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98화
체면 따위를 따질 놈이 아닌데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라더니.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이 끝없이 길게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진혼이 입을 열었다.
“제게 뭘 원하시죠?”
“……!”
성녀(聖女)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아무리 설명해도 계속 시큰둥해하던 자가 드디어 관심을 보인 것이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으나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낚아챘다.
‘아직 멀었어. 침착해야 해.’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 향리객잔을 통해 얻은 정보를 상기하자 온몸의 피가 싸늘히 식었다.
진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교활하고 악랄한 자였다.
한순간만 삐끗해도 어찌 될지 모르니 최대한 신중하게 상대해야 했다.
“흥미가 생기신 것 같군요.”
“네.”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제 제안을 거절하시게 되면 오늘 일은 잊어주십시오.”
“물론이죠. 그건 저도 부탁드릴게요.”
“허언을 안 하신다고 들었으니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녀는 최대한 담담하게 원하는 것을 말했다.
“첫째. 신전에 재력과 무력을 지원해주십시오. 어려운 교도들을 어루만질 재물과 힘이 필요합니다.”
“광신자들을 키워서 유명무실해진 신력(神力)을 바로 세우시겠다는 말씀이네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 어떤 교주라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교주는 천신의 대리자 아닙니까? 교도들에게 그 점을 확실히 주지시킬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장차 그들은 교주에게 작게나마 힘이 될 겁니다.”
진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긴 한데. 대신 교주도 신전에 자주 들러서 예배를 드리고 교도들과 어울려야 할 거 아니에요. 생각만 해도 귀찮…… 아니지. 그 정도는 견뎌야지.”
“맞습니다. 약간의 수고만 감수하면 되는 일인데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진혼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두 번째 요구는 뭐죠?”
“신강을 벗어나 포교 활동을 하게 해주십시오.”
“불가. 시끄러워지는 건 싫어요.”
“교의 세력을 넓힐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근방이라도…….”
“차라리 중원 침공을 하자고 하시죠. 이렇게 무리한 것을 던지시다니. 세 번째 청이 제일 중요한 건가 봐요.”
정곡을 찔린 성녀는 애써 태연히 말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한등민가를 키워주십시오.”
“이미 전대 교주가 그랬던 거로 아는데. 향리객잔을 운영하면서 신강 곳곳의 정보를 긁어모으고 있잖아요.”
“위신을 키워달란 말입니다.”
“위신?”
“매해 천신이 내려온 날, 교의 중요 인물들을 이끌고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에 올라 천신께 제를 지내주십시오.”
“올라간 김에 성지(聖地)도 참배하고요?”
“그렇습니다. 그리하면 높은 자들의 눈에 띄길 원하는 이들도 오를 테고 오래전 잊혀 버린 성지가 활기를 띠게 될 겁니다.”
“순례자들도 생길 거고요. 그만큼 사건 사고도 많이 일어나겠죠.”
“한등격리봉에선 아무도 함부로 굴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려주시면 되는 일 아닙니까?”
“강제로 정숙하게 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레 받아들일 거고 결국엔 민 씨 일족을 어려워하게 될 거다, 이 말씀이네요.”
“그렇습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자금과 인력도 많이 써야 하고요.”
성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강조했다.
“그만큼 교주의 위엄도 빛나게 될 겁니다. 교주가 그 누구보다 위에 있음을 전 교도들에게 보여줄 기회 아닙니까? 이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그래도 해마다 산에 올라 제를 지내는 건 너무 번거롭…… 흠. 그래, 입지를 단단히 다지려면 그 정도는 기쁘게 해야지.”
진혼이 싱글거리자 성녀는 가슴이 뛰었다.
오랫동안 염원해 온 길을 향해 첫걸음을 떼게 된 것이다.
“성녀님, 생각보다 괜찮은 거래네요.”
“승낙하시는 겁니까?”
“아뇨.”
“정말 감사…… 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게요.”
성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다 넘어온 것처럼 굴다가 검토하겠다니!
뭘 더 빼먹으려고 이런단 말인가!
“진혼.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짚어주십시오. 대화를 통해 절충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이런 중요한 사안은 숙고해서 정해야죠. 조만간 들러서 답을 드릴 테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정광은 우아하게 두 손을 모았다.
“그럼 이만.”
성녀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
“정말 이대로 가시는 겁니까!”
“네.”
“후회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다 제 복이겠죠.”
정광은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전음을 보냈다.
-마뇌가 성녀님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어요.
“……!”
-신전에 간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한동안 화가 난 기색을 유지해 주세요.
“…….”
성녀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정광은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인 뒤 문을 열고 나갔다.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물론이죠.”
“……성녀님의 고성이 들린 것 같았습니다만.”
“절 만나서 너무 기쁘셨나 봐요. 예배실로 가죠.”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당연한 일이지만 아직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이렇게 믿음이 약해서야.”
정광이 혀를 차자 섬랑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누가 누구한테…… 아야! 왜 때려요?”
“때릴 만하니까 때리지. 다들 그만 가죠.”
정광 일행은 신전 밖으로 나갔다.
신관이 대문까지 따라 나와 정중하게 배웅했다.
“천신의 가호가 교우들께 깃들기를 빌겠습니다.”
“신관님께도 그러길 빌게요.”
정광 일행은 산 밑으로 향했다.
섬랑이 발걸음을 옮기다가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아야야. 찬 바닥에 엎드려 있었더니 정강이가 다 아프네.”
정광은 섬랑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충고했다.
“참아. 미리미리 익숙해져야지.”
“무슨 말씀이에요?”
“앞날은 모르는 거라고.”
“으으. 갑자기 오싹해지네.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계신 거죠?”
“네가 지금 그런 걸 걱정할 때야? 객잔에 가자마자 수련부터 할 건데.”
“하아아. 그렇네요. 당장 오늘부터 살고 봐야죠.”
섬랑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광은 그 모습이 기꺼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그리고 섬랑이 기절하자 관엽에게 던져줬다.
“관 숙수. 방에 데려가서 추궁과혈 해주시겠어요?”
“알겠네.”
“끝나면 다시 이곳으로 데려와 주시고요.”
“그렇게 하지.”
관엽이 섬랑을 들쳐 메고 사라졌다.
후원에 홀로 남게 된 정광은 귀곡자를 불러 총단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줬다.
귀곡자는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멸혼생사투 대진표가 나쁘지 않게 나왔다니 다행입니다. 섬랑이 손강이라는 아이를 이길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지금은 힘들어.”
“앞으로는 가능하다는 말씀이군요.”
“어떻게든 이기게 해야지.”
“섬랑은 복이 참 많은 아이입니다.”
귀곡자는 흉악한 미소를 흘리며 다음 건을 꺼냈다.
“아극소연가 가주인 연혁소도 고민이 많겠군요.”
“그래 보이더라.”
“아비의 사후에 가문을 지킬 방법을 궁리하느라 머리가 많이 빠졌겠습니다.”
“머리털이란 한 올도 없는 녀석이 누굴 걱정해?”
귀곡자가 소심하게 발끈했다.
“지존께서 삭발하셔서 이런 것 아닙니까.”
“나라고 좋아서 그랬겠냐? 원망하려면 널 잡아서 가두고 고문한 마뇌에게 해야지.”
귀곡자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민머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지존. 마뇌를 죽이시기 전에, 그놈의 머리도 빡빡 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차피 자를 수 있는 건 다 자를 거니까 연혁소를 회유할 방법이나 생각해.”
“지존께서 그의 아비를 죽이실 건데 어떻게…….”
“잘.”
“……생각나는 게 하나밖에 없습니다. 때가 되면 패륜을 부추겨 보겠습니다.”
“이게 마뇌 같은 소리를 하네. 꽤 오래 부대끼더니 비슷해진 건가.”
귀곡자가 손사래 쳤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 마뇌가 사람을 보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곽숭보다 더 똑똑한 녀석을 보내서 지존을 압박하려고 들겠지요.”
“그런 식으로 수하가 많은 걸 과시하는 녀석이긴 하지.”
“이번에도 돌려보내실 겁니까?”
“상황 봐서 정하려고.”
“신전에는 언제 가실 생각이십니까?”
“오늘과 내일은 섬랑을 수련시켜야 하니까 그 이후가 되겠지. 성녀, 어떤 것 같아?”
귀곡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민이와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정광이 보기에도 그랬다.
나민은 무력과 재력을 모으기 위해 신력을 움직이려고 하는데, 성녀는 신력을 세우기 위해 재력과 무력을 지원받으려 하지 않는가?
“그래, 죽이 잘 맞을 거야. 욕심만 더 안 부린다면.”
“이미 마음을 굳히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뭐를?”
“섬랑에게 정통성을 줄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라도 후사(後嗣)를 보시게 되어 다행입니다”
“난 또 뭐라고.”
정광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미쳤냐? 내가 아니라 영감 아들로 할 거야.”
“……!”
“왜 그렇게 놀라? 그게 더 어울리잖아. 섬랑이 내 자식이면 저렇게 자질이 떨어지겠어?”
귀곡자는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간신히 닫았다.
“여, 역시 지존이십니다. 자유롭고 기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발상에 감탄했습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런데 작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말해봐.”
귀곡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진혼에게 정통성을 주는 것이면 지존이시든 전전대 교주님이시든 간에 귀천하시기 직전에 거사를 치르셨다고 하면 되지만 섬랑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정광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려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떠넘기기 바빠서 그걸 생각 못 했네. 너는 역시 내 장자방(張子房)이야.”
“……감사합니다.”
정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럼 보기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거로…… 아니지. 멸혼생사투 참가 제한에 걸리잖아.”
정광은 손뼉을 짝 쳤다.
“좋아. 섬랑의 아비 권오가 영감 아들인 거로 가자. 됐지?”
“…….”
되긴 뭐가 됐다는 건지.
그래도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탁월한 판단이십니다.”
“그래, 그만 들어가서 쉬어.”
“벌써 말입니까?”
정광은 객잔 문을 보며 빙긋 웃었다.
“관엽이 섬랑을 데려오고 있거든. 수련시켜야 해.”
섬랑은 자기 직전까지 생사를 넘나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을 먹자마자 치열하게 수련했다.
“으아악!”
“견뎌! 그래야 살아!”
“지금 당장 죽겠는데 무슨 개소리를…… 커억!”
비명을 더 크게 지르고 고통을 더 많이 느낄수록 얻는 게 많아졌다.
섬랑은 정광의 엄격한 지도 아래 실력과 원한을 쑥쑥 키웠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뜨자 땅바닥에 쓰러져 가늘게 경련했다.
정광은 자애롭게 웃으며 섬랑의 상처를 치료하고 추궁과혈로 몸을 풀어줬다.
“아프냐?”
“…….”
“나는 안 아픈데.”
“……흐윽.”
섬랑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정광은 섬랑의 옷을 찢어 눈물을 닦아주며 따끔하게 충고했다.
“오늘 아픈 만큼 내일 안 아플 거야. 수련은 여기까지 하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섬랑은 언제 울었냐는 듯 싱글벙글 웃었다.
“우하하하! 진짜요?”
“응.”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나중에 딴소리하시면 안 돼요.”
“알겠으니까 콧물이나 닦아.”
“으으. 그러고 보니 눈물만 훔쳐주셨네.”
섬랑은 얼굴을 꼼꼼히 닦고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정광은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이상하네. 마뇌가 왜 사람을 안 보내지?’
어제 안 온 거야 그러려니 하는데 오늘까지 이럴 줄이야.
‘아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그러는 건가. 체면 따위를 따질 놈이 아닌데.’
아니.
세월이 꽤 흘렀으니 변했을지도.
정광은 기지개를 크게 켜고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현유.”
“네, 대인.”
“점심 식사 준비하고 있지?”
“거의 끝나갑니다. 바로 내올까요?”
정광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객잔 밖으로 통하는 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대인?”
“손님이 오셨어.”
“단 소가주 일행입니까?”
“아니.”
정광은 씩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나가 객잔으로 오고 있는 무리를 훑어봤다.
‘이것 봐라? 마령강시가 다섯 구나 왔네. 살아 있는 것들도 꽤 하는 놈들이고.’
뭐 그건 그거고.
정작 눈길을 사로잡는 건 따로 있었다.
‘이거야 원. 무슨 놈의 가마가 저렇게 화려해?’
가마 위에는 한 노인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기억 속 모습보다 한참 늙었지만 바로 알아볼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왜 사람을 안 보내나 했더니…….’
본인이 올 줄이야.
천마신교 이인자 마뇌가 직접 행차했다.