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97화 (496/569)

2부 226화

감사하긴 개뿔

구경도 끝났겠다, 슬슬 움직여야 했다.

정광은 마치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화광이 충천하며 매캐한 연기를 퍼뜨리고 많은 사상자가 널브러져 있는 주변 상황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지키는 입장에선 단 한 명에게 돌파당한 것도 크나큰 수치인데 그 꼴을 보고만 있을 리 있나.

이곳저곳에서 몰려온 마인들이 반원을 그리며 막아섰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뒤쪽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길을 막고 뭐 하는 거야? 전부 비켜! 비키라고!”

신경질적인 고함과 함께 정문 통로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무력대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한 무리가 뛰어 들어왔다.

양의 몸에 사람의 얼굴, 머리에 뿔 두 개가 달린 흉수(凶獸)를 상징으로 삼는 도철대(饕餮隊)였다.

천마궁에 화시(火矢)를 쏘는 적들을 잡으러 나갔던 그들이 허탕만 치고 돌아온 것이다.

기분이 무척 안 좋을 수밖에.

누구보다 빨리 들어온 깡마른 노인이 정광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진혼! 총단에 불을 지르는 미친 짓을 해놓고 뻔뻔스럽게 나타났구나! 화시를 날린 놈들은 어디에 숨은 것이냐?”

정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제가 했다는 증거 있어요?”

“……?”

깡마른 노인은 도철대주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인지라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는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걸 깨닫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놈이 감히! 정녕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구나!”

“굳이 그럴 필요 있나요. 벌써 찔끔찔끔 나는데.”

정광은 자욱한 연기를 손바람으로 날리며 말을 이었다.

“증거도 없으시고. 게다가 놈들이라뇨. 제 일행은 전부 신전에 있는데. 거기에서 저 빼고 누가 나왔다고. 빤히 아시면서 터무니없는 모함을 하시네요.”

“이…… 이…….”

“새벽 내내 시끄럽던데. 사방에 화톳불을 피우고 말이에요. 그 불, 아직도 몇 개는 타고 있더라고요. 그것들이 세찬 바람에 밀려 옮겨붙은 거 아니에요? 맞죠?”

“…….”

말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도철대주가 폭발하려는 순간.

정광의 정면에 선 이들 중에서 땅딸막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 격장지계(激將之計)에 넘어가면 쓰나. 그만 진정하게.”

도철대주가 반발했다.

“궁기대주(窮奇隊主)! 하지만 이놈이…….”

궁기대주라 불린 노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교주께서 내게 수장을 맡기셨네. 내 말 못 들었나?”

소리가 크진 않았으나 끈적끈적한 살기가 담긴 음성이었다.

도철대주는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알겠소.”

“고맙네.”

궁기대주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성뿐만 아니라 눈빛에도 살기가 어려 있었다.

“진혼, 이번엔 뭘 꾸미고 있는 것이냐?”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꾸미다뇨?”

“정문을 돌파했으면 곧장 천마전(天魔殿)으로 달리는 게 당연하거늘, 왜 여유를 부리느냐고 물은 것이다.”

궁기대주가 말을 끊고 한 손을 들었다.

정광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고 있던 마인들이 더 조여들고 뒤에 있던 도철대가 합류해 네 겹의 원을 그림으로써 포위망을 완성했다.

그러자 엄청난 마기와 살기가 일어나 정광을 짓눌렀다.

궁기대주의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혔다.

“이렇게 진(陣)을 굳힐 때까지 말이다.”

정광은 팔방에서 압박을 받으면서도 싱긋 웃었다.

왜긴.

이게 더 편하니까 그랬지.

조금 전에 천마궁 정문을 뚫을 때는 이런저런 수법을 사용해 힘을 아꼈다.

덕분에 몸 상태도 좋고 내공도 충분한 상황.

이제 천마전에 진입하기만 하면 됐다.

‘가는 내내 차륜전(車輪戰)에 시달리다가 기진맥진하느니 단번에 뚫는 게 나아.’

화시를 쏜 건 그러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상대할 머릿수를 줄이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사흉대와 마령강시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이었기에 양측을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더구나 이 계책은 지금도 유효하지.’

다수로 소수를 상대하는 제일 확실한 방법은 진이었다.

진이란 오랫동안 합을 맞춰야 하는 건 물론이오, 상황에 따라 한 몸처럼 움직여야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는 것.

그런 제약이 있는 수단을 펼치는 데 이지가 없는 마령강시 따위가 도움이 될 리 있나.

잠깐 풍경을 구경하고 천천히 걷기까지 하자 예상대로 사흉대만 몰려왔다.

마령강시들은 천마전을 지키고 있을 터.

사흉대를 단숨에 돌파해야 놈들을 부수고 연휘준 앞에 설 여력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연휘준과 생사투를 벌일 수 있게 되는데.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천마전에서 나올 때가 문제란 말이지.’

밖에서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증인 노릇을 할 자들을 잔뜩 끌고 왔으니 체면을 많이 따지는 연휘준이 약조를 손바닥 뒤집듯 어길 확률은 낮았으나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 아닌가?

교도들에게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되더라도 눈앞의 화근부터 제거하려고 들 수도 있었다.

정광은 두 손을 매만지며 정신을 집중했다.

‘나름 숨겨둔 한 수가 있으니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시작할 때였다.

쿵.

마기의 압박을 밀어내며 한 걸음 내딛자 궁기대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움직이겠다? 이 진이 무엇인지 알고?”

뭐긴.

사흉절멸대진(四凶絶滅大陣)이지.

쿵!

한 걸음 더 걸었다.

궁기대주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조롱했다.

“왜 갑자기 말을 안 하지? 혀라도 잘린 것이냐?”

그럴 리가.

네가 그렇게 되겠지.

애초에 마음에 안 들던 놈이었다.

전생에 진작 그럴 것을, 지금이라도 잘라주마.

마혼(魔魂)을 개방했다.

녀석은 주위에서 옥죄어 오는 불순한 마기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거세게 솟구쳤다.

정광의 전신을 짙게 물들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칠흑 같은 불길로 화해 넘실거렸다.

마(魔)의 정수로 이루어진 검은 불길이 정광을 찍어 누르던 마기를 잔인하게 불살랐다.

그리고 그만큼 크기를 키우며 일렁였다.

모조리 불태워 삼켜줄 테니 언제라도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정광을 압박하던 마기가 불에 데어 화들짝 놀란 아이처럼 화급히 물러났다.

그리 멀리 가지는 않고 중간에 멈췄으나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적인 광경이었다.

이 압도적인 위용에 사흉절멸대진을 펼치고 있던 마인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저, 저렇게 강하고 순수한 마기를 지녔을 줄이야!’

‘그분의 마혼을 전해 받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 헉! 설마?’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천마신교에서 최초로 진천마(眞天魔)라는 칭호를 받은 혁련후.

그 절대자의 무공을 이은 것과 마혼을 품은 건 완전히 달랐다.

전자는 인연이 있는 후인으로 끝나지만 후자는 진체를 물려받은 계승자인 것이다.

마인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현 교주도 신검에 담긴 마혼을 굴복시켜 받아들이고 전대 교주의 계승자가 되었음을 증명했는데?’

‘또 다른 계승자가 나타났다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다들 술렁거리는 그때, 궁기대주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말투도 하는 짓도 비슷하다 싶더니 역시 그랬었군.’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악귀가 또 나와선 안 됐다.

내공을 끌어 올려 일갈했다.

“사흉대! 정신 차려라! 교주께서 척살령을 내리신 놈이다! 넋 놓고 있다가 뚫리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이냐!”

“……!”

마인들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흉절멸대진을 펼치고도 적을 놓치면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겠는가?

삼엄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저마다 병기를 굳게 잡고 적을 노려봤다.

궁기대주도 마찬가지였다.

들고 있던 구겸창(鉤鎌槍) 자루 끝으로 땅바닥을 강하게 내려치며 명했다.

쿠웅-

“똑똑히 들어라! 생포는 없다! 죽인다!”

마인들이 일제히 화답했다.

“존명!”

궁기대주는 정광을 응시하며 이죽거렸다.

“진혼!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으면 지금 해라!”

정광은 사양하지 않았다.

“혀가 기네요.”

“……무어라?”

“불편하실 테니 잘라 드리죠.”

정광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면으로 쇄도했다.

검은 불길로 화한 마혼이 앞을 가로막는 마기를 새까맣게 불태웠다.

궁기대주가 구겸창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공(攻)!”

네 겹으로 이루어진 원진에서 최전열에 서 있던 혼돈대(混沌隊)가 움직였다.

세 개의 도끼가 정광의 정면과 양 측면에서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정광도 대응했다.

전신을 감싸고 있던 불길이 세 갈래로 갈라져 쏘아졌다.

양손으로 내지른 참마수(斬魔手)와 오른쪽 다리로 펼친 붕혼각(崩魂脚)이었다.

콰창!

“……!”

도끼들이 동시에 박살 나고 그 파편이 주인들의 몸에 박혔다.

즉사했으나 아직 쓰러지지 않은 그들 사이로 기다란 구겸창들이 튀어나와 정광을 꿰뚫으려 했다.

이열에 있는 궁기대의 반격이었다.

정광의 허리춤에 잠들어 있던 만마가(萬魔) 검집에서 빠져나와 구겸창들을 맞이했다.

서걱-

단 일검에 모조리 베어버리고.

사악-

이검에 궁기대원들마저 갈라 버렸다.

삼열에 있던 도철대가 다급히 궁기대원들을 보호하려 했으나 이미 늦은 상태.

정광은 거침없이 전진하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수라혈검(修羅血劍) 제삼초 혈풍개세(血風蓋世).

도철대원들의 목이 일제히 잘리며 그 위에 있던 머리통들이 허공에 떴다.

정광의 놀라운 무위에 대경한 궁기대주가 다급히 명했다.

“퇴(退)! 수(守)!”

진이 일제히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방어에 치중하며 전열을 가다듬으려고 하는데.

정광은 이미 그들의 코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인들이 두 동강 났다.

핏물이 튀어 올라 정광을 덮쳤다가 전신에서 불타오르는 검은 불길에 먹혀 뿌연 안개로 화했다.

정광은 그 안개를 헤치며 또 다른 핏줄기를 끌어냈고 그것들 역시 증발시켜 버렸다.

궁기대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습(襲)!”

정광의 뒤쪽에서 대기하던 마인들이 달려와 병기를 내질렀다.

양 측면에 있던 자들도 마찬가지.

정면에서 맞서던 자들도 혼신의 힘을 다해 반격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정광은 손에 거머쥔 승기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노리는 적보다 더 빨리 전진해 시체의 산을 쌓아갔다.

간혹 적들의 병기가 몸에 꽂혔으나 철혈장(鐵血莊)이 전력을 기울여 제작한 철혈무쌍용갑(鐵血無雙龍甲)을 뚫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분명 타격을 받았으련만.

정광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피로 물든 길을 걸었다.

궁기대주가 진을 아무리 변화시켜도 소용없었다.

정광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렇지, 대체 어떻게!’

‘말도 안 돼! 진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잖아!’

원진을 회전시켜서 대원들을 바꿔가며 차륜전을 펼칠 새도 없었다.

부딪치면 바로 죽어버리는데 그럴 새가 어디 있는가?

사흉절멸대진의 진정한 묘용이라 할 수 있는 마기를 이용한 압박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정광은 세상 그 무엇보다 정순한 악(惡)의 결정체인 마혼으로 불태워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신(魔神) 그 자체였다.

사기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궁기대주도 그랬으나 수장의 책무를 잊지는 않았다.

혀를 질끈 깨물었다.

지독한 쇠 맛이 느껴졌다.

동시에 극심한 고통이 일며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밀려났다.

‘이대로 가다간 뚫린다!’

잠시라도 시간을 벌고 재정비해야 했다.

그 임무를 맡은 자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궁기대주는 마음을 굳히고 외쳤다.

“봉(封)!”

소수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다수의 생명을 건지는 명령.

명을 받은 자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후퇴하고 사열에 있던 자들이 전면으로 나섰다.

임전무퇴(臨戰無退)를 좌우명으로 삼는 불퇴의 무인들.

귀두도(鬼頭刀)를 꼬나쥔 도올대(檮杌隊)였다.

정광은 선두에 당당히 선 건장한 중늙은이를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현생엔 섬랑을 대원으로 삼으려고 한 일조장, 전생엔 도올대 막내였던 고노진이었다.

녀석과 오래전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임전무퇴라는 헛소리 말이야. 그게 그렇게 좋냐?”

“네! 그러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웃기는 소리. 어차피 죽으면 후회할 수도 없잖아.”

“그래도 좋습니다!”

“그래. 원하는 쪽으로 밀어주마. 혹시라도 죽기 직전에 후회해서 원한을 품은 귀신이 되어 나를 찾아오면 안 돼.”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개뿔.

진짜 죽을 순간이 왔는데 무슨.

‘이놈도 곽상처럼 한직으로 보내 버릴 걸 그랬나.’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바라던 대로 해줄 수밖에.

정광은 상념을 흩날리고 신형을 날렸다.

잠시 뒤.

두 눈을 부릅뜬 수급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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