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11화
상관없어
정광은 해맑게 웃었다.
“슬슬 지겨워지네. 그냥 검으로 촘촘히 쑤실까?”
총단 경비를 책임지는 호교당 무인들은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젠 검으로 쑤시겠다고?’
‘그것도 촘촘히?’
자신들이 아직 오지 않았으면 모를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병기를 뽑아 들고 경고했다.
“발로 밟는 것도 검으로 찌르는 것도 안 되오.”
“향주(香主)께서 곧 오실 테니 얌전히 기다리시오.”
그들이 언급한 향주는 정광이 아는 자였다.
삼향주 곽상이 놀라운 속도로 달려와 정광을 응시했다.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정광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았다.
‘이놈이 올 줄은 몰랐는데.’
뭐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쉽게 매듭지을 기회였다.
“누구신가 했더니 삼향주님이셨네요. 정문을 지키시던 분이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교대하고 호교당으로 가던 길이다. 너는 이곳에 무슨 일로 온 게냐?”
“멸혼생사투가 끝나서 신전으로 가던 길이었는데요.”
“그럼 조용히 갈 것이지, 왜 이런 소란을 일으켰지?”
정광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연규종을 가리켰다.
“억울하게 왜 이러세요. 이 사람이 신성한 총단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어서 하늘을 대신해 천벌을 내렸을 뿐이에요.”
“천벌이라…….”
곽상은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연규종을 뒤집고 얼굴에 묻은 게거품을 털어냈다.
“아극소연가 소가주군.”
“어? 그렇네요.”
“너와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아는데. 그인지 모르고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냐?”
그럴 리가.
그래도 그렇다고 하는 게 더 편했다.
정광은 연규종을 걷어차는 시늉을 했다.
“제 일행을 죽이려 하는 걸 멀리서 보고 달려와 이렇게 했거든요. 땅바닥에서 나뒹굴다가 엎어지길래 계속 밟았고요. 그래서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어요.”
“그럴듯한 변명이구나.”
“사실인데요.”
“그럼 아극소연가 사람이란 것도 몰랐겠군.”
정광은 얕은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설마요. 화려한 녹의(綠衣)를 걸치고 허리춤에 장검을 찼잖아요. 제가 무슨 맹인도 아니고. 당연히 알아봤죠.”
곽상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다른 질문을 했다.
“아극소연가 소가주가 왜 네 일행을 해치려고 한 것이지?”
왜긴.
이유야 뻔했으나 직접 설명하기 귀찮았다.
“해를 당할 뻔한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보죠.”
정광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 따라온 자오와 섬랑이 나민을 안정시키고 관엽을 응급처치하고 있었다.
직접 만든 금창약을 섬랑에게 던져주고 나민을 불렀다.
“관 숙수는 설명 같은 걸 할 상황이 아니네. 나 소저.”
“네, 진혼.”
“힘드시겠지만 이리 와서 증언 좀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안색이 다소 창백해진 나민이 다가와 사정을 설명했다.
연규종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가 관엽에게 누명을 씌우고 관엽은 물론이오, 나민까지 죽이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정광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했다.
“일전에 나 소저에게 치근덕거리다가 차이고서 복수를 맹세하더니 그걸 정말 실행해? 그것도 떼거리로? 이런 옹졸한 놈을 봤나! 더 두들겨 패줬어야 하는데!”
구경꾼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팰 만큼 패놓고 뭐?’
‘이미 넝마처럼 되어버렸잖아. 더 때릴 곳이 있긴 한가?’
곽상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만. 더 때리면 죽는다.”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안타깝지만 별수 있나요. 죽을 짓을 했으면 죽어야죠.”
“내가 온 이상 안 된다. 그리고 나는 한쪽 말만 듣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야.”
곽상은 구경꾼들에게 다가가 절도 있게 포권했다.
“귀하들의 협조가 필요하오. 어떻게 된 일인지 증언해 주시오.”
“……!”
사람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곽상이 어떤 위인인지 익히 알아서였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 앞뒤가 꽉 막힌 영감에게 걸리다니.’
‘거부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나까지 잡아들일 게 뻔하잖아.’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곽상은 딱딱한 성품만큼 대단한 무공으로 명성이 높았다.
다른 방법이 있나.
보고 들은 대로 털어놔야지.
연규종이 나민을 죽였으면 앞날을 고려해서 연규종을 편들었겠지만, 나민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지금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사람은 없었다.
“어, 어떻게 된 일이냐면…….”
곽상은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묵묵히 듣다가 예를 표했다.
“협조해 줘서 고맙소.”
“별것 아니외다.”
“추후 미심쩍은 점이 발견되면 다시 찾을 테니 그때도 잘 부탁드리오.”
“…….”
구경꾼들은 속으로 탄식했다.
‘정문을 지키며 우리의 신분을 다 외웠다 이거지?’
‘정말 지독한 영감이구나. 사실대로 말하길 잘했어.’
다음은 연규종의 수족 중 아직 살아 있는 두 사람의 차례였다.
호교당 무인들 때문에 도주하지 못하고 있던 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곽상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눈이 퉁방울처럼 튀어나온 장년인을 주시했다.
“독비귀도가 너를 암기로 암습한 게 사실이냐? 네가 그렇게 주장했다고 들었다. 어서 대답해라.”
“…….”
장년인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연규종이 기절하지 않았으면 그가 직접 상대했을 텐데 자신에게 화살이 겨눠진 것 아닌가?
‘망할. 이런 경우까지 생각해 보지는 않았거늘 이게 무슨 꼴이야?’
장년인이 망설이자 곽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다섯을 세마. 그 안에 답해라. 하나.”
장년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만약 숫자를 다 셀 때까지 대답을 안 하면?
이 고지식한 늙은이가 어떤 짓을 할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에라, 모르겠다. 소가주 새끼가 나중에 막아주겠지.’
장년인이 순간적으로 생각을 굴리고 말을 뱉으려 하는데.
정광이 전음을 보냈다.
-소가주님을 보세요. 이렇게 망신을 당했는데 아극소연가에서 잘했다고 칭찬할까요?
‘……!’
그럴 리 있나.
“둘.”
-마침 오늘 셋째 공자가 멸혼생사투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죠. 모두 훌륭한 인재라고 칭찬했어요.
‘……!’
확실히 그랬다.
“셋.”
-그런데 이런 사고가 났으니 가주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저라면 대공자를 내치고 셋째 공자를 소가주로 세울 텐데.
‘……!’
누구나 그러리라.
“넷.”
-이제 숫자가 하나밖에 안 남았네요. 증인이 이렇게 많은데 구멍 난 배에 꿋꿋이 타고 있다가 같이 침몰하면 쓰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할게요.
‘…….’
고민은 짧았다.
장년인은 곽상이 ‘다섯’을 세기 전에 다급히 외쳤다.
“사, 사실이 아닙니다! 저 스스로 그랬습니다!”
곽상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왜 그런 짓을 했지?”
기호지세(騎虎之勢)!
장년인은 연규종의 보복 따위를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길을 정했으니 끝까지 달려야 했다.
“소가주가 나 소저를 연모하다가 크게 망신을 당하고…….”
장년인은 정광이 짧게 했던 얘기를 아주 자세히, 매우 실감 나게 늘어놨다.
곽상은 끝까지 들은 뒤 손목이 잘린 청년에게 시선을 옮겼다.
“위증죄는 무겁다. 사실이냐?”
“……!”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긴 하지만 인정하면 연규종의 눈 밖에 날 것 아닌가?
장년인이 눈을 부라리며 재촉했다.
“어허! 자네 뭐 하는가? 큰 화를 당하기 전에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게. 어서.”
정광은 연규종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쯧쯧. 깨어나면 가주님한테 많이 혼나시겠네. 처벌은 처벌이고. 앞으로 용돈은 제대로 받으시려나.”
“……!”
청년은 그제야 머릿속이 환해졌다.
곧 돈이 끊기는 걸 넘어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 모를 물주는 당장 버리고 몸을 보전해야 했다.
“저, 전부 사실입니다.”
곽상이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맹세하느냐?”
“무, 물론입니다. 거짓으로 밝혀지면 저를 처벌하십시오.”
“흐음.”
곽상은 청년을 쏘아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싸움을 벌인 양측과 목격자들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상황.
총단 사람을 해쳤으면 전부 잡아들여야 했으나 외인들 간의 분쟁이니 잘못한 쪽만 처벌하면 됐다.
“일조장.”
곽상의 수하가 몸을 바르게 세웠다.
“네, 향주.”
“시체들을 깨끗이 치우고 정리해라. 살아 있는 놈들은 연옥(煉獄)에 처넣고.”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연규종은 기절한 상황이라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손목이 잘린 청년과 눈이 큰 장년인은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어느 정도 처벌을 받는 거야 각오하고 있었으나 악명 높은 뇌옥인 연옥에 집어넣다니?
“저, 저희 죄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소가주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썼을 뿐입니다. 더구나 사람이 죽은 건 저희 쪽 아닙니까? 상대는 무사하니 손가락이나 발가락 두세 개만 자르고 끝날 일인데 연옥이라니…….”
곽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형벌 규정을 꿰고 있구나.”
“헉!”
“평소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그런 것이지?”
“…….”
“흉수로 지목받은 자가 깨어나면 너희와 대질 신문을 할 것이다. 지금껏 증언한 게 사실로 밝혀지면 너희는 가벼운 처분만 받게 될 테니 그와 함께 얌전히 처박혀 있어라.”
장년인과 청년은 물론이오, 구경꾼들까지 입을 떡 벌렸다.
‘그와 함께?’
‘설마 아극소연가 소가주도 연옥에 집어넣겠다는 건가? 교주의 손자를?’
‘고지식한 게 아니라 미쳤군! 완전히 미쳤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럴 일이 없었을 뿐, 곽상은 원래 그런 자였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정광은 손뼉을 치며 칭찬했다.
“일 처리가 시원시원하시네요. 저희는 정당방위였으니 가도 되죠?”
“그렇다.”
“그럼 수고하세요.”
“단.”
“네?”
“네가 사고를 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랬을 시 용서하지 않을 테니 잘 처신해라.”
“하하. 저를 뭐로 보시고.”
정광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는 조용한 걸 좋아해요. 먼저 손을 쓰는 일은 거의 없으니 안심하세요.”
곽상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러길 기대하마.”
* * *
정광은 일행과 함께 산에서 내려갔다.
섬랑이 부지런히 걷다가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더러운 수나 쓰고 말이야. 깡그리 죽여야 분이 풀릴 것 같은데. 대인, 어떻게 복수하실 거예요?”
정광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섬랑은 두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손은 왜요?”
“내놔.”
“뭘요?”
“좀 맞아야겠네.”
“아! 기억났어요.”
섬랑은 품속에서 정광의 금창약을 꺼내 돌려줬다.
정광은 목갑을 열어서 안을 확인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이 귀한 걸 왜 이렇게 많이 썼어? 관 숙수를 그렇게 아끼냐?”
섬랑이 코웃음 쳤다.
“흥. 농이 심하시네요. 제 것이 아니라 그랬을 뿐이에요.”
“관 숙수에게 바른 것이니 이번은 넘어가 줄게.”
“뭐예요 진짜! 저한테 바르는 건 그렇게 아끼셨으면서! 차별이 너무 심하잖아요!”
“이거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네.”
정광은 사람들을 먼저 내려 보내고 섬랑을 노려봤다.
섬랑이 겁먹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순간 너무 서운해서 그만…….”
“그깟 금창약이 무슨 대수라고.”
“네?”
정광은 손가락으로 섬랑의 중단전 옥당(玉堂)을 살짝 찔렀다.
“훨씬 귀한 걸 줬는데 고마운 줄을 모르네.”
“……!”
그곳에 심어준 마혼(魔魂)의 파편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일 싸움에서 이길 비책, 진인사대천명이라 했지?”
“네.”
“그걸 쓰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해. 하늘의 뜻은 네 의지에 달렸으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단단히 다져둬.”
섬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魔)에 잡아먹힐까 봐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정광은 피식 웃었다.
“그것과 비교할 만한 마는 아니었지만 네가 이긴 오경도 해냈는데 왜 겁을 먹어?”
“아!”
“고향에 돌아가 네 명을 기다릴 화전오가에게 부끄럽지도 않아? 그들의 희망을 죽여놓고 그보다 못한 꼴을 보이고 죽어버릴 거야?”
섬랑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힘주어 부정했다.
“설마요. 절대 그럴 일은 없어요.”
“그래. 그래야지.”
“빨리 가죠. 할 게 많아요.”
두 사람은 빠르게 내려가 일행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향리객잔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정광은 한동안 달리다가 나민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오늘은 성녀님과 얘기가 빨리 끝났네요?
-글로 적어서 드렸습니다. 오늘 검토하고 내일 답을 줄 겁니다.
-그게 더 편하긴 하죠. 수고하셨어요.
-별말씀을.
-홀로 도주하지 않고 관 숙수와 함께 싸우며 시간을 번 걸 칭찬하는 거예요.
-당연한 판단이었습니다.
-아뇨. 모사(謀士)란 자들은 보통 그러지 않죠. 자신의 안위가 걸리면 머리가 다른 쪽으로 돌거든요.
정광은 나민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나 소저는 모사가 아니라 더 나은 자가 될 거예요.
-…….
다른 이도 아닌 진혼의 칭찬이라.
나민은 가슴이 뿌듯해졌다.
정광은 관엽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지존. 그보다 소인이 불민해서 아극소연가와 마찰이 생겼습니다. 소인 때문에 지존과 아극소연가주의 관계가 안 좋아지게 됐는데…….
-상관없어.
관엽의 눈이 커졌다.
-……네?
-그럴 리도 없고.
정광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전음을 이었다.
-객잔에 가면 네 상태를 보고 금창약을 더 바르든 내공을 써서 치료해 주든 할 테니 도착하자마자 씻기부터 해.
-……감사합니다.
관엽은 가슴이 뿌듯해지는 걸 넘어 터질 것처럼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