자루가 바닥을 깊게 뚫고 들어갔다.

정광은 고개를 들어 창에 꿰인 머리 없는 시체를 확인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불바다 너머에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마인들이 보였다.

정광은 그들에게 짧지만 무겁게 경고했다.

“이 깃발을 넘으면 죽는다.”

“……!”

마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들의 수장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시체를 깃발로 삼으며 협박하다니!

하지만 아무도 반발하지 못했다.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려서였다.

정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법을 펼쳤다.

천마궁에서 유일하게 전생과 달라진 점이 없는 전각이 급속도로 확대됐다.

꽤 오랜 세월 동안 집이었던 천마전(天魔殿)이었다.

‘전생엔 지겨웠는데. 오랜만에 보니 나쁘지 않네.’

그렇다고 전부 그대로인 건 아니었다.

정광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우선 천마전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적의인들.

적혼대(赤魂隊)라는 근본 없는 놈들은 기억에 없었다.

그것들 앞에 줄을 지어 서 있는 것들 역시 마찬가지.

알기는 하나 여기 있어선 안 되는 것들 아닌가?

‘마음에 안 들어.’

취향이 이상한 쪽으로 뒤틀린 연가 놈이 헛짓거리를 해서 바꿔놓은 다른 것들은 활활 불타고 있으니 됐고.

마령강시(魔靈僵屍)들.

전생에 폐기한 것처럼 현생에도 그래야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을 꽤 쓰긴 했으나 그 정도쯤이야.

‘그걸 사용하면 돼.’

안 되면 할 수 없고.

길은 여러 개니 하나씩 두드리다 보면 답이 나오리라.

정광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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