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24화
그게 중요한가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점.
건조한데다 바람도 많이 불었기에 천마궁(天魔宮)은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였다.
천마궁 안에 있는 천마전(天魔殿) 역시 마찬가지.
지붕에 화시(火矢)들이 내려꽂히며 불이 붙었다.
수하들을 지휘하며 화시들을 쳐내던 적혼대주(赤魂隊主)가 대경해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보좌에 앉아 있는 연휘준 앞에 부복했다.
“교주! 천마전 지붕이 불타고 있습니다! 서둘러 꺼야 하니 속하들이 위로 올라가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연휘준은 활짝 열린 문밖으로 보이는 광경을 날카롭게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거라.”
“감사합니다!”
밖에 있던 적혼대원들이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연휘준은 바닥에 엎드린 적혼대주를 내려다보며 스산하게 물었다.
“흉수는 몇 놈이고 화살을 쏘는 위치는 어디냐?”
적혼대주가 입술에 침을 묻히고 재빨리 답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나 숙련된 궁사가 십여 명은 있어야 저렇게 많이 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화시가 날아온 곳은 도철대(饕餮隊)가 쓰는 전각 지붕입니다.”
연휘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거리에서 쐈다고?”
화살이 닿을만한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신궁이 신궁으로 쏘면 가능할까.
헌데 그런 위인이 십여 명이나 있을 거라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적혼대주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급히 대답했다.
“속하도 믿기 어려우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주. 더구나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습니다.”
“이곳 구조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겠지. 심지어 번(番)을 서는 위치조차.”
적혼대주가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그렇습니다. 맨땅에 떨어지는 화시는 거의 없었습니다. 정예 중의 정예들이 촘촘히 지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틈을 뚫고 날아와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천마궁 구조를 아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다는 건 지금 이곳에 적의 세작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연휘준의 눈이 조금 투명해졌다.
‘그건 나중에 밝혀도 돼.’
세작의 정체보다 더 중요한 건 흉수였다.
적혼대주는 십여 명은 되어야 이렇게 화시를 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으나 연휘준의 생각은 달랐다.
‘천하에 그런 수준의 궁사가 흔하진 않지.’
천하마도의 종주임을 자부하는 천마신교에도 신궁이라 할만한 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외부인의 소행일 수밖에 없는데.
‘총단은 그렇게 쉽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검문을 담당하는 자는 호교당 삼향주 곽상이었다.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 무공까지 뛰어난 그가 외부인을 허투루 출입시킬 리 있나.
그래서 계속 그 자리에 두고 부리는 것 아닌가?
‘설령 숨어들어왔다 해도 오래는 못 버텨.’
천마신교 총단은 웬만한 잠행술과 은신술로 활개 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 모든 걸 종합하면, 정문을 통해 당당히 들어올 수 있으나 오래전부터 천마신교에 있던 자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일 수밖에.
‘진혼. 그의 궁술까지 오롯이 이은 것이냐.’
길쭉한 보자기를 등에 메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간 못 보던 걸 챙겨온 게 의아해서 물었더니 등이 허전해서 그런다고 했던가.
그 속에 신궁과 화살이 들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총단에 불을 지른 놈이 누군지도 뻔하지.’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큰 소란이 일어난 상황이면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진혼이 정문을 지키고 있던 곽상을 제압하고 납치해서 일반 교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북천호가(北天扈家)의 진전을 이었다는 흑조라는 자가 방화할 여건이 되는 것이다.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더 강하고 많이 교활해.’
그래.
그의 후인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연휘준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조처했느냐?”
적혼대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철대주가 수하들을 이끌고 흉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전멸당했을 리는 없고. 구원을 요청하는 호각 소리도 없는 걸 보면 흉수가 도망갔나 보군.”
“속하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계속 말해라.”
“마령강시들은 불길을 잡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 천마전을 둘러싼 채 대기하게 했습니다.”
마령강시가 인지하는 명은 한정되어 있었기에 교주가 있는 천마전을 지키게 한 적혼대주의 판단은 옳았다.
“그리고?”
적혼대주가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청했다.
“적은 총단에 불을 지르고 천마궁까지 노리고 있습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역모입니다. 진혼은 주동자이든 하수인이든 간에 이 일과 관련이 있느니 놈을 생포하는 게 아니라 죽이도록 허해주십시오.”
“흐음.”
진혼의 실력이 모자라면 가지고 놀려고 생포하라 명한 상황.
허나 진혼은 기대를 뛰어넘었다.
수하들이 전력을 다하면 어디까지 올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본좌의 대업을 계속 훼방을 놓은 진옥룡이라는 놈이 떠오르는군.’
하지만 그 녀석일 리는 없었다.
진정한 마혼을 지닌 그가 살아 돌아왔다면 모를까, 정공과 마공을 어떻게 동시에 펼친단 말인가?
‘놈. 곧 곤륜으로 가서 죽여주마.’
먼저 간 이들이 보낸 전서응에는 진옥룡이 무리하게 내공을 수련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져 싸움에 참전하지 못하고 있다 들었다.
그런 놈의 목숨을 거두는 거야 여반장(如反掌).
연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하마.”
“존명!”
적혼대주는 바닥에 머리를 찧고 천마전 밖으로 나갔다.
충천하는 화광에 비친 그의 두 눈이 뜨겁게 이글거렸다.
‘진혼! 어서 와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 * *
정광은 다른 일로 바빴다.
하나같이 흉악하게 생긴 도철대 녀석들이 분노를 토하며 날듯이 뛰어오는 모습이라니.
보자마자 전각 지붕에서 내려와 잠행술을 펼쳐 달렸다.
‘바꿔봤자지.’
천마궁이 전생과 달라졌다고 들었으나 그래봐야 건물의 외관을 바꾸고 화원 등을 조성했을 뿐, 있던 전각을 허물거나 다른 곳에 새로 세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안에 있는 놈들이 지키는 위치는 뻔할 수밖에.
그럴 만한 곳만 노리며 화살을 쏘니 무리 없이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일단 시간은 벌었고.’
방화를 즐긴 뒤 몸을 숨기고 있던 흑서와 자오가 신전 예배실로 통하는 비밀통로로 가기 쉬워졌을 것이다.
‘나도 가야지.’
비밀통로 출입구가 있는 곳으로 은밀히 가 근처에 비룡(飛龍)을 숨겨놨다.
흑서와 자오가 와서 챙겨가게 한 것이다.
‘다음은…….’
천마궁을 제외하고 제일 소란스러운 곳을 향해 잠행술을 펼쳤다.
불길과 연기가 제일 높게 치솟고 있는 전각이었다.
그 꼭대기에선 ‘형기(刑旗)’라는 글자가 수놓인 깃발이 화마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잘 타네. 지금쯤이면 마뇌 녀석은 신전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겠지.’
마뇌도 신전으로 향하다가 천마궁에 불이 난 걸 보았을 터.
허나 천마궁엔 이미 충분한 전력이 있는 상황이니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게 맞았다.
상식적으로는 말이다.
‘홀로 직접 피땀을 흘리며 그런 싸움을 해봤어야 알지. 일백과 아흔아홉의 차이만 해도 얼마나 큰데.’
조소를 흘린 것도 잠시.
마뇌가 이끌고 간 전력과 신전에 있는 이들을 비교하자 미간에 골이 생겼다.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쓸데없는 걱정이 느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성품이 눈곱만큼 변해서 그런 것이었으나 정광은 몰랐다.
‘은가 놈은 언제 돌아온 거야?’
전생엔 도철대주였으나 광명우사자(光明右使者)로 출세했다고 들은 우경환이 있는 건 당연했다.
헌데 마뇌가 그새 불러들였는지 이녕에 남았던 광명좌사자 은호정도 신전으로 갈 줄이야.
마뇌 직속 무력대로 보이던 놈들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상대하기 조금 벅찰 것 같은데.’
정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흑서와 자오가 늦지 않게 돌아가 합류할 거야.’
냉정히 계산해 보면 그래도 부족할 것 같았다.
‘뭐 알아서 하겠지. 밀리면 할 수 없는 거고.’
생각과 육신이 반대로 움직였다.
잠행술을 거두고 신법을 펼쳤다.
주변 풍경이 미친 듯이 밀려나고 불길에 휩싸인 전각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확대됐다.
정광은 전각을 향해 도약하며 힘있게 외쳤다.
“총단이 불타다니! 저도 불을 끄는 걸 도울게요!”
말로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전신에서 칠흑보다 어두운 마기가 솟구치더니 가볍게 들어 올린 양 손바닥에 모여 새카만 구(球)로 화했다.
정광은 차가운 눈으로 화마를 노려보며 쌍장을 세차게 뻗었다.
두 개의 구가 허공을 찢어발기며 날아갔다.
쇄월광풍장(碎月狂風掌)!
장구한 세월 동안 천하마도를 다스려온 천신혁련가(天神赫連家)!
그 위대한 가문의 비기가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펼쳐진 것이다!
콰앙!
그야말로 명불허전!
아니, 달을 부술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으나 광풍 그 자체였다.
화마를 모조리 날려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전각까지 산산이 부숴버린 것이다!
정광은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뒤 신형을 돌렸다.
경악한 마인들이 입을 떡 벌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정광은 싱긋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그래도 도움이 돼서 다행이네요.”
정광의 등 뒤에서 새카맣게 탄 전각의 잔해들이 추락했다.
마인들은 그것들과 정광을 번갈아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다 총단 무인들 중 한 청년이 정신을 차리고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본기(本旗)의 전각을 무너뜨리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정광은 태연히 대꾸했다.
“불을 끈 건데요.”
“전각도 산산이 부쉈잖아!”
“어차피 곧 쓰러질 것 같았는데요, 뭐.”
“뭐가 어째? 그걸 말이라고!”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그래도 불길을 전부 날려 버렸으니 주변 전각들은 안전해졌잖아요. 왜 그렇게 이기적이세요?”
“이…… 이…… 이 망종이 보자 보자 하니까 감히!”
청년이 이를 갈며 병기를 뽑으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노인이 다급히 막았다.
“그만!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청년이 놀란 얼굴로 노인을 쳐다봤다.
“부기주(副旗主) 어르신, 왜 이러십니까? 설마 저 악적이 하는 짓을 못 보신…….”
“그만 하래도!”
“히끅!”
청년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주춤주춤 물러났다.
노인은 그런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정광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그것. 쇄월광풍장이 맞는가?”
정광은 태연히 답했다.
“그런데요.”
“……후우우.”
노인은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진혼 자네, 묵영권가의 무공을 익힌 게 아니라 떠도는 소문처럼 전대 교주님의 진전을 이었나?”
“그게 중요한가요?”
“…….”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마인들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늘과 땅 차이보다 더 크잖아!’
교주를 보필하던 가문의 무공을 익힌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의미였다.
허나 정광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얘기를 돌렸다.
“어쨌든 전각이 사라지니까 주변이 탁 트인 게 보기 좋네요.”
총단 무인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으나 구경하러 온 일반 교도들은 아니었다.
‘과연. 그렇긴 하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속이 시원해.’
형기는 천마신교 행정 조직들인 육기(六旗) 중에서 죄를 따지고 형벌을 내리는 곳.
본인들은 최대한 공정하게 집행한다고 떠들곤 하나 실제로도 그럴 리 있나.
권력은 물론이오, 재물도 힘도 없는 일반 교도들에겐 혐오스러운 조직이었다.
‘전대 교주님 시절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는데 요즘은 영.’
‘진혼 저 친구. 일 처리가 정말 시원시원해. 전대 교주님의 뒤를 이을 만하군.’
‘가만. 그러면 길길이 날뛰었던 어린 녀석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아니었다.
정광은 그 청년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긴커녕 따뜻하게 다독였다.
“전각이야 다시 세우면 되죠.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일반 무인들은 감탄했다.
무공은 이었을 뿐이나 성품은 훨씬 낫지 않은가?
총단 사람들도 정광을 새삼스레 봤다.
‘소문도 그렇고 직접 봐도 그렇고.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헌데 왜 지금까지 숨겨온 것이지? 아니, 조금 전에도 인정하지 않았어. 대체 왜?’
모두 의아해하는 그때.
정광이 다른 곳을 쳐다보며 탄식했다.
“저런. 화시가 수도 없이 날아가더니. 천마궁의 불길이 점점 커지네.”
“…….”
네가 날린 건 아니고?
그러고 보니 활은 없네?
“천마궁을 뚫고 들어가 천마전에 진입해야 하는데. 이 틈을 노려야 하나 불을 꺼야 하나.”
“…….”
진심인가?
마인이면 당연히 어부지리를 취해야지.
정광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도 저도 아닌 말을 뱉었다.
“일단 가서 볼까. 혹시 불을 끄게 될지도 모르니 다들 함께 가죠.”
“…….”
마인들의 머릿속에 어제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진혼이 교주에게 도전해서 열광했다가 교주가 전대 교주의 마혼(魔魂)을 계승한 힘으로 전대 교주가 남긴 검을 들고 곤륜으로 직접 가 정파무림 위선자들을 멸하겠다고 천명했던 광경이었다.
‘진혼은 그분의 진전을 이은 게 확실해. 그렇다면…….’
‘……교주보다 정통성이 짙지.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모두 혼란스러워하는 순간.
정광은 신형을 날렸다.
“그럼 먼저 갈게요!”
“……!”
마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음을 굳혔다.
그들의 눈에는 뜨거운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마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외치며 신형을 날렸다.
“가자!”
정광은 신법을 펼치며 웃었다.
이로써 수많은 증인이 생긴 것이다.
연휘준은 어떤 결과가 나와도 절대 물리지 못하리라.
‘이제 한창 불을 끄고 있을 사흉대 녀석들을 죽여볼까?’
구태여 천마궁에 불을 지른 이유가 있다.
마령강시와 사흉대를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아무리 정광이라 해도 부담스러워서였다.
사냥터를 깔끔하게 만들어놨으니, 사냥을 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