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85화 (484/569)

2부 214화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감사합니다! 반드시 우승하고 소교주가 되어서 모두 굴려 드릴게요!”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가 커봐야 얼마나 클까.

수많은 이들의 환호성에 묻혀서 들리지 않아야 정상이건만.

어린놈이 목청도 좋지.

모두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뭐가 어째?’

‘……네가 우리를?’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확인하려 했다.

허나 불필요한 짓이었다.

모두의 표정이 대동소이한 것 아닌가!

사람들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칼로 쑤시거나 암기를 뿌리지는 않았지만.

환호와 응원이 순식간에 욕설과 야유로 바뀌었다.

“저 빌어먹을 꼬마가 간덩이가 부었나! 감히 누구를 굴리겠다고? 한껏 격려해 준 이 어르신에게 그게 할 말이냐?”

“꼭 져라! 네가 죽을 때까지 저주하마! 아니, 죽어도 저주할 테니 귀신이 되어서도 불행해라!”

사람들이 살기를 흩뿌리며 분노를 토하자 한 노인이 눈썹을 곤두세우며 호통쳤다.

“갈! 그만들 하게! 앞날이 구만리 같은 아이에게 그게 무슨 말인가!”

노인 주변에 있던 마인들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저 녀석이 영감 손자라도 돼? 그런 거야?”

“손자를 가슴에 묻기 전에 영감부터 먼저 보내줄까? 한 점, 한 점 얇게 저며서 말이야. 크크.”

노인이 냉정하게 설명했다.

“이렇게 혈기만 앞세워서야 원! 생사투를 하다가 죽는 건 너무 편안한 최후 아닌가! 형편없이 지고 간신히 살아남아야 해! 그 후 차라리 죽는 게 기쁠 만큼 우리가 끝없이 굴리세나!”

마인들이 탄성을 지르며 노인을 치켜세웠다.

“허어!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과연! 실례했소이다!”

“영감의 말이 옳소! 나도 그러기를 원하오!”

“살아라! 반드시 살아남아! 그리고 그때 다시 얘기하자!”

대세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모두 섬랑이 패배하되 목숨만큼은 붙어 있기를 바랐다.

정광은 천막으로 가다가 옆에서 걷는 섬랑을 칭찬했다.

“모두 네가 살아남기를 바라네. 헛된 삶은 아니었어.”

“그, 그렇죠? 정말 여한이 없네요.”

“말과 다르게 안색이 해쓱해졌네.”

“하하. 설마요. 기분 탓이겠죠.”

“그래, 그 정도 뻔뻔함은 있어야지.”

정광은 섬랑의 작은 등에 손바닥을 댔다.

내공을 부드럽게 밀어 넣자 섬랑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섬랑은 작게 한숨을 쉬고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대인.”

“응. 장부에 써둬.”

“더 이상 적을 여백이 없어요.”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섬랑은 ‘진짠데’라고 중얼거린 뒤 말을 이었다.

“사람들을 도발하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저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오네요.”

“그게 더 도발하는 거잖아.”

“죄송해요. 고칠게요.”

“꼭 그럴 필요는 없어.”

“네?”

정광은 씩 웃었다.

“능력이 받쳐주고 결과를 내면 욕은 먹더라도 더 큰 지지를 받게 되거든.”

섬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데 뒤에서 걷던 자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게 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네, 혈조.”

“그걸 또 충족시켜 주면 더 기대하며 따르게 되고 말입니다. 응원하면 만족시켜 주는 선순환을 이루어내는 것이군요.”

자오가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무인이라면 가슴이 뛸 만한 얘기지만 단주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섬랑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뇨. 한 분 더 계세요.”

자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당연히 전대 교주님이시죠.”

섬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은 모자라지만 저도 그렇게 될 거고요. 과거엔 전대 교주님, 현재엔 대인, 미래엔 제가 있는 거죠.”

“하하. 배포가 크구나. 그래, 벌써 소진혼(小眞魂)이라고 불리니 할 수 있을 게야.”

“헤헤.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혈조. 아. 대인도요.”

“나는 아무 말 안 했는데.”

“꼭 말을 해야 마음이 전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환청이라도 들었나? 이거 큰일이네.”

“하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세 사람은 사방이 탁 트인 천막에 도착해 의자에 앉았다.

정광은 섬랑의 상태를 살폈다.

‘너무 들뜨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고 딱 적당해.’

눈을 지그시 감고 평정을 유지하려 하는 모습이 제법 가상했다.

‘성녀가 건 주술도 있고.’

한시적인 데다 큰 효과가 있는 건 아니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싸울 때 전음으로 지시까지 내릴 수 있으면 좋은데.’

섬랑이 지시를 듣자마자 바로 반응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야 시도라도 해보지.

지금 당장은 집중력이 분산되어 목이 잘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손강을 변성술(變聲術)로 속일 수도 없고.’

이미 손강의 아비이자 토로번손가 소가주인 손병권을 변성술로 농락하지 않았는가?

가주 손재등이 전음 따위는 무시하라고 신신당부했을 게 뻔했다.

‘빡빡하기도 하지.’

정광은 입맛을 다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환한 햇살 때문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제 하늘의 뜻을 기다릴 차례인가.’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하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본인의 의지다.

섬랑은 중단전 옥당(玉堂)에 있는 마혼의 파편을 집어삼켜야 했다.

‘내가 심어준 것이나 복종까지 시켜줄 순 없어.’

놈은 이미 섬랑의 혼과 얽힌 상태.

하나가 된 지 오래였기에 섬랑 스스로 해내야 했다.

‘뭐 정 안 되면 손을 써보겠지만 해봐야 아니까 문제지.’

정광은 뺨을 긁다가 차가운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극소연가주 연혁소가 노려보고 있었다.

정광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연혁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꼴을 보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됐다.

‘사고를 친 손자놈을 할아비가 꺼내주지 않았네.’

매정하기도 하지.

이쪽엔 잘된 일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연혁소가 전음을 보냈다.

-오늘 싸움, 자신 있는가?

-글쎄요.

-반드시 이겨야 해. 이기기만 하면 총력을 다해서 돕겠네.

그냥 돕는 것도 아니고 총력을 다해서라.

아비와 연을 끊는 걸 넘어 등에 칼을 꽂을 준비가 된 듯했다.

-제가 교주님을 엎드리게 해도 복수 안 할 거라고 말씀하셨던 거 기억하시죠?

-물론이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게나.

-생각해 볼게요.

-대신 규종이를 용서해 주게. 다른 곳도 아닌 연옥(煉獄)으로 끌려갔으니 몸 성히 나오진 못할 걸세. 그것으로 죗값을 치른 걸로 해달라는 말이네.

-그 정도야. 그렇게 하죠.

연혁소가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정광도 고개를 돌리다가 다른 천막을 힐끗 봤다.

토로번손가주 손재등이 연혁소와 정광을 번갈아 보며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정광도 속으로 웃었다.

‘손을 잡을락말락 하다가 깨진 것 같아?’

천만의 말씀.

연대가 더 단단해졌다.

막상 때가 되면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으나 전보다는 무조건 나으리라.

‘연혁소의 아비인 그놈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자식을 가장 잘 아는 자는 부모지만 자식을 제일 모르는 이 역시 부모다.

특히 연휘준같이 자신밖에 모르고 자식을 무시하는 놈은 더더욱 그랬다.

‘여기까진 됐고. 슬슬 시작할 때가 됐는데.’

잠시 뒤.

풍채가 좋은 노인이 비무대에 올라와 두 손을 모았다.

“예기주(禮旗主) 양방이 교우들께 인사드리오!”

“와아아아!”

이제나저제나 멸혼생사투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함성으로 화답했다.

양방은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멸혼생사투 본선 마지막 날!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살아남은 두 인재가 본교 소교주직을 놓고 겨루게 됐소! 두 사람의 무운을 빌며 다음 식을 시작하겠소이다!”

대연무장 동서남북에 있는 네 개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사흉대(四凶隊)가 들어왔다.

뒤이어 악사들이 여러 악기로 경건한 음률을 흘리며 들어와 단상 밑에 늘어서자 천마신교주 연휘준이 총단 주요 인물들의 호종을 받으며 등장했다.

연휘준은 높은 단상 위에 홀로 올라 우뚝 섰다.

전 교도가 부복하며 소리 높여 외쳤다.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위대한 천마신교의 통치자이신 교주를 뵙습니다!”

총단은 물론이오, 탁목이봉까지 뒤흔드는 엄청난 외침!

연휘준은 담담히 명했다.

“모두 일어나 고개를 들라.”

“존명!”

교도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연휘준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훑어봤다.

정확히 말하면 다섯 사람이었다.

‘자신만만하군.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손강은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빛냈다.

‘이 꼬마도 제법이야. 확연히 열세인데도 평정을 유지하고 있어.’

섬랑은 위축되긴커녕 자연스러운 자세로 서 있었다.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 더 나은 셋째를 손쉽게 소가주로 세울 수 있게 됐는데 그깟 모자란 첫째 때문에 나를 원망하고 있군.’

연혁소는 차가운 눈으로 아비를 응시했다.

향리객잔에서 진혼을 몰래 만났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무엇을 하려고 했든 간에 첫째 문제 때문에 어그러졌을 게 분명했다.

‘헌데 저 녀석만큼은 속을 알 수 없단 말이야.’

진혼은 슬쩍 목례(目禮)하며 미소 지었다.

연휘준의 입가에도 희미한 선이 그어졌다.

‘그래서 더 재밌고.’

마지막은 마뇌였다.

연휘준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내 사후에 손강을 어떻게 구슬려서 교를 쥐고 흔들까 생각 중이겠지.’

손강의 할아비이자 토로번손가 가주인 손재등과는 이미 얘기가 되어 있을 터.

허나 마뇌라면 손재등을 최대한 빨리 치워 버리고 손강을 직접 움직일 것이다.

‘눈을 데구루루 굴리는 모습을 보니 아직 확실한 방도는 정하지 않은 것 같군.’

확인해야 할 건 다 했고.

이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감상할 차례였다.

교도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좌의 후계자를 정하는 이 뜻깊은 날에 총단에 온 걸 환영한다! 최후의 생사투를 시작해라!”

“와아아아아아!”

마인들이 열광했다.

예기주 양방이 내공을 끌어 올려 소리쳤다.

“멸혼생사투 본선 마지막 날! 최후의 생사투를 시작하겠소! 이 번 출전자, 묵영권가 섬랑! 오 번 출전자, 토로번손가 손강! 두 사람은 비무대에 올라 마주 서라!”

손강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비무대로 향했다.

섬랑도 그러려고 하는데 자오가 허리를 숙이더니 꼭 안았다.

섬랑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제, 제가 애도 아니고. 뭐 하시는 거예요?”

자오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너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냥 이러고 싶구나.”

섬랑은 코를 몇 번 찡긋거리다가 자오를 슬며시 밀었다.

“혈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혼인해서 아이를 낳으세요. 아니지, 어떤 여인이 혈조의 수다를 감당할까. 그냥 참을성 강한 녀석을 양자로 들이시는 게 낫겠네. 다녀올게요.”

섬랑이 자오보다 훨씬 많은 말을 하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머리에 익숙한 손이 올라왔다.

“아 진짜. 대인은 또 왜…….”

섬랑은 말끝을 흐렸다.

대인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지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목소리도 그랬다.

“전략대로 싸우고. 절대 잡아먹히지 마.”

“……당연하죠.”

“잡아먹히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네?”

대인의 맑은 음성이 가슴에 또렷이 새겨졌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내가 꺼내줄게.”

“……대인.”

“백치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네가 좋아하는 술은 마실 수 있을 거야.”

“……하아아. 엄청난 위로가 되네요. 그럼 이만.”

섬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비무대로 향했다.

정광은 섬랑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오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자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주께서 길을 여시는 사이, 저는 섬랑을 데리고 신전으로 가서 시간을 끕니다.

-잘 아시네요.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보죠.

자오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정광의 마음도 가볍지는 않았다.

‘귀찮게 됐네. 전보다 밖에서 포위하고 있는 마령강시가 더 많아졌어. 서른 구가 넘잖아.’

반면 섬랑의 마음은 편안했다.

사방에서 신랄한 야유와 거친 욕설이 쏟아져도 개의치 않았다.

피식 웃으며 양손을 귓가에 댔다.

“더 크게! 더 크게 해주세요!”

“……!”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어서요!”

“…….”

사람들은 멍하니 있다가 이를 갈았다.

이놈의 꼬마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도발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모두 살기를 쏟아부으려는 그때!

섬랑이 외쳤다.

“지금은 욕을 먹어도 싸니까 그렇게 말씀드린 거예요!”

“……!”

“하지만 생사투가 끝나면 저 홀로 당당히 서 있을 테니 욕한 게 미안해서라도 더 큰 목소리로 축하해 주세요!”

“…….”

그런 의미였나!

대연무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젊은 자들은 섬랑의 큰 배포에 깜짝 놀라고 늙은이들은 오래전 누군가를 떠올리며 향수에 젖었다.

그리고 잠시 뒤.

모두 욕설이 섞인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망할 꼬마야! 네가 정말 해내면 평생 충성해 주마!”

“잔뜩 자극해 놓고 허무하게 뒤지기만 해봐! 부관참시(剖棺斬屍)다!”

“자! 자! 이왕 이렇게 된 거, 덕담이라도 좀 해줍시다!”

욕인지 덕담인지 구분하기 힘든 말들이 쏟아졌다.

섬랑은 그것들을 남김없이 맞으며 비무대에 올랐다.

예기주 양방이 묘한 표정으로 섬랑을 쳐다봤다.

“어르신, 왜요?”

“……잠시 옛 생각을 했다. 상대와 마주 서라.”

“싱거우시기는. 네.”

섬랑은 뚜벅뚜벅 걸어가 손강 정면에 섰다.

손강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며 이를 드러냈다.

“역시 무인이 아니라 광대였어. 아주 잘 어울리는걸.”

섬랑도 씩 웃었다.

“내가 인기가 너무 많아서 질투하는구나? 남자의 질투는 좀 추한데. 으스스하기도 하고.”

“웃기는군. 네 요사한 혀부터 잘라주마.”

섬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말을 했던 애가 있었는데 어떻게 됐더라? 아, 연규서. 나한테 형편없이 깨졌지. 걔는 받아주기로 했지만 너는…….”

섬랑은 말끝을 흐렸다가 장탄식했다.

“후우우.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미안, 도저히 안 되겠어.”

“이 새끼가 감히!”

손강이 도파(刀把)를 움켜쥐자 예기주 양방이 경고했다.

“시작은 내가 알린다.”

“…….”

양방은 손강을 노려보다가 뒤로 물러나 크게 외쳤다.

“상대가 더 이상 싸우지 못하거나 항복할 때까지다!”

손강과 섬랑은 서로를 쏘아보며 살기를 끌어 올렸다.

“어떤 수를 써도 좋다! 시작해라!”

두 소년이 동시에 움직였다.

칼날이 급격하게 휘어진 만도(彎刀)와 단단한 쌍단봉이 충돌했다.

쩌엉!

섬랑은 두 걸음 물러나고 손강은 그만큼 전진했다.

시작부터 전력!

섬랑의 온몸에 있는 솜털이 솟았다.

‘위험!’

힘의 우위는 확인했겠다, 대인이 짜준 전략대로 움직였다.

제일 자신 있는 묵영보를 펼쳤다.

옆으로 반원을 그리며 돌아가 후방을 점하려 했다.

허나 손강의 보법도 훌륭했다.

섬랑의 움직임을 따라 돌며 만도를 내려쳤다.

쉬이이익-

급히 피했으나 소용없었다.

왼쪽 어깨가 얕게 베이며 핏방울이 튀었다.

섬랑의 벽안이 커졌다.

‘미친! 직접 싸워보니 더 강하잖아!’

그래도 이 정도 상처쯤이야.

계속 묵영보를 밟아 손강의 주위를 돌았다.

대인의 지시대로 성질을 돋워야 했다.

‘아까는 화난 게 아니라 화난 척한 거야.’

저 음흉한 놈이 그 정도로 평정을 잃을 리 있나.

‘열받으면 더 강해지는 유형이라고 하셨지. 그래도 열받게 해야 해. 그래야 희미한 틈이나마 보이게 될 거야.’

대인의 지시는 곧 진리!

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빨라졌다.

더 빠르게 더 은밀하게 움직이며 손강을 희롱했다.

허나 손강의 만도가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엄청난 속도와 다양한 변화로 섬랑을 몰아쳤다.

섬랑은 날카로운 만도로 이루어진 촘촘한 그물을 정신없이 튕겨내고 피하다가 어느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없어?’

분명 눈앞에 있던 손강이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뒤이어 뒤통수에 싸한 느낌이 휘몰아쳤다.

‘뒤!’

눈으로 확인하려 하면 죽는다.

섬랑은 전력을 다해 앞으로 뛰었다.

목덜미가 따끔해지는가 싶더니 뜨거운 통증이 몰려왔다.

재빨리 오른쪽으로 이동한 뒤 다시 왼쪽으로 움직여 빙글 돌았다.

손강이 비릿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광대답게 춤을 잘 추는구나. 다시 와봐. 기꺼이 놀아줄게.”

섬랑의 목덜미가 축축해졌다.

땀 때문인지 피 때문인지 구별이 되지는 않았으나 한 가지 사실만큼은 알 것 같았다.

분명 손강의 공세는 잠시 멈춰졌지만 틈이 보이긴커녕 공격할 엄두가 안 났다.

섬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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