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91화 (490/569)

2부 220화

설령 귀신이라 해도

정광은 예배실 문을 닫고 일행을 돌아봤다.

향리객잔에 남은 귀곡자와 민현유, 성녀에게 끌려간 섬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결연한 얼굴로 눈을 마주쳤다.

정광은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자, 자. 뭐 하세요? 예배실에 왔으면 예배를 드려야죠.”

“…….”

이 상황에 예배라니.

농을 하는 것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어서 엎드리세요. 아, 어서요.”

“…….”

이렇게 채근까지 한다는 건 진심이라는 얘기.

투지를 일으키고 있던 사람들은 엉거주춤 눈치를 보다가 분분히 엎드렸다.

정광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으며 설명했다.

“천신께 아부를 하든 소원을 빌든 알아서 하시고 끝나신 분은 편히 앉으세요.”

자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단주, 얼마나 오래 해야 하는 겁니까?”

“그거야 자유죠.”

“그렇군요. 그럼…….”

마인도 아닌데 천신에게 할 말이 있을 리 있나.

자오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에게 안부를 물은 뒤 은근슬쩍 몸을 일으켰다.

그 기척을 느낀 사람들은 잠시 어이없어하다가 하나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이라고 천신과 친하지는 않아서였다.

정광은 모두 예배를 마치고 앉자 눈을 뜨고 웃었다.

자오가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왜 이런 걸 시키신 겁니까?”

“다들 너무 불타오르고 계셔서요. 지금 당장 싸울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낭비잖아요.”

“아!”

자오는 물론이오, 다른 이들 역시 과오를 뉘우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정광은 그런 그들을 훑어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적당히 풀어지셨네요.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주의를 드릴게요. 먼저 관 숙수님.”

관엽이 무겁게 대답했다.

“말하게.”

“의욕이 너무 지나치세요. 목숨을 내던지며 싸우는 게 아니라 본인과 주위 분들을 지키며 견뎌야 해요.”

연규종 무리와 붙었을 때처럼 최소한의 피해만 보며 시간을 끄는 싸움을 하라는 의미.

관엽은 지존의 말을 소중히 되뇌고 투지를 불태웠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네.”

“힘 좀 빼시라니까 다시 넣으시네. 어쨌든 쓸데없이 죽어버리시면 안 돼요.”

다음은 단영과 고이륵단가 무인들이었다.

“다른 분들도 그렇지만 단가 역시 나 소저의 지시에 따라 싸우셔야 해요. 처음이라 어색하겠지만 하실 수 있죠?”

단영이 식솔들을 대표해 장담했다.

“걱정하지 말게나. 우리는 나 소저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네.”

“좋아요. 나 소저, 들으셨죠?”

“네, 진혼.”

“막중한 책임을 지셨지만 잘하실 거라 믿어요.”

나민은 살짝 굳은 얼굴로 맹세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력하는 게 아니라 잘하셔야 해요.”

정광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교주는 모르지만 마뇌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아까 제가 마뇌를 은퇴시켜 달라고 도발했으니 더 그러겠죠.”

나민이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진혼이 천마궁과 천마전을 지키는 전력을 분산시키려고 그랬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움직일 겁니다.”

“네. 전력이 넘치는 상황이니까요.”

정광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래도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아무런 명분 없이 신전에서 칼춤을 출 순 없죠. 이런저런 수작을 부려 여러분에게 누명을 씌울 거예요. 생각나는 게 몇 개 있는데 일일이 막을 순 없으니 최대한 버티다가 싸움에 응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원군이 두 차례 올 테니 잘 협력하시고요.”

“일차 지원군은 말씀해 주셨는데 이차 지원군은 누구입니까?”

“글쎄요. 지금 말씀드리긴 좀 그렇네요.”

“정체를 비밀로 해야 하는가 보군요.”

“그게 아니라 올지 안 올지 확실하지 않아서요.”

나민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혹시 안 오면 어떻게 됩니까?”

정광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때 다시 생각해 봐야죠. 힘내세요.”

나민의 눈꺼풀이 더 빠르게 떨리고 정광의 미소는 짙어졌다.

“여기까진 됐고. 다들 임무는 숙지하셨죠?”

흑서와 자오를 필두로 모든 이들이 그렇다고 답했다.

정광은 배를 문지르다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해가 떨어지니 배고프네요. 신전 밥은 맛이 어떤지 가보죠.”

말은 그렇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다.

궁핍한 집 밥상이 좋을 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정도가 있지.

신전 요리들은 맛을 즐기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 것들뿐이었다.

정광은 딱 한 입만 삼키고 젓가락을 놓은 뒤 민현유가 챙겨준 육포를 씹었다.

“과연 신전. 식사마저 고행이구나. 성녀님도 신관님들도 정말 대단하시네.”

“…….”

몰래 훔쳐보던 신관들이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보다 더 침울한 얼굴로 성녀와 밥을 먹고 있던 섬랑이 긴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교주가 되면 신전부터 도와야겠네. 어떻게 된 게 쿠차에서 빌어먹던 것보다 더 엉망이지?”

“…….”

장내 분위기가 더 어두워졌다.

그만큼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다.

정광은 창가로 다가가 밖을 확인했다.

‘흠. 많기도 하네.’

은신하면 뭐 하나.

사람의 기척이 이곳저곳에서 느껴졌다.

정광 일행의 동태를 감시하는 것이리라.

‘아직 날이 찬데. 주인을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아.’

안쓰러워하는 것도 잠시.

정광은 하늘의 별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그 녀석들도 저녁을 먹고 한창 얘기 중이려나?’

* * *

천마궁 천마전의 한 밀실.

마뇌는 연휘준의 발치에 엎드려 간청했다.

“교주,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십시오. 진혼의 언행을 보면 역심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놈은 물론이오, 놈의 일행도 전부 죽여야 합니다.”

“섬랑도 말인가?”

“그렇습니다. 놈은 진혼의 제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연휘준이 조소를 흘렸다.

“토로번손가 아이가 우승하기를 기대했는데 엉뚱한 녀석이 소교주가 되니 마음에 안 드는가 보군. 하긴, 조종하기 까다롭겠지.”

마뇌는 솔직히 말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진혼을 죽이면 교주와 속하를 원수로 여길 겁니다. 아직 어린아이이긴 하나 굳이 후환을 남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불가.”

“교주, 제발 재고해 주십…….”

“섬랑은 이미 소교주일세.”

연휘준의 전신에서 소름 끼치는 마기가 흘러나왔다.

“본좌의 체면과 관련된 존재란 말이지. 본좌의 사후면 모를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일 수 없어.”

마뇌는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럼 나머지 놈들만이라도 허락해 주십시오.”

연휘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뇌의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자네, 심신이 많이 달아올랐군. 진혼의 뻔한 술책에 스스로 넘어가려는 겐가?”

“어차피 천마궁을 지키는 전력은 충분한 걸 넘어 과할 정도입니다. 속하 직속 무력대가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말입니다.”

“과하긴 해.”

“속하의 수하들과 돕겠다고 자청하는 가문만 쓰겠습니다. 진혼의 뜻대로 해주되 놈의 수족들을 전부 잘라 훗날 섬랑이 기댈 곳을 없애고 싶습니다.”

연휘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답지 않게 가벼이 생각하는군. 놈의 일행 중에는 고이륵단가 소가주와 오로나가 여식이 있어.”

“그들은 무거운 죄를 저지를 겁니다.”

“계속 말해보게.”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신분을 불문하고 죗값을 치러야 하지요. 교주께서 이미 선례를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하지.”

사고를 치고 연옥(煉獄)에 갇혀 있는 연규종을 말하는 것이었다.

교주의 손자이자 아극소연가 소가주인 연규종조차 합당한 벌을 받았으니 그럴듯한 죄만 뒤집어씌우면 명분은 충분하지 않은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일이 끝나면 큰 잡음이 안 나오게 정치적으로 풀 테니 믿어주십시오, 교주.”

“칠대가문 중 둘을 갈아치우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새바람을 불어넣을 때도 됐으니 최악의 경우엔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

새바람이라.

수명을 억지로 늘리며 권력을 계속 휘두르려는 주제에 그런 단어를 입에 담다니.

원래는 상관치 않았으나 얼마 전부터 사정이 바뀌었다.

연휘준은 반쯤 투명해진 눈으로 마뇌를 내려다봤다.

허나 마뇌는 머리를 숙이고 있어서 그 눈을 볼 수 없었다.

연휘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로 보자 했는가?”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으니 네가 알아서 하되 절대 실패하지 말라는 의미.

마뇌는 내심 욕설을 뱉으며 공손히 답했다.

“진혼 무리가 신전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다 합니다.”

“밤을 새울 셈인가?”

“사흘 내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곳에서 지내며 위험을 피하려나 보군.”

연휘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내일이면 마뇌의 솜씨를 보게 되리라.

진혼의 실력 역시.

“밤에는 보는 눈이 없으니 움직이지 않을 공산이 크지만 혹시 모르니 방비를 단단히 하게.”

“존명!”

아니었다.

마뇌가 고개를 드는 순간 밖이 시끄러워졌다.

적혼대주(赤魂隊主)가 뛰어 들어와 다급히 보고했다.

“교주, 진혼이 신전에서 뛰쳐나왔습니다.”

연휘준은 당황하지 않고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생각보다 일찍 움직이는군. 어디로 향하고 있지?”

“그, 그게…….”

적혼대주가 말을 더듬거리며 토설했다.

“놈의 잠행술과 은신술이 대단해 감시하고 있던 자들이 종적을 놓쳤습니다.”

“……무어라?”

“죄, 죄송합니다 교주! 속하를 죽여주십시오!”

적혼대주는 두려움이 치밀어 올라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부복할 뻔했으나.

연휘준은 무슨 일을 그따위로 처리했냐고 분노를 토하지 않았다.

아니, 내심 흡족했다.

진혼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방증 아닌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마뇌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책을 쓰는 거라 생각하나?”

눈을 데구루루 굴리고 있던 마뇌가 즉시 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본좌의 수하들을 피곤하게 만들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는 뜻이군. 대처 방법은?”

마뇌가 송구스럽다는 듯 머리를 깊이 숙이며 계책을 내놨다.

“최선이라 할만한 게 없으니 차선을 택해야 합니다. 천마궁을 지키는 전력은 그대로 두고 나머지 인원으로 총단을 수색하겠습니다.”

“위험부담을 최소화하고 놈의 장단에 맞춰주겠다 이거군.”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게.”

“존명!”

총단 곳곳에서 화톳불이 피워졌다.

수많은 무인들이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진혼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길 어언 몇 시진.

소용없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도무지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침소로 간 교주를 대신해 지휘를 맡은 마뇌는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잠행술이 뛰어날 순 있다. 은신술의 달인일 수도 있어. 허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됐다.

그 많은 인원이 팔방을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 한 곳에 숨어 있지 못하고 움직이는 중일 터.

기관진식(機關陣式)에 해박하다 해도 그렇지, 총단에 비밀스럽게 깔린 진법과 기관 장치가 몇 개인데 하나도 안 걸린단 말인가?

그 모든 것에 정통한 진천마가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귀신이라 해도 전부 통과할 순 없어. 최소한 몇몇 진이나 기관을 해체하는 소음은 나야 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마뇌는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주름살로 뒤덮인 얼굴이 갈수록 창백해졌다.

그러다 동이 트기 직전.

마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서, 설마!’

* * *

마뇌의 생각대로였다.

신전에서 뛰쳐나갔다가 바로 몰래 돌아온 정광은 푹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체조법을 펼쳐 몸을 적당히 푼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부를 관조했다.

‘어디 보자.’

몸 상태는 좋았다.

다음은 운기조식.

충실하게 끝내고 눈을 떴다.

정광의 두 눈이 부드럽게 빛나다가 가라앉았다.

‘잠도 잘 잤고 몸도 괜찮은데 이놈의 허기가 문제네.’

아쉬운 대로 육포를 꺼내 꼭꼭 씹어 먹었다.

먼저 일어나 있던 자오가 물이 든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단주, 그러다 체하시겠습니다. 중간중간 드십시오.”

“고마워요, 혈조.”

정광은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자오에게 물었다.

“준비됐죠?”

자오가 얼굴을 굳히더니 가슴을 활짝 폈다.

“네, 단주.”

“흑조는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흑서가 진지하게 장담했다.

“자네 기대에 부응할 테니 맡겨주게.”

“좋네요.”

마지막 차례가 남았다.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예배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뜨거운 눈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정광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이제 움직일 시간이었다.

정광은 신전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