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07화
시원시원하게
정광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늦은 시간에 이런 우연이 있나. 안녕하세요, 가주님. 혼자라 적적했는데 같이 술 한잔하시죠.”
연혁소는 정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겨 맞은편에 앉았다.
“야밤에 통보도 없이 방문했는데도 반겨줘서 고맙네.”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극소연가주(阿克蘇燕家主)님이신데 억지로라도 그래야죠. 내 집처럼 편하게 즐기세요.”
“겉치레일 뿐이라고 말해주니 마음이 편해지는군.”
“하하. 제가 정직을 신조로 삼고 있는지라.”
“바람직한 신조이긴 한데…….”
연혁소는 송곳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정광과 옆에 서 있는 민현유를 번갈아 봤다.
“말이 앞뒤가 안 맞아. 조금 전에 혼자라 적적했다고 하지 않았나? 한등민가(汗騰閔家) 소가주는 사람이 아닌가?”
정광은 빙그레 웃고 민현유는 침착하게 예를 취하며 설명했다.
“점소이는 근무 중에 술을 못 마십니다. 그러니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지요. 술상을 준비해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랬군. 잘 부탁하네.”
연혁소는 민현유가 주방에 들어갈 때까지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등민가주가 자식 농사를 잘 지었어.”
정광도 동의했다.
“손님 접대를 잘하는 편이죠. 요리도 웬만한 숙수만큼은 하니 드실 만할 거예요.”
“독비귀도(獨臂鬼刀) 관엽보다 솜씨가 좋은가?”
연혁소의 담담한 물음에 정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잘 아세요?”
“쿠차에서 고차기(庫車伎)라는 객잔을 운영했던 사람 백정이자 숙수라는 것 정도는 아네.”
“가주님처럼 높으신 분이 의외네요. 은근히 한가하신가 봐요.”
“안타깝게도 그 반대일세.”
“저런. 관 숙수가 아니라 현유가 깨어 있어서 다행이네.”
“무슨 말인가?”
“서로 장기가 달라 우열을 논하기 어렵지만 굳이 따지면 식재료나 조리 기구가 적을 때는 소박한 음식을 맛깔스럽게 만드는 관 숙수가, 반대의 경우에는 있어 보이는 요리를 적당히 조리하는 현유가 뛰어나거든요. 드셔 보시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거예요.”
“주어진 환경에 따라 누가 더 나은지 바뀐다는 얘기군.”
“이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죠.”
“자네 말이 옳아.”
연혁소의 눈이 살짝 투명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서 자네를 찾아왔네.”
정광은 씩 웃었다.
“아직 술상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본론으로 들어가시네요.”
“바쁘다고 했잖는가. 내가 올 거란 걸 알고 있었지?”
“설마요.”
“아까 말했던 신조는 그새 어디 팔아먹었나?”
“정직하게 말씀드린 거예요. 가능성을 오할 밑으로 봤으니 모른 거나 마찬가지죠.”
“오할 아래라. 꽤 후하게 매겼군. 나는 일할 정도로 봤네.”
“그건 너무 짠데. 서운하네요.”
“무척 높이 평가한 거지. 원래는 토로번손가가 십할이었어.”
연혁소는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교주 자리를 힘으로 차지하며 적지 않은 원한을 사셨네. 나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해.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정광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이변이 없는 한 멸혼생사투 최종 승자는 손강이 될 테니 토로번손가를 택하겠죠.”
“그래. 상식적으로 보면 그게 맞아.”
연혁소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그 박자에 맞춰 말했다.
“오 년, 팔 년, 구 년, 혹은 십 년. 그래, 길게 봐야 앞으로 그 정도겠지. 아버님이 귀천하시면 손강은 약관의 나이에 교주가 될 게야. 그 나이에 강해져 봐야 얼마나 강해질까?”
“너무 젊은 나이긴 하죠.”
“승복하지 않는 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지. 그때 손강을 지지하겠다고 미리 약조를 하면 토로번손가 역시 본가를 보호해 줄 걸세. 하지만 문제가 있어.”
“연대가 그리 오래가진 못할 거란 말씀이네요.”
연혁소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토로번손가는 아버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갖가지 궂은일을 다 한 끝에 마도칠대가문의 반열에 들었네. 반란까지 진압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토로번손가주 손재등이 가만히 있을 리 있나. 자신을 부렸던 이의 가문을 가만두지 않을 걸세.”
정광은 손뼉까지 쳐가며 격하게 공감했다.
“그분, 성품이 몹시 나쁘시긴 하더라고요. 아극소연가를 멸문시키려 하실 거예요.”
“……자네 마음에 안 든다고 너무 나가는군. 현실적으로 보면 다양한 압박을 가해서 본가의 세를 축소시킬 게야.”
“손강까지 좋게 보시는 건 아니죠?”
“훗날 교를 장악하면 끝까지 가려고 들지도 모르지. 그래도 다른 방도가 없어 차악(次惡)이라도 선택하려 했는데…….”
연혁소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정광을 뚫어져라 봤다.
“자네가 나타나며 환경이 바뀌었네. 그것도 많이.”
정광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물었다.
“그런데도 제게 일할밖에 안 주신 이유는 뭐예요?”
“‘밖에’가 아니라 ‘이나’라 했네만. 자네 행보를 보면 고이륵단가의 빈객이 아니라 동업자에 가까워. 오로나가의 금지옥엽과 다니는 걸 보면 그들과도 좋은 관계고. 이녕임가도 마찬가지야. 섬랑이 쓰는 병기들, 그들 것이지? 자네 검 중 하나도 그렇고.”
“제가 인복이 좀 있는 편이죠. 안목이 좋으시네요.”
“그게 끝이 아니지. 한등민가 소가주가 자네를 돕고 있네. 자네를 추종하는 일반 교도들도 있어.”
“무슨 추종씩이나. 신조대로 정직하게 돈을 따고 베풀어서 인식이 나쁜 편은 아닌 거겠죠.”
“정체가 수상하나 능력 있는 동료들도 있더군. 그리고 섬랑, 듣던 것보다 빼어난 인재야. 손강을 이기긴 힘들어 보이지만.”
“아. 그러면 그렇지. 섬랑 그 녀석 때문에 제 점수가 대폭 깎인 거였네요.”
“아니. 자네 때문일세.”
연혁소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자네는 묵영권가가 아니라 전대 교주님의 진전을 이은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자네 무위를 설명할 수 없지.”
“하아. 헛짚으시는 분이 또 계시네.”
“마뇌도 그랬나?”
“네. 다행히 오해를 풀어드렸죠.”
“그가 자네를 거두려 했는데 자네가 거부하고 무사히 풀려났다는 얘기가 들리더군.”
“오. 가끔 맞는 소문도 있네요.”
연혁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터무니없는 소리. 마뇌는 원하던 걸 그렇게 쉽게 포기할 자가 아니야. 자신이 품을 그릇이 아닌 걸 알고 아버님께 밀었을 걸세.”
“다시 생각해 보시죠. 지나친 비약이에요.”
“멸혼생사투 때 마뇌는 다른 쪽을 신경 쓰고 아버님께선 자네를 흥미롭게 보셨으니 맞아. 진천마의 후인이라. 분명 자네를 그냥 두시지는 않을 게야. 그런데도 일할이나 준 걸세. 이제 이해했나?”
정광은 빙긋 웃었다.
“그런데 왜 저를 택하신 거죠?”
“…….”
연혁소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숙소에서 나올 때만 해도 토로번손가주를 만나려 했네. 헌데 걷다 보니 이쪽으로 발길이 향하더군. 왜 그런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 향리객잔이 보일 때쯤 결론이 나왔네.”
연혁소의 이마에 파인 주름들이 더 깊어졌다.
“첫째. 자네 같은 변수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걸세. 모험을 하려면 지금뿐이야.”
“둘째는요?”
“고작 이틀 만에 섬랑이 많이 변했더군. 아직도 손강보다 약하지만 이틀 뒤엔 또 얼마나 강해질지 모르는 일 아닌가? 이미 기적을 일으킨 자네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네.”
“그렇게 되길 천신께 기도드려야겠네요.”
“아니. 자네에게 달렸어.”
“부담스러워라. 최선을 다해볼게요.”
“다른 것도 그래야 하네.”
연혁소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
“아버님은 본인의 명예에 오점을 남기기 싫어하시니 누가 소교주가 되든 간에 제대로 키울 걸세. 허나 귀천하시면 자네의 역할이 중요해져. 자네를 중심으로 칠대가문 중 셋이 모였고 본가까지 합세하려 하는데 자네가 죽어버리면 그 연합이 얼마나 가겠는가?”
“저 오래 살 건데요.”
“정말 장수하고 싶으면, 섬랑을 조종해 본교를 다스리고 싶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아나?”
“뒤엣것은 오해지만 오래 살고 싶긴 하니 궁금하네요.”
연혁소가 또박또박 말했다.
“아버님께 납작 엎드리게. 그럼 흥미를 잃으실 게야.”
“교주님이 엎드리시게 하면 안 돼요?”
연혁소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정광을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천신께 기도드려도 힘들 걸세. 쉬운 길이 있는데 불구덩이에 뛰어들려 하는군.”
“정말 해내면요?”
“나보고 지금 복수할 거냐고 묻는 건가?”
“천륜이란 게 있으니까요.”
연혁소의 눈썹이 꿈틀했다.
“인륜이 지켜져야 천륜으로 이어지는 법이지. 헌데 아버님이 직접 그 줄을 끊으셨어.”
과거를 떠올리자 그의 눈이 반쯤 투명해졌다.
“멸혼생사투를 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님께 달려가 여쭸네. 본가에는 우승할 만한 인재가 없는데 어떡하려고 그러시냐고. 누가 소교주가 되든 간에 본가는 힘겨워질 게 뻔하지 않은가?”
“그렇죠.”
“그런데 아버님께서 뭐라고 답하셨는지 아나?”
“세이공청(洗耳恭聽) 할게요.”
“나는 내 일을 하고 있으니 너는 네 일을 하라 하셨네.”
정광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연혁소는 더 화가 나는지 주먹을 슬며시 쥐었다.
“원래 그런 분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정말 그러실 줄이야. 가문을 정말 버리실 거냐고 여쭸지. 허나 괜한 짓이었어.”
“뭐라 하셨길래요?”
연혁소는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했다.
“본좌는 천마신교주다. 아극소연가 일은 가주인 네가 알아서 해라.”
“매정하셔라. 친부가 아니신 것 같네요.”
“친아버님일세.”
“저런. 너무하시네. 가주님께선 아드님들한테 따뜻하게 대하시죠?”
“……어쨌든 자네가 본가를 지켜주면 본가도 자네를 해칠 일은 없을 걸세.”
“시원시원하시네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연혁소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아버님께 굴복하겠다고 약조하게. 자네는 살아야 해. 죽으면 만사휴의(萬事休矣)야.”
“싫은데요.”
“그러면 나는 토로번손가주를 찾아갈 수밖에 없어. 그리고 최선을 다해 싸우고 싶어 하는 내 아들은 내일 실제로 그럴 걸세. 그 녀석이 미욱하긴 하나 섬랑에게 상처를 입힐 순 있지. 그러면 섬랑은 어떤 수를 써도 손강을 이길 수 없을 게야. 그래도 좋은가?”
정광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제가 승낙하면 아드님한테 일부러 지라고 명하실 생각이셨어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건 곤란하죠.”
“……뭐?”
정광은 정색하며 설명했다.
“멸혼생사투는 교주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에요. 그 어떤 걸음보다 잘 내디뎌야 하죠. 그런데 석연찮은 승리를 거두면 어떤 꼬리표가 붙을지 뻔하잖아요. 그런 평판을 받고 어떻게 교를 이끌어요?”
연혁소가 인상을 찡그렸다.
“배부른 소리. 일단 우승해야 할 것 아닌가?”
“신조가 너무 다르네요. 그럼 이렇게 하죠. 섬랑이 우승하고 교주님이 저를 못 죽이게 하면 되는 거죠?”
“그렇네.”
“그럼 지켜보시다가 그렇게 되겠다 싶으면 지지해 주세요. 안 될 것 같으면 없던 일로 하고 토로번손가를 찾아가시고요.”
연혁소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 정말 자신 있나 보군.”
“물론이죠.”
“자네도 자네지만 섬랑의 실력이 그새 더 늘었다고?”
“네.”
연혁소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불쑥 물었다.
“내 아들을 꼭 죽여야겠나?”
“가주께선 교주님과 다르게 인륜을 지키시네요.”
“최소한의 기본은 하려고 하네.”
“보기 좋네요. 안타깝기도 하고.”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연혁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섬랑은 멋지게 이겨야 해요. 그래도 부정(父情)을 봐서 조언 하나 해드리죠.”
* * *
다음 날 아침.
정광은 식사를 마친 뒤 귀곡자의 방으로 가 연혁소와 나눴던 대화를 들려줬다.
귀곡자는 묵묵히 듣다가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연혁소는 마뇌가 곧 죽을 거라 확신해서 그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군요.”
“마뇌가 어떻게 수명을 늘리려고 하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당연한 일이지.”
“소인은 패륜을 부추기려 했는데 지존께선 온정을 베푸셨고 말입니다.”
“말끝마다 아버님, 아버님 하는 게 따를 것 같지 않더라.”
“연혁소는 심성이 괜찮은 편이었으니 지존의 판단이 맞을 겁니다.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칼을 거꾸로 들도록 제가 힘써보겠습니다.”
“응. 나민은 어때?”
“첫 협상은 잘했습니다. 오늘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좋아. 그럼 흑서와 현유를 도우며 기다려.”
“존명.”
정광은 일행을 이끌고 객잔 밖으로 나가 단영 무리와 만났다.
그리고 탁목이봉(托木爾峰)으로 향했는데 어제처럼 일찍 출발했기에 편히 오를 수 있었다.
물론 항상 그랬듯이 검문은 까다로웠다.
정문 경비를 책임지는 호교당(護敎堂) 삼향주(三香主) 곽상은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정광 일행을 들여보냈다.
섬랑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지 투덜거렸다.
“오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네.”
정광이 미소 지었다.
“아까 화전오가(和田吳家)에서 온 것 같던데. 나 소저에게 혼나서 그런 건 아니고?”
“……하아아.”
“땅 꺼지겠다. 몸은 어때?”
섬랑은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활짝 웃었다.
“대인께서 직접 추궁과혈 해주셨으니 최고죠.”
“관 숙수가 하면 별로였나 보네.”
“……어제는 부자지간 같다더니 오늘은 이간질하시네요.”
“네가 어제 극도로 싫어하길래 그러는 거지.”
정광은 나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죠. 생사투가 끝나면 신전으로 갈게요.”
“알겠습니다. 얘기가 빨리 끝나면 저희가 대연무장으로 가겠습니다.”
“그게 낫겠네요. 관 숙수. 나 소저를 부탁드려요.”
“걱정하지 말게.”
정광은 관엽을 응시하며 씩 웃었다.
“네. 관 숙수니까 믿을게요.”
짧은 말이었지만 관엽은 속으로 감동했다.
“고맙네. 이따 보세나.”
관엽은 나민과 신전으로 갔다.
정광은 섬랑, 자오, 단영 무리와 함께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일찍 도착한 덕에 빠르게 천막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섬랑은 살짝 망설이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뭐 하냐?”
정광이 묻자 섬랑은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 명상하는 시늉을 하면 그럴듯해 보일 것 같아서요.”
“긴장돼?”
“……긴장이 뭐죠?”
“네가 느끼고 있는 거.”
“……하아아. 금방 가라앉힐게요.”
섬랑은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정광은 한동안 지켜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하네.’
몸 상태도 좋고 마음가짐도 좋았다.
정광은 섬랑에게서 관심을 끊고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사람이 가득 차 있었고 그 중엔 연혁소도 있었다.
정광은 그를 주시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연혁소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시선을 피했다.
정광은 내심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토로번손가주 손재등이 의심쩍다는 듯이 정광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광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어제처럼 거창하게 천마신교주 연휘준이 등장했다.
그는 교도들의 경배를 받은 뒤 짧게 명했다.
“시작하라.”
“와아아아아!”
마인들이 열광하고 예기주(禮旗主) 양방이 비무대 위에 올라갔다.
“멸혼생사투 본선 두 번째 날! 첫 번째 생사투를 시작하겠소! 이 번 출전자, 묵영권가(黙影權家) 섬랑! 사 번 출전자, 아극소연가(阿克蘇燕家) 연규서! 두 사람은 비무대 위에 올라 마주 서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섬랑의 가문과 별호를 연호했다.
섬랑은 두 귀를 쫑긋거리면서도 눈을 뜨지도 가부좌를 풀지도 않았다.
정광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섬랑의 양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그러면 있어 보일 것 같아?”
“아야, 아파. 놔, 놔주세요. 일어날게요.”
“놨는데 왜 안 일어나? 다리가 저려서 못 일어나겠어?”
“저를 뭐로 보시고. 마무리 좀 할게요.”
섬랑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두 눈을 번쩍 뜨고 힘차게 일어섰다.
정광은 피식 웃으며 섬랑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연규서를 어떤 식으로 상대해야 하지?”
섬랑이 진지하게 답했다.
“집중력을 유지한 채 막을 수 있는 건 막고 꼭 피해야 할 것만 피해요.”
“공격은?”
“빨리 승부를 내려고 서두르지 않아요. 그러다 기회가 오면 치명상을 먹이고요.”
“그래. 시원시원하게 해치워. 내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섬랑은 벽안을 반짝이며 힘차게 답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