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81화 (480/569)

2부 210화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

관엽은 나민과 함께 대연무장으로 향하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자들을 보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무리 중앙에서 걷는 자의 용모를 확인하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연규종! 하필이면 저 녀석을 만나다니.’

나민에게 치근덕대다가 냉대받고 복수를 맹세한 아극소연가 소가주.

지존이 자리를 비우고 홀로 나민을 호위하고 있는 지금, 저 속 좁은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머지 여섯은 복장이 가지각색인 걸 보면 연규종에게 빌붙어 사는 녀석들인 것 같은데.’

오만한 연규종이 데리고 다닐 정도이니 실력까지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리라.

나민도 약하진 않으나 머릿수에서부터 너무 차이가 나는 상황.

‘그래도 대놓고 일을 벌일 만큼 경우 없는 놈은 아니야.’

연규종은 지존께 큰 망신을 당했고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미 소문이 널리 퍼졌을 터.

그런 와중에 총단에서 소란을 일으켜 봐야 본인의 평가만 떨어질 테니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게 현명한 처사였다.

‘이쪽도 그래야 해.’

나민에게 주의를 주려고 하는데.

총명한 그녀는 벌써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좋아. 이대로 가면…….’

아니었다.

갑자기 연규종이 진득한 살기를 발산하는 것 아닌가?

피가 싸늘히 식었다.

‘조용히 넘어가긴 글렀구나.’

마음을 정하고 나민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가 도를 뽑으면 바로 신전으로 달려가 몸을 숨기게.

-홀로 시간을 끄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는가?

나민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관 숙수의 말씀대로 하면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 공산이 큽니다. 허나 함께 시간을 벌면 둘 다 살 수도 있지요. 오늘의 생사투는 두 번밖에 안 됩니다.

지존께서 곧 오실 거라는 의미.

냉정하게 보면 옳은 얘기였으나 관엽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네는 섬랑을 보필하며 본교를 이끌어갈 중요한 인재야.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자네의 안위를 진혼이 내게 부탁했네.

나민이 뭐라 하려 했으나 관엽이 더 빨랐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 했고 진혼은 관 숙수니까 믿는다고 했지.

그때 느꼈던 감동과 의무감이 다시 떠올랐다.

-놈들이 다가오고 있네. 기회는 지금뿐이니 어서 가게나. 나는 진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해.

관엽의 전신에서 뜨거운 투지가 피어오르는데.

나민이 찬물을 퍼부었다.

-제 능력과 입장은 완전히 무시하시는군요. 저곳으로 가시지요.

-저곳이라니?

곧 알 수 있었다.

나민이 담벼락 쪽으로 향하는 것 아닌가?

관엽도 따라갈 수밖에.

담벼락을 등지고 우뚝 선 나민을 나무랐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나민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봉들을 하나씩 돌려 껴서 길게 이어 붙였다.

그리고 끝에 창날을 연결하자 훌륭한 장창이 되었다.

-앞에서 적을 상대하십시오. 뒤에서 지원하겠습니다.

더 따질 겨를이 없었다.

적들이 달려와 반원을 그려 두 사람을 포위했다.

관엽은 연규종을 노려보며 무겁게 물었다.

“왜 우리를 핍박하는 겐가?”

연규종은 약간 투명해진 눈으로 관엽을 응시하다가 나민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나 소저, 나를 보고 왜 장창을 조립했소? 나를 해하려는 것이오?”

나민은 담담히 부정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그랬소?”

“이쪽으로 방향을 바꿨는데도 따라오시길래 불안해서 그랬습니다.”

“인사를 하려고 온 것뿐인데 너무 예민하시구려.”

“살기로 인사를 하시는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하셨으니 가시면 되겠군요.”

“하하. 그건 너무 정이 없지. 일전의 오해를 풀고 가야겠소.”

“어떻게 말입니까?”

“대화밖에 더 있겠소? 차근차근 얘기해 봅시다.”

연규종의 눈이 더 투명해지고 살기도 짙어졌다.

미리 정해놓은 것인지 눈이 퉁방울처럼 튀어나온 장년인이 관엽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보시오, 외팔이 양반. 우리에게 무슨 불만이 있길래 그렇게 눈에 힘을 주오?”

관엽은 냉랭히 답했다.

“내 눈은 원래 이렇다. 그러는 너희는 무슨 마음을 품고 있길래 병기에 손을 대고 있느냐?”

장년인이 허리춤에 찬 도를 툭툭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귀하가 투지를 일으키고 있어서 겁을 먹어 그러오. 오해가 있으면 말로 풉시다. 그게 서로에게 좋은 일…… 헉!”

장년인이 왼쪽 어깨를 다급히 부여잡고 뒷걸음질 치더니 무언가를 뽑아냈다.

그의 손에는 피에 젖은 암기가 들려 있었다.

장년인의 눈이 더 커졌다.

“암기로 암습을 하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관엽은 묵묵히 도신(刀身) 폭이 좁은 기형도를 뽑았다.

기형도가 뿜어내는 섬찟한 예기(銳氣)와 관엽의 스산한 음성이 차갑게 어우러졌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군. 번거롭게 떠들지 말고 와라.”

“이 병신이 감히! 오라면 못 갈 줄 아냐?”

장년인이 도를 꺼내 휘둘렀다.

관엽은 당당히 맞섰다.

단 일격에 상대의 도가 두부처럼 잘렸다.

장년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미친! 꼴에 보도(寶刀)를 가지고 있구나! 모두 한꺼번에 덤벼!”

사내들이 관엽에게 병기를 내질렀다.

관엽은 피하지 않고 그 병기들을 노렸다.

사내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물러났다.

“젠장! 무슨 자신감인가 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군!”

“그렇게 대응하면 너를 죽이지 못할 것 같냐?”

사내들이 치고 빠지기 시작했다.

관엽은 다수의 적을 연이어 상대하게 됐다.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당사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존이 내려줬던 가르침을 따랐다.

‘집중력을 유지한 채 막을 수 있는 건 막고 꼭 피해야 할 것만 피한다.’

뒤에 나민이 있으니 전부 막아야 할 수도 있으나 상황을 봐서 대응하면 되리라.

‘빨리 승부를 내려고 서두르면 안 돼. 기회가 오면 치명상을 먹인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한 사내가 관엽의 머리를 구환도(九環刀)로 찍으려다가 관엽이 기형도를 휘두르자 급급히 물러나며 틈을 보였다.

‘심장을 뚫는다!’

허나 관엽은 도를 뻗지 않았다.

지존께 가르침을 받은 뒤 명상을 통해 얻은 깨달음 때문이었다.

‘신중하게. 함정일 수도 있어.’

지금의 관엽은 뼈를 내주고서라도 살을 베는 독비귀도(獨臂鬼刀)가 아니었다.

최소한의 피해를 입으며 적을 제거해야 했다.

그게 바로 지존이 그에게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 역시 함정이었군.’

물러선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장 얼굴을 뭉개주고 싶었으나 다른 적들이 공격해 왔다.

관엽은 그들을 상대하며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내들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변방에서 굴러먹던 놈이 이렇게 굳건할 줄이야!’

‘이 빌어먹을 외팔이가! 평생 기본기만 파왔나?’

관엽은 어렸을 때 오른팔이 잘린 뒤 지존이 창안해서 내려준 좌수도(左手刀)만 수련했다.

그것이 기본기이자 절기.

지존이 토대는 넘칠 만큼 다졌으니 기본에서 벗어나 융통성 있게 싸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길까지 열어줬고.

관엽은 섬랑을 수련시키며 체득한 멸살법의 무리(武理)를 좌수도에 적용했다.

너무 나이가 들어 큰 성과는 못 볼 거라는 걸 알면서도 부단히 노력해 온 것이었다.

오직 지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애써온 보람이 있는지 간결했던 도법에 변화가 생겼다.

관엽은 그 도법으로 반격했다.

사내들이 화들짝 놀라 분분히 물러섰다.

한 청년이 깨끗이 잘린 손목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아악! 내 손! 내 손이 없어졌어!”

“망할! 어서 물러나서 지혈해!”

“외팔이가 간간이 기이한 도법을 쓴다! 모두 조심해라!”

지켜보던 연규종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원래 계획은 관엽을 몰아붙여서 나민이 끼어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도 나서서 두 사람을 전부 죽이려고 했는데 관엽 한 명조차 어찌하지 못하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

눈이 큰 장년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대로 가다간 아무런 성과 없이 욕만 먹을 걸세. 손해를 각오하고 없애야 해.

한산한 곳이었으나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없었으면 왜 장년인이 자기 몸에 암기를 박고 암습당한 척했을까.

그런데 싸우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총단 경비를 책임지는 호교당(護敎堂) 무인이 오면 당장 싸움을 멈추게 할 터.

그 전에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의미였고 분명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눈이 큰 장년인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개새끼를 봤나! 동귀어진(同歸於盡)할 각오로 목숨을 내던지라고? 그간 네놈을 그렇게 떠받들어 온 우리에게 그게 할 말이냐?’

반발심이 솟았으나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런 물주를 또 구하긴 힘들뿐더러 한번 눈 밖에 나면 어떤 보복을 당하게 될지 몰랐다.

‘할 수밖에 없으면 확실히 해야 해!’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상대를 어떻게든 죽여야 우리가 산다는 암어였다.

“이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놈을 봤나! 하늘을 대신해서 우리가 천벌을 내리세!”

“……!”

사내들은 평소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장년인의 말을 알아듣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리고 방어를 도외시하고 관엽을 공격했다.

관엽은 눈살을 찌푸리며 기형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한 손으로 열한 개의 손을 막는 건 힘겨웠다.

시간이 갈수록 상처가 늘어났다.

‘궁지에 몰리기 전에 피해야 해!’

뒤에 있는 나민에게도 신형을 날리라고 언질을 주려는 그때.

나민이 전음을 보냈다.

-주먹코, 옆구리!

관엽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주먹코 사내의 옆구리를 향해 도를 그었다.

사내는 피하지 않았다.

도를 몸으로 받아내고 동료들이 공격할 틈을 만들려 했다.

‘흐흐. 옆구리가 갈라져도 몇 달만 정양하면 괜찮…….’

그때, 관엽의 겨드랑이 밑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기형도에 신경을 쏟고 있던 사내는 나민의 장창에 목이 뚫려 핏물을 뿜어냈다.

“커헉!”

나민은 장창을 당겼다가 다른 쪽으로 내지르며 전음을 보냈다.

-난쟁이, 다리!

나민의 장창이 키가 제일 작은 사내의 가슴을 노렸다.

사내는 허리를 틀어서 피하다가 관엽의 기형도에 다리가 잘려 쓰러졌다.

관엽은 크게 감탄했다.

‘대단하구나! 이게 그 특별한 능력인가?’

나민이 또 능력을 발휘했고 관엽은 한 놈 더 거꾸러뜨리게 되었다.

처음에 손목이 잘린 놈이 지혈을 하고 합세했으니 그놈을 포함해 셋만 남은 상황.

이 정도면 곧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민이 비틀거리며 말했다.

“더, 더 이상은 힘듭니다.”

심력을 다 써버렸다는 얘기였다.

관엽은 경의를 담아 답했다.

“정말 수고했네. 덕분에 편하게 됐어.”

말뿐만이 아니었다.

관엽은 남은 자들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한 놈을 또 죽이자 관엽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지존의 가르침으로 지존이 하사한 병기를 써서 사람을 자르는 감촉이란.

짐승을 사냥할 때 느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이놈들은 어떤 부위를 어떻게 요리할까?’

관엽은 노련한 숙수였다.

식재료들은 결국 칼질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려타곤(懶驢打滾)의 수법으로 땅바닥을 뒹굴었다.

관엽이 전진해서 놈들의 수급을 취하려는 순간.

연규종이 나섰다.

관엽의 측면으로 빠르게 다가와 검을 그었다.

검이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관엽의 상반신을 노렸다.

아극소연가 소가주다운 매서운 수였다.

관엽의 건조한 눈에서 검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드디어 왔구나!’

마기를 개방해 기형도에 담았다.

기형도가 멸살법(滅殺法) 제일식의 투로(鬪路)를 따라 힘차게 나아갔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방어를 도외시하고 모든 걸 쏟아붓는 살초(殺招)였다.

연규종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

상대를 죽일 순 있으나 자신도 죽을 판 아닌가?

저깟 버러지와 아극소연가 소가주의 목숨값이 같을 리 있나.

보법을 밟아 옆으로 피한 뒤 숨통을 끊으려 하는데.

기형도가 급격히 방향을 틀어 왼쪽 어깨를 노렸다.

다급히 검을 들어서 막자 귀를 찢는 듯한 소음이 터졌다.

곁눈질로 검을 살피니 생채기만 난 상황.

자신의 검에 자신감을 가지고 반격하려 했으나.

기형도가 어느새 기이한 원을 그리며 반대쪽 어깨를 베려고 했다.

‘어떻게 이런 움직임을! 사술인가?’

두 눈을 부릅뜨고 물러나는데 이번엔 무릎을 절단하려고 했다.

다시 보법을 밟는데 또 변화를 일으켜 배를 노리는 것 아닌가?

‘이 새끼가 진짜!’

눈앞의 외팔이는 차륜전(車輪戰)을 상대하며 살육을 벌인 후에도 칠대가문의 소가주를 능히 죽일 수 있는 강자였다.

연규종은 현실을 인정하고 손해를 감수하기로 했다.

기형도는 상관치 않고 적의 목을 노렸다.

중상을 입더라도 반드시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두 사람의 병기가 서로를 해치려는 순간.

“어떤 놈이 총단에서 행패야?”

누군가가 달려와 연규종의 배를 걷어찼다.

퍼엉!

“커억!”

연규종이 허리를 새우처럼 굽히고 날아가는데 배를 걷어찼던 자가 유성처럼 날아와 발뒤꿈치로 어깨를 내려찍었다.

“신성한 총단을 더럽힌 천벌이다!”

빠각!

“크악!”

연규종은 어깨를 움켜쥐고 바닥을 나뒹굴다가 죽은 듯이 엎어졌다.

그런 그의 등에 무수한 발자국이 새겨졌다.

정광은 연규종을 잘근잘근 밟으며 훈계했다.

“팔이 하나밖에 없는 분을 핍박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마인이냐?”

구경하던 사람들이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대체 어떤 놈이길래 이런 행패를 부린 거야?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 죽고 싶은 거야? 응?”

“끄르륵…….”

연규종의 입에서 흘러나온 게거품이 바닥을 잔뜩 적실 때쯤 되자 호교당 무인들이 달려와 날카롭게 경고했다.

“그만! 더 이상의 싸움은 허할 수 없소.”

“계속 손을 대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순식간에 장내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버렸다.

정광은 정중하게 포권한 뒤 하던 일을 계속했다.

“싸움이 아니라 구타라 다행이네요.”

뻑! 뻐억!

“…….”

뭐?

“손이 아니라 발을 쓰고 있던 것도 그렇고요.”

빡! 빠각!

“…….”

그걸 말이라고!

호교당 무인들과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리고 정광은 해맑게 웃었다.

“슬슬 지겨워지네. 그냥 검으로 촘촘히 쑤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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