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84화 (483/569)

2부 213화

웅심(雄心)을 끌어올려 포효하다

멸혼생사투 본선 마지막 날 아침.

정광 일행은 한 탁자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모두 말없이 젓가락질만 했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식사를 즐기고 있는 섬랑을 배려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허나 당사자의 생각은 달랐다.

“오물오물. 왜 그렇게 깨작깨작 드세요? 요리가 마음에 안 드세요?”

“…….”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데 그럴 리 있나.

사람들이 어색한 표정을 짓자 섬랑은 젓가락과 입을 더 바쁘게 움직이며 나무랐다.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당장 그만두세요.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송장 취급하다니. 불쾌하네요.”

“내 말이.”

섬랑은 유일하게 동의해 준 정광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대인께선 좀 적당히 드시고요. 어떻게 저보다 더 열심히 드시죠? 밥이 넘어가요? 제가 걱정도 안 되냐고요.”

정광은 천장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까다롭기는. 뭐가 이렇게 복잡해?”

섬랑도 탄식했다.

“아! 대인이셨지. 괜한 말씀을 드렸네. 그냥 흘려들으세요.”

“삐졌냐? 좋아, 기분이다.”

정광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권했다.

“오늘의 주연께서 중용(中庸)의 도(道)를 원하시니 딱 그분만큼만, 돼지처럼 드세요. 그래야 져도 우리 탓을 못 할 거예요.”

“대인!”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뭐 하세요? 어서 드시지 않고.”

사람들은 피식거리며 요리를 먹었다.

섬랑은 인상을 쓰며 다시 먹는 데 집중했다.

요리들이 워낙 훌륭했기에 섬랑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펴졌다.

그리고 결국 헤벌쭉 웃게 됐을 때.

정광이 의자에서 일어나 담담히 말했다.

“슬슬 가죠.”

이미 떠날 채비를 끝내놨기에 짐을 들고 나가기만 하면 됐다.

섬랑이 문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귀곡자가 막아섰다.

“축배를 들 준비를 하고 있으마. 네 능력을 세상에 선보이고 돌아오너라. 허허.”

그 딴에는 자애롭게 웃은 것이었으나 보는 이에겐 공포였다.

“그, 그럴게요.”

흑서도 다가와 충고했다.

“이기는 건 당연한 거고 인상적으로 마무리해야 해. 상대의 눈알을 파내서 얇게 저며라. 그것에 피와 뇌수를 듬뿍 적셔서 태연하게 씹어. 삼킬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 거 잊지 말고.”

“그, 그건 좀…….”

민현유는 육포를 챙겨주며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대인께 드린 것보다 네 것이 더 상등품이야. 들키지 않게 꼭꼭 씹어 먹어라. 무운을 빌며 기다리마.

“……민현유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섬랑의 진심이 담긴 말에 정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현유가 전음으로 뭐라고 했길래 그래?”

“무, 무운을 빈다고 했는데요. 어서 가시죠.”

“아닌 것 같은데.”

“아 맞다니까요. 평생 속고만 사셨나.”

섬랑은 정광의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갔다.

한결 따사로워진 햇살과 다소 부드러워진 바람이 오늘의 주연을 반겼다.

“와! 봄이 오려나?”

섬랑이 즐거워하자 정광이 씩 웃었다.

“새 시대가 오리라는 걸 알리는 거지.”

“계절이 아니라 시대요?”

“그래. 만들 준비는 됐지?”

섬랑의 벽안이 눈부시게 빛났다.

“물론이죠!”

“좋아, 가자.”

정광 일행은 단영 일행과 만나 탁목이봉으로 향했다.

단영과 고이륵단가 무인들이 섬랑에게 한마디씩 던졌다.

“처음 만났을 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천지 차이다. 오늘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헤헤. 감사해요, 소가주님.”

“섬랑, 네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구나. 아니, 우리뿐만 아니라 다 그랬겠지. 오늘도 기적을 보여다오.”

“어허. 섭섭하게 기적이라뇨. 오늘도 당연한 결과를 보여 드리죠. 즐겁게 감상하세요.”

멸혼생사투 마지막 날이라 그런 걸까?

탁목이봉을 오르는 길은 벌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속엔 독두를 비롯한 전주 무리도 있었다.

그들은 정광 일행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다가왔다.

“대인! 아극소연가 소가주를 박살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독비귀도! 나 소저! 꼴 보기 싫던 무뢰배들을 쓸어주셔서 감사하오!”

“섬랑! 밥은 든든히 먹었느냐? 당연히 그렇겠지! 꼭 이겨라! 새로운 역사를 쓰는 거야!”

“혀, 혈조. 반갑긴 한데 왜 입을 여시오? 갑자기 두통이 심해져 아무 말도 못 들을 것 같소.”

독두 무리는 단영도 반갑게 맞이했다.

정광이 밟아버린 연규종처럼 칠대가문의 소가주라는 신분의 벽은 있으나 평소 평이 좋은 위인 아닌가?

게다가 차후 이녕(伊寧)에서 운영하게 될 도박장에서는 전표만 사용하게 할 예정.

그 전표를 발행하는 고이륵단가의 소가주이니 친근하게 구는 게 당연했다.

“단 소가주, 앞으로 잘 부탁드리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

훈훈한 분위기가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 널리 퍼졌다.

다른 이들도 그 분위기에 전염되어 정광 일행을 반겼다.

자연히 탁목이봉을 오르던 모든 사람들은 기분 좋게 웃으며 정상으로 향하게 됐다.

하지만 목적지에 이르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총단 정문을 지키고 있는 호교당(護敎堂) 삼향주(三香主) 곽상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오늘은 또 얼마나 빡빡하게 검사할까? 성질 같아선 그냥 확!’

‘후우우. 참아야지. 아극소연가 소가주를 연옥(煉獄)에 처넣은 미친 늙은이한테 뭘 바래?’

‘교주도 참 대단하군. 손자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저 영감을 또 정문에 세우다니.’

‘곽상 저거, 혹시 교주의 총애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해서 날뛰는 거 아니야?’

아니었다.

곽상은 평소와 똑같은 태도로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들여보냈다.

정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무겁게 경고했던 것과 총단 출입 검사는 별개의 일이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목패를 확인한 뒤 통과시켰다.

“들어가거라. 총단에 온 걸 환영한다.”

정광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네. 삼향주님도 수고하세요.”

섬랑은 총단 안으로 들어가 한동안 걷다가 뒤를 흘깃 돌아보고 중얼거렸다.

“뒤끝은 없어서 좋네.”

“그런 편이지.”

“전에 대인께서 답답하긴 해도 쓰기에 따라 좋은 수하가 될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정말이네요.”

“꼭 그런 건 아니야.”

“네? 이번엔 또 왜요?”

정광은 현 교주 연휘준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병기가 아무리 좋아도 쓰는 이의 무공에 안 맞으면 방해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섬랑은 이마를 좁히며 궁리하다가 머리를 홰홰 내저었다.

“내 정신 좀 봐. 생사투에 집중해야 할 판에 복잡한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이게 복잡해?”

“……설마요. 단순한 생각이라도 할 때가 아니죠. 그새 소화가 다 됐네. 배 좀 채울게요.”

섬랑은 품속에서 육포를 꺼내 꼭꼭 씹어 먹었다.

그런데 대인도 육포를 먹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코를 킁킁거리는 것 아닌가!

‘아차! 민현유 아저씨가 몰래 먹으라고 했는데!’

대인보다 더 좋은 걸 받았다는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될까?

아직 상상하지도 않았는데 몸이 가늘게 떨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으로 육포를 가리고 허겁지겁 먹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어째 네 것이 더 좋아 보인다?”

“기분 탓이겠죠. 오물오물.”

“아냐. 두께부터 다른데? 향도 그렇고.”

“콜록. 콜록.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기 마련이잖아요. 어서 가시죠. 우물우물.”

정광은 피식 웃고 육포를 씹었다.

‘현유가 보낸 전음이 이거였나? 네 것이 더 좋으니 몰래 먹으라고?’

애쓰는 섬랑이 안타까울 정도로 현실은 달랐다.

두 사람의 육포는 크기도 향도 똑같은 것이었다.

‘뭐 그렇게라도 기분 좋게 해줬으면 된 거지.’

정광은 어제와 같은 사고를 막기 위해 나민과 관엽을 신전 앞까지 데려다줬다.

“생사투가 끝나면 신전으로 올 테니 성녀님과 얘기가 일찍 끝나도 기다리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알겠네.”

정광은 그들만 들을 수 있게 덧붙였다.

“혹시 밖이 소란스러워져도 나오지 마시고요.”

섬랑이 생사투에서 지면 일을 벌일 테니 신전에서 버티며 시간을 벌라는 의미.

나민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고 섬랑을 노려봤다.

“소교주가 되겠다는 약조를 지켜야 한다.”

“하아. 또 잔소리네.”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섬랑은 가슴을 활짝 펴며 장담했다.

“반드시 소교주가 돼서 나 소저가 혼인할 시간도 없을 만큼 실컷 부려 먹을 테니 각오나 하시죠.”

관엽도 그답지 않게 덕담을 했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행생즉사(幸生則死)라고 했다. 반드시 죽으려고 하면 살 테니 목숨을 내던지고 싸워라.”

섬랑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뒷걸음질 쳤다.

“미친. 잘해봐야 함께 죽겠네.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나약한 마음으로 뭘 하겠다는 것이냐!”

관엽이 훈계를 시작하려는 그때.

신전 문이 열리고 성녀가 나왔다.

그녀를 따라 나온 신관 등현이 사람들에게 인사한 뒤 섬랑을 바라봤다.

“성녀께서 교우님을 대신해 천신께 축원을 드리고 싶어 하십니다. 예를 갖춰주시겠습니까?”

섬랑은 성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어, 어떡하면 되는데요? 성녀님께 전 재산을 바치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면 되나요?”

섬랑이 품속을 뒤지며 당장에라도 엎어지려고 하자 등현이 빙그레 웃었다.

“재물은 필요 없습니다. 마음을 경건히 하시고 두 손을 모아주십시오.”

마음이 움직이자 몸도 움직였다.

섬랑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았다.

정광 일행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성녀가 조용히 다가와 섬랑의 머리에 섬섬옥수(纖纖玉手)를 올렸다.

섬랑의 눈이 풀리고 성녀의 입에서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맑고 아름다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늘 이 어린 종이 천신의 대리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을 떼었으니, 천신께선 부디 이 아이를 어여삐 보시고…….”

섬랑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아.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췄으면…….’

하지만 얼마 안 가 생각이 바뀌었다.

‘……가만. 손은 부드러운데 왜 이렇게 차가워?’

실제로 차가운 건 아니었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느낌이 그랬다.

‘젠장. 차라리 대인이 대충 쓰다듬어주시는 게 백 배 낫지.’

섬랑의 흐리멍덩하게 풀렸던 벽안이 또렷해지고 성녀의 눈에는 이채가 맺혔다.

그녀는 축원을 마치고 섬랑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섬랑은 그 시선이 불편했다.

“설마 이제 와서 돈을 내라는 건 아니시죠?”

성녀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부정했다.

“당연히 아니지요. 교우님의 무운을 빕니다.”

“네, 그럼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섬랑은 정광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대인, 어서 가죠. 이상하게 으스스하네요.”

정광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섬랑의 머리털을 헝클어뜨렸다.

“잘했어.”

“네? 뭘요?”

정광은 대답 없이 성녀를 응시했다.

성녀가 초승달 같은 아미(蛾眉)를 살짝 들어 올리며 변명했다.

-기운을 북돋워 주려고 가벼운 주술(呪術)을 썼을 뿐입니다.

-알아요.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동시에 섬랑을 시험하려고 했으니까요.

-…….

-그래서 감상은요?

성녀는 솔직히 인정했다.

-훌륭한 인재입니다. 나 교우가 제안한 조항들을 전부 받아들이고 계약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글쎄요. 그게 되려나?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 전에 보여주신 수법 때문에 사정이 바뀌었거든요.

정광은 한 사람을 눈짓으로 가리켰고 그 사람을 본 성녀는 흠칫했다.

나민이 북풍한설(北風寒雪)보다 더 차가운 얼굴로 성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음은 더 차가웠다.

-성녀께선 생각보다 욕심이 크시군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섬랑의 마음에 헛된 욕망을 심고 훗날 이용하려고 하셨잖습니까?

성녀의 눈이 커졌다.

진혼이라는 신비한 인물이 알아챈 거야 그렇다 쳐도 나민은 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타고난 특별한 능력으로 성녀의 수작을 눈치챈 나민은 원래 했던 제안대로 계약을 맺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성녀님, 그만 들어가시지요.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성녀의 안색은 어두워지고 정광의 입가엔 미소가 맺혔다.

“그럼 수고하세요. 우리도 가죠.”

정광, 섬랑, 자오는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섬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걷다가 정광을 올려다봤다.

“대인, 하나 여쭤봐도 돼요?”

“응.”

“아까보다 몸이 살짝 가벼워진 것 같은데 성녀님이 축원해 주셔서 그런 건가요?”

“맞아.”

섬랑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와아! 사이비는 아니었구나.”

“명색이 성녀니까.”

“그래도 친해지고 싶진 않네요.”

“왜?”

섬랑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쨌든 그래요. 대인께서는요?”

“나?”

“네. 성녀님은 예쁘잖아요. 잔소리꾼 아줌마보다 더요. 저런 미인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정광은 간단하게 답했다.

“나도 별로야.”

“왜요?”

왜긴.

네가 느꼈듯이 성격이 나빠서지.

그런 주제에 엄마를 닮아서 더 그렇고.

“아까 단순한 생각도 하지 말고 생사투에 집중해야 한다고 누가 말했더라?”

“아! 또 이러네. 죄송해요. 정신 차릴게요.”

섬랑은 다시 육포를 씹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대연무장에 도착해 수많은 마인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섬랑이다! 섬랑이 왔다!”

“그거 아냐? 너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산을 올랐어!”

“꼭 이겨야 해! 네가 죽기 직전까지 응원하마!”

“아니야! 죽어도 응원할 테니 귀신이 되어서라도 이겨!”

“…….”

중간중간 기분 나쁜 말들도 있었으나 이런 환호를 받고도 가만있으면 무인이 아니지.

섬랑은 육포를 꿀꺽 삼키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간 키워온 웅심(雄心)을 끌어 올려 포효했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우승하고 소교주가 되어서 모두 굴려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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