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87화 (486/569)

2부 216화

그럼 이만

섬랑은 손강의 머리통을 밟아 박살 내고 그 잔해를 내려다봤다.

섬랑의 육신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내려 손강의 시신을 적셨다.

예기주(禮旗主) 양방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이건…… 마(魔), 마…….”

양방은 경악한 나머지 말을 더듬거리다가 그 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대신 속으로 부르짖었다.

‘마혼(魔魂)! 전대 교주님의 마혼이구나!’

이십여 년 전에 귀천한 절대자의 상징이 이 어린 소년에게서 다시 나타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그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것이었으나 천하에 이렇게까지 정제되어 더없이 순수하게 느껴지는 마기(魔氣)가 또 있을 리 있나.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했겠지만 지척에서 지켜본 양방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최소한 교주는 알아봤을 것이야. 어쩌면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겠군.’

섬랑을 가르친 건 진혼이라는 괴청년이었다.

그럼 진혼 역시 마혼을 품고 있을 것 아닌가?

이는 곧 진혼이 전대 교주의 후인이라는 의미.

전대 교주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는 현 교주가 진혼을 곱게 대하지는 않으리라.

정통성을 이은 진혼도 어떻게 나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두 사람을 슬쩍 번갈아 봤다.

교주는 묘한 눈빛을 흘리며 진혼을 응시하고 있었고 진혼은 싱긋 웃으며 교주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이런. 역시 심상치 않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바로 답이 나왔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모르는 척해야 해. 그래야 화를 피할 수 있어.’

이렇게 마음을 굳게 먹는데.

섬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뭐 하세요? 승패를 판정하셔야죠.”

“아!”

양방은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린 채 섬랑을 주시하고 있었다.

놀라운 대역전극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다시 섬랑을 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칠갑을 하고 있으나 출혈은 어느 정도 멎은 상태.

눈은 원래의 벽안(碧眼)으로 돌아왔고 은은하게 일렁이던 검은 마기는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한마디로 예전의 섬랑이었지만.

기분 탓일까?

저 작디작은 몸이 이상하게 커 보였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양방은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은 후 내공을 끌어 올려 크게 소리쳤다.

“섬랑 승! 손강 패! 멸혼생사투 본선 마지막 대결의 승자는 묵영권가를 대표해 출전한 섬랑이오!”

“와아아아아!”

피투성이 소년에게 뜨거운 환호성이 쏟아져 내렸다.

양방은 내공을 배가하여 말을 이었다.

“본교의 소교주가 될 인재를 가려내는 대장정이 드디어 끝났소! 섬랑은 오늘 하루 동안 심신을 정갈하게 한 뒤 내일 술시(戌時)에 바로 이곳에서 소교주가 되는 의식을 치를 것이오!”

사람들이 일제히 열광하며 소리쳤다.

“수없이 상처를 입으면서도 끝없이 공격하더니, 한순간 압살해 버릴 줄이야!

“역시 숨겨둔 한 수가 있었어! 생사투가 끝나면 홀로 당당히 서 있을 거라더니 정말 해냈구나!”

“아까 욕한 게 미안해서라도 더 큰 목소리로 축하해 달라고 했지? 옜다, 받아라! 진심으로 축하한다!”

“미친! 진짜 이겼잖아! 해내면 평생 충성하겠다고 말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충성해 주마!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게 쑥쑥 성장해라!”

평소의 섬랑이라면 두 손을 번쩍 들고 함성을 지르며 으스댔겠지만, 정중히 예를 표한 뒤 비무대에서 내려갔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섬랑을 칭찬했다.

“뭐야 이거? 아까보다 한결 의젓해졌잖아?”

“거참. 이상하게 커 보이네. 설마 그새 큰 건가?”

“어쨌든 보기 좋구먼. 벌써 소교주다운 위엄을 풍기는 것 같아.”

정말 그랬다.

섬랑은 보무당당하게 일행이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자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정말 수고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어서 안기거라, 어서.”

섬랑은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서 입을 열었다.

“일단 의복부터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요.”

섬랑이 걸친 모든 것들은 넝마가 다 된 지 오래였고 피에 절은 건 물론이오, 내장 조각과 뇌수까지 묻어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반가운 마음에 포옹부터 하려고 했던 자오는 실수를 깨닫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차! 정신머리하고는. 잠시만 기다려 다오. 바로 꺼내주마.”

“네, 혈조.”

자오가 봇짐을 푸는 사이, 섬랑은 고의만 빼고 전부 벗었다.

손강의 만도(彎刀)에 베이고 찔려 엉망이 된 몸이 드러났다.

정광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물이 든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자오에게 손짓했다.

“혈조, 깨끗한 천부터 주세요.”

“아! 여깄습니다, 단주.”

정광은 천에 물을 적시며 섬랑에게 물었다.

“너 과묵해졌다?”

섬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히 답했다.

“이상하게 담담하네요.”

“왜 그런지 알아?”

“모르겠어요. 왜 그런 거죠?”

“분위기에 취해서.”

정광은 젖은 천으로 섬랑의 몸을 박박 닦았다.

섬랑이 의젓한 언행을 벗어던지고 온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악! 아악! 대, 대인! 좀 살살 하세요!”

“아프냐?”

“당연하죠!”

“나는 안 아픈데.”

“아 진짜! 으윽!”

정광은 섬랑의 전신을 꼼꼼히 닦은 뒤 피로 물든 천을 버렸다.

“엄살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금창약도 발라야 해.”

“……!”

엄살이라니?

그 많은 상처를 벅벅 문질러 닦아놓고는 뭐가 어째?

섬랑은 이를 갈며 대꾸했다.

“듬뿍 발라주실 거죠? 아주 아주 두껍게요.”

“당연하지.”

“하아아. 원망하진 않을게요. 금창약보다 훨씬 귀한 걸 주셨으니…… 잠깐. 지금 뭐라 하셨죠?”

“벌써 귀가 먹었냐? 아낌없이 발라주겠다고 했잖아.”

섬랑이 정광을 멍한 눈으로 보다가 물었다.

“왜요?”

“네 자질과 노력을 증명했으니 그 정도 대접은 받을 자격이 생긴 거지.”

“……대인.”

섬랑의 경직된 얼굴이 부드럽게 풀리는가 싶더니 눈부시게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광도 싱긋 웃으며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예기(禮旗) 무인이 한 명 다가와 고급스러운 목갑 두 개를 건넸다.

“꽤 좋은 것들이니 효과가 있을 것이오. 부디 잘 치료하시고 내일 늦지 않게 나오시길 빌겠소.”

“네, 잘 쓸게요.”

예기 무인이 떠나고 정광은 목갑 하나를 열었다.

퀴퀴한 향이 나는 금창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섬랑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간신히 의문을 표했다.

“설마 아낌없이 발라주시겠다던 게 이건 아니죠?”

“맞는데.”

“……정말 너무하시네요.”

섬랑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정광은 신경 쓰지 않고 금창약 냄새를 맡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섬랑의 상처에 아주 두껍게 발랐다.

“이거 꽤 괜찮은 거야.”

“앗, 따가워. 진짜요?”

“당연하지. 멸혼생사투 우승자가 내일 멀쩡하게 나타나지 않으면 교주의 체면이 뭐가 되겠어? 좋은 걸 주는 게 당연하잖아.”

“으으.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다른 목갑은 뭐죠?”

“요상약(療傷藥). 말 나온 김에 확인하자.”

정광은 목갑을 열어 안에 있는 단환 냄새를 맡았다.

“흠. 이것도 나쁘지 않네. 가벼운 내상도 내상이니 이따 객잔에 도착하면 바로 먹어.”

“헤헤. 네. 꼭꼭 씹어 먹을게요.”

정광은 섬랑에게 목갑을 주고 다시 금창약을 발랐다.

“죽지도 않았고 주정뱅이가 될 일도 없어졌네.”

“윽. 그, 그러게요. 감사합니다.”

“깊이 새겨둬. 만도는 왜 손으로 잡았지?”

“그래도 될 것 같아서요. 아야!”

“더 손쉽게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았는데 쓸데없는 짓을 했어. 대담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네.”

“둘 다 아닌데요.”

“그럼?”

섬랑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하지만 정광이 깊은 상처에 금창약을 쑤셔 넣듯 바르자 눈물을 찔끔 흘리며 실토했다.

“으악! 미, 믿음 때문에 그랬어요. ‘그놈’도 투혼(鬪魂)도 대인께서 주신 거잖아요. 뭐가 두려웠겠어요.”

정광은 섬랑이 벗어서 내려놓은 투혼을 보고 피식 웃었다.

“한 놈은 반쯤 망가졌네. 다른 녀석은 아껴서 써.”

섬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그놈을 집어삼키는 거요. 계속 반복해야 해요?”

“응.”

“언제까지요?”

“그럴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후우우우. 미치겠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정광은 땅이 꺼져라 탄식하는 섬랑을 나무랐다.

“마공을 익힌 자의 숙명이니 담담히 받아들여. 마(魔)가 커지는 게 싫어? 평생 제자리걸음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섬랑이 정색하자 정광도 진지하게 충고했다.

“네가 품은 녀석은 특별한 거야. 부대끼며 살다 보면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거다.”

섬랑은 이미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출혈이 빨리 멎은 것도 그놈 때문이죠?”

“응.”

“까다롭던 손강도 한 방에 보내 버렸고요.”

“그래.”

정광은 손을 들어 섬랑의 머리털을 헝클어뜨렸다.

“한번 맛을 봤으니 의욕이 솟지?”

섬랑이 빙긋 웃었다.

“물론이죠.”

“어디 보자. 상처는 대충 다 치료했고. 왼쪽 어깨만 당분간 조심하면 되겠네.”

섬랑은 달걀만 한 살점이 베여 허전해진 어깨를 곁눈질하며 투덜거렸다.

“끄으. 아직도 욱신거리네. 이 어깨, 움직이는 데 지장 없을까요?”

“정양만 잘하면.”

“이해했어요. 주의할게요, 대인.”

“좋아. 이제 뒤로 돌아.”

섬랑은 난데없는 지시에 의아해하면서도 뒤로 돌았다.

자오가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흑의와 검은 가죽신을 들고 서 있었다.

“아직 날이 춥다. 감기 걸리기 전에 어서 입어.”

“고마워요, 혈조.”

섬랑은 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은 뒤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흑색투성이라니. 영 이상하네요.”

정광이 설명했다.

“네 가문인 묵영권가의 복색이 그랬어. 현유가 나름대로 신경 써서 준비한 것들이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입어.”

“아!”

섬랑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옷을 보며 쓰다듬었다.

“싫다곤 안 했는데요. 나쁘지 않네요.”

“그래? 그럼 남은 일을 처리하자.”

“남은 일이라뇨?”

정광은 섬랑의 양팔을 잡고 옆으로 돌렸다.

수많은 군중이 섬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왜 다들 아직도 안 가고 있는 거죠?”

정광은 당황한 섬랑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오늘만큼은 네가 주연이어서야. 교주와 높은 양반들이 너를 배려해서 조용히 떠났잖아.”

“어라? 정말 없네요.”

“이제 한 명, 한 명 인사하러 올 테니 귀찮더라도 웃으며 받아줘.”

섬랑은 머리를 긁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 걸 다. 후우. 어쩔 수 없죠. 성심성의껏 대할게요.”

섬랑의 다짐은 일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무너졌다.

단영과 고이륵단가 무인들은 원래부터 친분이 있으니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지만 다른 이들까지 그럴 수 있나.

아니,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흉악한 얼굴을 들이밀며 건네는 축하에 ‘감사합니다’라고 앵무(鸚鵡)처럼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만으로도 지쳐갔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끝이 안 보이잖아!’

섬랑이 고생하는 사이, 정광은 몇몇 사람들을 떠올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연혁소는 확실히 협조할 거고.’

아극소연가주 연혁소는 ‘수고했네. 앞으로 잘 부탁하네’라는 전음을 남기고 갔다.

‘손재등 그놈은 맛이 갔어.’

토로번손가주 손재등은 멸혼생사투에서 우승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손강이 패하고 죽어버리자 넋이 나가 버렸다.

‘뭐 더러운 성품을 생각하면 곧 정신을 차리고 어떤 식으로든 복수하려 하겠지만.’

그때 괴롭게 죽여주면 된다.

‘마뇌는 심정이 꽤 복잡한 상태였지.’

눈을 쉴 새 없이 데구루루 굴리는 모습이라니.

손강이 우승할 거라 믿고 녀석을 주무르려다 일이 어그러졌으니 골치깨나 아플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교주 놀이를 즐기고 있는 연휘준은…….’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섬랑이 아닌 정광에게.

이전에 정광을 바라보던 시선이 호기심과 흥미라면.

지금은 강한 승부욕과 진득한 살의(殺意)라 할까?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오랜만에 마혼을 느꼈으니 당연한 일이지.’

어떻게 나올까?

내일 열릴 소교주 책봉식(冊封式)이 기대됐다.

‘그건 그렇고. 이거 영 지루한데. 전생에는 어떻게 버텼지?’

아직도 섬랑에게 축하를 건네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은 수를 세기 힘들 만큼 많았다.

‘아. 버티지 않고 그냥 뛰었었지. 이번에도 그럴까?’

한편, 섬랑은 시간이 갈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불편한 감정은 곧 표정으로 드러났고 그걸 마주 대한 마인들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단 축하는 하고. 너, 표정이 왜 그렇지? 이 어르신께 불만이라도 있는 것이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지.

섬랑은 그래도 참았다.

이 좋은 날에 선의로 온 자를 어찌 함부로 대하겠는가?

“제가요? 설마요. 단지…….”

“단지?”

“효율이 엉망이어서요.”

“효율이라니?”

섬랑은 두 손을 정중히 모으고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내공을 끌어올려 전력을 다해 외쳤다.

“모두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대 잊지 않고 좋은 소교주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그럼 이만!”

“……!”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리고.

섬랑은 신법을 펼쳐 질풍처럼 달렸다.

“대인! 혈조! 뭐 하세요? 배고픈데 빨리 가서 먹고 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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