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03화
예상 밖의 대응
멸혼생사투 본선은 오시(午時)에서 미시(未時)로 넘어갈 때 열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가만히 보면 참 어중간한 시간대였다.
사람이란 먹어야 살고 먹기 위해 일하는 존재이거늘 하필이면 점심 식사를 할 때쯤에 이 중요한 행사를 시작하다니.
구경꾼들이야 그렇다 치자.
목숨을 걸고 겨루게 될 출전자들에게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악으로 싸우란 말인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나.
산을 오를 때도 내려갈 때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에 이렇게 해가 중천에 뜰 때 시작해야 제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섬랑은 산을 오를 때는 물론이오, 대연무장으로 향하는 지금도 민현유가 챙겨준 육포를 꼭꼭 씹어 먹고 물도 수시로 마셔서 체력을 보충했다.
정광이 그 모습을 보고 충고했다.
“싸우다가 토할라. 너무 과하게 먹고 마시지는 마.”
섬랑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대인께 드리고 싶은 말이네요. 왜 그렇게 많이 드세요?”
정광이 육포를 우물우물 씹으며 답했다.
“너보다 더 힘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어? 설마 제가 죽으면 복수라도 하시려고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섬랑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으스댔으나 자오는 아니었다.
뭔가 있음을 짐작하고 정광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단주.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러시는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닌데 혹시 몰라서요.
-정말 문제가 생겼을 시 저는 어떡하면 됩니까?
-길을 열어드릴 테니 섬랑을 데리고 신전으로 가세요. 아무리 유명무실해졌다 해도 신전은 신전이니 교주도 당장 치지는 못할 거예요.
-그럼 단주께선…….
자오가 말끝을 흐리자 정광의 표정이 섬랑보다 훨씬 더 오만하게 변했다.
-저를 아직도 모르세요? 최대한 빨리 정리할게요. 신전에서 뭘 하며 기다려야 지루하지 않을지 그거나 걱정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오는 겉으로는 수긍했으나 속마음은 달랐다.
아무리 정광이라 해도 여기는 천마신교 총단 아닌가?
지금껏 수많은 곳에서 신위를 떨쳐온 정광이었지만 이곳에서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섬랑을 피신시키고 단주를 도와야 해. 단주에게 짐이 되지 않는 방법으로.’
자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리했고 섬랑은 싸울 대상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투지를 다졌다.
정광은 향리객잔의 육포 맛이 괜찮은 편이긴 하나 장이의 모친이 만든 것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대연무장이 가까워지고 수많은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이가 정광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진혼이다! 진혼이 왔어!”
“오오! 저 청년이 그 유명한 진혼인가?”
“그럼 조그마한 꼬마는 묵영권가의 유일한 적자(嫡子) 섬랑이겠군.”
“평범하게 생긴 중년인은 누구야?”
“내가 알아. 나름 괜찮은 친구지. 혈조! 그동안 잘 계셨소?”
정광 일행은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근래에 그 누구보다 드높은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신성과 멸문한 가문에서 태어나 밑바닥에서 구르다가 치열한 멸혼생사투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오른 아이가 나타났으니 그럴 수밖에.
독두와 전주들도 와 있었는데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길을 열었다.
“여러 교우께 간곡히 부탁드리오! 환영하는 건 좋은데 조금만 협조해 주시오!”
“섬랑은 곧 목숨을 걸고 생사투를 벌여야 하잖소! 편히 지나가게 해줍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일반 교도.
섬랑이 이기는 것을 원했기에 별다른 불평 없이 비켜줬다.
특히 정광을 따라다니며 재미를 봤던 도박꾼들이 적극적이었다.
“자! 자! 뭐 하는가? 조금만 더 물러나자고!”
“섬랑! 본선에선 돈도 못 거는데 너를 응원하러 이 높은 산을 올랐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마!”
섬랑의 허리는 태산처럼 굳건히 섰고, 가슴은 바다보다 넓게 펼쳐졌다.
정광은 비무대로 향하며 섬랑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지지?”
“네, 대인.”
“네가 지면 저 응원이 전부 욕설로 변할 거야.”
“……그것참 힘이 되네요.”
이미 죽은 상태라도 욕을 먹고 싶을 리 있나.
섬랑은 의욕이 솟구쳐 올라 두 손을 번쩍 들고 함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반드시 이긴다!”
사람들은 야유로 화답했다.
“인마! 그렇게 소리칠 힘이 있으면 아꼈다가 싸울 때 써!”
“물지 않는 개가 요란하게 짓는 법인데 겁먹었다고 자랑하는 거야?”
“어허! 왜 자꾸 어린애를 기죽이는가? 믿고 지켜보세! 죽으면 그때 욕해도 늦지 않아!”
섬랑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정광은 만족했다.
“고마워라. 너무 들떠서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고 했는데 안 해도 되겠어.”
“……그, 그것참 다행이네요.”
섬랑은 몸을 부르르 떤 뒤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내가 너무 흥분했나?’
인정하긴 싫지만 그럴지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지금껏 해온 대로만 하면 돼.’
아니.
지금은 예선이 아니라 본선이었다.
더 열정적이면서도 더 냉정해져야 했다.
“후우우.”
섬랑은 티 나지 않게 심호흡했다.
가슴은 여전히 뜨거웠으나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차가운 머리를 익숙한 손이 쓰다듬었다.
대인의 손이었다.
“잘했어.”
기분도 좋아졌다.
“네.”
“방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할 수 있지?”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물론이죠. 믿으셔도 좋아요.”
“그래, 가자.”
정광 일행은 비무대 바로 앞까지 나아가 출전 신청을 하고 배정받은 곳으로 갔다.
예선 때처럼 사방이 탁 트인 천막이었는데 똑같은 것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었으나 얼마 안 가 전부 채워졌다.
이렇게 출전자들이 전부 모이자 풍채가 좋은 노인이 비무대 위에 올라왔다.
노인은 양손을 모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예기주(禮旗主) 양방이 교우들께 인사드리오!”
예기(禮旗)는 천마신교의 각종 행사와 외교를 담당하는 힘 있는 조직.
그런 곳의 수장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사람들은 커다란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양방이 멸혼생사투의 유래와 의의에 대해 늘어놓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아주 오래전 천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빤히 아는 전설을 또 듣게 됐는데 좋아할 이가 몇이나 될까.
평소라면 화를 내진 않더라도 투덜거렸겠으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억지로 참았다.
그런데 양방의 말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것 아닌가?
“……교주는 천신의 대리자요, 소교주는 언젠가 교주가 될 존재! 그런 소교주를 정하는 중요한 의식을 허투루 행할 수는 없기에 천신께선 멸혼생사투를…….”
사람들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망할 늙은이 같으니. 혀가 왜 이렇게 길어?’
‘강자존(强者尊)! 강한 자만이 천신의 대리자가 될 수 있으니 지금부터 생사투를 벌여 적임자를 뽑겠다고 하면 되는 것을!’
몇몇 이들이 참다못해 야유를 쏟아내려는 순간.
양방의 말이 끝났다.
“……그럼 모든 출전자들의 무운을 빌며 다음 식을 시작하겠소!”
대연무장 동서남북에 있는 네 개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네 무리의 무인들이 들어왔다.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저, 저 의복은!’
‘사흉대(四凶隊)다! 저들이 전부 오다니!’
궁기(窮奇), 혼돈(混沌), 도올(檮杌), 도철(饕餮).
천마신교 최강 무력대들이 모두 나타나 대문은 물론이오, 요소마다 가서 우뚝 서는 것 아닌가!
이런 판국에 감히 불만을 토로할 사람은 없었다.
모두 순한 양이 되어 천마궁(天魔宮)이 있는 방향인 서문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잠시 뒤, 악사들이 각종 악기를 연주하며 들어와 비무대보다 더 높은 단상 밑에 늘어섰다.
경건한 음률이 팔방으로 퍼지는 가운데 핏빛 장포를 걸친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총단 주요 인물들의 호종을 받으며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단상 위에 홀로 오연히 서자.
천마신교 이인자 마뇌가 단상 밑에서 부복하며 소리 높여 외쳤다.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위대한 천마신교의 통치자이신 교주를 뵙습니다!”
선창이 끝나자마자 후창이 이어졌다.
대연무장에 모인 모든 마인들이 일제히 엎드려 한목소리로 외쳤다.
“만세만세만만세! 위대한 천마신교의 통치자이신 교주를 뵙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외침에 탁목이봉이 진동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온몸의 피가 끓어오를 만큼 웅장한 광경!
하지만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경배를 받는 당사자인 연휘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한 사람만 내려다봤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부복하는군.’
실망감이 들었으나 당연한 일이었다.
진천마의 진전을 이었다고 그와 똑같을 순 없지 않은가?
연휘준은 진혼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모두 그만 일어나서 고개를 들라.”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생생히 들렸다.
전 교도가 일어나 천마신교의 지배자를 조심스레 올려다봤다.
연휘준은 진혼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
‘웃어? 꼬리를 말은 건 아니구나.’
살기를 쏘아내진 않았으나 빤히 보고 있는데도 싱긋 웃을 줄이야.
더구나 사흉대가 팔방에서 포위하고 있는 형국 아닌가?
무공 수위도 그렇고. 정말 재밌는 놈이었다.
‘목과 손에 주름살이 거의 없는 걸 보면 믿기 힘들지만 정말 어린 나이일지도 모르겠군.’
허나 딱 거기까지.
자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럼 뭘 믿고 있는 거지?’
별것 아니면 무리수를 써서라도 바로 없애 버리려 했거늘.
흥미가 솟았다.
무엇을 노리고 무슨 수를 준비한 건지 보고 싶었다.
‘섬랑이라는 꼬마는 어느 정도일까?’
이대로 행사가 시작되면 곧 알게 될 터.
연휘준은 교도들을 둘러보며 담담히 선언했다.
“오늘처럼 뜻깊은 날 총단에 오른 걸 환영한다. 지금부터 멸혼생사투 본선을 시작한다.”
“와아아아아아!”
마인들은 연휘준의 위엄 때문에 두려워하면서도 열광했다.
‘그래! 이래야 교주지!’
‘짧고 굵게! 얼마나 좋아?’
‘꼭 실력 없는 것들이 쓸데없이 말만 많다니까!’
정광도 평생 받기만 하다가 주는 신선한 경험을 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전생에 아비에게는 물론이오, 현생엔 대명(大明)의 황제 앞에서도 하지 않았거늘 드디어 남에게 엎드려 본 것이다.
‘부복하면 어떤 심정이 될지 궁금했는데 별것 없네.’
재미 삼아 해본 것이라 그런 것이겠지만 어찌 됐든 간에 하지 않았는가?
정광은 화려한 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지그시 감는 연휘준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나저나 제법인데? 예상보다 많이 컸어.’
무공 수위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정광이 전생에 비해 많이 약한 상태라 그런 것도 있지만 연휘준이 강해진 건 확실했다.
‘주안술(駐顔術)은 아니야.’
이십여 년 전과 똑같은 외모가 그 증거였다.
‘원하던 대로 저 두 놈이 한곳에 모이긴 했는데…….’
마뇌가 단상에 올라가 연휘준보다 한 계단 낮은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정광은 입맛을 다셨다.
‘거리가 아쉽네.’
마음만 먹으면 금세 닿을 테지만 연휘준 같은 고수라면 바로 대응하고도 남을 거리였다.
‘거치적거리는 것도 너무 많고.’
저놈들이 묵영대를 몰살시키고 새로 만들었다는 적혼대(赤魂隊)일까?
적의를 입은 고수들이 호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은신하고 있는 자들의 기척도 느껴졌다.
그뿐이랴.
사흉대가 곳곳을 지키고 있어서 빠져나가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빤히 쳐다봐서 도발해 놓고는 이게 뭐 하는 장난이야?’
그래도 마령강시는 안 끌고 왔으니 좋은 기회이긴 한데…….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마뇌나 저 의심 많은 놈이나 그럴 리 없지.’
기감을 키워서 대연무장 밖을 꼼꼼히 살펴봤다.
사기(死氣)로 뭉쳐진 덩어리들이 스무 개나 느껴졌다.
‘관태가 이십삼살(二十三殺)이었으니 스무 구가 넘는 건 당연하고. 얼마나 더 있을까?’
정광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예기주 양방이 비무대 위에서 소리쳤다.
“멸혼생사투 본선 출전자는 총 여덟! 사흘 동안 공정하게 치러 소교주를 정할 것이오!”
“와아아아!”
“오늘은 그 첫 번째 날! 일 번 출전자, 화전오가(和田吳家) 오경! 이 번 출전자, 묵영권가(黙影權家) 섬랑! 두 사람은 비무대 위에 올라 마주 서라!”
마도칠대가문의 적자는 없는 생사투였으나 그럼 어떤가.
마인들은 곧 벌어질 참극을 상상하며 열광했다.
“우와아아아아!”
반면 정광은 담담한 목소리로 섬랑에게 물었다.
“준비됐지?”
섬랑은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우득. 우드득.
자오가 웃으며 섬랑의 작은 등을 어루만졌다.
“하하. 녀석, 그게 대답이냐?”
“네, 혈조 아저씨.”
정광도 미소 지었다.
“그럼 다녀와.”
“네, 대인. 이따 봐요.”
섬랑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당당히 걸었다.
그 발걸음 위로 수많은 응원이 쏟아졌다.
“섬랑! 믿는다!”
“마음 약하게 먹지 말고 죽여 버려! 알았지?”
섬랑의 상대도 많은 격려를 받았다.
“오경! 네가 죽일 놈은 명문가 도련님이야!”
“진짜 밑바닥 근성이 뭔지 똑똑히 보여줘라!”
섬랑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명문가 도련님이라고?’
칠대가문이면 모를까, 멸문한 지 오래인 그저 그런 가문인데 무슨.
비무대 위에 올라 오경과 마주 섰다.
햇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와 빼빼 마른 몸이 인상적이었다.
섬랑은 오경을 응시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처음 만났는데 작별 인사를 해야겠네. 잘 가. 신전에 들러서 제는 지내줄게.”
한껏 도발했건만.
오경의 대응은 예상 밖이었다.
“네가 불쌍하게 자란 것처럼 떠들어서 동정심을 끌어낸다는 그놈이구나.”
“……뭐?”
오경이 섬랑을 노려보며 차갑게 웃었다.
“웃기지 마. 진짜 밑바닥이 뭔지 똑똑히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