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01화
계승자
정광은 곧장 향리객잔 쪽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노상 반점 밖에서 구경하다가 도망쳤던 사람들과 마주쳤는데, 그들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입이 길게 찢어진 노인이 눈치를 보다가 친근하게 물었다.
“이보게, 진혼.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네.”
“교의 중요한 행사라는 게 도대체 뭔가?”
“아. 그거요?”
“개처럼 쫓겨난 게 너무 억울해서 그러니 제발 좀 알려주게.”
“그 정도야 뭐. 함구하기로 약조하진 않았으니 말씀드려도 상관없겠죠.”
정광이 말을 잇자 노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내기였어요.”
“……내기?”
“네.”
“……참말인가?”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죠. 거짓말을 뭐 하러 해요. 어떤 경로로든 금방 아시게 될 텐데.”
사람들은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 망할 영감탱이가 내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육을 벌였다고?’
‘으드득. 이걸 진짜 찾아가서 따질 수도 없고.’
‘그런데 무슨 이유로 어떤 내기를 한 거지?’
다들 또 다른 의문을 느꼈을 때, 정광은 이미 저만치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노인과 사람들은 후다닥 뛰어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내기 말일세. 누가 하자고 한 건가?”
“마뇌 어르신요.”
“어떤 내기였는지 궁금하네.”
“제가 노상 반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 겨루는 거였어요.”
“흐음. 생각 외로 대단한 내기는 아니…… 어?”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자, 잠깐. 자네가 지금 여기 상처 하나 없이 있다는 건…….”
“마령강시가 다섯 구씩이나 있는데도 가볍게 뚫고 빠져나왔다는 말인가?”
“우리를 도륙하며 쫓아낸 마뇌 직속 무력대도 있잖아. 시랑대(豺狼隊) 그 악귀들.”
“자네가 허언을 안 한다는 건 익히 들었지만 이건 좀 그렇군. 대체 무슨 수를 쓴 겐가?”
정광은 한숨을 쉬었다.
“돈 좀 썼죠.”
“……돈?”
“밥값으로 쓰시라고 했더니 별말씀 안 하시던데요.”
“……!”
전표를 뿌린 뒤 그것들을 밟고 뛰어서 포위망을 벗어났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듣는 이의 귀에는 돈을 바치고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라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마뇌가 모종의 이유로 내기를 강요했는데 진혼이 돈을 바치니까 그냥 보내줬다고?’
‘진혼이 아무리 강해도 마령강시들과 시랑대를 물리치고 빠져나왔을 리는 없으니 안 믿을 수도 없잖아.’
‘설마 마뇌가 돈을 뜯어내려고 그런 걸까?’
‘진혼이 대단한 부자라 해도 마뇌가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부유할 텐데 왜?’
안색이 알록달록한 중년인이 머리를 쥐어짜도 답이 안 나오자 다른 걸 물었다.
“진혼, 무엇을 건 내기였는지 말해 줄 수 있나?”
“제 자유요.”
“그게 무슨 의미인가?”
“마뇌께서 밑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저는 싫다고 했고요. 그래서 내기를 하게 된 거죠.”
“아!”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그래. 진혼이라면 마뇌가 탐낼만하지.’
‘그런데 그 제안을 찼다니. 배포가 대단하구나.’
모두 감탄하는 건 아니었다.
표독하게 생긴 청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퉤! 교의 이인자가 거두려고 하는데 그걸 거절하다니. 완전히 미쳤군.”
정광이 싱긋 웃었다.
“그러면 안 돼요?”
“배가 아주 처불렀구나. 마뇌 밑에 기어들어 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뭐 하는 짓이야?”
“그분의 수하가 되면 뭐가 어떻게 변하는데요?”
청년의 눈이 몽롱하게 변했다.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지. 너 하기에 따라 더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될 테고. 그 자리를 차지한 뒤 더 높은 자리를 노릴 수 있게 될 거다.”
정광의 눈은 또렷했다.
“오르고 또 오르고. 그러다가 못 오르면 밀려나겠네요. 죽게 될지도 모르고요.”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잘 풀려도 평생 그 짓만 반복하다가 죽을 텐데.”
청년의 눈썹이 치솟았다.
“그게 어때서? 모두가 원하는 것이다. 너도 욕심이 아예 없는 놈은 아니잖아.”
지켜보던 사람들도 동의했다.
“저 청년 말이 맞아. 진혼의 식욕과 재물욕은 유명하지.”
“이것 참. 피차일반인데 말코 도사처럼 굴며 훈계한 격이군.”
정광이 손을 내저었다.
“저도 사람인데 당연히 욕심이 있죠. 다만 권력은 관심 없다고 얘기한 거예요.”
입이 길게 찢어진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그건 그렇지. 권력을 탐한다는 소문은 들은 적 없어. 고이륵단가의 빈객으로 만족하는 건가?”
정광이 정정했다.
“빈객 노릇을 하는 것도 돈을 벌고 저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역시. 떠봐서 미안하네. 다들 그렇게 얘기하고 있어. 그래, 이제야 알겠군.”
노인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설명했다.
“마뇌는 진혼을 수하로 삼으려고 했으나 진혼이 그토록 집착하는 돈을 바치면서까지 거절하자 정말 권력에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거둬봐야 쓸모없다고 여겨 놓아준 것일세.”
사람들은 노인의 추론에 공감했다.
정광은 청년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오해하시지 않게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귀하의 욕망을 무시한 게 아니에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걸 얘기한 거죠.”
“…….”
“이건 마땅히 서로 존중해 줘야 하는 것이니 더 이상 다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청년의 표독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네 말이 맞다. 서로 다른 건 인정해줘야지. 오해해서 미안하다.”
“뭘요. 그럴 수도 있죠.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사과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지켜보던 사람들이 흐뭇한 얼굴로 덕담을 건넸다.
“아주 보기 좋군.”
“맞는 말이야.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서 패 죽이더라도 서로 원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건 알아야지.”
“허허. 그래야 쓸데없는 오해 없이 자신이 원하는 걸 쉽게 차지할 수 있지 않소? 이런 생각을 하는 청년들이 있다니. 본교의 앞날이 무척 밝소이다.”
이렇게 분위기가 훈훈해지는데.
얼굴이 알록달록한 중년인이 찬물을 끼얹었다.
“진혼, 색욕도 없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
“그럴 리가요.”
“그럼 그렇지. 그런데 왜 여인들을 돌 보듯 하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나서죠.”
중년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 소저만 해도 얼마나 미인인데. 자네 혹시 소문처럼 남색을 즐기는 겐가?”
“…….”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권력욕이 전혀 없음을 널리 알려서 앞으로의 행보에 이용하려고 질문을 받아주고 있었는데 이런 망발을 하다니.
‘그냥 본보기로 조각조각 내버릴까?’
그때, 의외의 인물이 나섰다.
표독한 청년이었다.
“진혼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입이 찢어진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새 친해졌다고 편을 들어주다니. 청춘은 다르구먼.”
청년이 정색했다.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걸 어찌 확신하는가?”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 하지만 진혼에겐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말이 되지. 아암. 그렇고 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굳어버렸다.
“……자, 자네가 그쪽인가?”
“그렇습니다만.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십시오.”
사람들은 청년이 너무 당당하게 나오는 데다 조금 전에 칭찬한 것도 있기에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청년은 그런 사람들을 보며 후련한 표정을 짓다가 정광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고맙네. 자네 덕에 진짜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겼어. 보답이라 하긴 뭐 하네만 자네가 불쾌해하는 헛소문은 더 이상 퍼지지 않을 걸세.”
정광은 뒤로 크게 한 걸음 물러나 포권했다.
“잘됐네요. 앞으로도 힘내세요. 그럼 이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법을 펼쳐 유성처럼 날아갔다.
권력욕이 없음을 알리는 것을 넘어 헛소문까지 불식시키게 됐기에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여기까진 됐고. 푹 쉬고 있을 섬랑의 근골을 좀 만져줄까.’
잠시 뒤.
향리객잔에서 섬랑의 처절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으아악! 오늘 수련은 끝났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라더니 이게 뭐예요!”
“너는 마음을 가다듬고. 몸은 내가 가다듬어 주는 거지.”
섬랑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게 그런 뜻…….”
우드득. 꽈드드득.
“끄아아악! 내, 내 뼈! 내, 내 근육!”
섬랑은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갈라지는 통증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비명을 지를 힘조차 없어져 흐느꼈다.
덕분에 정광은 더 편하게 손을 쓸 수 있었다.
“그렇지. 잘 참네.”
“흑흑.”
“내일이 기대되는걸. 내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기대를 저버리면 어떻게 될지 알지?”
섬랑의 벽안이 암청색으로 변했다.
“제, 제가 죽어도 혼백이라도 불러내 괴롭히시겠죠.”
“괴롭히다니. 그냥 지금처럼 지도할 건데.”
섬랑이 딸꾹질을 하며 투지를 불태웠다.
“히끅. 바, 반드시…… 흐끅. 반드시 이길게요!”
* * *
마뇌는 천마궁(天魔宮) 정문에 이르자 화려한 가마에서 내렸다.
현 교주가 묵영대를 몰살시킨 뒤 새로 창설한 적혼대(赤魂隊)가 정중히 맞이했다.
마뇌는 그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거만하게 물었다.
“교주께선?”
“안에 계십니다. 들어가십시오.”
정문이 활짝 열렸다.
마뇌는 천천히 걸으며 내부를 둘러봤다.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시간이 이만큼 흘렀으면 익숙해져야 하거늘.’
적혼대도 그랬지만, 거의 이십 년 가깝게 봐왔는데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풍경이었다.
‘오직 저것만 그대로야.’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다란 전각, 천마전(天魔殿)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차라리 저것까지 바꿔 버렸으면 나았을 것을…….’
이미 지난 일이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고.
문을 지키고 있던 적혼대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앞에 있는 보좌(寶座)에 검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마뇌는 그의 오장 앞까지 다가가 오체투지(五體投地)했다.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위대한 천마신교의 통치자이신 교주를 뵙습니다!”
마뇌의 우렁찬 외침이 전각 안을 울리다가 잦아들자 중년인의 입에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라.”
“네, 교주.”
중년인은 마뇌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일이 잘 안 풀렸나 보군.”
“그렇습니다.”
“모자랐나, 아니면 넘쳤나?”
“넘쳤습니다.”
중년인의 눈이 살짝 투명해졌다.
“모자랐으면 자네가 버렸듯이 본좌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넘쳤다고?”
“그렇습니다. 무위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대단한 그릇이었습니다.”
“흥미롭군.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게.”
마뇌는 숨김없이 얘기했다.
중년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묵묵히 들었다.
“……결국 그렇게 됐습니다, 교주.”
마뇌의 말이 끝나자 중년인이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아까보다 더 투명해져 있었다.
“누군가 생각나는 얘기군. 진전을 이은 거야 그렇다 쳐도 성품까지 닳다니. 너무 과해.”
“…….”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묵영권가에서 홀로 살아남은 권오가 ‘그’의 비급을 숨기고 있다가 진혼이라는 망종에게 전한 거라 생각하나?”
“전대 교주께선 귀찮게 비급 같은 걸 만들 분이 아닙니다.”
“그게 맞아. 계속 말해보게.”
“진혼이 정말 어렸을 때 중원에서 쿠차로 흘러들어 온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쿠차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몇 명 납치해서 알아봤는데 진혼과 그 일행이 나타난 건 최근이라 합니다.”
“그건 당연하고. 쓸모없는 정보야.”
“그렇습니다. 그 증언을 근거로 정체를 따져봐야 증인을 매수하거나 고문해서 거짓 자백을 얻어낸 거라고 우기겠지요.”
“그냥 쳐죽이기도 곤란해. 오래전 묵영권가의 죄를 더 이상 따지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게 이제 와서 발목을 잡을 줄이야.”
“더구나 진혼은 지금 고이륵단가의 빈객 신분입니다. 추종자도 꽤 있고 말입니다.”
“여러모로 귀찮게 됐군.”
“말씀대로 귀찮은 일일 뿐이지요.”
“그래. 결국엔 본좌가 마음먹기에 달린 거지.”
중년인이 으스스한 미소를 지었다.
“변수를 싫어하는데 계속 생기고 있어. 여러 안배가 무산됐는데 그의 후인까지 나타나다니.”
“전대 교주의 핏줄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지. 말년에는 모든 게 귀찮다고 조용히 지냈지만 그전에는 제멋대로 돌아다녔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렇다면 진혼의 나이가 보기보다 많겠군요.”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전해 듣기만 했으나 그 나이에 그 무위가 말이 되나?”
“항상 역용을 하고 있으니 교주의 추측이 맞을 겁니다.”
중년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강할지 기대되는군. 태극검존(太極劍尊) 그 늙은이 정도 수준이면 좋을 텐데. 거기까진 불가능하겠지.”
“태극검존을 무공만으로 꺾지 못하셨던 게 여전히 아쉬우신가 봅니다.”
“현실적으로 목표로 삼을 수 있는 대단한 무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중년인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오를 엄두를 내긴커녕 머릿속에서 어떻게든 지우고 싶을 만큼 거대한 산이었지.”
“…….”
“교를 손에 넣은 뒤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묵영대 대신 적혼대를 만들고 천마궁 내부를 바꾸었지만…….”
중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좌를 쓰다듬었다.
“언제나 여기에 앉아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차마 천마전은 못 바꾸겠더군.”
“…….”
“그런데 요즘 들어 조금 생각이 바뀌었네.”
“……어떻게 말입니까?”
중년인은 신형을 돌렸다.
손을 뻗어서 벽에 걸려 있는 검붉은 보검을 잡았다.
“이놈은 그가 유일하게 아끼던 검이지.”
“…….”
“그의 사후, 그가 검에 마혼(魔魂)을 불어넣은 걸 모르고 훔치려 했던 놈들이 마혼에게 잡아 먹혀 광인이 된 거 기억하나?”
“물론입니다. 아직도 생생합니다.”
“허나 본좌는 견뎠지. 이놈을 완전히 꺾지는 못했지만 먹히지도 않았어.”
“그러셨지요. 모두 그 모습을 목도하고 교주를 그분의 계승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솔직히 말하게나. 그때는 계승자라기엔 너무 부족한 상태였어. 하지만…….”
중년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젠 맞네. 얼마 전에 완전히 집어삼켰지.”
“……!”
“많은 고생을 했으나 결국 해냈어. 나 연휘준이 진천마의 진정한 계승자가 된 것이야.”
연휘준의 표정이 그가 걸치고 있는 핏빛 장포(長袍)에 수놓인 악귀처럼 변했다.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계승했다. 내일 그의 혈육을 만나는 게 기대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