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99화
데구루루
온숙(穩宿)은 천마신교 총단이 있는 탁목이봉 바로 밑에 자리한 도시이기에 신분이 높은 자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자꾸 보면 익숙해지는 법. 자연히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봐도 놀라지 않고 차분히 일상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오직 교주만 머리 위에 있을 뿐, 신강을 굽어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마뇌가 나타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대부분 하던 일을 팽개치고 우르르 몰려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웬일로 저 엉덩이 무거운 양반이 행차했을까?”
“많이도 끌고 왔구먼. 으음. 방립(方笠)을 눌러쓴 저것들이 마령강시구나.”
“가만. 향리객잔으로 가고 있잖아. 객잔에서도 기다렸다는 듯 사람이 나오고. 누구지?”
“아! 그 유명한 진혼일세. 마뇌와 진혼이 만나기로 약조한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진혼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마뇌는 격이 다른 인물인데 무슨.”
“쉬잇. 조용히 좀 하게. 기다리다 보면 알게 되겠지.”
사람들의 눈이 짙은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마뇌 일행이 진혼 앞에 멈춰 서자 궁금증이 절정에 달했다.
마뇌는 화려한 가마 위에서 진혼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진혼이냐? 소문보다 더 똘똘해 보이는구나.”
진혼이 멋들어지게 두 손을 모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마뇌 어르신. 이렇게 직접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행하실 줄은 몰랐네요.”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아하! 그런 것이었군.”
“허어. 진혼을 그렇게 높이 살 줄이야. 아니지, 그럴 만도 해.”
“내 말이. 진혼이 무공만 강한가? 의리도 있고 얼마나 교활한데. 마뇌가 탐낼 만한 인재야.”
“그런데 고이륵단가의 빈객이잖아. 그들과 얼굴을 붉혀서라도 그럴 속셈일까?”
사람들은 이런저런 억측을 쏟아냈고 장내는 시장통처럼 어수선해졌다.
하지만 마뇌는 여전했다.
진혼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듣던 것 이상이군. 아주 당차. 만나서 반갑다.”
의표를 찌르려고 갑작스럽게 방문했거늘, 자신을 귀히 여겨서 몸소 찾아온 것으로 소문이 퍼지게 하다니.
그 기지를 칭찬한 것이었으나 진혼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정광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저도 반가워요. 이제 한 번 뵀으니 두 번만 더 오시면 되겠네요. 그럼 이만.”
마뇌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나도 곧 뒤따라 들어가마. 그때 두 번째 만남을 시작하자.”
“저 바쁜데.”
“나만 할까.”
“그렇긴 하네요.”
바쁜 걸로 따지면 천마신교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마뇌와 견줄 만한 이가 천하에 몇이나 될까.
정광은 깨끗이 인정하고 다른 제안을 했다.
“이왕 오신 거, 점심이나 드시고 가시죠.”
“그래도 끝까지 내치진 않는구나.”
“어르신 체면이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정광은 마뇌의 수하들을 둘러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많이 오셔서 앉을 자리도 없겠네. 다른 분들은 밖에서 기다리셔야겠어요. 가시죠, 어르신.”
마뇌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수하들을 박하게 대하지 않아. 자리가 충분한 괜찮은 곳이 있으니 거기로 가자.”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러시죠. 다만 미리 양해를 구할게요. 제가 형제가 없어서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요. 외지거나 폐쇄적인 곳은 못 가요.”
“그것참 의외구나.”
“어르신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마뇌는 향리객잔에 홀로 들어가는 걸 꺼렸고, 정광은 그럴 거면 가까우면서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자고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는 평소 구름 위에서 지내는지라 답답한 풍경은 싫어한다. 거리도 가깝고 사방이 탁 트인 곳이니 마음에 들 거다.”
“그럼 다행이고요.”
“좋아. 내가 살 테니 네 일행도 불러라.”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요. 이제 처음 뵀는데 군입을 늘리는 건 예의가 아니죠.”
정광은 정색한 뒤 객잔에서 내다보고 있는 민현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른 분들과 밥 먹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알겠습니다. 식사 후 다과를 준비할 예정인데 늦으시면 어떻게 할까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깨끗이 먹고 치워.”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직 날이 차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응.”
정광은 다시 시선을 마뇌에게 옮겼다.
“가시죠.”
마뇌는 정광과 민현유를 번갈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다가 가마꾼들에게 명했다.
“그곳으로 가자.”
“존명!”
마뇌 일행이 앞장서고 정광이 그 뒤를 따랐다.
이 좋은 구경거리를 누가 마다할까?
구경꾼들도 웅성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표정이 구겨졌다.
“뭐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곳으로 가나 했더니 겨우 여기라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딱 맞는 말이구먼.”
맛은 나쁘지 않은 곳이지만 이건 아니지.
온숙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봤을 노상 반점 아닌가?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양반이 뭐 하는 짓이야?”
“쯧. 궁핍한 삶을 경험해 보고 싶은가 보지.”
“조용히 좀 하게. 이러다 듣겠어.”
“아 들으라지. 사람을 이렇게 기만하는데 어떻게 참아?”
사람들은 김이 빠져 투덜거렸으나 마뇌는 아니었다.
수하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한 가마에서 내렸다.
부축까지 하려고 하는 수하들을 뿌리치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리고 한 탁자 앞에 앉아 정광에게 손짓했다.
“여기다. 여기가 좋은 자리야.”
“…….”
이깟 노상 반점에 좋은 자리가 따로 어딨다고.
정광은 한숨을 쉬고 마뇌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미리 정해놓은 것처럼 마령강시와 마뇌의 수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언제든 정광을 제지하고 도주를 막을 수 있는 절묘한 위치에 앉은 것이다.
정광은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탁자 곳곳에 묻은 얼룩들을 내려다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마와 의복은 화려한데 드시는 건 소박하시네요. 이런 더러운 자리를 좋아하시고요.”
“아니. 나는 무엇이든 비싸고 깨끗한 걸 좋아한다. 허나 이 반점은 특별한 곳이야.”
“어떤 점이요? 요리와 술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맛있나요?”
“그럴 리가. 나는 아니지만 네 입맛에는 어떨지 모르겠군. 곧 내올 테니 직접 확인해 봐라.”
마뇌의 말대로 요리와 술이 나왔다.
간단한 소채 무침과 싸구려 화주(火酒)였다.
정광이 맛을 보고 인상을 찡그리자 마뇌가 웃었다.
“하하. 내가 무어라 하였느냐?”
“아 진짜. 이런 걸 왜 시키시는 거예요?”
마뇌는 소채 무침을 한 젓가락 먹고 화주도 한 잔 들이켰다.
“크으. 너는 너무 젊어서 모를 거다. 늙으면 현재가 아니라 추억을 즐기게 돼.”
“어떤 추억인지 제가 여쭤야 하는 거예요?”
“네가 그런 걸로 치고 얘기하마.”
마뇌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래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던 시절의 얘기다. 나는 이곳에서 멍청한 녀석들에게 정국을 논하며 답답한 마음을 풀었다. 그런데 말하면 말할수록 더 답답해져서 대취했지. 왜 그런 줄 아느냐?”
정광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말 해봐야 소용없어서겠죠.”
“그래, 역시 세상을 아는구나. 뜻이 있으면 뭐 할까? 펼칠 기회가 없는데.”
“그래서요?”
“그런데 누군가 나타나 나를 시험했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던 분이었지.”
“누구시죠?”
“전대 교주님. 그 당시엔 소교주님이셨다.”
“아. 그 대단하신 분요?”
마뇌의 눈동자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 정말 대단한 분이셨지. 그런 분이 내게 찾아오신 게야. 그토록 염원하던 기회가 찾아오니 가슴이 세차게 뛰더구나.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최선을 다해 내 능력을 증명했다. 하지만…….”
마뇌는 손으로 허공을 잡는 시늉을 했다.
“이런 헛짓거리였어. 내 탁상공론을 파훼하고 더 훌륭한 대처법을 말씀하셨지. 이미 다 생각해 놓으신 게야.”
“저런. 부끄러우셨겠어요.”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제발 거둬달라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다고 간청했어.”
“아. 그분이 그 정성에 감복해서 받아주신 거군요.”
마뇌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 전에 죽도록 패셨지만 받아주시긴 하셨지.”
“다행이네요.”
“내가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네. 그것도요.”
마뇌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그분께선 내게 마뇌라는 별호를 내려주시며 뜻을 펼칠 기회를 주셨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뭔데요?”
“넓고 길게 볼 줄 몰랐지.”
“겸손하시네요.”
“그분께서 지적하셨던 거다. 사실 나는 그 당시엔 승복하지 못했어.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이지.”
마뇌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분께선 박락하가(博樂賀家)에서 인재를 데려오셨다. 그 녀석에게 내게 그러셨던 것처럼 귀곡자라는 별호를 하사하시고 일을 맡기셨어. 그리고 녀석은 잘해냈지. 내가 갖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더구나.”
“아, 그분. 경쟁이 붙었겠군요.”
“맞다. 보통은 홀로, 때로는 둘이 함께 일했다. 다른 성향 때문에 부딪히는 일이 많았으나 그분의 중재 아래 어찌어찌 넘어갔지. 그리고 결국 귀곡자의 능력을 인정하게 됐다. 녀석도 마찬가지였어.”
“잘됐네요.”
“그래, 그분께서 귀천하시기 전까지는 그랬지.”
마뇌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분께선 사후를 신경 쓰지 않으셨어. 너희 능력껏 알아서 하라는 주의라고 할까.”
“공평한 분이시네요.”
마뇌의 손가락이 멈췄다.
“아까부터 너무 좋은 평만 하는구나.”
“사실이니까요.”
“흐음. 네가 그분의 진전을 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은 없는데요.”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원래 얘기로 돌아가마. 귀곡자는 본래 게으른 데다 욕심도 없는 녀석이다. 하지만 나는 아주 부지런하고 야망이 있지. 발 빠르게 현 교주를 지지해서 권력을 움켜쥔 뒤 귀곡자를 숙청했다. 너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광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맞기 전에 때리는 건 당연하죠.”
“바로 보았다.”
“그런데 귀곡자 그분, 게으르고 욕심 없는 분이라 하시지 않았어요? 괜한 짓을 하신 것 같은데요.”
“그 또한 옳다. 하지만…….”
마뇌의 눈이 번들거렸다.
“만에 하나도 소홀히 하면 안 돼. 그게 내 방식이다. 그래야 최후에 웃을 수 있고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어.”
“왠지 제게 경고하시는 것 같네요.”
마뇌가 정광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잘 아는구나.”
“왜요?”
“너는 너무 위험해.”
마뇌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
“네가 나타나고 많은 게 바뀌었다. 신강이 몸살을 앓고 있어. 너 하나 때문에 말이다.”
“너무 과장하시는 거 아니에요?”
“절대 아니지. 오히려 축소한 게야.”
마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분의 진전을 이었고 교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지?”
정광의 눈이 커졌다.
“잠깐만요. 큰 오해를 하고 계시네요.”
“그분께 받은 은혜를 생각해서 충고해 주마. 아직은 너무 일러. 내 밑에 들어와서 엎드려 지내라. 그러면 언젠가 모두의 위에 설 수 있게 될 거다.”
“일단 앞의 말씀은 모르겠고요. 저를 수하로 거두시고 싶으세요?”
“네 능력이 탐난다.”
“제가 도박 좀 하는 편이죠.”
“토로번손가가 귀찮게 굴지 못하게 해주마. 귀곡자, 마령강시, 승황대(乘黃隊) 건도 넘어가 주고. 민 씨 일족이 도주한 것도 마찬가지야. 이 정도면 마음이 움직일 만도 한데. 네 생각은 어떻느냐?”
마뇌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정광은 마뇌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너무 넘겨짚으시네요.”
“증거가 없는 걸 믿고 나댈 만큼 멍청하진 않을 텐데.”
“어르신도 마찬가지죠. 증거도 없이 생사람을 잡을 분은 아니라고 믿어요.”
마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미래를 보기에 이러는 것이야. 하지만 현 교주는 현재만 본다. 그가 널 가만둘 것 같으냐?”
정광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미래라뇨? 어르신, 얼마나 더 사실 셈이세요? 매일 영약을 드셔도 안 될 텐데.”
“재밌군. 아주 재밌어.”
마뇌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무공을 모르는 노인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짙은 살기였다.
“아까 민 씨 꼬마와 얘기할 때처럼 홀몸이면 도주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냐?”
정광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답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를 치시려고요? 욕 많이 드실 텐데요.”
마뇌가 눈을 데구루루 굴렀다.
머리를 빨리 굴릴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