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17화
축배라는 이름의 의식
섬랑은 신법을 펼쳐 질풍처럼 달렸다.
“대인! 혈조! 뭐 하세요? 배고픈데 빨리 가서 먹고 쉬죠!”
“……!”
뭐?
효율이 엉망이라고 운운하더니 뭐가 어째?
마인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지켜보다가 분노를 토했다.
“저놈의 꼬마가 감히! 축하해 주려고 귀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는데 이딴 식으로 물을 먹여?”
“욕했던 게 미안하긴 개뿔! 역시 저 녀석이 패배하고 비참하게 뒈져야 했어!”
“아직 늦지 않았다! 잡아! 당장 잡아서 치도곤을 놓자!”
섬랑이 멸혼생사투에서 우승할 만큼 뛰어난 인재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어린 나이에 신법이 빨라봐야 얼마나 빠를까.
녀석도 그걸 알기에 도중에 멈춰서서 진혼과 혈조를 계속 부르고 있지 않은가?
‘진혼도 이해할 거야!’
‘이놈의 새끼! 본때를 보여주마!’
마인들이 살기를 쏟아내며 신법을 펼치려는 그때!
여기저기서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열받는 상황에 어떤 미친놈들이 그러는가 돌아보니 오늘내일하는 노인네들이었다.
한 중년인이 늑대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힐난했다.
“어이, 영감. 실성했소? 벽에 똥칠하기 전에 이 어르신이 깨끗이 보내줄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듬성듬성한 이빨을 드러내며 받아쳤다.
“허허. 자네 나이면 몇 다리 건너 들어서 바로 안 떠오르는 게 당연하니 용서해 주지.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자네 부친이 여기 있었어도 이랬을 테니 너무 탓하지 말게나.”
“내 아비? 흥! 그 작자가 영감처럼 개짓거리를 했으면 내가 한 번 더 죽였을 텐데 무슨. 어쨌든 무슨 헛소리요?”
노인이 클클거리며 약간 잠긴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분이 생각나서 말일세. 자네, 부친과 사이가 안 좋았나 보군. 그분도 그랬지만 자네처럼 패륜을 저지르진 않았지.”
“뭐가 이렇게 복잡해? 그분은 또 누구야?”
노인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전대 교주님을 말하는 걸세.”
“난 또 뭐라고. 그런데 그분이 갑자기 왜…… 아!”
마인이 탄성을 지르자 코가 없는 노인이 실소를 흘리며 끼어들었다.
“허허허. 이제 좀 기억이 나나? 그분과 똑같아, 정말 똑같다니까.”
다른 노인들도 박장대소하며 동의했다.
“크하하! 전대 교주께서도 멸혼생사투에서 우승하신 뒤 신법을 펼쳐 사라지셨지!”
“그뿐인가? 다 귀찮다며 소교주 책봉식(冊封式)이 열릴 때까지 은신술을 펼쳐 숨어계셨다고 들었네!”
“크크크. 어린 시절 어머님이 말씀해 주셨을 때 뭐 그런 미친 양반이 있는가 황당해했거늘, 내가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두개골이 기묘하게 찌그러진 노인이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었다.
“흘흘. 될 수 있으면 오래 살고 싶어졌어. 섬랑 저 아이가 다른 부분도 그분과 같은 면이 있으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
노인들은 물론이오, 다른 마인들도 전대 교주가 이룩한 전설 같은 위업들을 떠올렸다.
독심악혼(毒心惡魂)으로 시작해 일수천혈(一手千血)을 거쳐 진천마(眞天魔)라는 별호로 불리며 추앙받은 유일무이한 절대자!
마도칠대가문을 놀라운 신위와 뛰어난 지혜로 복속시키고 포달랍궁(布達拉宮)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까지 모조리 분쇄해 버린 무신!
허나 힘없는 일반 교도들에겐 나름대로 갖가지 선행을 펼쳐 보듬어준 기묘한 존재.
아직 대연무장에 남아 있는 자들은 대부분 한미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었다.
자연히 전대 교주를 경외하면서도 짙은 호감을 품고 있을 수밖에.
‘그분이 계시던 시절, 본교는 최전성기를 달렸어. 교(敎)와 소교주가 반란과 진압을 되풀이하며 절차탁마하여 실력을 기른 셈이지.’
그만큼 출혈도 심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분이 본교를 완전히 손에 넣으신 뒤엔 쓸데없는 싸움을 멈추고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모든 교도가 그분의 범접하지 못할 무위와 악마 같은 두뇌, 끝없는 변덕을 두려워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야.’
그렇다고 마냥 변덕만 부린 건 아니었다.
‘분쟁이 일어나면 시시비비를 명백하게 가려주셔서 억울한 일이 많이 없어졌지. 솔직히 우리 같이 없는 놈들 편을 많이 들어주셔서 숨통이 트였었어.’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욕심 없는 사람이었다.
그쯤 되는 능력이 있으면 중원 정복을 도모하는 게 당연하거늘, 대부분의 날들을 천마궁(天魔宮) 내부에 틀어박혀 뒹굴뒹굴하다가 귀천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니 소싯적부터 말년까지 한결같으셨군.’
몸이 근질근질한 교도들이 곤륜이라도 좀 치자고 간청해도 너희들끼리 놀라고 하고, 끝장도 못 내게 제지했다.
‘너희들 한 놈, 한 놈이 전부 내 종복인데 왜 아까운 피를 흘리냐고 하셨던가?’
쓸데없는 배려였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현 교주를 떠올리자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욕심만 더럽게 많기는.’
자신의 힘으로 교주 자리를 차지한 대단한 강자였으나 전대 교주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뭐? 그분을 계승한 새로운 진천마라고? 웃기는 소리. 그렇게 불릴 수 있는 건 그분뿐이야.’
마인들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그간 억눌러 왔던 반발심이 치솟은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늙은이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때가 좋았지.’
어느 곳에 소속되었든 간에 중책을 맡기 시작한 중년인들도, 혈기 왕성한 청년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나도 그 시절을 제대로 경험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자연히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섬랑! 그 녀석이 있었지!’
‘딱 절반만. 아니, 반의반만이라도 그분과 닮은 행보를 하면 얼마나 재밌을까?’
마인들은 일제히 흉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번들거리는 두 눈으로 섬랑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떡 벌렸다.
‘어, 없어? 정말 도망간 건가?’
‘가만. 진혼과 혈조도 없잖아!’
포근한 날씨를 뚫고 들어온 찬바람이 대연무장을 세차게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뒤, 마인들의 눈에 뜨거운 열기가 맺혔다.
앞날이 기대됐고, 그때 자신들이 하게 될 일에 피가 끓어올라서였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됐다.
‘섬랑도 그렇지만 그분을 더 닮은 건…….’
‘……진혼. 진혼이다.’
* * *
섬랑은 작은 두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투덜거렸다.
“어차피 오실 거면 빨리 좀 오시지. 세월아 네월아 하며 오셔서 기다리느라 혼났잖아요.”
정광이 피식 웃으며 섬랑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러게 왜 감당하지도 못할 말을 뱉어?”
“아야! 대인께서도 저와 같은 심정일 게 뻔했으니까요. 자청해서 대신 욕을 먹어드린 거죠.”
“뭐 결과가 괜찮게 나왔으니 그냥 넘어가 줄게.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면 너 자신이 많이 곤란해질 거야.”
섬랑이 정광을 힐끔거리다가 나직이 물었다.
“벌써 떠나시려는 건 아니죠?”
“내가? 왜?”
섬랑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발걸음을 옮기다가 작은 돌부리를 걷어찼다.
“지금 말씀하신 것도 그렇고. 왠지 그러실 것 같아서요.”
“그러진 않을 테니까 얼굴 똑바로 들고 걸어.”
섬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작은 얼굴에 큰 미소가 걸려 있었다.
“헤헤. 진짜죠?”
“응.”
“혈조도 그렇고요.”
자오는 어떻게 답할까 고민했다.
정광이 지금 바로 떠나지 않을 거라고 한 건 사실이지만 천마신교주를 죽이고 정리가 끝나면 곤륜산으로 갈 것이란 걸 알아서였다.
‘그럼 나도 떠나야 해. 되도록 상처를 덜 줘야 하는데…….’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쥐어짜다가 최선의 대답을 했다.
“단주께서 계신 곳이 곧 내가 있는 곳이다.”
“오오. 멋진 말이네요.”
섬랑은 싱글벙글 웃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정광이 기겁했다.
“미쳤냐? 누구 마음대로.”
섬랑이 발끈했다.
“또, 또 차별하시네. 혈조는 되는데 저는 왜 안 되죠?”
“넌 소교주가 됐잖아. 교주가 될 거고. 여기 계속 붙어 있어야지.”
“신강이 싫으세요?”
“싫다기보단 지루해.”
“왜요?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많기는 개뿔. 주위를 둘러봐라. 칼바람에 만년설밖에 없는데 무슨.”
“그야 탁목이봉이니까 그렇죠.”
“내려가면 뭐 특별한 거라도 있어? 밥만 해도 그래. 너 자금성(紫禁城) 알아?”
“당연히 알죠. 그런데 거기도 가보셨어요?”
“당연하지. 거기 밥 먹어봤냐?”
섬랑이 멈칫했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황궁이 뭐 대수라고. 그래봐야 사람이 만드는 요리죠.”
정광이 비웃었다.
“그래, 모르는 게 속 편하지.”
“아 진짜! 저도 언젠가 꼭 가서 먹어볼게요. 맛없으면 대인 혀가 엉망진창이라고 소문낼 테니 그렇게 아세요.”
“황궁을 치려고? 그러면 못 써.”
“후우우. 밥만 먹어본다고요, 싸우지 않고 밥만요.”
“그게 되려나? 그냥 안계를 넓혀줄 테니 잘 들어. 아, 직접 말하려니 귀찮네. 혈조, 부탁해요.”
섬랑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품고 있던 것도 잠시.
자오는 재빨리 입술에 침을 묻히고 현란하게 놀렸다.
“알겠습니다, 단주. 섬랑아, 궁중요리를 알려면 상선감(尙膳監)이 어떤 곳인지부터 이해해야 하니 차근차근 설명해 주마. 자금성의 환관 조직은 이십사아문(二十四衙門)으로 갈리는데, 상선감은 사사(四司)와 팔국(八局)보다 품계가 높은 십이감(十二監)에 속한 조직으로…….”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거늘 섬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덕분에 정광은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빨리 끝내고 이 녀석을 떼어놓은 뒤 곤륜으로…… 어?’
하지만 얼마 안 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곤륜산도 탁목이봉처럼 칼바람과 만년설밖에 없는 곳 아닌가?
더구나 몰래 사냥이라도 하지 않으면 풀만 씹는 산양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인세의 지옥.
그런 곳을 왜 빨리 가려고 하는 걸까?
정광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전생에 여기서 보낸 세월보다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지내서 그런 거겠지.’
한동안 걸음을 옮기다 보니 신전이 나왔다.
가까이 다가가 문을 두드리자 전에 봤던 턱이 뾰족한 신관이 나왔다.
그는 섬랑을 보고 크게 놀랐다가 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두 손을 모았다.
“어서 오십시오, 교우님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에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신관이 사라지자 섬랑이 이마에 주름을 잡고 인상을 썼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기는.”
자오가 웃으며 위로했다.
“하하하. 그만큼 네가 강한 적을 이긴 것이야.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구나.”
“으으. 차라리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하시죠.”
자오가 두 눈을 번뜩였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산에서 내려가며 얘기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섬랑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자오가 입맛을 다시며 앞으로 떠들 내용을 정리하는데.
신관 등현이 나민, 관엽과 함께 나오더니 섬랑을 보고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역시 이렇게 되었군요. 멸혼생사투에서 우승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섬랑 교우님.”
“네? 제가 이길 거라고 점치셨었어요?”
“반반입니다.”
섬랑의 한껏 올라갔던 어깨가 제자리를 찾았다.
“에휴. 그럼 그렇지. 그런데 왜 역시 이렇게 되었다고 하셨죠?”
“실제로 절반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럼 졌어도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하셨겠네요.”
“그건 아닙니다.”
“뭐가 다른데요?”
등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간절히 원해서 천신께 빌었던 대로 된 것과 아닌 것의 차이입니다.”
섬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비겁한 변경 같네요. 잘된 것만 긍정적으로 대하는 느낌?”
“하하. 그 또한 맞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긍정적으로 사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일이 틀어지면요?”
등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제 믿음이 너무 미욱해 저를 탓하고 천신을 원망합니다.”
“으음. 합리적인 것 같긴 한데. 천신께서 화내시지 않을까요?”
“천신이시잖습니까? 그렇게 옹졸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
“이상하게 설득되네요.”
“무척 다행이군요. 한시름 놨습니다.”
“네? 왜요?”
등현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 소교주 책봉식이 시작되면 성녀께서 제를 지내고 축원을 하실 겁니다. 그리고 모든 식이 끝나면 섬랑 교우는 신전으로 와 칠주야 동안 머무시며 본교의 역사와 교리들을 배우셔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알려 드릴 테니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그, 그렇게 열심히 하실 필요까지야…….”
정광이 동의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신관님, 잘 부탁드릴게요. 그럼 이만.”
정광은 마치 석상처럼 굳어버린 섬랑의 뒷덜미를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나민이 급히 따라와 허공에서 대롱거리는 섬랑을 샅샅이 훑어봤다.
그 매서운 시선에 섬랑이 정신을 차리고 진저리를 쳤다.
“아줌…… 헉! 소, 소저. 왜 그렇게 살벌하게 보세요?”
나민은 손강의 만도(彎刀)에 베여 움푹해진 섬랑의 어깨를 노려보다가 짧게 칭찬했다.
“아팠을 텐데 수고했다.”
“가, 감사합니다.”
“상대는 어떻게 죽였지?”
“배를 걷어차고 머리를 밟아서요.”
나민의 두 눈이 빛났다.
“단 이격(二擊)으로?”
“네, 네. 제가 혹시 잘못한 건가요?”
“……아니, 훌륭하다.”
섬랑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헉! 내가 벌써 가는 귀가 먹었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하셨죠?”
나민은 쌀쌀맞은 얼굴로 앞서갔다.
대신 관엽이 다가와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칭찬을 늘어놨다.
“잘했다. 아주 훌륭해. 정말 큰 일을 해냈어.”
“과, 관 숙수는 또 왜…….”
섬랑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자오가 황궁 요리에 대해 다시 얘기하기 시작하자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정광은 섬랑을 힐끗 보며 웃은 뒤 나민에게 물었다.
“소저, 성녀님과 얘기는 잘 끝났어요?”
“네, 진혼. 원래 계획보다 몇 가지 더 부탁드렸는데 흔쾌히 받아들이셨습니다.”
‘흔쾌히’가 아니라 ‘억지로’겠지만 어쨌든 좋은 일.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나민이 조심스레 전음을 보냈다.
-토로번손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죠.
-교주와 마뇌도 잔뜩 경계하고 있을 테고 말입니다. 진혼, 귀곡자 어르신께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 정말 교주를 죽일 겁니까?
-물론이죠.
나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객잔에 가면 준비해야 할 일이 많겠습니다.
-네. 그러고 다 같이 해야 할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정광이 씩 웃으며 육성으로 답했다.
“섬랑이 우승했으니 약조했던 대로 축배를 들어야죠.”
“……!”
나민의 눈이 커지자 정광이 덧붙였다.
“그렇게 놀라실 것까지야. 주독을 몰아내는 비기가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사를 앞두고 술판을 벌이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
“축하는 다음으로 미루고…….”
“아뇨. 오늘 꼭 해야 해요. 이건 양보할 수 없으니 그렇게 아세요.”
나민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관엽의 눈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이글거렸다.
‘섬랑을 축하하는 건 핑계고 과거 지존께서 행하셨다던 그 의식이구나!’
진천마는 절대열세의 상황일 때 항상 축배를 들었다.
마지막 축배가 회자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영광스럽게 관엽 또한 그 잔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엄청난 은혜에 뜨거운 자부심과 단단한 의지가 솟구쳤다.
‘지존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