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83화 (482/569)

2부 212화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느낌

정광 일행은 향리객잔에 도착하자마자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자오는 지붕 위로 올라가 은신술을 펼치고 주변을 경계했다.

관엽은 평소 사용하지 않던 빈방에서 따뜻한 목욕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다.

안전을 위해 항상 관엽과 같은 방을 쓰던 섬랑은 홀로 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자 자연스레 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늘의 뜻은 내 의지에 달렸으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단단히 다지라고 하셨지?’

그래, 분명히 그러셨다.

‘당차게 할 수 있다고 장담했었는데…….’

그건 그때 얘기고.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도록 침을 꿀꺽 삼켰다.

‘망할. 겁이 나는 게 아니야. 신중히 접근하는 거야.’

우선 운기조식부터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가라앉고 단전은 풍족해졌다.

‘좋아, 이쯤이면 됐어.’

더 미뤄봐야 망설임만 늘어날 뿐.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의지를 다지려면 먼저 인사부터 나눠야지.’

섬랑은 품속에 손을 넣어 작은 가죽 뭉치를 꺼낸 뒤 정성스럽게 접어 입에 물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중단전 옥당(玉堂)에 숨어 있는 ‘그놈’을 떠올리며 이죽거렸다.

‘얌전 떨지 말고 튀어나와 인마. 오랜만에 면상이나 보자.’

마음을 굳게 먹고 초대했건만…….

그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뭐 해? 자냐? 아니면 죽었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쉽게쉽게 가자고, 응?’

도발의 수위를 높여도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게 진짜!’

섬랑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심신이 약해졌을 때 기어 나와서 분노에 모든 걸 맡기라고, 그럼 다 알아서 해주겠다고 수작을 부리던 얍삽한 놈에게 무시당하다니.

장차 천하마도(天下魔道)의 종주(宗主)가 되어 천하를 굽어볼 이 몸이 어찌 참겠는가?

‘너 이 새끼. 전에 기분 나쁘게 웃고 사라질 때 머리끄덩이를 잡고 패줬어야 했는데 실수했네. 네가 원했던 대로 화내고 있는데 안 나와? 내가 멀쩡한 상태라서 쫄았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녀석이었어?’

극히 일부일 뿐이지만 정광이 혼에 마(魔)를 심어 키운 마혼이 그럴 리 있나.

섬랑의 중단전 옥당이 가볍게 진동했다.

마치 아비가 어린 자식의 재롱을 즐기며 흘리는 웃음 같았다.

섬랑의 두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오호라. 내가 우습다 이거지? 사람 잘못 봤어. 오랜만에 한번 놀아볼까?’

옥당이 피식 웃는 것처럼 짧게 울리더니.

변화가 일어났다.

숙주의 벽안(碧眼)이 암청색으로 물들 만큼 급격한 변화였다.

‘사, 살살! 살살 놀아보자고 이 미친놈아!’

섬랑은 두 눈을 부릅뜨며 입안에 대고 있던 가죽 뭉치를 질끈 깨물었다.

숙주가 아니라 주인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 * *

정광은 깨끗이 씻은 관엽을 치료해 주다가 방문 쪽을 바라봤다.

“웬만하면 사이좋게 지내지 아웅다웅하기는.”

관엽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지존, 적입니까?”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섬랑이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바뀔 거야.”

섬랑은 방에 홀로 있는 상황.

관엽은 정광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아! 섬랑이 지존께서 심어주신 마혼을 다스리고 있나 보군요.”

정광은 피식 웃으며 부정했다.

“다스리긴 무슨. 휘둘리느라 정신없는데.”

“위험한 상태란 말씀입니까?”

“그간 눈곱만큼이나마 성장했으니 그 정도는 아니고.”

정광은 고개를 갸웃했다가 설명했다.

“시험을 받고 있다고 할까? 살짝 괴로울걸.”

“…….”

지존의 살짝은 타인의 극한과 비슷하지 않은가?

관엽의 이마에 파인 주름들이 더 깊어졌다.

정광은 금창약이 들어있는 목갑으로 주름을 밀어서 펴고 나무랐다.

“나이를 먹더니 잔정이 많아졌네. 왜 남 걱정을 해?”

“……죄송합니다.”

“흠. 아예 안 하는 것보단 나으려나. 문제가 생기면 내가 가서 해결할 테니 지금은 네 걱정이나 해.”

“알겠습니다, 지존.”

정광은 관엽의 상처들을 꼼꼼히 치료한 뒤 손을 털고 일어섰다.

“네 실력이 늘어서 크게 치료할 곳은 없네.”

관엽은 바로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건조한 눈과 차가운 성대에 뜨거운 물기가 맺혔다.

“보잘것없는 소인에게 이런 무한한 영광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운기조식하고 쉬고 있어. 저녁 먹을 때 보자.”

“존명!”

정광은 일 층으로 내려가 찻물로 목을 축였다.

세 잔쯤 마셨을까?

이 층 방에서 나민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귀곡자가 내려왔다.

정광이 후원으로 나가자 그도 따라 나왔다.

“지존, 웬일로 술이 아니라 차를 즐기고 계셨습니까?”

귀곡자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정광은 기지개를 켜고 답했다.

“알면서 왜 물어? 슬슬 몸 관리해야지.”

귀곡자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내일 일을 벌이시려는 겁니까?”

“섬랑이 멸혼생사투에서 우승하면 모레 소교주 책봉식(冊封式)이 끝나고 치겠지만 져버리면 내일 할 수밖에.”

“오늘 벌써 준비하시는 걸 보니 섬랑이 손강을 이길 확률이 낮은가 봅니다. 아니면 이긴다 해도 마(魔)에 잡아먹힐 가능성이 높든지 말입니다.”

귀곡자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나직이 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마찬가지군요.”

정광은 단호히 부정했다.

“엄연히 다르지. 후자가 훨씬 더 괴롭고 비참한 죽음이잖아.”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실 겁니까?”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상황 봐서 정해야겠지.”

귀곡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군요.”

“뭐가?”

“목을 잘라서 편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다른 방도를 생각하시는 것 같아 안심했습니다.”

“상황 봐서 정할 거라니까.”

“그런 결정을 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네가 왜? 그놈이 고마워해야지.”

귀곡자가 빙그레 웃었다.

“섬랑은 표현만 안 할 뿐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지존을 친형처럼 따르잖습니까?”

“언제 내 등을 찌를지 모른다는 얘기네. 기대되는걸.”

“허허. 진심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섬랑만큼은 아니지만 민이도 그러고 있지요.”

“나민? 걔는 또 왜?”

“오늘 지존께서 칭찬을 해주셨다고 자랑하더군요.”

“그런 성격인지는 몰랐는데.”

“아니지만 지존께 칭찬을 들으니 바뀐 겁니다. 지존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지요.”

귀곡자의 확신에 찬 말에 정광은 턱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으음. 그렇단 말이지. 몇 번 더 억지로 칭찬해 주면 써먹기 더 편해지려나.”

귀곡자가 기겁하며 말렸다.

“총명한 아이라 역효과만 날 겁니다. 마음이 갈 때만 그래 주십시오.”

“그러지 뭐. 나도 그게 더 편해.”

“감사합니다. 그런데 민이가 말하길, 오늘 큰일이 있었다고…….”

“잠깐.”

정광은 객잔과 통하는 문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마침 올 사람들이 왔네. 편하게 한 번에 말해줄게.”

잠시 뒤.

밖에 일을 보러 나갔던 흑서와 민현유가 문을 열고 나왔다.

뒤이어 단영도 나왔는데 안색이 나쁜 편이었다.

정광은 단영에게 명했다.

“현로가 귀곡자인 건 짐작하고 있었을 테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다 아니까 편하게 말해.”

단영은 살짝 당황하다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네, 지존. 지존께서 대연무장에서 나가신 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예기주 양방은 뻔한 말을 하다가 비무대에서 내려갔습니다. 연휘준과 마뇌도 바로 떠났고 말입니다.”

“그다음엔 뭔가 있었다는 말 같네.”

“그렇습니다.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정광은 두 손바닥을 비비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누가 칼춤이라도 췄어? 몇 놈이나 죽었는데?”

“비슷합니다. 사망자는 넷입니다.”

“에게? 겨우?”

정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실망하자 단영이 긴장한 얼굴로 조곤조곤 설명했다.

“관 숙수가 네 명을 죽인 것보다 지존께서 아극소연가 소가주 연규종을 무참하게 구타하셔서 난리가 났습니다. 호교당 삼향주 곽상이 연규종을 연옥(煉獄)에 처넣은 것도 한몫했지요.”

흑서와 민현유는 입을 떡 벌렸으나 정광은 시큰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또 뭐라고. 다른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네.”

“……죄송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단영은 있는 그대로 고했다.

“아극소연가주 연혁소는 소식을 듣자마자 식솔들에게 셋째 아들 연규서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호교당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는데 표정이 영 안 좋은 게 쉽게 넘어가진 않을 기세였습니다.”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다가 씩 웃었다.

“차라리 벽을 보며 얘기하는 게 낫지. 곽상한테 아무리 따져봐야 소용없을걸.”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역시 곽상이라고 감탄하며 그렇게 떠들었습니다.”

“연혁소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 테니 곽상의 직속상관인 호교당주(護敎堂主)에게 가겠지.”

“호교당주가 연규종을 풀어줄까요?”

“마음이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러지 못할 거야.”

“현 교주인 연휘준이 곽상의 성품을 빤히 알면서도 내치지 않고 있으니 그 눈치를 보느라 못 할 거란 말씀이군요.”

“응. 연혁소는 그걸 알면서도 일단 찔러나 보는 거고. 그래야 아비한테 얘기가 들어갈 거 아냐. 부정(父情)에 호소해서 수감 기간과 처벌 수위라도 줄이려고 하는 거지.”

단영이 이맛살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연휘준의 성품을 생각하면 아들의 청을 받아들일 확률이 높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정광도 동의했다.

“당연하지. 곽상을 이용해서 자신의 공명정대함을 내세우려고 하는 놈이 그럴 리 있나. 더구나 첫째보다 셋째가 더 뛰어난 인재라는 걸 알게 됐잖아.”

“연혁소가 크게 실망하겠군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러는 것일 테니 그렇지도 않을걸. 오히려 이 기회에 마음을 단단히 먹을 거야.”

정광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이쯤 되면 아비와 연을 끊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등에 칼을 꽂게 될지도 모르지.”

“……아!”

단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되도록 안배하신 겁니까?”

“무슨 소리.”

정광은 당당히 설명했다.

“진인사대천명. 나는 미끼만 풀었을 뿐 하늘이 이렇게 만든 거야. 공짜로 비수가 생겼으면 감사히 써야겠지?”

“그, 그렇습니다.”

“뭐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정광은 흑서와 민현유를 번갈아 봤다.

“오늘의 성과를 얘기해 봐.”

꿀꺽.

두 사람은 마른침을 삼키고 명을 받들었다.

“네, 지존!”

* * *

단영은 해가 떨어지자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정광 일행은 일 층에 모인 뒤 한 탁자에 둘러앉았다.

점소이들이 탁자가 휘어지도록 요리를 내왔다.

정광은 흡족한 얼굴로 감상하다가 민현유에게 물었다.

“갑자기 웬 진수성찬이야?”

“섬랑이 내일 잘 싸우길 바라며 준비해봤습니다.”

“저런. 당사자는 입맛이 없는 것 같은데.”

모두의 시선이 섬랑에게 모였다.

섬랑은 멍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네? 왜요? 왜 쳐다보세요?”

정광이 대표로 말했다.

“넋이 나가 있어서. 괜찮냐?”

“아!”

섬랑은 머리를 홱홱 저은 뒤 의젓하게 답했다.

“저를 뭐로 보시고. 물론이죠.”

“정말 괜찮아?”

“그렇다니까요. 이렇게 쌩쌩한데 무슨. 식기 전에 빨리 드시죠. 아, 어서요.”

섬랑이 젓가락을 들고 요리를 집으려고 하는데.

정광이 부드럽게 충고했다.

“힘들지? 억지로 의연한 척하지 않아도 돼.”

“……!”

옥당에 품고 있는 마귀와 싸우다가 희롱만 당한 듯한 느낌에 좌절하고 있었건만, 이런 따뜻한 위로를 받다니!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면 이런 기분일까?

섬랑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대인.”

정광의 목소리가 더 따뜻해졌다.

“그래. 죽음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는데 음식이 넘어가겠어? 차라리 술을 줄까?”

“……대인!”

섬랑은 소리를 빽 지르고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흥! 죽기는, 오물오물. 누가 죽어요? 우물우물. 죽는 건 손강, 꿀꺽. 그 녀석이에요.”

“그래, 그렇게 될 거야.”

“아 진짜! 이길 수 있는데 왜 자꾸…… 네?”

정광은 섬랑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대충 쓰다듬었다.

“놀림을 당했다고 힘 빠지면 안 돼. 너도 놀리면 되잖아. 뭐가 두려워?”

“……아!”

“나한테 그러라는 말 아니다. 알지?”

당연한 소리.

빌어먹을 마귀 놈을 얘기하는 것 아닌가!

섬랑은 힘차게 외쳤다.

“네! 잘 알아요! 아야!”

정광은 섬랑의 머리를 쥐어박고 나무랐다.

“귀 찢어지겠다. 꼭꼭 씹어먹어.”

“헤헤. 네.”

“술은 안 돼.”

“당연하죠. 내일 제가 우승하고 다 같이 축배를 들어요.”

섬랑은 마귀와 싸우다가 이를 너무 세게 물어서 아픈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먹었다.

사람들은 섬랑을 응원하며 기운을 북돋웠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자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정광은 홀로 후원으로 나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암흑 속에서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어야 할 별들이 구름에 가려져 흐릿하게 빛났다.

‘꼭 자연지기(自然之氣) 같네.’

잡힐 듯 말 듯 흐릿한 게 정말 똑같았다.

‘까다롭기는. 완전히 깨우쳤는데 별것 아니면 화내주마.’

다음 날 아침.

정광은 침상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햇살과 바람이 밀려 들어와 정광을 부드럽게 감쌌다.

‘……괜찮네.’

햇볕은 한결 따사롭고 바람은 다소 약해진 포근한 날씨.

봄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다.

‘좋아.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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