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18화
추천해 드리자면
탁목이봉에서 내려온 정광 일행은 향리객잔에 도착하자마자 큰 탁자에 둘러앉았다.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오, 뒤늦게 따라 내려온 단영까지.
정광은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며 또박또박 말했다.
“자! 섬랑의 우승을 축하하며 축배를 들죠.”
이런 말을 할 거란 걸 알고 있던 자들은 미소를 지었고 모르고 있던 이들은 잠시 당황하다가 피식 웃었다.
민현유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점소이들에게 명했다.
“어서 요리와 술을 내와라.”
“네, 도련님.”
수많은 요리들이 탁자 위에 놓이고 명주도 준비됐다.
정광은 모든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고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주연을 바라봤다.
“뭐 해? 한마디 해.”
섬랑이 머뭇거리다가 겸연쩍게 웃었다.
“헤헤. 제가 해도 돼요?”
“해도 되는 게 아니라 해야지.”
“영 어색한데.”
“팔 아프다.”
“음.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섬랑이 술잔을 치켜들며 외쳤다.
“모두 감사합니다! 저에게 베풀어주신 크나큰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싱겁기는.”
정광이 짧게 타박하고 술을 쭉 들이켜자 다른 이들도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리고 너 나 할 것 없이 축하의 말을 쏟아냈다.
섬랑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벅벅 긁다가 술병을 들고 일어섰다.
“네, 네. 제가 눈치 없이 가만히 있었네요. 한 잔씩 따라 드릴 테니 그만하세요.”
진심으로 칭찬해 주니 쑥스러워하는 모습이라니.
사람들은 왁자하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섬랑은 공손히 술을 따랐고 마지막으로 정광의 잔까지 가득 채운 뒤 은근히 권했다.
“대인, 이 좋은 날 한 말씀 하셔야죠.”
“그래, 축하는 여기까지다.”
“네?”
섬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정광은 상관하지 않았다.
모두를 천천히 둘러보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내일 책봉식이 끝나면 섬랑은 소교주가 돼요. 교주는 새로운 소교주를 배출한 가문이나 스승에게 훌륭한 인재를 키운 공을 치하하며 한 가지 상을 내리게 되어 있죠.”
섬랑의 눈이 더 커졌다.
“상이라니요? 그런 교칙(敎則)이 있었어요?”
“응.”
“처음 알았네요.”
“사실상 이번에 처음 적용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럴 수밖에.”
“자세히 좀 알려주세요.”
“전대까지는 천신의 후예가 계속 소교주 자리를 이어왔고 현 교주는 전대 교주가 죽은 뒤 스스로 교주 자리를 차지했기에 새로운 가문에 상을 줄 일이 아예 없었다는 얘기야.”
섬랑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아! 그럼 제 가문은 멸문하다시피 했으니 제가 받게 되겠네요. 뭘 달라고 할까.”
“네가 스스로 컸냐? 내가 키웠지. 상을 받을 권리는 내게 있어.”
“헉! 저를 제자로 인정하시는 거예요?”
“이번처럼 필요할 때만.”
“……하아. 그럼 그렇지.”
섬랑은 투덜거리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조건이 붙었을지라도 제자로 인정받은 것 아닌가?
정광은 신경 쓰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저는 교주에게 조금 까다로운 상을 요구할 거예요. 분위기가 꽤 나빠지겠죠.”
“……!”
섬랑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갖은 고생을 다 하며 몇 차례나 생사를 넘나들던 끝에 염원하던 소교주 자리에 앉게 되었거늘,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 대인이 대형 사고를 칠 낌새 아닌가?
삽시간에 바싹 말라붙어 버린 입술을 간신히 떼었다.
“대, 대인. 모든 게 다 잘됐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정광은 단호히 부정했다.
“잘되긴. 이제 시작이야. 탐욕스러운 마뇌가 널 가만둘 것 같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종하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아치울걸.”
“그, 그렇다면 마뇌만 어떻게 하면 되잖아요.”
“마뇌를 죽이는 건 교주 얼굴에 먹칠하는 거야.”
“네? 그럼 설마…….”
섬랑은 너무 놀란 나머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정광이 친절하게 대신 마무리해줬다.
“교주를 죽여야지.”
“억!”
“마뇌도 그렇고.”
“헉!”
“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교주가 될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뛰어?”
“아! 그렇네요!”
연이어 경악하던 섬랑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꿈 깨. 그게 말이 되냐?”
“……쳇. 그럼 어떡하시려고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지금 하는 말이나 잘 들어.”
정광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설명했다.
섬랑은 손에 땀을 쥐고 듣다가 다른 사람들의 안색을 살폈다.
대부분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두려워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음속에서 오기가 치솟았다.
‘망할. 전부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데 쪽팔리게 혼자 겁먹다니.’
머리를 홰홰 저어 두려움을 털어내고 귀를 활짝 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광은 설명을 마치고 모두에게 물었다.
“질문 있으신 분?”
아무도 없었다.
“섬랑, 다 알아들었어?”
“…….”
당연히 이해야 했지.
말도 안 되는 계획에 온몸에 소름이 돋은 게 문제지만.
“네.”
“할 거지?”
섬랑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당당히 답했다.
“외통수인 상황이라고 하셨잖아요.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대인을 믿고 따를게요.”
“좋아. 모두의 무운과 건승을 빌며 한잔하자.”
정광이 호쾌하게 술을 마시자 모두 따라 했다.
섬랑이 제정신으론 도저히 버티기 힘들어 더 마시려고 하자 정광이 제지했다.
“너와 나 소저는 거기까지.”
“네? 왜요?”
나민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광은 두 사람에게 다가오라고 한 뒤 각자의 명문혈(命門穴)에 손바닥을 하나씩 댔다.
그리고 주즉시공(酒卽是空)으로 주정(酒精)을 빨아들인 후 허공에 흩날렸다.
술기운이 사라진 두 사람이 놀란 얼굴로 정광을 돌아봤다.
정광은 섬랑부터 쳐다봤다.
“장차 나 소저와 함께 교(敎)를 이끌기로 했지?”
“네, 대인.”
“그럼 나 소저를 지켜. 나 소저도 너를 지킬 거야.”
무거운 분위기는 금세 전염되는 법.
섬랑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반응하지 않고 진지하게 맹세했다.
“반드시 그럴게요.”
“좋아. 나 소저는요?”
나민도 굳은 얼굴로 다짐했다.
“저 역시 그럴 것입니다.”
“좋네요.”
정광은 손뼉을 짝 치고 섬랑과 나민을 먼저 올려 보냈다.
“섬랑, 요상약 챙겨 먹고 운기조식한 뒤 푹 자. 나 소저, 잘 자야 머리도 잘 돌아가는 거 알죠? 그 능력도요.”
“당연히 먹어야죠. 아주 꼭꼭 씹어 삼킬게요.”
“명심하겠습니다, 진혼.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정광은 두 사람이 이 층으로 올라가자 자오에게 부탁했다.
“혈조, 올라가셔서 섬랑이 운기조식하는 걸 지켜봐 주시겠어요?”
자오는 눈치가 빨랐기에 자리를 피해달라는 의미란 걸 알아챘다.
허나 섭섭하지는 않았다.
정광은 타당한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네, 단주. 제가 호법을 서겠습니다.”
자오도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귀곡자가 자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 은근히 여린 면이 있어서 지존에 대해 알게 되면 크게 상처받을 겁니다.”
정광은 술을 홀짝이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어째 안 그럴 거라고 믿으시는 것 같습니다?”
“너, 주름살이 많아진 만큼 말도 늘었어.”
귀곡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존께선 여전히 젊으시나 말씀이 많아지셨지요.”
“쫑알쫑알 시끄럽기는. 치병 걸린 상태로 내버려 둘걸. 그때로 되돌려 줄까?”
귀곡자가 재빨리 술을 따르며 화제를 돌렸다.
“지존께서 오랜만에 축배를 들자고 하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무척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 예상하시나 봅니다.”
“머릿수가 너무 차이 나니 그럴 수밖에. 다들 뭐 해? 어서 마셔.”
귀곡자, 흑서, 관엽, 단영, 민현유는 술을 단번에 삼켰다.
정광은 그들의 빈 잔을 채워주며 경고했다.
“다들 알지? 죽어버리면 무덤까지 가서 붓기 귀찮으니까 미리 먹이는 거야.”
모두 한목소리로 답했다.
“네, 지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럴 거야.”
“네, 지존.”
정광은 아무 말 없이 술을 몇 잔 더 마신 뒤 잔을 들었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나직이 주의를 줬다.
“웬만하면 죽지 마. 그걸 기원하는 마지막 잔이다.”
이 축배는 언제나 그랬듯이 정광 자신이 아닌 수하들을 위한 것.
또한 최소한의 희생으로 거둘 승리를 미리 축하하는 것이었다.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진천마를 따르는 마인들은 일말의 의구심도 없이 술잔을 높이 들었다.
“존명! 지존의 대승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 * *
정광 일행은 해가 뜨자마자 배를 든든히 채웠다.
몸이 안 좋은 귀곡자와 도주로, 안가 등을 준비한 민현유는 객잔에 남고 나머지 이들은 모두 정광과 함께 탁목이봉으로 향했다.
도중에 단영이 식솔들을 이끌고 합류했다.
섬랑이 심호흡을 거듭하며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자 정광이 놀렸다.
“긴장돼? 솔직해서 좋네.”
“무슨 말씀이죠?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섬랑은 시치미를 뗐으나 통하지 않았다.
정광은 섬랑의 머리털을 헝클어뜨리며 충고했다.
“싸우는 게 뭐 대수라고. 신전에서 칠주야 동안 머물며 역사와 교리를 배우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하아아. 역사와 교리라니…….”
섬랑은 어깨를 늘어뜨렸다가 다시 올렸다.
“그러게요. 대인 말씀이 맞아요. 차라리 생사투를 벌이는 게 훨씬 낫죠.”
“그래, 안색이 한결 좋아졌네. 그 마음을 유지해.”
탁목이봉을 오르는 길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섬랑을 발견하자 잔뜩 흥분하여 덕담을 내뱉었다.
“소교주가 된 걸 축하한다! 단 한 순간도 정체하지 말고 쑥쑥 성장해라!”
“네가 본교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는지 지켜보마!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섬랑은 어안이 벙벙했다.
어제 그런 사고를 쳤는데도 이렇게 축하를 받을 줄이야.
사람들의 덕담은 정광에게도 쏟아졌다.
“진혼! 자네가 아주 큰일을 했어! 앞으로도 섬랑을 잘 부탁하네!”
“자네에게도 기대가 커! 본교에 새바람이 불게 해주게나!”
정광은 씩 웃으며 멋들어지게 두 손을 모았다.
“새바람이 아니라 폭풍이 휘몰아치게 해드릴 테니 기대하세요!”
사람들은 기쁜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정광이 말한 폭풍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몰라서였다.
이렇게 다들 즐거워했으나.
호교당 삼향주 곽상은 여전했다.
딱딱한 얼굴로 섬랑의 신분패를 확인하고 들여보낼 뿐이었다.
“들어가라. 총단에 온 걸 환영한다.”
“삼향주님도 수고하세요.”
섬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발걸음을 옮기는데.
곽상이 지나가듯 덧붙였다.
“우승을 축하한다.”
“네?”
곽상은 대답 없이 정광의 신분패를 검사했다.
정광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안 하던 말씀도 하시고.”
곽상은 신분패를 살피며 퉁명스레 답했다.
“본교의 경사니 그래야지. 확인했으니 받아라.”
정광은 곽상이 내미는 신분패를 챙기며 물었다.
“듣던 대로 교를 많이 위하시네요. 교를 위한 일이면 언제든 발 벗고 나서실 거죠?”
곽상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무슨 사고를 치려는 것이냐? 용서하지 않을 테니 잘 처신하라고 경고했을 텐데.”
“사고라뇨. 저를 뭐로 보시고.”
정광은 곽상을 스쳐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호사(好事)에는 마(魔)가 붙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그 마를 사고라고 폄하한다니까.”
“……!”
곽상의 눈이 커졌다.
기억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말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들은 것이다!
“그 말을 대체 어디서…….”
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정광은 이미 한참 먼 곳에 있었다.
곽상의 눈이 이글거리다가 깊게 가라앉았다.
‘소문을 믿지 않았거늘. 정말 그분의 후인인가?’
정광은 일행을 이끌고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나아가다 보니 예복을 입은 채 기다리고 있던 예기(禮旗) 무인들이 정중히 맞이했다.
“멸혼생사투 우승자는 이쪽으로 오시게. 의복을 환복해야 하네.”
섬랑은 어제 처음 입은 묵영권가의 상징,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흑의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냥 이거 입고 있으면 안 돼요?”
무인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불가. 책봉식이 아이들 장난 같은가?”
“그건 아니죠.”
“그럼 빨리 환복하게.”
“하아아. 네.”
섬랑은 작은 천막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교주가 입는 것보다 작은 흑색 악귀가 수놓인 핏빛 장포(長袍)였다.
“뭐가 이렇게 촌스러…… 흡!”
섬랑은 투덜투덜하다가 급히 입을 닫았다.
예기 무인이 화난 얼굴로 따끔히 나무랐다.
“자네가 훗날 나를 벌한다 해도 참을 수가 없군. 중요한 의식일세. 교도들에게 얕보이지 않으려면 제대로 하게나.”
섬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중히 두 손을 모으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대로 할게요.”
“고맙네.”
“그런데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귀하게 써드리려고요.”
“…….”
예기 무인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예법을 알려줬다.
이번엔 섬랑의 말문이 막혔다.
‘뭐가 이렇게 까다롭고 복잡해? 마인으로서 할 짓이 아니잖아!’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섬랑은 집중해서 들으며 책봉식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 바람이 천신께 닿은 걸까?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들어왔다.
뒤이어 성녀가 신관들과 함께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천마신교주 연휘준이 수하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마인들은 마뇌의 선창을 따라 한목소리로 외쳤다.
“만세만세만만세! 위대한 천마신교의 통치자이신 교주를 뵙습니다!”
연휘준이 높은 단상 위에서 위엄 있게 명했다.
“모두 고개를 들고 일어나라. 소교주 책봉식을 시작한다.”
“존명!”
책봉식의 규모는 거창했으나 마인들이 만든 식답게 진행은 빨랐다.
성녀와 신관들이 천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제를 지냈고 섬랑은 엎드렸다가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며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정광은 전생에 했던 끔찍한 짓을 다시 보게 되자 정신이 아득해졌으나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아극소연가주 연혁소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렇게 철저한 경비는 처음이네요. 교주님 등에 칼을 꽂을 각오로 오신 거 맞죠?
-자신 없네. 각오가 없는 게 아니라 해낼 실력이 없어.
-직접 꽂는 거 말고요. 연을 완전히 끊는 걸 넘어 제 안배에 따라 싸우실 수 있냐고요.
-그야 물론 당연하지. 자네의 복안을 말해보게.
정광이 전음을 보내고.
연혁소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약조대로 따르겠네. 단, 반드시 성공해야 해.
-성공 못 하면 저부터 죽게 될 텐데요 뭐. 걱정하지 마시고 힘써주세요.
성녀와 신관들이 천마신교와 교주 연휘준, 소교주가 된 섬랑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축원하고 마지막 의식만 남았다.
정광은 호흡을 고르며 훗날을 생각했다.
‘섬랑이 교주가 될 때, 성녀가 정통성을 인정하면 탄탄대로가 깔리겠지.’
구경하고픈 마음이 살짝 일어났으나 곧 사라졌다.
한 번도 안 가본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즐겁게 주유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
‘일단 이번 일부터 마무리 짓고.’
천마신교주 연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이처럼 뛰어난 인재가 소교주가 되었으니 이는 본교의 홍복(洪福)이오, 본좌의 기쁨이다. 본좌는 소교주를 성심성의껏 지도해 장차 본교를 훌륭히 이끌어 나가도록 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마인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연휘준은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광을 바라봤다.
정광은 싱긋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연휘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
“또한 교칙에 따라 훌륭한 인재를 키운 스승의 공을 치하하며 상을 내릴 터. 진혼은 앞으로 나와라.”
정광은 연휘준이 서 있는 단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단상 주위를 지키고 있던 적혼대(赤魂隊) 무인들이 병기에 손을 대며 경고했다.
“그만. 거기서 멈추게.”
“조금만 더 가면 안 돼요? 최대한 가까이서 뵙고 싶은데.”
적혼대 무인들이 병기를 뽑았다.
정광은 두 손바닥을 살짝 들어 보이며 멈춰 섰다.
“보기보다 예민하시네요. 말씀대로 섰으니 흉흉한 것들 그만 치우시죠.”
적혼대는 여전히 병기를 든 채 정광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봤다.
사람들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허나 연휘준이 입을 열자 모두 조용해졌다.
“진혼, 못 보던 걸 챙겨왔구나.”
정광은 길쭉한 보자기를 등에 메고 있었다.
“등이 허전해서요.”
연휘준의 눈이 반쯤 투명하게 변했다.
“흥미롭군. 그간 수고했다. 원하는 것을 말해라.”
정광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간 고생하셨으니 그만 교주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는 신강에 발을 붙이지 말아주세요.”
“……!”
사람들이 경악하고.
정광은 친절하게 덧붙였다.
“추천해 드리자면 장강(長江) 이남(以南)이 좋을 것 같네요. 사파무림 세력권이니 그나마 노실 만할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